• 오슬로 '하녀'들과 노르웨이 노동당
        2010년 06월 19일 11:33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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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는 출근할 때에 오슬로 중심부의 마욜스투엔 지하철역에서 학교까지 대개 걸어가곤 하지만, 보통 저희 가족이 사는 베케스투아라는 변두리에서 마욜스투엔역까지 버스를 타곤 합니다.

    20분도 안 되는, 책이나 즐겁게 읽을 수 있는 버스행인데, 늘 버스를 탈 때마다 옆에서 들리는 언어는 두 가지, 즉 폴란드어와 타갈로그어(필리핀의 언어)가 있습니다. 폴란드어는 러어와 어느 정도 흡사해서 제게 쉽게 구별되지만, 타갈로그어는 이제 와서 거의 구분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하도 자주 들으니까요.

    출근 버스 속의 낯선 언어

    짐작하시겠지만 폴란드어를 쓰는 사람들은 재오슬로 폴란드 노동자, 대개 건설노동자와 각종 수리공, 그리고 농업 계절 노동자들이 쓰는 것이죠.

    폴란드가 유럽연합에 편입됨과 동시에 유럽연합을 중심으로 한 유럽 경제구역에 가입돼 있는 노르웨이까지도 폴란드 노동자들에게 무비자 입국 및 특별 허가 없이도 노동할 수 있는권리를 부여해서, 이제는 ‘폴란드인’은 오슬로에서 페인트공이나 수도공의 동의어가 다 됐습니다.

    노르웨이에서 도대체 폴란드 노동자 몇 명이 있는가요? ‘약 12만 명’이라고 하는 사람들은 있지만 (http://www.aftenposten.no/nyheter/iriks/article1443964.ece), 어떨 때에 버스를 탈 때에 거기에서 승객의 절반 이상이 폴란드어를 쓰니 그것보다 더 많은 것 같기도 해요. 노르웨이 인구가 4백50만이이라는 점을 상기하시면 노르웨이 전체 인구의 약 1% 이상이 이제 폴란드인이란 결론도 나옵니다.

    폴란드인들은 대개 남성들이며, 대도시 건설 등 막노동 부문을 맡아 일종의 ‘막노동자 및 기술공의 종족계급(ethnoclass)’을 이루는 반면, 필리핀인들은 거의 다 여성이며 절대 다수는 가사 노동과 육아 노동을 맡고 있는 ‘가내 노동자 종족계급’이라고 보면 됩니다.

    그들의 수를 정확하게 알기 어려운 이유는, 상당수는 공식 au pair(육아 견습노동자) 비자가 아닌 관광비자로 와 있기 때문인데, 제대로 비자를 받고 들어오는 사람만 계산해도 1년에 1200명 이상이랍니다. (http://kilden.forskningsradet.no/c16881/artikkel/vis.html?tid=24656)

    그런데 제 육안으로 봐서는 실제적 숫자는 이것보다 훨씬, 몇 배 높은 듯해요. ‘유럽인’인 폴란드 노동자들은 노르웨이에서 사실상 무제한적으로 노동해도 되고 3년이 지나면 영주권 받고, 7년이 되면 국적을 받으면 되지만 유럽연합 밖에서 들어온 육아 견습노동자라면 2년 끝내고 바로 무조건 출국해야 한다는 법이 있죠.

    노르웨이의 ‘외국 하녀’

    유럽인으로 취급되는 폴란드인들은 보통 노르웨이어 과정을 무료로 다닐 수 있지만 필리핀 육아 노동자들에게 ‘임시 체류’라는 차원에서 무료 언어 학습은 제공되지 않고, 다닐 시간도 별로 없대요. ‘주인님’과 같은 집에서 살면서 사실상 기상시간부터 취침시간까지 움직여야 하기 때문이죠.

    ‘주인님’의 귀한 아이가 일어나자마자 노동 시간이 시작되고, 아이가 9시에 자기 전까지 간간이 쉬는 시간 말고 사실상 별로 휴식이 없어요. 보통 자신의 아이를 친척들에게 맡기고 이렇게 노르웨이에 들어오는 그들은, 이 지옥적 노동을 해서 한 달에 받는 돈은 약 3천 크로네, 즉 600달러 정도입니다.

    물론 숙식이 제공되니 그 돈의 대부분을 저축해도 된다지만, 악질적 착취라는 여론은 노르웨이 안에서도 팽배하죠.(육아 노동자 착취 반대 토론: http://vgd.no/index.php/samfunn/aktuelt/tema/1567605/tittel/avskaff-au-pair-ordningen-naa/innlegg/27629489/ )

    물론 동네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제가 사는 동네 같으면 아마도 약 30~40%의 가구들은 이렇게 ‘외국 하녀’를 데리고 사는 듯합니다. 노르웨이 가정의 입장에서는 한달에 3000크로네라는 지출은 ‘돈’이라고 할 수도 없기에(좋은 식당에 가족끼리 두세 번 갔다올 정도의 금액이죠) ‘하녀 고용’ 결정을 다들 쉽게 내리더랍니다.

    ‘하녀’를 집에서 두면 그 집은 식구들은 조선시대 양반 만큼이나 ‘자유인’이 되죠. 솔거 노비를 데리고 사는 양반이 부엌에 들를 일이 없었듯이, 필리핀 ‘하녀’가 있는 집에서는 아이를 유치원이나 학교에 데려오고 데리러 가는 일부터 식량 구입, 요리, 설거지, 청소까지 대체로 ‘인간 기계’가 된 ‘하녀’가 거의 다 하죠.

    고대 희랍적 생활양식의 현대판?

    그 대신에 남녀 부부는 문화 생활이나 사회 활동을 즐기면 되고, 외국여행을 보다 자주 다녀도 되고 그렇다는 것이죠. 청소기와 접시닦이로부터의 해방이라 할까요? 그렇게 해서 아이가 애정 결핍에 걸릴 확률도 없지 않아 있지만, 과거 상류층만 향유할 수 있는 생활양식을 즐기는 노르웨이 중신층은 대체로 그런 생각을 안하고 ‘자아 실현’ – 사실상 보다 풍족해진 소비 생활 – 을 즐기죠.

    애정결핍에 걸릴 확률이 높은 건, ‘하녀’가 그리운 고국에 두고 온 아이도 마찬가지이거나 더 많을 것이고, 그 그리운 고국도 이와 같은 ‘노동자 수출’로 그 어떤 발전도 이룰 일은 없습니다.

    외국에서 송금되는 돈으로 기존의 경제구조가 유지될 뿐이지 총인구의 약 11% (http://en.wikipedia.org/wiki/Overseas_Filipino), 즉 일을 제일 잘 하는 노동자의 상당부분이 외국에 나가 있는 상태에서, 특히 숙련공(보모, 간호사 등) 부족 현상이 심각해질 뿐입니다. 필리핀 ‘하녀’의 대량 유입으로 노르웨이인의 하루하루가 ‘편해지는’ 반면, 필리핀은 여전히 똑같은 만성적 가난의 늪에서 허우적거릴 뿐입니다.

    ‘자유민’들이 귀찮은 집안 일들을 노예들에게 맡겨놓고 아고라에서 철학 토론이나 즐겼던 고대 희랍적 생활 양식의 현대판이라고나 할까요? 저는 이러다가 사민주의적 에토스(대중적 도덕, 도덕적 관습)가 증발되지 않을까 우려돼요.

    70대에 당과 국가의 요직을 다 그만둔 뒤에 다시 목수 일을 시작해 나무를 갖고 일하는 걸 즐겼던 허콘 리(http://en.wikipedia.org/wiki/Haakon_Lie) 전 노르웨이 노동당 총비서나 평생 방 하나 밖에 없는 좁은 아파트에서 살면서 침대와 책장밖에 가구도 거의 없었던, 당의 일과 공부 이외에 아무것도 모르고 가정조차 없었던 노동당의 불멸의 지도자 마르틴 트란먈 (http://en.wikipedia.org/wiki/Martin_Tranm%C3%A6l) 같은 사회주의 일꾼들을, 아마도 앞으로 노르웨이에서 보지 못할 것 같아요.

    노동과 인간되기

    목수 일을 폴란드 사람들이 거의 다 맡아 하는 것이고, 좁은 아파트에서 궁핍하게 사는 갓도 이제 ‘폴란드 노동자’ 생활 양식으로 치부되기 때문이죠. 사실, 노르웨이를 여기까지 끌고 온 것은 과거의 청교도적 ‘근검절약’과 뒤섞인 사민주의자들의 ‘노동 존중’, 그리고 극히 금욕적인 (어떤 면에서 소련의 옛 볼세비키들을 연상케 하는) ‘당과 계급을 위한 봉사’의 태도인데, 이제 종교도 그 종교를 많은 면에서 빼닮은 20세초의 사회주의도 점차 옛말이 되는 것 같습니다.

    노동당 지도부부터 거의 중산층의 생활양식을 배운 것이고, 선거에 노동당을 찍는 노동자까지도 육아노동만큼 ‘하녀’에게 맡기는 걸 문제시하지 않기 때문이죠.

    지금까지야 70년대의 다소 좌파 지향적 분위기에서 자란 사람들, 젊었을 때에 데모하면서 미 제국의 대사관에다 돌을 던지곤 했던 스톨텐베르그 총리 (노동당) 같은 사람들이 국정을 책임지고 사회적 분위기를 좌우하니 그나마 사민주의적 질서가 유지되지만, ‘하녀’들이 모든 집안 일들을 맡은 걸 보면서 자란 아이들이 커서 이 나라를 맡게 되면 과연 지금의 덴마크처럼 보수화되지 않을까 심히 걱정됩니다.

    저는 기본적으로 6~7살부터 청소나 식량구입, 쉬운 요리 같은 일들을 해가면서 자란 사람, 노동 습관이 몸에 밴 사람이 아니라면 장차 ‘인간’이 되기가 아주 어려울 거라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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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디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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