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양은 문명이고 조선은 비문명이다”
        2010년 06월 17일 02:00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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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화도조약 30년 만에 국권 상실

    1876년, 조선과 일본 사이에 병자수호조약, 일명 강화도조약이 체결되었다. 12개조로 이루어진 이 조약은 매우 굴욕적인 불평등 조약이었다. 조선 내에 일본인 거주지를 두고, 그곳에 거주하는 일본인들에 대해 치외법권이 인정되었다. 또한 조선의 연해, 섬 등 조선의 해안 영토에 대해 일본이 자유롭게 조사하고 해도를 작성할 수 있게 하였다.

    그것은 조선과 일본의 오랜 외교 역사에서 볼 때 매우 유례가 없는 내용의 조약이었다. 임진왜란 이후 중국에 청나라가 들어서고, 일본에 도쿠가와 정권이 들어선 이후 동북아 지역은 200여 년에 걸친 평화의 시대를 구가하였다. 조선과 일본 사이에도 심각한 외교, 군사적 분쟁 없이 통상적인 교류와 교역이 진행되었다.

    그러나 서양 국가들이 동북아에 출몰하기 시작하면서 정세가 급변하기 시작하였다. 청나라는 영국과 아편전쟁을 통해 만신창이가 되어, 동북아에서 주도권을 상실하게 되었다. 일본은 1854년 미국의 강압에 의해 통상조약을 맺은 이후 영국, 네덜란드, 러시아, 프랑스 등과 잇달아 조약을 맺었다.

    1866년 쿠데타에 의해 도쿠가와 정권은 막을 내리고 왕정복고가 이루어졌다. 새로운 집권세력들은 부국강병의 기치 아래 서양을 모델로 한 급격한 산업화와 군사력 강화를 추진하였다. 이것을 메이지유신이라 한다.

    조선 내부의 사정은 매우 복잡하였다. 전국 각지에서 민란이 발생하여 지배체제의 위기가 가중되는 가운데, 청나라가 영국에 패배하였다는 ‘충격적인’ 소식이 전해졌다. 또한 1866년에는 프랑스 함대가, 1871년에는 미국 함대가 강화도를 침범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러한 서양 국가들의 침범에 대한 대응책을 놓고 두 가지의 견해로 갈라졌다. 하나는 서양의 것을 일체 배척하고 서양 세력과 일전불사를 하자는 것이었다. 다른 하나는 자주적으로 문호개방을 하자는 것이었다.

    고종이 왕위에 오른 후 권력을 장악한 고종의 아버지 흥선대원군을 중심으로 하는 당파는 쇄국정책을 추진하였다. 흥선대군파는 고종의 부인인 명성황후를 중심으로 하는 당파와 투쟁에서 패배하였다. 이런 권력 변화의 틈을 노려 일본은 개항을 요구하며 강화도에서 무력시위를 하였다. 이 압력에 굴복하여 조선은 일본과 강화도조약을 체결하게 되었다.

    강화도조약으로 조선은 쇄국에서 문호개방으로 정책을 전환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국제정세에서 볼 때 문호개방이 불가피한 선택이기는 하였지만, 그것이 자주적이 아닌 타율적이었다는 데에 문제가 있었다.

    외세를 등에 업고자 하는 당파들이 등장하였다. 당파 간 투쟁은 외세들 사이의 투쟁의 대리전 양상이 띠기도 하였다. 그런 가운데 조선 내부의 개혁은 지지부진하였다. 그 결과는 참담했다. 강화도조약이 있은 지 불과 30년 만에 국권 상실이라는 비극이 일어났다.

    이일원론을 중심으로 하는 연합전선

    현상윤은 <조선유학사>에서 서경덕, 이황, 이이, 기정진, 이진상, 임성주를 조선 시대 6대 성리학자로 꼽았다. 이들 중 앞의 세 사람은 조선 전기, 중기에 속한 인물들이고, 뒤의 세 사람은 조선 후기에 속하는 인물들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은 기정진, 이진상, 임성주가 모두 일원론 혹은 일원론적 경향을 보인 학자들이라는 점이다. 임성주는 기일원론에 입각하여 인간의 본성에 대한 이론을 혁신하였다. 그보다 한 세대 뒤의 학자들인 기정진과 이진상은 모두 이일원론(理一元論)을 주장하였다. 기정진이 이이의 학통계열의 인물이라면, 이진상은 이황의 철학에 입각해있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조선 후기 일원론의 등장은 이기이원론으로는 당면한 위기적 상황을 극복하기 어려운 사정을 반영한다. 그것은 이기이원론적 성리학이 내부에서 붕괴되기 시작하였음을 의미한다.

    기일원론은 임성주, 홍대용, 박지원, 최한기를 거치며 화이관을 부정하고 평등한 세계관을 제시했고, 인식에 관한 이론을 다져서 문화와 과학의 발전을 위한 철학의 토대를 다졌다. 그것은 중세에서 근대로 이행이라는 역사적 방향에 순응하면서 철학의 발전을 이루어나가는 것이었다.

    서양 세력이 월등한 군사력을 앞세워 조선을 압박하여 왔다. 이것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가 시급한 현안이 되었다.

    위정척사(衛正斥邪)의 주장이 등장하였다. 올바른 것을 세우고 사악한 것을 배척한다는 말이다. 여기에서 올바른 것이란 정통 성리학과 그 철학이 토대로 하고 있는 중세적 질서를 의미하였다.

    이항로가 선두에 나섰다. 그는 정세 파악에 있어 융통성, 사회 변화의 여지를 두지 않는 극단론을 택했다. 외세에 맞서서 강경한 투쟁만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그는 <화서아언>에서 이(理)와 기(氣)는 하나일 수 없고 대등할 수도 없다고 단언하였다. 이가 내리는 명령을 기가 받아야 한다고 하였다.

    그의 주장은 집권층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졌다. 집권층이 이와 기를 근접시킨 것이 가치관이 혼란을 가져온 원인이라는 것이다. 기를 중심으로 한 이기이원론을 주장한 이이는 물론, 이를 중심으로 한 이기이원론을 주장한 이황의 철학 역시 불철저하다 하여 비판하였다.

    기정진과 이진상은 이항로의 주장을 받아들이면서 철학적으로 정교화하여 이일원론을 정립하였다. 당파의 구분을 뛰어넘어 이일원론을 외세에 맞서는 공동 노선으로 하는 연합전선이 형성된 것이다.

    그들은 근대를 외세와 동일시하여 배척하였다. 그들이 제시한 해결책은 중세적 질서의 회복이었고, 따라서 중세에서 근대로의 이행이라는 역사적 방향에 대한 역행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주장은 많은 유학자들을 불러일으켰고, 의병활동에 나서게 하였다.

    위정척사운동은 유교 사상이 실천적 행동으로까지 극대화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이일원론에 바탕을 둠으로써, 기일원론으로 근대를 스스로 이루어나가는 길을 차단하였다. 그리고 중세 질서의 회복이라는 꿈은 조선 왕조의 붕괴와 함께 사라졌다.

    개화파의 파탄

    성리학의 시대가 막을 내렸다. 철학사적으로 볼 때, 성리학 시대의 종언은 중세 시대의 종말, 근대 시대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었다. 근대로의 이행이 외세의 침략과 함께 일어났기에 시대적 과제는 복잡하고 엄중하였다. 외세의 침략을 극복하고 근대적 개혁을 이루어야 하였다. 이전 시대 철학의 합리적 핵심을 이어받아 시대적 과제에 맞게 발전시키는 게 철학의 절실한 과제였다.

    개화파가 등장하였다. 그들은 박지원의 손자 박규수의 영향을 받았다. 박규수는 1866년 평안도 관찰사로서 대동강에 침입한 미국 상선을 격침시킨 바 있었다. 그러나 그는 오히려 그 사건을 겪으며 서양 국가들의 군사력 우위를 절감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는 자주적인 문호개방을 주장하였다. 그의 주장은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등 젊은 정치인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그들은 박규수의 사랑방을 드나들며 긴밀히 교류하였고, 개화파를 형성하였다.

    개화파에 영향을 준 사람들로 통역관 출신 오경석과 의관 출신 유대치가 있다. 그들은 중국을 드나들며 서양을 소개하는 많은 책자들을 가지고 들어와 소개하였다. 그들은 양반 출신이 아니라 중인 출신이었다. 그들은 당연히 신분제에 대해 부정적이었다. 개화파는 유력 양반 가문 출신들이지만, 그들의 신분제 비판을 받아들였다. 김옥균은 <지운영사건규탄소>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지금 온 세계는 산업을 주장하여 서로가 생산을 많이 하는 것을 경쟁하고 있습니다. 이런 때에 양반을 없애어 그 폐단의 근원을 없애는 데 힘쓰지 않으면 국가가 망해 없어지기를 기다리는 것이 될 뿐이옵니다.

    개화파가 북학파의 실학에 영향을 받았지만 그 철학을 이어받은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문명개화’를 추구하였고, 그 모델은 일본이었다. 문명개화란 낡은 폐습을 타파하고 발달된 문명을 받아들여 발전하자는 얘기이다. 김옥균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오직 밖으로 서양 각국과 신의를 가지고 친교를 맺고, 안으로는 정치를 개혁하여 어리석은 백성을 문명의 길로 가르치며, 상업을 일으켜 재정을 정리하고, 군사를 길러서 국력을 강하게 해야 할 것이옵니다. – <지운영사건규탄소>

    총체적 개혁을 통해 부강한 나라를 만들자는 얘기이다. 개화파는 일본이 문명개화를 통해 그러한 부강한 나라를 이루었다고 보았다. 또한 일본에서 메이지유신이 있었기에 이러한 일이 가능했다고 보았다.

    갑신정변은 메이지유신을 가능하게 했던 1866년의 쿠데타를 모델로 한 것이었다. 그러나 근본적인 차이가 있었다. 일본에서는 군부 소장파들이 쿠데타를 일으켜 왕정복고를 이루고 권력을 잡았다. 반면에 갑신정변은 일본의 지원에 기대어 쿠데타를 일으킨 것이었다.

    일본이 발을 빼자 갑신정변은 3일 만에 실패로 끝났다. 대부분의 개화파는 몰살을 당하였고, 살아남은 인사들은 박영효 등과 같이 이후 친일파로서 조선의 일본 식민지화에 기여를 하게 되었다.

    개화파는 근대적 개혁을 이루고자 하였다. 그러나 그것을 이루어나갈 사상적 토대를 마련하지 못하였다. 문명개화라 하여 조선의 전통은 낡은 것, 타파되어야 할 것으로 치부되고, 서양 문물의 수입이 일방적으로 강조되었다.

    뜻과 의지는 있었으나 방향과 방법이 없었다. 결국 외부의 힘을 빌려 개혁을 하고자 하는 모험이 감행되었고, 파탄에 이르고야 말았다. 그들의 문명개화론은 그 다음 세대들에게 이어지고, 그 세대들의 철학적 파탄을 합리화하는 수단이 되었다. 그 세대의 대표적 인물이 최남선이었다.

    새로운 출발이 필요하다

       
      ▲ 최남선(1890년~1957년)

    최남선(1890년~1957년)은 조선의 일본 식민지화가 고착되어가던 시기에 일본 유학을 하였고, 경술 국치 이후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였다. 그는 중인 출신이다. 따라서 그는 양반에 대한 강한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풍기혁신론>에서 박지원의 <양반론>을 인용하면서, 양반은 아무런 가치도 없다고 했다. 양반은 나라를 망치는 근본이고, 타파해야 할 낡은 폐습의 핵심이라고 했다.

    그는 새로운 시대가 도래했음을 말하면서, "실지사업에 무능무위"하면서도 온갖 것을 다 누리는 양반의 습성을 폐기하고, 땀 흘려 일하는 상민의 습성을 살려 열심히 일하자고 하였다. 그리고 그 방향을 실사구시와 실익추구라 하였다.

    양반 중심의 사회를 근본적으로 개혁하자는 얘기이다. 최남선의 주장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는다. 그는 양반의 이념인 성리학을 잡고 늘어진다. 그는 "사문난적의 독한 화살을 쏘는 곳과 척사식정의 굳은 방패가 번득이는 때에 우리 사상계는 멸망하였다"고 말한다.

    사문난적이라는 딱지 붙이기와 척사식정, 즉 위정척사라는 사고와 행동으로 인해 조선의 사상이 멸망하게 되었다는 얘기이다. 그로 인해 "모든 기능이 다 장애가 되고, 모든 조직이 병"들었다고 했다. 성리학의 죄에 대한 강력한 규탄이다.

    성리학이 배척한 사상을 다시 살려내야 하는 데, 최남선은 양명학이 특히 중요한 의의가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왕학제창에 대하여>에서 양명학은 결코 이단이 아니고 유학의 한 학풍이라 하였다. 그리고 사회를 개혁하는 데 필요하니 양명학을 이용하자고 하였다.

    성리학의 폐단을 극복하기 위해 양명학에 주목하였던 흐름은 조선 시대부터 있어 왔다. 다만 사상 통제로 인하여 밖으로 표출되지 않고 있었다. 성리학의 시대가 끝나고 사상 통제가 사라지자 양명학 주장이 밖으로 나왔다. 동시대의 학자들 중에서도 양명학을 통해 사상의 혁신을 이루자는 주장이 하나의 흐름을 형성하고 있었다. 최남선의 주장은 이런 흐름과 무관하지 않다.

    양명학은 성리학을 비판하며 등장한 유학의 한 분파이다. 그것의 핵심 개념은 양지(良知)인데, 양지란 인간이 가지고 있는 선천적이고 보편적인 참된 앎을 말한다. 이것을 바르게 깨우쳐 사물을 대하고 실천하자는 게 양명학의 주장이다.

    최남선은 가장 순수한 형태의 양지를 소년이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소년은 과거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로우며 무한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이런 소년의 마음으로 과거의 낡은 폐습을 타파하고 새로운 세계를 창조해나가자고 하였다.

    그러면 어떻게 새로운 세계를 창조할 수 있을 것인가. 그는 실학에 근거하여 양반 사회를 비판하였다. 성리학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창조를 해야 한다면서 양명학의 의의를 말하였다. 그러나 그는 실학도 양명학도 계승하지 않았다. 오로지 새로운 출발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자신이 발 딛고 있는 이 땅에서 벗어나 어디에서 새 출발을 하겠다는 것인가.

    서양은 문명이고 조선은 비문명이다

    최남선은 <예술과 근면>에서 문명인에 대해 말한다.

    오늘날의 세계는 문명인의 세계이니, 오직 문명인만이 생존의 권리를 향유하며 오직 문명 강자만이 번영과 권위를 가지는 세계이다. 문명인에게는 천지에 기쁨이 있지만, 비문명인에게는 비참함이 있을 뿐이다.

    인류를 문명인과 비문명인으로 나누는 이분법을 제시하였다. 문명인만이 생존의 권리가 있고 비문명인은 비참함만이 있을 뿐이라고 말한다. 또한 문명은 서양문명을 가리키는 것이고, 동양문명이나 조선의 문명은 비문명이라 하였다.

    따라서 비문명인 조선의 것은 버리고 서양문명을 받아들여야 한다. 문명개화론이다. 그러나 개화파의 문명개화론이 함축한 의미와 최남선이 주장한 문명개화에 함축된 의미는 달랐다. 그것은 시대적 차이이기도 하였다.

    개화파가 비록 일본에 의존하는 한계를 가지고 있었지만, 그들은 문명개화를 통해 조선을 근대화하여 부강한 국가를 만들고자 하였다. 최남선 역시 문명개화를 통한 조선의 근대화를 주장한다. 그러나 시대가 완연히 달랐다.

    최남선이 문명개화를 주장한 것은 일제 강점기였다. 빼앗긴 국권의 회복이 가장 절박한 민족적 과제인 시대였다. 그는 이러한 시대적 과제에 대한 치열한 고민 없이 문명과 비문명의 이분법을 제시하며 문명개화를 얘기하였다.

    그의 문명-비문명론은 일본의 조선 지배를 정당화하는 논리였다. 문명인 서양문명을 받아들여 문명화된 일본이 비문명인 조선을 지배하는 것은 조선의 문명화를 위해 당연한 일이 되기 때문이다.

    조선의 전통적인 것은 일체 낡은 것이니 버리고 서양문명을 전폭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받아들이는 창구는 어디인가. 당연 일본일 수밖에 없다. 최남선은 일본에 소개된 서양문명을 조선으로 가져오는 일을 열심히 하였다. 그는 서양책의 일본어 번역본을 들여와 열심히 우리말로 번역하는 작업을 하였다.

    실학과 양명학을 들먹인 것은 조선 사회를 비판하고 부정하기 위한 구실에 불과하였다. 최남선에게 중요한 것은 서양문명의 수입이었다. 서양의 제도와 사상을 수입하여 조선을 바꾸자는 것이었다.

    그러면 최남선이 새롭게 창조해낸 것은 무엇인가. 그는 조선의 것의 버리자더니 뜻밖에도 단군에 대한 연구로 돌아간다. 그는 <단군께의 표성>에서 "단군은 조선 및 조선심(朝鮮心)의 표지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그는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찾는답시고 우리 민족의 역사를 뒤지고 다니는 일을 하였다. 그가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은 조선심(朝鮮心)이니 조선아(朝鮮我)니 하는 공허한 개념뿐이었다.

    그것은 일본의 강점이라는 민족적 현실을 외면한 자가 자신을 합리화하고자 하는 것에 불과하였다. 문명인-비문명인을 나누며 일본의 침략을 정당화한 이후 최남선은 현실과 대결하려는 그 어떠한 의지도 없었다. 그것은 철학의 빈곤이 아니라 철학의 부재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성리학의 시대가 끝나면서 근대 사상의 출현이 요구되었다. 일본의 침략과 지배는 엄중한 정세 속에 놓여 있었기에, 일본의 지배를 타파하고 독립된 근대 국민 국가를 형성하는 것이 긴박한 과제였다. 이런 과제를 수행하기 위한 사상적 토대의 마련이 매우 긴요하였다.

    그런데 전통적인 것은 비문명으로 치부되어 부정되었다. 이 땅에 근대 사상의 출현은 서양 철학의 수입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서양 철학을 우리의 민족적, 국민적 과제에 맞게 소화하는 게 필요하였다. 그러나 최남선은 이런 일을 하지 않았다.

    그는 조선에 대한 부정, 파괴를 열심히 하였다. 파괴된 자리에 새롭게 세워진 것은 없었다. 서양문명의 수입이 개화요 근대화이고, 그것을 위해 일본의 강점이 불가피하다는 논리만이 횡행하였다. 그는 사상적으로 완전히 파탄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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