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보신당, 이제 그만 내려오라”
        2010년 06월 16일 10:44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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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지못미’ 당원이다

    나는 진보신당 당원이다. 그리고 2008년 총선 결과를 보며 부끄러운 마음에 입당한 ‘지못미’ 당원이며, 동시에 ‘촛불’을 거치며 생활인으로‘만’ 살 수 없게 된 시민이며, 십수 년 만에 돌아온 낡은 운동권이기도 하다.

    동시에 나는 2008년 9월부터 2009년 12월까지 진보신당 중앙당 비정규직 담당국장으로 일했으며, 현재는 비정규운동과 미디어 운동에도 참여하고 있는, 소위 활동가이기도 하다. 또 동시에 나는 여전히 영화 만들고, 애니메이션 만드는 생활인기도 하다.

       
      ▲ 사진=심상정 블로그

    이 글은 이런 나의 위치에서 심상정 사퇴로 촉발된 진보신당 내부 논쟁과 민주노동당으로부터 시작된 진보정당 운동을 바라보는 시선이며, 당직자로서의 나의 활동을 포함한 진보신당의 현재에 대한 반성적 평가다.

    글을 시작하기 전에 분명히 하고 싶은 것이 있다. 논쟁의 국면에서 우리가 종종 저지르는 의도된 실수는 상대를 자신의 논지에 맞게 극단적인 포지션으로 몰아넣는 것이다. 심상정이 던지는 문제의식을 고민할 필요가 있다는 주장은 모든 것을 접고 민주당으로 대표되는 (신)자유주의에 투항하자는 논리인가? 아닐 것이다.

    마찬가지로 심상정의 길이 틀렸다는 주장은 현실을 모르는 극단적 원리주의인가? 역시 아닐 것이다. 밝혀두는 바, 나는 이하의 글에서 “배타적 계급 정당”, “폭력 계급 혁명”, “국가 사회주의”의 입장에 서 있지 않다.

    강력한 대중운동과 대중 조직 없는 사회민주주의적 변화가 가능한가?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의 강령은 대략적으로 “사회민주주의”로 수렴될 수 있다. 그런데 브라질, 스웨덴, 프랑스, 영국, 독일 등 사회민주주의 모델로 제시되는 그 모든 사회. 그 어디에 강력한 “계급적 대중 운동”, “계급적 대중 조직” 없는 사회가 있던가?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진 사민주의‘적’ 정당들은 노동조합과 노동운동의 엄호와 협력 속에 사회 변화를 달성할 수 있었다.

    계급적 대중 운동 뿐인가? 성소수자를 비롯한 각종 소수자운동, 여성운동, 농민운동, 빈민운동, 환경운동, 지역운동, 하다못해 종교적 색채를 띤 사회운동까지. 이른바 사민주의 정당들은 이런 대중운동과 대중조직과의 결합을 통해서야 사회민주주의적인 사회변화를 성공시킬 수 있었다.

    오직, 미국과 같은 사회만이 다양한 대중운동과 대중조직들의 에너지를 보수 양당 체제로 수렴하며 사회적 변화를 봉쇄하고 있을 뿐이다. 사회민주주의적 전환은 “강력한 대중운동과 대중조직, 특히 계급적 대중운동과 대중조직을 기반으로 할 때” 가능해진다.

    단순히 운동과 조직만의 문제가 아니다. 대중이 스스로를 조직하여, 정치에 개입하는 경험과 전통, 역사와 제도. 그리고 그 기반 위에 선 강력한 노동운동과 대중운동. 정당으로 표현되는 정치 운동은 그러한 사회적 배경을 근거로 할 때 작동 가능하다.

    전통적인 계급운동의 한계를 지적하며 새로운 사회운동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하여도, 그것이 계급적 대중운동과 대중조직이 갖는 중요성을 폐기하는 것이 전혀 아니다. 브라질이 그렇고, 프랑스가 그렇고, 스웨덴이 그렇다.

    우리 사회는 어떤가? 계급적 대중 운동은 물론 이른바 중간 계급적 사회운동마저 제대로 자리 잡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해방 이후, 정치 공간은 한민당과 자유당 같은 보수 정당들에 의해 독점되었고, 87년 이후 시민운동이 형성되었다고는 하나 한국 전쟁 이후 형성된 보수 우익 천하에서 체제 안으로 수렴되거나, 정치 중립이라는 명분으로 스스로 정치성을 거세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런 상황에서 자본주의 사회의 문제에 가장 강력하게 저항해야할 계급적 대중운동은 최소한의 ‘시민권’조차 획득하지 못했으며, 노동조합은 전두환 정권 이후 형성된 기업별 노조 체제 안에 봉쇄된 채 고립되어 있다.

    무엇보다 한국 사회는 대중이 스스로를 조직하여 사회적 발언권을 행사하는 것 자체를 금지 하고 있으며, 이는 대중 스스로 금기와 터부를 내면화하며 영속되고 있다. 대중의 일상적 삶은 향우회부터 관제 시민운동까지 체제 친화적인 운동과 조직으로 지배되어 있으며, 체제에 반하는 모든 발언은 ‘정치적’이라는 이유로 금지된다. 대중은 정치로부터 배제되고 있으며, 이러한 시스템은 대중 스스로의 탈정치와 비정치를 통해 완성된다.

    그러니까 대중정치, 계급정치 없는 정치는 한국 사회의 구조이자, 역사적 산물이라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의 진보정당 운동은 대중운동과 대중조직의 지원과 협력 없는 고독한 싸움일 수밖에 없다.

    민주노총과 전농 등을 지적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들의 ‘계급적’ 대중운동서의 시민권은 여전히 보류 중이다. 문제의 근원을 민주노총이나 전농 각각의 주체의 문제로 환원하는 것은 올바른 해법이 아니다. 주체의 문제는 언제나 첫 단추지만, 이를테면 노동운동의 문제는 한국 사회 일반의 변화 속에서 해결되는 것이지, 민주노총 지도부 몇몇 혹은 그 자신 한국 사회의 구성원 중 하나인 조합원 개개인의 변화를 통해 극복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브라질의 사례가 이를 반증한다. 브라질 PT 당의 모태며, 중심 기반은 강력한 금속노조다. 그러나 강력한 금속노조와 그 성원은 브라질 사회의 다양한 대중운동과 대중정치의 전통 속에 서 있는 것이지, 그 자체로 유별난 게 아니다. 브라질 PT 당의 지지자의 다수가 중간계급이란 지적도 논점 이탈이긴 마찬가지다. 브라질 PT 당의 지지자가 모두 중간계급인 것도 아니며, 중간계급의 PT당에 대한 지지는 사실상 계급 연합에 가깝기 때문이다.

    사회민주주의적 사회 변화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강력한 대중운동과 조직이며, 특히 계급적 대중운동과 조직의 역할이 중요하다. 이는 단순히 운동과 조직만의 문제가 아니며, 대중 스스로의 자기 조직과 정치적 의사표현이라는 전통과 경험, 제도에 기반한다. 과장하면 이렇게도 말할 수 있다. 노동조합 없는 사회민주주의적 변화는 불가능하다.

    심상정은 이런 현실을 인정하자고 한다

    심상정의 문제제기는 그러니까, 우리 사회의 현실을 인정하자는 것이라 생각한다. 민주노총의 총파업이 매번 “뻥”이 되는 것은 우리 사회 구조와 현실의 반영이다. 진보정당에의 지지가 비판적 지지에 가로막히는 것은 보수 양당 체제 때문이며, 이는 정치 제도의 문제를 넘어서 한국 사회의 구조 탓이라는 것이다.

    심상정은 이른바 노동운동 중앙파 출신이다. 그는 민주노동당 창당에 즈음하여 노동자정치세력화라는 흐름 속에서 당운동에 결합한 노동운동가다. 그런데 이 민주노동당을 낳은 합법정당 운동을 시작한 것은 인민노련이며, 최초의 공식 선언이 주대환의 신노선이었다. 그리고 주대환은 이미 오래전부터 심상정과 유사한 주장을 해왔다. 여기에 심상정이 몸을 실은 것이다.

    민주노총-민주노동당 양날개론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당 운동을 만들어낸 세력이 이제 그 전략을 한계를 선언한 것이다. 따라서 심상정의 선언은 어떤 의미에서는 87년 이후 지속된 합법 정당을 통한 독자적 정치 세력화라는 정치운동이 스스로의 한계를 자인하는 것이기도 할 것이다.

    나는 심상성의 문제제기가 옳다고 생각한다. 내 식대로 심상정의 문제제기를 이해한다면 우리는 오랫동안 “대중운동 없는 정치 운동” 최소한 “체제 저항적 대중운동과 대중정치가 과소 결핍된 정치운동”을 해왔다. 이런 상황에서 노동조합과 진보정당이라는 두 개의 날개 ‘만’으로 집권은 불가능하다.

    그러니까 심상정은 이 현실을 인정하자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심상정이 제시한 길이 틀렸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심상정은 현실을 인정하는 것을 넘어 이를 공식화하자고 하고 있기 때문이다.

    심상정에게 묻고 싶다. 심상정의 전략이 진보-개혁 정당의 당 대 당 통합을 통한 전략적 제 3당 건설, 장기적으로 보수 양당 체제의 해체 혹은 민주당의 대체라는 것은 알겠다. 그런데 정치운동 수준에서의 전략 말고 대중운동과 대중조직의 문제는 어떠한가? 정확히 계급적 대중운동과 대중 정치의 공백은 어떻게 해결할 수 있나?

    정치에서 배제된 절대 다수의 대중은 어떻게 정치화 되는가? 최소 700만에 달하는 저소득 계층은 어떻게 정치화할 것인가? 비정규직 노동자와 최저임금노동자, 영세자영업자에게 어떻게 정치적 주체로 만들 수 있나? 복지정책으로? 선거를 통해서? 그래서 위에서 아래로 향하는 개혁과 변화를 통해?

       
      ▲ 사진=진보신당

    6.2 지방선거의 결과는 MB정권과 한나라당에 대한 유권자의 분노만이 아니라 두 가지를 더 보여준다. 시민사회가 일정하게 ‘작동’하고 있다는 것이고, 그 공간을 지배하는 것은 중간 계급적 이해와 감성을 가진 주체성이라는 것. 언론 수호를 위해 MBC 파업은 지지하지만, 노동권 수호를 위한 제조업 노동자의 파업은 지지하는 않는 정서와 관점이 시민사회 공간을 지배하고 있다는 것이다.

    최저임금 노동자와 최하위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민주당과 한나라당이 무슨 차이가 있나? 그러나 이른바 중간 계급적 차원에서는 차이가 있다. 민주노총의 선택은 노동운동의 한계, 정파적 한계에서 나오는 것이기도 하겠지만 까놓고 말하면, 노동조합 상층으로서는 한나라당보다 민주당이 낫다는 것이다. 적어도 현재로서는!

    계급 대중이 정치로부터 구조적으로 배제된 사회에서 대중의 정치는 철저하게 “선거”로 치환될 수밖에 없으며, 대중이 스스로를 조직하고, 정치에 개입할 수 없는 상황에서 대중은 ‘유권자’로, 대중의 정치는 ‘투표 행위’로 치환된다.

    이런 치환은 결론적으로 대중운동과 조직의 성장을 더욱 가로막을 것이며, 설혹 좀 더 나은 정권의 창출한다 해도 그 정권은 끊임없는 공격에 시달릴 것이며, 나아가 이러한 과정은 문제해결자로서의 국가를 더욱 강화시키게 될 것이다. 결국엔 국가 우위의 상황에서 중간 계급적 주체로서의 시민사회 간의 상호 견제만이 선거를 통해서 반복될 것이다. 보수 양당 체제를 가능하게 하는 물적 조건이 구조화된 사회이기에 더더욱.

    배제된 자들은 누가 조직하고, 누가 대변해야 하는가?

    잠깐 우리 사회의 현실을 또 다른 각도에서 보자. 2009년 기준으로 1,648만 명의 근로인구 중 51.9%인 855만 명이 비정규직이다. 정규직 비정규직을 가리지 않고, 평균 임금의 2/3 이하의 저소득층이 무려 430만 명이다. 그 중 최저임금도 못 받는 사람만 175만 명.

    2007년 기준으로 한국의 자영업자는 604만 명. 근로 인구 중에서 무려 30%가 넘는다. 그 중 월 150만원 미만의 영세자영업자가 무려 40.1%. 중위임금 2/3 이하의 소득을 얻는 저소득층이 242만 명이란 얘기다. 추가로 145만 명이 무급 가족 종사자도 있다.

    2008년 경제위기 이후 자영업자가 몰락하고 있다는 것을 감안해도, 저소득층으로 분류되는 인구가 800만에 육박한다는 뜻이다. 게다가, 몰락한 영세자영업자가 무엇을 하겠는가? 또 다시 불안정한 저임금 노동에 종사할 수밖에 없다. 그들의 가족까지 고려하면 1천만이 넘는 영세자영업자와 저임금노동자들이 자리를 바꿔가며 서로가 서로를 파먹고 산다는 거다.

    그런데 정치 공간에서 누가 이들을 대변하는가? 누가 최저임금 인상을 위해 싸우는가? 누가 비정규직 문제 해결을 위해 싸우는가? 진보정당? 국가보안법 철폐를 위해 목숨을 건 단식을 감행한 진보정당 당원 숫자와 최저임금 인상, 아니 최저임금 책정 정책 자체를 개선하기 위해 단식한 사람들의 숫자를 비교해보라. 이번 6.2 지방선거 정책 우선 순위를 뒤져보라. 선거 슬로건을 분석해보라. 진보정당의 정책 프레임과 자유주의 정당의 정책 프레임을 비교해보라. 과연 얼마나 다를까?

    터놓고 얘기하자. 그들은 표가 안 된다. 아니, 억압 받는 저소득층이 자신들의 삶을 변화시킬 진보정당을 지지하기 보다 지배계급들의 이해를 대변하는 보수 정당에 표를 던지는 것은 아주 오래된 현실이다. 한국 사회만의 문제가 아니다. 전세계 모든 좌파들에게 던져진 과제이기도 하다. 하다못해 브라질 PT 당 역시 중간계급의 지지 없이는 집권 자체가 불가능했을 것이다.

    따라서 필요한 것은 대중운동이고, 대중조직이다. 정치에서 배제된 대중을 대변할 수 있는 것은 진보정당이 아니라, 그들 자신들이다. 선거건, 일상적인 정치 활동이건 피억압 대중 스스로의 운동과 조직을 통하지 않는 한 누구도 그들을 대변하지 않는다. 진보정당 역시, 개개 구성원들의 의지와 신념, 정당의 강령과 정책과 상관없이 표‘도’ 안 되는 그들을 온존하게 대변하기 어렵다. 그리고 이것이 의회주의에 대한 오랜 비판이기도 하다.

    따라서 진보정당의 성장은 대중운동과 대중조직, 특히나 자본주의 사회의 문제에 맞설 수 있는 계급적 대중운동과 조직이 성장할 때 가능해진다. 그렇지 않은 상황에서의 집권은 가능하지도 않고, 설혹 집권한다 해도 그것은 사상누각일뿐이다.

    심상정의 선언 이후 진보신당 내부에서 벌어지고 있는 논쟁에서 빠진 것은 이 점이다. 모두가 정치 공간과 영역을 이야기 할뿐, 배제된 대중을 어떻게 정치화할 것인지는 말하지 않는다. 시민사회라는 공간의 한계를 갑갑해 할 뿐 새로운 담론 영역의 창출은 말하지 않는다.

    민주노총의 한계를 지적할 뿐 누구도 민주노총의 변화, 기업별 노조 체제의 변화를 말하지 않는다. 그것이 정치운동의 과제는 아니기 때문이라고? 그렇다면 영원히 변화는 없다. 대중 특유의 폭발력으로 새로운 정치의 지평이 열릴 때까지. 물론, 그때 가서 대중들이 진보정당을 지지해줄지는 알 수 없다.

    국가, 무소불위의 중재자

    한국의 사회주의들이 국가 사회주의의 폐기를 통해 국가를 포기한 지금, 오히려 사민주의를 포함한 제 세력들이 국가를 강조하고 있다. 다양한 측면이 있지만, 이는 한편에서 보면 대중운동, 조직의 부재를 반증하는 것에 불과하다.

    대중의 정치가 구조적으로 불가능한 조건에서 선거라는 제도를 통한 집권과 강력한 국가를 통한 아래로의 변화 이외에는 전망하지 못함을 스스로 드러내는 것이다. 다양한 수준의 복지국가 모델이 제출되지만 누구도 “대중정치의 배제”와 “대중운동의 부재”에 대해 답하지 않는다. 복지 국가를 가능하게 해줄 대중정치, 대중운동에 대한 의미 있는 구성없는 복지국가론이란 “엘리트주의 혹은 국가주의”에 불과한 할 수 있다.

    그들이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선거라는 공간에서 국가에 저항할 수 있는 주체는 “시민”이며, (적어도 현재까지는) 시민이라는 사회적 주체가 기본적으로 중간 계급적 포지션을 취하고 있다는 점이다. 반면, 이른바 피억압대중, 하층 계급은 이 시민사회에서도, 선거라는 게임에서도 배제되어 있다.

    따라서 시스템에서 강력한 우위를 점하고 있는 지배 계급은 얼마든지 시민과 정치 엘리트들에 의해 창출된 정권을 하층 계급의 적으로 돌릴 수 있다. 우리는 지난 노무현 정권에서 이 점을 충분히 보았다. ‘내 아버지의 꿈은 복지국가’라 말하는 박근혜에게서 그 외연을 본다. 또한 노동계급을 포함한 피억압 대중, 하층 계급들의 정치적 영향력이 조직되지 않은 상황에서 ‘선의와 합리’에 기반 한 중간계급의 지지는 언제든 철회될 수 있음도 명심해야 한다.

    Agian 2002는 가능한가?

    그러나 나는 이러한 문제를 심상정이나 진보신당 내의 통합에 가까운 연합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모를 리 없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 대중 운동과 대중 정치의 영역을 공백으로 두고, 어쩌면 이를 영속화 시킬 수도 있는 제 3당 혹은 사실상 통합 프로그램을 내장한 연합을 주장하는가?

    나는 이 문제를 민주노동당의 이례적인 성공 경험에서 찾고 싶다. 90년대 초반부터 시작된 합법 진보정당 운동은 매번 실패했다. 우리 사회 운동 진영의 다수는 매 선거 때마다 비판적 지지를 선택해왔다. 그러나 단 한번, 2000년 민주노총의 독자 진보정당 건설이 시작되던 시점에서 그 다수 세력이 독자 정치세력화의 길에 합류했다. 그 “좌우 동거”라는 주체적 조건이 사회적 정세와 맞물려 2002년부터 시작된 민주노동당의 성공을 가져왔다.

    나는 심상정과 진보신당 내 사회민주주의자들의 주장의 배경에는 이 성공의 경험이 있다고 판단한다. Again 2002. 민주노동당과의 통합을 통해서든. 좀 더 큰 사이즈로 국민참여당과 창조한국당까지 포괄한 것이든 간에. 좌우 동거를 통한 의미 있는 정당의 건설함으로서 집권을 향해 달려가자는 것.

    왜냐하면 독자적 진보정당의 실패를 확인했으니까. 민족주주의자들을 제외한 진보정당의 토대가 얼마나 미약한지 확인했으니까. 진보정당이 대변하고자 하는 계급과 계층은 여전히 ‘정치’ 밖에 있으니까. ‘정치화’된 주체는 시민이니까. 따라서 그들과 함께 하지 않는 한, 진보정당의 집권은 불가능하니까. 그리고, 진보정당의 생존과 성장을 보증해줄 대중운동과 대중조직은 당장은 불가능하니까. 혹은 정치운동 스스로는 그 공백을 채울 수 없으니까.

    진보신당은 무엇을 했나?

    심상정은 진보신당을 가리켜 ‘반’민주노동당으로 정립한 정당이라 불렀다. 그러나 심상정은 충분히 말하지 않았다. 진보신당은 민주노동당에만 반정립하는 것이 아니다. 창당 초기 진보신당 내부에서 제출된 각종 공식 비공식 발언들을 살펴보면, 진보신당이 실은 “반운동권, 반데모, 반북, 반민주노총, 반노동자주의, 반정파” 정당이기도 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운동권과 데모, 정파, 민주노총 그리고 민주노동당으로 상징되는 87년 체제의 극복. 이름 하여 진보의 재구성. 그러나 내용 없는, 실패한 재구성. 결론적으로 반정립.

    이른바 진보의 재구성은 정당의 운영원리나 정책 수준의 변화로 가능한 것이 아니다. 87년 체제란 87년 이후 형성된 사회시스템 안에 있는 것이며, 87년 이후의 그 시스템 안에서 살아온 사람들과 민주화운동과 노동운동, 그리고 다양한 사회운동 등을 포함한 총체다.

    그러나 진보신당은 사회적 시스템을 변화시키기 위한 경로로 “선거” 이외에는 사고할 수 없었으며, 진보의 재구성이라는 문제의식에 동의하지 않거나 노선적, 정서적 차이가 있는 제 운동 주체들을 변화시키기 보다는 절연하는 쪽을 택했다. 그래서 민주노총을 비롯한 낡은 운동과 절연했으며, 스스로도 변화시키지 못했으면서도 이른바 운동권과도 절연했다. 그 결과는 낡은 운동으로부터‘도’ 고립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많은 진보신당 당원들이 민주노총의 한계를 비판한다. 그러나 조직의 차원에서 보면 진보신당이 그토록 목 놓아 외쳤던 비정규직 문제를 가장 책임 있게 대응한 것은 실은 민주노총이었다. 1%를 간신히 넘는 비정규직 노조 조직률. 이랜드와 같은 상당하게 정치화된 영역을 제외하면, 우리 사회 다수의 중소영세,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조직한 것은 그토록 비판받는 민주노총이지 진보신당이 아니다.

    최소한 우리 사회에 비정규직 문제를 제기한 비정규 운동의 주체들은 비정규직 노동조합원들이었다. 반면, 작년까지 중앙당 비정규 담당자였던 나를 포함하여 진보신당이 한 것은 지난 전국위원회에서의 발언처럼 “비정규 연대기금 1억으로 플랭카드 만들자”는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었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정치화되지 못한 상황에서, 시민사회의 영역에서 비정규직 문제를 발언하는 것 이상을 넘어서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앞에서 끊임없이 주장한 것처럼 비정규직 노동자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비정규직 노동자 스스로의 조직이며, 운동이다. 그리고 진보정당은 과제는 그 대중운동과의 결합 속에서 나와야할 것이다.

    노동조합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주장 역시 있어왔다. 맞다. 노동조합이 모든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진보신당은 일상의 영역, 이른바 생활의 영역에서 시민을 대상으로 비정규직 노동의 문제를 “시혜와 동정”의 수준에서 발언하는 것 이외에 도대체 무엇을 했나?

    계급 정치가 배제된 상황에서 진보정당이 걸을 수 있는 길은 탈계급적 공간에 탈계급적 방식으로 개입하거나, 아니면 탈계급적 공간에서 계급적 정치를 구성하는 것 중 하나일 것이다. 이럴 때 진보정당이 취한 것은 주체의 의지와 상관없이 탈계급적 전략이었던 것 아닌가?

    민주노총과 관련하여 추가할 것은 이른바 “민주노총이 노동계급을 대표할 수 없다”는 논리다. 정말로 민주노총이 노동계급을 대표하지 못하고 있다면 대표할 수 있도록 끊임없이 설득하고, 비판하고, 견인해야 할 것이다. 더 나아가서는 노총이 노동계급을 대변할 수 있는 진보정치를 구성하여, 민주노총이 스스로 그 길로 들어설 수밖에 없게 하는 것이다.

    10%에 불과한 조직률을 탓하는 것은 언급할 가치도 없다. 프랑스 노총이 조직률이 높아서 2004년 최초 고용 투쟁의 주력부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더군다나 이른바 정치 운동이라면 기업별 노조체제에 갇혀 있는 노동조합을 사업장 밖으로 끌어내고, 나아가 기업별 노조 체제 자체를 변화시키는 것을 자기 과제로 해야 하는 법이다. 그러지 못한다면 무능하거나 무책임한 것이다. 그도 아니라면 진보신당 왼편의 주장처럼 그저 ‘기름밥 먹는 것들이 못마땅한’ 중간계급의 정당에 불과하기 때문인가?

    민주노총을 비롯한 당 밖의 대중운동 특히, 노동과의 문제만이 아니다. 진보신당은 당 내의 다양한 계급적 주체와 함께 하는데 무기력했다. 예를 들어, 진보신당은 농민 당원들에게 무엇을 주었을까? 영세상인 당원들과는 무엇을 했을까?

    진보신당과 관련하여 마지막으로 추가하고 싶은 것은 이를테면 노정태 같은 사람들의 주장이다. 신당원과 구당원. 촛불당원과 민노당 출신 당원의 차이. 그러나 이런 분석은 센세이셔널 하긴 해도 결코 현실을 드러내지도 현실을 변화시키지도 못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 촛불 당원은 결코 하나가 아니며, 지난 1년 반의 과정 속에서 상당한 변화를 겪으며 분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심상정의 선언 이후 벌어질 논쟁은 이러한 분화를 더욱 가속화시킬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구당원과 신당원과 같은 과도하게 규정은 지나치다고 생각한다.

    촛불, 시민, 연합? 필요한 것은 시민과 노동의 연합, 즉 계급 연합이다.

    서두에서 말한 바와 같이 나는 “배타적 계급 정당” 즉, 노동계급만으로 구성된 정당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선거를 통한 사회변화를 부정하는 것 역시 절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길고 긴 이야기를 한 것은 권력에 맞서 겨우 “시민”이라는 주체만이 서 있는 상황, 계급적 대중운동과 조직은 시민권조차 획득하지 못한 것은 물론, 대중정치 자체가 봉쇄되어 있는 상황, 이 상황을 변화시키지 않는 한 진보정당의 미래는 없다고 주장하고 싶기 때문이다.

    당연히 진보정당은 중간계급의 지지를 확보해야 한다. 현 시기, 이른바 촛불로 상징되는 “시민”을 자신의 편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러나 심상정을 비롯한 일부의 주장은 이 시민들을 인정하면서 실은 그들이 하나가 아님을, 하나가 아닐 수 있음을 묵과하고 있다.

    정치적 지지가 계급적 지위와 동일한 것은 결코 아니다. 그리고 선거와 제한된 시민사회 공간을 통해 구성되고 호명되는 이른바 국민과 시민은 결코 하나가 아니다. 그 안에는 다양한 균열이 존재하며, 다양한 계급적, 계층적 분화가 존재한다. 그러나 체제는 이들을 체제 친화적이며 탈계급적이며, 최소한 중간 계급적 주체로 제한하려 한다. MBC 파업을 지지하는 주체는 용인해도, 제조업 노동자들의 파업을 지지하는 주체는 용인하지 않는 이른바 ‘선택과 배제 전략’은 문민정부 이후 항상적으로 존재해온 전통적 전략이다.

    이런 상황에서 탈계급적 관점에서의 시민을 지지 기반으로 삼겠다는 것은 그 계급배제, 대중배제 정치를 영속화하는 것일 수 있다. 중간 계급의 지지를 얻는데 급급해 중간 계급의 변화와 분화를 포기하는 것이며, “무엇보다 중간계급과 하층 계급의 연대와 단결, 연합을 포기하는 것”이다.

    연합을 말하지만 실은 “중간 계급 간의 연합”으로 결국에는 “정치화된 그들만의 정치에 국한된 연합”을 주장하는 것이다. 계급적 대중운동과 대중정치의 공백에 대한 분명한 대안이 없는 한 이는 극복하기 어려운 경향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촛불과 시민은 결코 고정불변한 계급이 아니며, 영원히 보수 양당 체제에 갇힌 주체도 아니다. 그들 내부에서도 정치적 지향과 계급적 지위에 있어 다양한 분화가 있고, 있을 것이다. 노동계급을 비롯한 다양한 사회적 계급과 연대하고 있고, 할 수 있는 주체다. 사회민주주의적 변화를 위해서라도 진보정당이 해야 할 일은 “시민과 노동의 연합”이다.

    중요한 것은 계급적 대중운동과 대중정치에 대한 입장과 계획

    이제와 나는 반성한다. 나는 과거 민주노동당에 가입하지 않았다. 이른바 자주대오와 당을 함께 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당시 내가 아는 정당운동의 개념에 입각할 때 너무도 상이한 노선을 가진 두 세력이 함께 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또한 나는 합법정당 노선을 개량으로 폄하한 것을 반성한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이제와 민주노동당과 함께 하는 것에 동의한다는 것은 아니다. 그 당시의 합법정당 노선이 옳았다고 평가하겠다는 것도 아니다. 내가 반성하는 것, 어쩌면 우리가 반성해야할 것은 정당운동을 계급적 대중운동, 대중 정치의 관점에서 보지 못했던 점이다.

    중요한 것은 정치 운동의 수준에서 어떤 당이냐 ‘만’이 아니라, 우리사회에서 “어떻게 계급적 대중운동과 대중정치를 뿌리내릴 것”이냐며, 이 과제를 성공하지 못하는 한 어떠한 방식의 진보정당 운동이라 해도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나는 사회주의노동자정당을 준비하고 있는 진보신당 왼쪽의 정치세력의 시도가 참으로 중요하고 소중하다고 생각한다. 그들의 조직 노선이 무엇이든 간에 다양한 정치운동의 시도가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며, 무엇보다 그 과정을 통해 계급대중을 정치화시키는 데 주요한 일익을 전담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돌려 말하면 어쩌면 현 시기에 더 중요한 것은 계급적 대중운동과 대중정치에 대한 입장과 계획이 아니겠냐는 것이다.

    진보신당은 2000년 민주노동당의 재창당 운동과 유사한 문제의식에 입각한 이른바 제 2창당 운동을 시도했다. 그러나 결과는 참담했다. 왜냐하면 2000년의 재창당 운동은 좌우 동거라는 커다란 그림이 깔려 있었으나 현재의 제 2창당은 오른쪽을 뺀 왼쪽끼리의 제 2 창당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2000년의 재창당은 한국사회의 제 운동진영이 독자정치세력화라는 큰 흐름에 함께 복무한다는 대의와 명분, 그리고 비전이 있었지만 2008년 진보신당의 제 2창당은 “변화해야한다”는 주장만 있었을 뿐 명분도 비전도 없었다.

    나는 진보신당이 또 다시 제 2창당 운동을 시작하겠다고 한다면 거기에는 “계급적 대중운동과 대중 정치의 형성”을 위한 계획이 포함되어 있어야 한다고 본다. 그래야만 정파적, 정치적, 노선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함께 할 수 있는 공동의 과제와 지향이 형성될 것이기 때문이다. 아니, 제 2창당을 넘어 최소한의 연대와 연합을 위해서도 그렇다. 그렇지 않을 때 진보신당은 결국 심상정의 제안한 길로 가거나, 혹은 심상정의 길은 아니지만 그다지 다르지도 않을 길을 걸을 것이라 생각한다. 결과적으로는 말이다.

    진보신당, 이제 그만 내려오라

    (나는 전진 토론회에 참석하지 못했다. 따라서 토론 내용을 알지 못한다. 또한 사민모임 토론회의 경우 토론문이 공개되지 않아 별도의 입장을 제시하지 못했음을 밝혀둔다)

    전진의 지난 주 토론회에서 장석준은 ‘비’노동 전략을 제안했다. ‘비’정규직 노동자과 노동자가 될 ‘비(be)’노동자, 노동에서조차 배제된 가사노동 등의 ‘비(非)’노동자를 위한 정치. 나는 그의 주장에 동의한다. 그러나 ‘비’노동 전략에는 여전히 “계급적 대중운동과 대중정치를 위해 진보정당이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관점과 계획이 빠져있다고 본다.

    나는 장석준을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장석준이 그 공백을 채워달라고 하는 것이다. 현재의 사회구조 안에서 ‘비’노동 전략 역시 탈계급적 공간에서의 탈계급적 정치활동으로 전락할 수 있기 때문이다. 존재하는 그리고 앞으로 존재할 계급적 대중운동과 대중정치에 대한 지향과 계획을 자기 과제로 위치 지워지울 때에만 ‘비’노동과 같은 의미 있는 전략은 성공하게 될 것이다.

    긴 글을 통해 내가 하고 싶은 그러니까 한 마디로 이렇다.

    진보신당이여. 이제 그만 허공에서 내려와 대지에 발을 딛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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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디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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