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단병호 보고 전봉준 생각하다"
        2010년 06월 15일 09:19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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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년 전 1월 눈 쌓인 성균관대학교 수원캠퍼스. 당시 안기부와 경찰의 집요한 추적을 따돌리고 1천명에 이르는 노동자와 이들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전국에서 그곳으로 모여들었다. ‘극비 작전’이 성공했다. 그리고 전노협이 결성됐다. 그늘 3당 합당으로 민자당도 출범했다.

    전노협은 87년 노동자대투쟁으로 전국 각지에 퍼져나간 힘들이 다시 한 곳으로 모여 만든, 노동자들의 피와 땀이 서린 조직이었다. 그리고 전노협은 노동자의 조직만은 아니었다. 전노협을 지지하는 교수, 의사, 변호사, 학생 모든 이들의 조직이었다.

    전노협은 6년 활동을 접고 산별노조 건설 과제를 민주노총에 넘기며 해산했다. 지금, 전노협에 대해 이야기하자는 것은 단지 20년이 지났기 때문만이 아니다. 우리가 지키려 했던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잃은 것이 무엇이며, 되살려야 할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레디앙>은 노동자 역사 ‘한내’와 공동 기획으로, 전노협 이야기를 소개한다. 다양한 위치에서 여러가지 시각으로 전노협을 바라보고 함께 했던 사람들이 기억해내는 전노협의 그때가 오늘을 향해 던져주는 ‘메시’는 무엇일까. 함께 생각하고 되살리기 위해 ‘전노협과 나’ 시리즈를 연재한다. <편집자 주>

       
      ▲ 전노협 창립대회 모습

    1990년 1월 22일. 오늘의 민주노총 모태인 전국노동조합협의회(전노협)이 닻을 올림으로써 이 나라 노동운동사에 큰 획을 그은 날이다.

    20년 지났지만, 기억은 생생

    이제 20년이 지난 과거이지만 기억은 아주 생생하다. 새벽같이 집을 나와 사당동에서 당시 민교협공동의장이었던 김진균 교수님을 만나, 전날에 이미 전갈을 받아둔 영등포역 근처 한 다방에 중간 집결하였다. 모인 사람들은 스무 명이 채 되지 않았다. 거기서 최종집결지가 성균관대 수원 캠퍼스라는 사실을 통첩 받고 삼삼오오 분산해서 빠져나와 수원행 전철에 몸을 실었다.

    말하자면 007작전과 같은 모양새였으니 서울 일원에는 이미 갑호비상령이 내려져 있었다. 후일의 얘기에 의하면 그 당시만 해도 교수라는 신분의 사람들이 비밀거사에 100% 신뢰를 얻기가 힘들었다고 한다. 전노협 창립의 축제에 가능한 많은 사람들이 초대받아야 마땅하지만 민교협에 배당된 초대는 공동의장 김 교수와 대외협력위원장인 필자에 그쳤다.

    그날 이전의 일들에 대해서 소개하는 게 좋겠다. 민교협이 전노협 건설지원에 본격적으로 참여하기로 최종 의견을 모은 것은 89년 12월 9일 유성 계룡산장에서 열린 중앙위원회에서다. 당시 전노협건설준비위원장이었던 단병호 씨가 신변 위험을 무릅쓰고 심상정 씨를 대동, 우리 모임에 참석하여 전노협 건설의 당위와 전반적 경과를 상세히 설명하였다.

    (단병호 씨와 만남은 나로서는 그 때가 처음이었다. 그를 처음 보는 순간 전봉준은 키가 작은데 이 이는 키가 아주 크구나, 100년 전에는 전봉준 지금은 단병호가 우리 역사의 한 가운데 있구나, 여하튼 동학농민혁명의 전봉준을 떠올렸다.)

    지식인과 노동운동의 결합

    1987년 7,8월 노동자 대투쟁 이래로 노동자계급과 함께 하여온 민교협은 밤샘 토론을 통하여 전노협 건설 적극지원은 물론 구체적 지원의 방법에 대해서도 깊게 논의하였다.

    그 후 전노협지원 공동대책위원회를 결성했으며, 지원활동은 전노협 건설의 정당성을 홍보하는데 역점을 두었다. 민교협은 1월 18일 학술단체협의회의 후원을 받아 연세대 장기원기념관에서 하루 내내 ‘전노협 건설의 당위성 평가’라는 주제의 학술심포지움을 개최했다.

    심포지움 제1주제는 ‘사회운동 및 이데올로기 개방과 전노협’, 제2주제 ‘현 경제상황과 노동운동의 책임성’, 제3주제 ‘한국 노동운동의 발전과정과 노동조합 전국조직’으로 나흘 앞둔 전노협 창립을 공개적으로 지지하고 나섰다. 이렇게 민교협과 전노협은 결속의 끈을 단단히 해 나갔다.

    민교협은 이 땅의 민주화가 계급모순의 해결과 직결되고 있음을 직시했으며, 전노협의 건설은 민주화의 주요한 경로로 바로 우리의 문제라고 판단했다. 

    1990년 1월 22일, 이날 거사의 제일의 목표는 뭐니뭐니 해도 무사히 창립총회를 치르는 거였다. 날씨는 우리 편이었다. 쾌청하였지만 전 날 밤에 내린 눈은 제법 쌓여, 걷는 데는 별 지장이 없었지만, 차량 이동은 상당히 어려웠다. 전철에서 내려 성대로 가는 길이 나를 듯 가벼운데다가 저만큼 앞에는 머리 하나는 위로 솟은 단병호 위원장의 행보가 힘차 보였다.

       
      ▲ 전노협 창립대회에 들이닥친 경찰들

    역사 현장의 한복판

    창립총회장은 그야말로 역사의 현장, 그 한복판이었다. 단상단하가 온통 노동자가 이 땅의 주인으로 다가가는 열기로 뜨거웠다. 민주화는 당장 내 눈앞에 와 있었다. 환호의 창립총회가 끝날 무렵 공권력은 뒷북을 쳤다. 눈길에 더디게 몰아닥친 경찰은 가득 메운 함성에 기가 질려 주춤거렸고 우리는 질서를 지켜 현장을 빠져나왔다.

    바로 그 날은 노태우, 김영삼, 김종필 씨가 모여 3당 합당을 해 민자당을 만든 날이기도 하니 당시의 정국은 노동운동탄압이 극에 달해 있었음은 물론이다.

    전노협 탄압은 날로 더 심해갔고 재정도 어려웠다. 전노협건설지원공대위는 전노협 발족으로 그 소임을 다하고 자연스레 전노협후원회 결성에 뜻을 이어갔다. 그해 6월 25일 공대위에 소속되어 활동한 학계, 법조계, 의료계, 문화예술계, 종교계, 여성계 등은 후원회준비위원회를 거쳐 9월 5일 결성하였다.

    후원회는 두 가지 일에 역점을 두었다. 첫째, 민중민주운동의 중심에 전노협을 자리매김하는 것이었다. 전노협건설지원공대위의 소속 조직들이 그 후에 국민연합의 구심이 되면서 전노협의 위상은 높아갔다. 여기에 특히 민교협은 아마도 자기 역량의 반이 넘게 쏟아 부었다.

    둘째는 재정자립을 돕는 거였다. 후원회는 평의원과 일반회원 모두 150여명이 조금 넘게 출발했는데 이들의 후원만으로는 한계가 많았다. 그래서 후원회가 출발하면서 곧장 ‘땀 흘리는 사람들을 위한 작품 전’을 기획, 추진하였다.

    방문객만 1천명 넘은 후원 작품전

    민족예술총연합(민예총)과 민족미술협의회는 자기 일처럼 나서 200여점의 작품을 모아 주었다. 특히 신영복 교수는 10여점의 서예 작품을 내줬다.

       
      ▲ 재정사업 기획상품이었던 징시계

    방명록에 올린 방문객만도 1천여 명이 넘었고 작품은 완전 매진되었고, 기획 상품이었던 징 시계는 일찌감치 동이 났다. 결산은 수익 1억 원이었다. 대성공이었다. 모금에만 성공한 게 아니고 전노협 돕기에 일반시민의 발길까지도 잡은 것이었다.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의 유홍준 교수의 작품 설명은 작품매진의 일등공신이었다. 필자는 이제 널리 고백하건데 원주의 장일순 선생님으로부터 아주 귀한 난초 서화 일점을 상으로 선물 받았다.(우리 집 안방에 걸려 아직도 은은한 향기가 느껴진다)

    후원회 운영의 중심은 집행위원회였고 고 김진균 교수, 신인령 교수(전 이화여대 총장), 중앙대 박영근 교수, 곽선숙 씨, 정인숙 씨와 김준묵 씨 등이 열성이었고 정해영, 김미영, 최미아, 정경원 씨가 이어서 간사로 그리고 평회원 이행자 시인이 오래 기억에 남아있다.

    후원회는 민주노총의 건설에 따른 전노협의 해산 후 1년여를 지속한다. 전노협백서 발간에 힘을 보태기위해서다. 7000여 쪽의 <전노협 백서>를 볼 때 마다 고 김종배 동지의 모습이 중첩된다. 이 글을 쓰는 내내 민중의 스승, 청정 김진균 교수의 진면목을 전노협에서 읽었다.

    * 이 글의 필자는 전노협 출범 당시 후원회 회장을 맡았으며, 중앙대 의과대 학장, 전국사립대 교수협의회 연합회장 등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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