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세의 종말, 후천개벽의 시작
        2010년 06월 11일 10:46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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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란의 시대

    19세기 조선은 가히 민란의 시대라 할 수 있는 한 세기였다. 1811년 홍경래의 난을 필두로 하여 시작된 민란은 1894년 갑오농민전쟁에 이르기까지 근 한 세기에 걸쳐 크고 작은 민란이 일어나 조선 사회를 뒤흔들었다.

    조선의 19세기는 정조에 이어 순조가 1801년 왕위에 오르면서 시작되었다. 순조가 불과 10살의 나이에 왕위에 오르게 되면서, 정조의 유언에 따라 김조순이 그의 후견인이 되었다. 그는 무려 30년을 국구로서 역할하면서 안동 김가 세도정치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그로부터 시작된 세도정치는 순조, 헌종, 철종에 이르기까지 60여 년간 이어졌다.

    세도정치가 시작되면서 중앙 정치의 기강은 더욱 문란해졌다. 특히 매관매직이 극성을 부렸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며 극도의 국가 재정 위기에 봉착하자, 그 위기를 모면하기 위한 한 수단으로 매관매직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런데 권력이 한 집안에 집중되면서 매관매직은 더욱 극심해졌다. 이제 그것은 국가 재정의 위기를 극복하려는 수단에서 한 집안의 사적 이익을 추구하는 수단으로 변질되었다. 그만큼 그로 인한 폐해는 심각하게 되었다. ‘줄 잘 잡아 출세하려는’ 자들이 앞 다투어 안동 김가 일문의 집안으로 몰려들었다.

    과거 시험의 경우, 소과 합격에 3만 냥, 대과 합격에 10만 냥을 바쳐야 하였다. 과거 시험에 합격하였다 하여도 직책을 부여받기 위해서는 또 다시 10만 냥을 뇌물로 주어야 하였다.

    매관매직은 백성들에 대한 가혹한 수탈로 이어졌다. 막대한 돈을 주고 벼슬을 샀으니, 재임 기간에 속된 말로 ‘본전 이상’을 뽑아내려 했기 때문이다. 백성의 삶은 말 그대로 피폐하고 도탄에 빠지게 되었다.

    그러나 백성들은 이미 과거의 백성들이 아니었다. 임진왜란 등을 거치면서 자신들의 운명에 수동적인 자세에서 벗어나려는 의식적 각성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들에 의해 하나의 문화가 형성되고, 판소리 등의 다양한 형태를 통해 사회 풍자와 비판이 이루어지는 등 새로운 문화적 운동이 나타나고 있었다.

    조선 후기에 오면서 신분제가 심하게 동요하였다. 백성들이 지배층의 수탈을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양반이 되는 것밖에 없었다. 그래서 농업이나 상공업을 통해 부를 축적한 일부 사람들이 돈으로 양반 신분을 사들였다.

    이로 인해 양반의 숫자가 급격히 늘어났다. 대구시의 일부 지역을 조사한 한 자료에 의하면, 1670년대에 200여 호였던 양반집이 1850년대에는 1,600여 호로 8배 이상 늘어났다. 반면 상민의 집 수는 같은 기간 1,300여 호에서 800여 호로 급격히 줄어들었고, 노비의 경우 1,000여 호에서 40여 호로 거의 소멸되었다.

    양반이라고 다 같은 양반일 수는 없었다. 집권층과 끈이 닿아 있는 일부 고급 관료들이나 대토지를 소유하고 있던 일부 양반층 이외에는 몰락에 몰락을 거듭하였다. 몰락한 양반의 생활은 일반 백성의 생활과 다를 바 없었다. 그들은 조선 사회에 대한 불만자로 자리 잡았고, 개혁 혹은 변혁을 꿈꾸게 되었다.

    백성들의 극도로 피폐해진 생활과 의식의 각성, 그리고 몰락한 양반들의 팽배해진 불만. 그들은 언제든 손을 잡을 수 있고, 조그마한 불씨가 광야를 태울 수 있는 시대적 상황이 조성되고 있었던 것이다.

    직업적 민란꾼

    몰락한 양반 중에 이필제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1860년대 말부터 진천, 진주, 영해, 문경 등에서 잇달아 민란을 일으켰다. 체포령이 내려지자 이름을 바꾸어 신분을 위장하고 경상도와 충청도에 걸쳐 넓은 지역에서 활약하였다. 한마디로 그는 ‘직업적인 민란꾼’이었다.

    그런데 그가 일으킨 민란은 당시의 다른 민란과 그 성격을 달리하였다. 지방 관리들은 이필제가 일으킨 민란에 대해 "도대체 어떤 적도들인지 모르겠다"고 보고하기까지 하였다. 그러면 어떤 면에서 성격을 달리하는가.

    보통 민란의 경우 지방 관리들의 학정에 못 이겨 자연발생적으로 일어났다. 주동 인물과 참여한 사람들은 주로 그 지역 주민들이었다. 민란이 일어나면 중앙 정부에서 해당 지방 관리를 파면하고 새로운 관리를 임명하는 것으로 마무리되곤 하였다.

    이필제가 일으킨 민란은 달랐다. 1871년에 일으킨 영해 민란을 보자. 거기에는 영해는 물론 울진, 영덕, 청하, 흥해, 경주, 영양, 상주, 문경 등에서 온 사람들이 참여하였다. 이필제가 광범한 지역의 사람들을 동원한 것이었다.

    민란의 목적도 달랐다. 이필제는 자신의 심문 조서에서 "바다 가운데 빈 섬이 많으므로 무리를 불러 모아 진주의 군기를 탈취하여 금병도로 향하여 바로 중원으로 들어가려 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민란의 목적이 관리들의 학정에 대한 저항이 아니라 군기 탈취였던 것이다.

    그는 무기를 탈취하여 무인도에 무리를 모아 들어가려 했다고 했다. 군사 훈련을 하겠다는 목적이 있었던 것이라 할 것이다. 그렇게 한 후 최종 목적은 무엇인가. 그는 중원, 즉 중국에 쳐들어가려 했다고 말했다. 그렇게 진술한 것은 자신의 벌을 경감 받으려고 둘러댄 말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오히려 그의 목표는 한양이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는 무장한 백성들을 이끌고 한양으로 쳐들어가는 것을 꿈꾸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에 관한 기록이 많지 않아 그가 어떤 과정을 거쳐 이런 야망을 가지게 되었는지를 알 수는 없다. 그러나 그의 시도는 지역적으로 고립 분산되어 자연발생적으로 일어났던 민란을 광범위한 지역에서 조직적으로 일으키는 민란으로 전환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 최제우(1824년~1864년)

    그런 시도가 가능했던 것은 동학이라는 조직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필제가 영해와 문경에서 민란을 일으킬 때 동원된 사람들이 동학교도들이었다. 그는 1863년에 동학에 입문하였다고 주장하였다.

    그가 영해에서 민란을 일으킨 3월 10일은 동학의 1대 교주 최제우가 처형을 당한 날로, 동학교도들에게는 원한을 가진 날이었다. 이 날 이필제는 교조신원을 명분으로 충청, 경상도 일대의 동학교도를 동원하여 민란을 일으켰던 것이다.

    최제우, 득도하다

    최제우(1824년~1864년)는 경주의 한 시골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몰락한 양반 집안이었고, 그는 서자였다. 보잘 것 없는 집안에서 보잘 것 없이 태어난 것이다. 그리고 별 볼일 없는 삶을 살았다. 그는 벼슬을 할 수도 없고 농사도 지을 수 없었다. 그래서 처자를 돌보지 않고 이리저리 떠돌아 다녔다.

    떠도는 사이 이것저것 해보았다. 장사도 해보았고, 글방에서 글도 가르쳐 보았고, 무술도 배워보았고, 점 치고 병 고치는 일도 해보았다. 그러나 그 어느 것 하나 제대로 된 일은 없었다. 요즘 말로 하면 백수나 다름없는 생활로 시간을 보냈다고 할 것이다.

    그러다가 갑자기 1860년 4월 5일, 그는 득도를 하고 동학을 창시하였다. 그 때의 상황을 그는 이렇게 말했다.

    뜻밖에도 이 해 4월 어느 날 나는 마음이 아찔아찔하고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병이라 해도 무슨 병인지 알 수 없고, 말하려고 해도 형용할 수 없었다. 이 순간 어떤 선어(仙語)가 문득 들려왔다. 나는 소스라쳐 일어나 캐어물었다.
    "무서워 말고 두려워 말라. 세상 사람들이 나를 상제(上帝)라고 부르는데, 너는 상제를 알지 못하느냐!"
    라고 하느님은 대답했다. 나는 하느님이 이렇게 나타나시는 까닭을 물었다.
    "나도 역시 일한 보람이 없었다. 그러므로 너를 이 세상에 나게 하여 이 법(法)을 사람들에게 가르치려고 한다. 부디 내 이 말을 의심하지 말라!"
    라고 하느님이 대답했다. – <동경대전>

    이때에 이르러 최제우가 득도하였다며 나선 것은 국내외적 정세로 볼 때 의미를 갖는다. 그는 국내외적 상황과 자신이 하고자 하는 과제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나라는 요즘 나쁜 질병이 나라 안에 가득 차 있고, 또 백성은 사시사철 편한 날이 없다. 이것도 상해(傷害)를 입은 우리 운수의 한 본보기이다.
    한편으로 서양 사람들은 싸우면 이기고 공격하면 빼앗게 되니, 그들의 뜻대로 되지 않는 일이 없다. 이러하여 중국이 온통 망해 없어지면 우리나라도 따라서 그렇게 될 우려가 없지 않다.
    아, 이 나라를 돕고 이 백성을 펀하게 할 계책이 앞으로 어디에서 나올 것인가? – <동경대전>

    여기에서 질병은 1821년 발생한 콜레라를 말한다. 1819년 인도의 벵골 지방에서 발생한 콜레라가 조선으로 들어와 전국에 10만 명 이상의 환자가 발생하였다. 당시 콜레라는 환자 10명 중 8, 9명이 사망하는 치명적인 전염병이었다. 이런 콜레라가 무려 3년간이나 창궐하였다. 이미 관리들의 수탈에 생활이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진 백성들에게는 엎친 데 덮친 격이었다.

    국외적으로 보면 영국을 위시한 서양 국가들의 중국 침략이 본격화하고 있었다. 중국은 영국과의 아편전쟁에서 패하여 1842년 난징조약을 맺었다. 1857년에는 상선 애로호 사건이 일어나 영국과 프랑스 연합군이 중국을 침략하였고, 중국은 또 다시 패하여 톈진조약을 맺었다. 1860년에는 아예 영국과 프랑스 연합군이 중국에 상주하기 시작하였다.

    이런 일련의 사건은 조선 사회를 크게 동요시켰다. 중국이 서양 국가들에 의해 멸망할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지고 있었다. 조선은 위아래 가릴 것 없이 심한 불안감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상황들이 최제우로 하여금 득도를 하게 만들었다. "나라를 돕고 백성을 편안하게 할 계책"을 제시하기 위해 그는 동학이라는 종교를 창시하였던 것이다.

    후천개벽의 시작

    역사적 전환기에 백성들 속을 파고드는 종교가 출현하는 것은 오래전부터 반복되어 온 일이었다. 신라 말 민란이 계속되는 속에서 미륵의 출현을 고대하는 신앙이 널리 퍼졌다. 고려 말 지배 질서의 위기가 일어나자 수많은 예언가들이 등장하여 백성을 선동하였다. 조선 후기 역시 마찬가지였다. 정감록, 도참설 등 온갖 예언집이 퍼지고, 그것과 연관된 민란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이러한 종교운동은 기존 지배체제가 흔들리고 지배적인 이념이 설득력을 상실하면서 나타난다. 그것은 백성들의 요구를 적극 수용하는 내용을 지님으로써 급속한 세력 확대를 가져오기도 한다.

    사상사적으로 동학을 살펴볼 때 역사적 전환기에 국한할 필요가 있다. 여기에서 전환기란 동학이 창시되면서부터 우리나라가 국권을 상실하게 되는 시기까지를 말한다. 그것은 조선이 그 생명력을 이미 상실하고 외세의 침략과 간섭이 노골적으로 진행된 시기이다. 그 이후 시기의 동학은 종교사의 영역이 된다고 할 것이다.

    최제우가 가장 강조한 것은 하느님을 모시라, 즉 시천주(侍天主)였다. 여기에서 혼란이 일어난다. 서학, 즉 기독교 역시 하느님을 모시라고 하지 않는가. 최제우는 자신의 주장이 서학과 다르다는 점을 수시로 강조해야 했다.

    나는 동쪽에서 나서 동쪽에서 도를 받았으므로, 도는 비록 천도(天道)지만 학(學)은 동학이다. 더욱이 땅이 동쪽과 서쪽으로 갈라져 있는데 어찌 서쪽을 동이라 하고, 동쪽을 서라고 하겠는가? – <동경대전>

    동쪽에서 도를 받았으므로 동학이라 한다고 했다. 그러나 이 말을 단지 지리적인 개념으로만 이해할 필요는 없다. 최제우가 유교와 불교에 대해 이미 시대에 뒤떨어진 것으로 비판하고 있음을 함께 고려해야 한다.

    최제우는 기독교는 물론 유교, 불교와 다른 독자적인 종교를 조선 땅에서 창시하였음을 말하고자 한 것이었다. 스스로 득도하였다며 종교를 창시하는 일은 우리 역사에서 유례가 없는 일이기도 하였다.

    최제우는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었음을 알리고자 하였다. 그는 <몽중노소문답가>에서 "삼각산 한양 도읍 사백 년 지낸 후에 하원갑(下元甲) 이 세상"을 두루 살폈다고 하였다. 그 결과 세상이 말세가 되었음을 알고 탄식을 하였다. 그러나 새로운 시대가 열리고 있다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십이제국 괴질운수 다시 개벽 아닐런가.
    태평성세 다시 정해 국태민안 할 것이니,
    개탄지심 두지 말고 차차차차 지내보자.
    하원갑 지내거든 상원갑(上元甲) 호시절에
    만고 없는 무극대도(無極大道) 이 세상이 날 것이니
    너도 또한 연천해서 억조창생 격앙가를 불구에 볼 것이니
    -<몽중노소문답가>

    하원갑의 말세가 지나가고 상원갑의 이상적인 시대가 도래하여, 크나큰 도가 실현되고 백성들은 태평성대를 노래하는 격앙가를 부르게 될 것이라 했다. 그것을 가리켜 ‘개벽’이라 했다. 흔히 말하는 후천개벽을 주장한 것이다.

    그러면 이런 때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우선 최제우는 동귀일체(同歸一體)하라고 하였다. 저마다의 이기심을 이겨내고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여 한 몸과 같이 되라는 것이다. 정신적 화합을 강조하고자 한 말이다.

    다른 한편으로 정치적 변혁을 꾀하고자 하였다.

    시호(時乎) 시호, 이내 시호 부재래지(不再來之) 시호로다.
    만세일지(萬世一之) 장부로서 오만년지(五萬年之) 시호로다.
    용천검 드는 칼을 아니 쓰고 무엇하리.
    -<검결>

    오만 년만에 찾아온 둘도 없는 기회에 용천검을 들지 않을 수 있겠느냐는 말이다.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분명하다.

    중세 시대의 종말

    최제우의 사상은 두 가지 면에서 근대적인 각성의 내용을 담고 있다. 하나는 시천주라는 말 속에서 하느님을 모시는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그것은 중세 신분제를 넘어서는 주장이고, ‘백성 중심적인 각성’이라 할 수 있다. 다른 하나는 독자적인 종교의 창시이다. 그것은 중세적 화이관을 뛰어넘는 ‘민족적 자각’의 일면이었다.

    그렇지만 그의 사상은 백성들의 의식을 근대적인 정신으로 발전시켜내는 역할을 하지는 못하였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종교라는 형식과 내용의 틀 안에 머무는 것이었다. 물론 최제우는 종교적인 측면과 아울러 백성들의 요구를 반영하는 정치변혁적인 측면을 함께 주장하였다. 그것이 빌미가 되어 그는 40살 나이에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최제우가 죽은 후 2대 교주가 된 최시형은 종교적 측면을 우선시 하였다. 앞에서 서술한 이필제가 교조신원을 내세워 동학교도들의 동원을 주장했을 때, 최시형은 거절하였다. 그에게 있어 후천개벽은 정신적 개벽을 의미하였다. 동학이 종교로서 본연의 모습을 정립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백성들의 불만과 요구는 종교적 틀 내에서만 갇혀 있을 수 없었다. 1894년 갑오농민전쟁이 일어났고, 동학교도들은 막대한 조직력을 바탕으로 이 운동을 주도하였다. 그것은 후천개벽이라는 언어가 아니라, 현실 속에서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선언이었다.

    갑오농민전쟁은 철저히 탄압되었다. 그 운동에 연루된 사람들은 그 후로도 오랫동안 숨어 지내며 탄압을 받아야 하였다. 그리고 동학이 가졌던 역사 전환기의 역할도 막을 내렸다. 갑오농민전쟁은 새로운 시대의 도래를 알리는 선언이자, 이전 시대가 종말을 고했음을 알리는 조종이었다.

    새로운 시대는 새로운 체제와 철학을 요구한다. 그것은 이전 시대 것들의 개혁과 변혁, 그리고 계승과 발전 속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에서 깊고 깊은 단절을 경험하여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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