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추모곡이 되돌이표가 되던 시절
    By 나난
        2010년 06월 11일 09:51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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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동해방과 민주주의를 이뤄가는 길에서 수많은 선후배, 동료가 죽어갔습니다. 가까운 지인으로부터,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동지들이 죽어갔습니다. 어떤 이의 죽음에는 추모곡이 만들어지기도 했지만, 또 어떤 이의 죽음은 많은 이에게 알려지지 않거나 후일에 알려지기도 했을 겁니다.

    그래서 굳이 누구의 추모곡이라는 이름이 붙기보다는 먼저가신 선배 열사들을 위한 추모곡으로 광범위하게 해석돼 불려 지곤 했었습니다. 예전에 만들어진 노래책에는 추모곡이라는 분류가 따로 있을 정도로 수많은 추모곡이 있었지요.

    <벗이여 해방이 온다> 역시 추모곡으로 탄생을 했습니다. 86년 봄 분신한 서울대 학우 김세진, 이재호 열사를 추모하기 위해 만든 노래입니다. 이 곡은 당시 노래모임 ‘새벽’에서 활동하던 메아리 출신의 이창학에 의해 창작되어 불렸고, 당시에는 이성지라는 필명으로 발표되었습니다.

       
      ▲ 사진=경계를넘어

    또 죽어간 열사를 애도하고, 그리워하며, 그들의 뜻을 받들자는 절절한 노래가사와 완성도 높은 곡 형식, 더군다나 그 시대 최고의 여가수로 손꼽혔던 윤선애의 열창 등으로 굳이 추모행사 자리가 아니더라도, 많은 이들에게 불리며 열사들의 뜻을 되새기는 노래가 되었습니다.

    87년 6월 항쟁의 포문을 열게 된 사건은 잘 아시는 것처럼 박종철 열사의 죽음이었습니다. ‘박종철 열사 고문치사사건’이 알려지면서 그간 운동세력들에 대한 무자비한 연행과 고문 사실이 폭로된 것입니다.

    말로만 듣던 고문

    84년 학원자율화조치가 있었고, 또 상대적으로 대중집회가 허용되긴 했지만 감시와 탄압은 여전히 계속되던 때라 선배들은 술자리에서 고문당한 이야기들을 해주곤 했습니다. 물고문, 전기고문, 통닭구이, 고추가루물 고문, 무릎에 봉 끼워 넣고 밟기, 여성들에 대한 성고문 등이 자행됐습니다.

    그리고 이런 소름끼치는 다양한 고문에 대한 설명과 그럴 때 오래 잘 버티는 요령과 정보를 실토하는 단계 및 요령에 대해서도 이야기해 주곤 했습니다. 하지만 다들 그런 일이 자신의 인생에 닥치게 될 거라고는 꿈에도 상상하지 않았었고, 설사 닥친다 해도 스스로 이겨낼 수밖에 없는 현실이란 걸 잘 알고 있었습니다.

    86년에 들어 민민 운동권의 투쟁이 거세지자 물리적 탄압도 노골적으로 강화되기 시작했습니다. 86년 4월 김세진, 이재호 열사가 분신을 하고 난 직후, 우리 노래 서클은 봄 정기 공연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공연당일 팸플릿을 찾으러 갔던 선배와 동기 3명이 서대문경찰서에 연행됐고, 그 중 한 명을 대신해 공연 마지막 부분 민민투 결성식을 상징화하는 장면에서 선배와 같이 혈서를 쓰고 말았습니다.

    그리곤 이틀간 집에 들어가지 않았고, 집에 가서는 문건들을 동생 방 침대 매트리스 밑에 숨겼습니다. 그 때 연행됐던 선배와 동기는 가을에 카투사로 입대를 예정했지만 결국 그것이 취소되면서 바로 강제 징집되어버렸습니다.

    교문에서 싸움이라도 벌어지는 날에는 페퍼포그와 최루탄은 물론, 32연발탄이나 64연발탄으로 본관 앞까지 밀고 들어오는 일이 허다했습니다. 언제 누가 어떻게 끌려가거나 죽음을 당할지 모르는 나날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끌려간 곳이 치안본부 대공분실이었고, 대여섯 명의 남자들한테 둘러싸여 죽거나 부러지지 않을 만큼 두들겨 맞고 물고문을 당했습니다. 말로만 듣던 그런 상황이 벌어진 것이었지요. 생각 같아선 잘 버티고, 당당하게 대항하고 싶었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박종철 열사의 죽음

    그리고 뭔가 어떻게든 이야기를 잘 하고 빠져나갈 궁리를 해야 했지만 머릿속에서는 ‘정말로 여기서 죽을 수 있구나’ 하는 두려움밖엔 들지 않더군요. 엄마 아빠, 가족들의 얼굴과 친구들의 얼굴이 떠올랐고, 이렇게 죽고 싶진 않았기에 울면서 살려달라고 애원을 하고 말았습니다.

    조직에서 그닥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지도, 공개되어 있지도 않은 터라 어찌어찌 사오일 후에 풀려나오긴 했습니다. 그러나 그 후 조직의 모든 선들이 끊어지고, 혼자서 어찌해야 할지 모른 채 시간은 흘러, 복학을 하고 학회 쪽으로 옮겨 나름대로 조용한 생활이 계속 되었었습니다.

    그러나 87년이 되면서 접한 박종철 열사의 죽음은 이전에 접했던 다른 어떤 열사들의 죽음과는 또 다른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 불과 8개월 전에 내가 거기서 구차하게 살아나왔다는 것이 너무 부끄러웠고, 죄책감마저 들어 견딜 수가 없더군요.

    다시 다른 조직으로 복귀를 하고 매일 매일을 거리에서 보냈습니다. 태어나서 그렇게 사람이 많이 모인 건 처음 봤지요. 정말 세상이 이렇게 뒤집어 질 것 같았습니다.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신촌으로 종로로, 시청으로 돌아다녔지만 힘든 줄도 몰랐고, 또 최루탄이 터지거나 전경들이 쫒아 와도 많은 사람들이 같이 있어 덜 무섭고, 서로서로 도와주곤 했으니 이런 게 해방구로구나, 싶었습니다.

    그러다 이한열 열사마저 사망하면서 장례식 준비와 6.10 대회 준비를 하게 되었습니다. 학생회관 합창연습실에서 모여 회의를 하고, 준비하며, 또 동기, 후배들과 노래연습을 하면서 밤을 지새웠습니다. 다들 제대로 씻지도 못하고 피곤했지만, 열사의 죽음을 추모하며, 걷잡을 수 없는 분노로 버텨냈던 것 같습니다.

    여전히 힘든 그 시절의 기억들

    23년이 지났지만 그 세월 속에 또 얼마나 많은 이들이 죽어갔고, 또 얼마나 많은 이들이 붙잡혀갔는지…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라고, 우리 해방의 나라는 눈물과 피를 먹고 동터온다고 위로하고, 또 위로해보지만 그래도 더 이상 이 길에서 죽거나 아프거나, 잡혀가는 일이 없길 바랍니다.

    그 시절을 살았던 누구라도 비슷한 경험을 직, 간접적으로 했을 것이기에 6월 항쟁은 몇몇의 성과가 아니라 그 자리에 있었던, 창밖으로 바라보면서라도 염원하던 모두의 것이길 바라는 마음으로 <벗이여 해방이 온다>를 함께 들었으면 합니다. 그리고 그 시절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들이나 그 자리에는 없었지만 공감하는 사람들은 각자의 의미를 되새겨 보시길 바랍니다.

    그 시절의 기억을 떠올리는 건 여전히 힘이 듭니다. 좀 더 자세한 그 때 이야기를 알고 싶으신 분들은 제 블로그(http://blog.jinbo.net/jini)의 ‘87년 6월 항쟁에 대한 기억’이라는 글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벗이여 해방이 온다>
    이창학 글, 곡

    그날은 오리라 자유의 넋으로 살아 벗이여 고이가소서 그대 뒤를 따르리니
    그날은 오리라 해방으로 물결 춤추는 벗이여 고이가소서 투쟁으로 함께 하리니
    그대 타는 불길로 그대 노여움으로 반역의 어두움 뒤집어 새날 새날을 여는구나
    그날은 오리라 가자 이제 생명을 걸고 벗이여 새날이 온다 벗이여 해방이 온다

    ** 음원 출처 : 민문연 11집 [해방의 노래] 중 윤선애 노래

    ** 참고 : 노래 작곡자인 오마이뉴스 이창학 기자의 글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3271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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