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빗자루 유령, 노동자로 거리에 서다"
    By 나난
        2010년 06월 06일 01:27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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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빗자루를 든 유령이 “우리도 노동자”라 외치며 세상 밖으로 나왔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관심조차 받지 못한 청소노동자들이 ‘여성․고령․저임금․비정규직’이라는 굴레를 벗어던지고 노동자로서의 ‘당당한 권리’를 되찾기 위해 행진을 시작한 것이다.

    청소노동자 권리선언

       
      ▲ 권리 찾기에 나선 청소노동자들이 환하게 웃고 있다.(사진=이은영 기자)

    공공노조 등으로 이루어진 ‘따뜻한 밥 한 끼의 권리’의 주최로 5일, 서울 혜화동 마로니에 공원에서 열린 ‘청소노동자 행진’에는 청소노동자들과 시민사회단체, 학생 등 500여 명이 모여 청소노동자들의 권리를 선언했다.

    청소노동자들은 “더 이상 유령으로 살지 않겠다”며 “따뜻한 밥 한 끼의 권리를 요구하기 위한 쟁취하기 위한 투쟁에 나선다”고 말했다.

    이날 모여든 각 대학과 병원의 청소노동자들과 학생들은 30도를 웃도는 더운 날씨에도 자신들의 이야기를 발언과 노래, 몸짓으로 전하며 세상을 향한 유쾌한 ‘한 방’을 날렸다.

    특히 이화여대 청소노동자들은 그들의 상황과 처지를 노래 ‘황진이’를 개사해 담아냈고, 흥에 겨운 청소노동자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춤으로 화답하기도 했다.

    “노동자가 봉이냐! 서민들이 봉이냐! 이제는 안 되지 이대론 안 된다. 노동악법 철폐하리라. 봄, 여름 가고 가을이 가고 겨울이 오면 적자인생 어떻게 살까? 하늘에서 꽃송이 하얗게 내리면 눈물 나서 어떻게 살까? 그래도 단결, 투쟁! 노동자의 희망 최저임금 인상하자.”

    소풍 같은 결의대회

    이처럼 청소노동자들의 세상에 대한 외침은 여느 노동자들의 결의대회와는 달랐다. 마치 오래된 학창시절 동창생들이 몇십 년 만에 소풍을 나온 듯 여기저기서 오이와 바나나, 냉커피, 오징어, 삶은 달걀을 나눠먹으며 같은 청소노동자들의 발언에 연신 고개를 끄덕이는 가하면, 어깨춤을 추기도 했다.

    또한 사회자가 코미디언 김미화 씨의 권리선언 지지글을 낭독하자, 이들은 더 큰 호응을 보냈다. 김 씨가 글에서 “저는 여러분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인연이 있다”며 “제 이름이 ‘미화’아닙니까, 환경 ‘미화’”라고 하자 청소노동자들은 “맞아 맞아”, “하하하~ 인연이지~”하며 웃음꽃을 피우기도 했다.

       
      ▲연세대 청소노동자들이 참석해 몸짓으로 ‘당당한 권리 선언’을 했다.(사진=이은영 기자)
       
      ▲이날 행사에 참여한 학생들이 이들의 권리 선언에 연대의 뜻을 밝혔다.(사진=이은영 기자)

    이날 발언에 나선 김윤희 고려대병원 청소노동자는 “모두가 단 꿈에 젖어 있을 때 우리는 별 보며 출근해 거리를 깨끗이 청소하지만 제대로 된 처우도 받지 못하고, 최저임금에 불과한 임금밖에 받지 못한다”며 “더구나 식어버린 찬밥을 데울 곳도 없는 곳에서 점심을 해결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노조가 설립되기 전, 관리자들이 ‘졸려도 걸레를 들고 졸라’고 말하는 등 서러움을 당했다”며 “우리 스스로 조직돼 우리의 권리를 되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대학로 전체를 꽉 채우는 축제의 날이 왔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인증샷 전시도

    캠페인이 열린 마로니에 공원 한켠에는 청소노동자들의 근로 처우를 알리는 선전전도 열렸다. 이 곳에서는 이동수 화백이 청소노동자는 물론 시민들에게 캐리커처를 그려주고, 캠페인 참석자들이 인증샷을 찍어 즉석에서 전시하기도 하는 등 시민들과 함께 할 수 있는 공간을 조성해 호응을 얻었다.

    시민들은 그들의 손으로 ‘청소 노동자들이 화장실에서 찬밥을 먹는 이유’를 작성하고 줄에 매달아 놓기도 했다. “무관심 때문이다”, “먹을 곳이 없기 때문이다”, “배려 없는 고용주 때문이다” 등 다양한 이유들이 매달렸지만, “우리 때문이다”라는 응답도 있었다.

    아울러 청소 노동자들과 같이 비좁은 휴게공간에서 식어버린 찬밥을 먹어야 하고, 저임금에도 시달리고 있는 간병 노동자들의 처우개선을 위해 ‘병원간병서비스 국민건강보험적용 법안’ 추진을 요구하는 서명운동도 열렸다.

    한편 이날 청소노동자들은 대학생들과 한 팀이 돼 북과 장구를 손에 들고 거리를 행진하기도 했다. 이날 행진에 참석한 이들은 풍물패에 맞춰 대학로 일대를 행진하며 시민들을 향해 “청소노동자도 노동자”라며 “이제는 당당히 여성 노동자의 권리를 위해, 비정규직 노동자의 권리를 위해, 노동자의 권리를 위해, 우리 모두의 권리를 위해 행진한다”라고 외쳤다.

       
      ▲ 청소노동자, 학생, 시민 등 500여 명이 서울 혜화동 일대를 행진하며 "청소노동자도 노동자"라고 외쳤다.(사진=이은영 기자)
       
      ▲ 청소노동자들은 ‘여성, 고령, 비정규직’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나 ‘당당한 노동자’임을 외치며 세상 밖으로 나왔다.(사진=이은영 기자)

    행진에 참석한 연세대 한 청소 노동자는 “그 동안 우리 자신이 부끄러웠는데 오늘 이 자리에 참석하며 마음이 넓어졌다”며 “답답했던 마음도 싹 가시고, 학생들이 도와줘서 더 힘이 난다”고 말했다. 고려대병원의 한 청소노동자도 “당당하고 기분이 좋다”며 “마음이 활짝 열렸다”고 말했다.

    유령과 같이 어두운 곳에서 식어버린 밥을 먹으며 살아오던 그들이, 자신들의 권리를 외치면서 손잡고 연대하면서 비로소 당당한 노동자로 거듭난 것이다.

    "더이상 자신이 부끄럽지 않다"

    이제 청소노동을 시작한 지 2개월째 됐다는 한 청소노동자는 “자식들 모르게 입사지원서를 내고, 일을 시작했지만 대학생들도 나 같이 보잘 것 없는 사람한테 먼저 인사를 하는 가하면, ‘수고하신다’며 음료수도 줘 힘이 난다”며 “청소 일을 하기 전에는 (쓰레기를 버리는 등) 행동을 아무렇게 할 때가 많았지만 이제는 공중화장실 등을 사용할 때 깨끗하게 사용한다”고 말했다.

    연세대 한 학생은 “며칠 전 학교 축제가 끝난 뒤 수십 명이 치워도 쓰레기를 다 치우지 못했는데, 다음날 학교가 엄청 깨끗해진 것 보게 되었다”며 “새벽부터 청소노동자분들이 깨끗하게 청소하신 덕분에 우리는 깨끗한 학교를 되찾을 수 있게 되었다”고 말했다.

    그는 “청소노동자들의 역할이 굉장히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여성의 고령 비정규직이라는 이유로 저평가 되고 있다”며 “이들의 권리를 되찾을 수 있도록 대학생들이 보다 많이 거리에 나와 열심히 알려나가겠다”고 말했다. 

    이날 캠페인에는 조직된 청소노동자들 외에도 ‘청소노동자 행진’ 벽보를 보고 개인적으로 참여한 청소노동자도 있었다. 한 남성 청소노동자는 “나이 먹은 사람이 할 일이 없고, 젊은 사람들에게 좋지 않은 말 많이 들으면서도 ‘에라 모르겠다, 즐겁게 살자’는 마음으로 일하고 있다”며 “오늘처럼 청소노동자들의 이러한 행사에 관심이 많다, 힘내서 하자”고 말했다.

    5시경에 끝난 이날 행진은 노동자들로 부터도 소외된 노동자들이 “따뜻한 밥을 먹을 권리”라는 기본권을 스스로 주장하는 자리였다. 학생들과 노동조합, 시민들과 어깨 걸고 나선 청소노동자들이 노동자로서 스스로 어두컴컴한 벽을 깨고 나오기 위한 출발선에 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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