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천지만물은 유행(流行)한다”
        2010년 06월 04일 02:43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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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행이란 무엇인가

    유행이란 단어는 누구나 흔히 사용하는 것이다. ‘유행에 뒤떨어졌다’느니 ‘유행을 선도한다’느니 하는 말을 흔히 한다. 사전에 보면 ‘특정한 행동양식이나 사상 따위가 일시적으로 많은 사람의 추종을 받아서 널리 퍼지는 것’으로 유행을 정의한다.

    또 다른 예로 ‘추측’이란 단어가 있다. 이것 역시 흔히 사용하는 단어이다. 사전에 보면 ‘미래의 일에 대한 상상이나, 과거나 현재의 일에 대한 불확실한 판단을 나타낼 때 사용한다’고 되어 있다.

       
      ▲ 화가 이양원이 그린 최한기

    실제로는 이 단어들은 사전적 정의보다도 더 가벼운 의미로 일상생활 속에서 사용되고 있다.

    그런데 최한기가 이 단어들을 사용할 때 의미는 사뭇 달랐다. 그는 ‘유행’을 천지만물의 이치를 나타내는 말로 사용하였다. 천지만물이 끊임없이 움직이면서 생겨나고 작용하는 것. 즉 천지만물의 본 모습을 유행이라 하였다. 그는 천지만물의 생성과 운동의 원리를 ‘유행지리(流行之理)’라 표현하였다.

    ‘추측’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확신한 것을 바탕으로 다른 것을 헤아린다는 의미로 추측을 사용하였다. 여기에서 ‘추(推)’는 근거를 나타내는 말이고, ‘측(測)’은 알아낸다는 의미이다. 예를 들어 ‘추기측리(推氣測理)’라 하면 기를 근거로 이를 알아낸다는 말이다. 이런 원리를 그는 ‘추측지리(推測之理)’라 하였다.

    ‘유행’과 ‘추측’은 최한기의 철학에서 핵심적인 개념이다. 천지만물의 본 모습인 유행을 추측을 통해 알아낸다는 것이다. 요새 사용되는 단어의 의미로 본다면 천지만물을 불확실하게 판단한다는 말이 되니, 도저히 최한기의 철학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게 된다. 이것은 우리의 철학적 전통과의 단절이 얼마나 심각한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라 할 것이다.

    흔히 최한기를 실학사상과 개화사상을 연결하는 역할을 한 사상가로 평가한다. 이 평가는 두 가지 측면에서 잘못되었다. 첫째, 최한기는 정약용을 정점으로 하는 실학사상과 달리 기일원론을 철학의 본령으로 하였다. 둘째, 개화사상가들은 최한기가 존재하는 줄도 몰랐다. 또한 그의 철학을 이을 수 있는 사고의 깊이나 폭을 갖추지도 못하였다. 한 마디로 최한기의 철학에 대한 몰이해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보여주는 평가라 할 것이다.

    평민과 교류하다

    최한기(1803년~1877년)는 19세기에 살았던 사람이다. 그럼에도 그의 삶에 대해서는 그리 알려진 것이 많지 않다. 그가 양반 가문의 출신이기는 하였지만 벼슬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 그 한 원인일 수 있다.

    그는 과거시험이라고는 단지 생원 시험을 한 차례 보았을 뿐이었다. 따라서 그는 일체의 벼슬을 하지 않았는데, 70세 때에 그의 장남이 시종신이 되자 그 덕에 통정첨지라는 호칭을 받게 되었을 뿐이었다.

    그는 벼슬을 하지 않는 대신 일생을 두고 연구와 저술활동을 하였다. 그는 동서양의 서적을 두루 섭렵하고, 경학, 사학, 예학, 수학, 지리, 천문 등 다방면에 걸친 저서를 남겼다. 그의 학문은 외국에서 인정을 받아 중국에서 그의 저서가 간행되기도 하였다.

    최한기는 다방면에 걸쳐 연구하고 방대한 양의 저서를 남긴 것에 비해 교분 관계가 넓지 않았다. 그와 가까웠던 사람들로는 <대동여지도>를 만든 김정호, 북학파인 이덕무의 손자 이규경 등이 있었다고 한다.

    이런 교분 관계에서 눈여겨보아야 할 점은 김정호가 평민 출신이고 이규경이 서자 출신이라는 것이다. 즉 최한기는 조선 사회 내의 비주류 계층, 하층민과 교류를 하였던 것이다. 그가 주로 이런 계층과 교류한 이유는 그의 집안 형편과 관계된 것으로 보인다.

    최한기의 집안은 양반 가문이지만, 그의 직계 조상 10대에 걸쳐 과거 시험 급제자가 없었다. 이것은 그의 집안이 명색만 양반 가문이었지 몰락한 집안이었음을 말해준다. 몰락한 양반 집안은 평민과 다름이 없었다.

    따라서 최한기는 어려서부터 일반 백성과 다름없는 생활을 하였다. 그래서 그들의 처지와 형편을 잘 알게 되었다. 그는 <인정>에서 "학문은 빈부귀천과 무관한 것이다"라고 말한다. 누구나 학문을 할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하지만, 그가 자신의 학문의 지향점을 어디에 두고자 하였는가를 표현한 말이기도 하였다.

    표준을 세워 가리고 경험으로 처리하라

    최한기는 현실과 현실의 변화를 중시하였다. 그는 <인정>에서 다름과 같이 말했다.

    만약 옛날과 지금 가운데 어느 것을 취하고 어느 것을 버려야 하느냐를 선택하라면, 내가 밑천으로 삼아 살아가고 의지하는 게 지금이지 옛날이 아니며, 내가 써야 하고 따라야 할 것도 지금에 있고 옛날에 있지 않으므로 옛날을 버릴지라도 지금은 버릴 수 없다. 학문하는 선비가 지금의 실상과 변화를 모르면서 옛날 글에 매달려 백성을 다스리고자 한다면, 반드시 많은 착오가 생긴다.

    말하고자 하는 바가 분명하다. 의지하고 이용하는 게 지금이니, 옛날보다 지금이 더욱 소중하다는 얘기이다. 또한 지금의 실상과 변화를 알아야 백성을 다스릴 때 착오가 없다고 했다.

    그러면 현실과 그것의 변화를 알기 위해 어떤 학문을 해야 하는가? 최한기는 학문을 해서 얻고자 하는 바가 서로 다르다면서 학문을 목적에 따라 몇 가지로 구분하였다. 즉 부귀를 목적으로 하는 학문, 민생의 방도를 열어주려는 학문, 자기만족을 얻으려는 학문, 천지만물의 실상과 변화를 밝히려는 학문 등이 그것이다.

    부귀를 얻으려는 학문에 대해, 마음을 바르게 하여 도의를 실행한다는 명분을 내세우지만 실제로는 부귀를 얻는데 힘쓴다고 비판한다. 이는 정통적인 유학을 두고 한 말이다. 정통 유학은 개인의 수양을 강조한다. 그러나 실상은 과거시험을 보아 관리로 출세하려는 목적에서 유교 경전을 공부한다. 최한기는 이것을 비판한 것이다.

    민생의 방도를 열어주려는 학문에 대해, 그것이 유익한 학문이기는 하지만 ‘한 고을, 한 국가’를 위하는 것에 불과하여, 경우에 따라 쓰일 수도 있고 쓰이지 않을 수도 있다고 말한다. 이것은 실학을 두고 한 말이다. 실학은 한 고을 혹은 한 나라를 위한 정책적 제언을 한다. 따라서 그것은 경우에 따라 쓸모가 있기도 하고 쓸모가 없기도 하다. 최한기는 실학의 한계를 지적하고자 한 것이다.

    자기만족을 얻으려는 학문은 불교와 도교 등을 두고 한 말이다. 최한기는 이 학문에 대해서는 특별히 거론할 만한 가치가 없다고 보아 구태여 비판하는 논의도 하지 않았다.

    천지만물의 실상과 변화를 밝히려는 학문에 대해, 그것이 큰 도를 밝히고 태평을 이룩하여 모든 사람들을 감복시킨다고 하였다. 그것은 최한기가 추구하고자 한 학문이었다. 그는 이 학문을 가리켜 ‘운화학(運化學, 운동과 변화에 관한 학문)’ 또는 ‘기학(氣學)’이라 불렀다.

    기학은 이학(理學)과 대비되는 개념이다. 최한기는 기학과 이학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

    옛 사람의 글이 기(氣)에까지 이른 경우가 아주 드문데, 어떤 것은 기의 자취를 보았으나 본체에 이르지 못하였고, 어떤 것은 그 단서를 찾았으나 궁극에는 이르지 못하였다. 그런 것들을 이학하는 사람들이 물리쳤는데, 그들이 한 일은 글을 단서로 삼아 시비했을 따름이다. 표준을 세워 허실을 분명하게 가리고, 경험을 통해 제반의 것들을 처리한 것이 아니었다. – <기학>

    옛 사람 중에 드물기는 하지만 기에 대해 말한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그들의 글은 기의 단초를 보기는 하였지만 궁극적인 본체에는 이르지 못했다고 했다. 그 이전의 기일원론자들의 부족한 점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그런데 그것을 비판하는 이학하는 사람들의 자세는 더 문제가 많다. 그들은 글을 단서로 삼아 시비했을 뿐이다. 기일원론의 한계를 지적한 게 아니라 아예 배척하여 버렸다는 것이다. 배척의 근거는 성현의 말씀이었다. 서경덕의 기일원론에 대한 이황의 비판에서 그 사례를 찾을 수 있다. 이황은 서경덕의 주장이 성현의 가르침과 다르다며 비판, 배격하였던 것이다.

    이렇듯 기존 기일원론의 한계와 그것에 대한 이기이원론의 비판의 문제점을 지적한 후, 최한기는 자신의 기학에 대해 "표준을 세워 허실을 가리고 경험을 통해 제반의 것들을 처리"한다고 말한다. 이것은 그가 일생을 두고 추구하였던 철학의 과제였다.

    모든 학문에는 오류가 있다

    어떤 학문이든 오류가 없을 수는 없다. 기학 역시 오류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다. 최한기는 학문하는 과정에서 나타날 수 있는 오류에 대해 말한다. 그는 오류의 양상에 따라 학문을 다시 구분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허무학의 오류는 표준이나 기준이 없는 곳으로 달려가는 데 있다. 그것은 시정하기 어렵다. 성실학의 오류는 자기 자신을 속박하는 상태가 굳어진 데 있다. 그것은 알아차리기 어렵다. 기학의 오류는 벗어나거나 넘어서는데 있다. 그것은 쉽게 수정할 수 있다. – <인정>

    여기에서 말하는 허무학은 불교나 도교를 말하는 것이니, 목적에 따른 분류상 자기만족을 얻으려는 학문이 이에 해당한다. 그것들은 표준이나 기준이 없이 검증 불가능한 주장을 한다. 따라서 오류를 저지른다 하여도 그것을 증명할 길이 없다. 증명할 수 없는 오류이니 그것을 수정하기도 어렵다.

    성실학은 유교를 가리킨다. ‘성(誠)’은 개인의 수양을 가리키는 말이고, ‘실(實)’은 세상을 이롭게 하는 경세의 사상을 가리키는 말이다. 따라서 성실학에는 정통 유학은 물론 그것의 폐단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실학까지 포함된다. 이것은 기학에 대비되는 이학(理學)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다.

    성실학이 저지를 수 있는 오류는 ‘자기 자신의 속박’이라 했다. 지나친 자기중심성이라는 얘기이다. 그것은 이(理)라는 절대 불변의 이념을 내세워 사고와 행동을 속박하려 한다. 실학의 경우에도 이런 절대 이념을 바꾸어 놓는 일을 하지 않았다. 따라서 똑같은 오류를 범하게 된다. 그 오류는 알아차리기 어렵다고 했다.

    기학에도 오류가 있다. 그러나 그것은 허무학, 성실학의 오류와 달리 알아차릴 수 있고 수정할 수 있다고 했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인가. 그것은 그가 추측을 통해 유행지리를 알아낼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최한기 철학의 핵심이 여기에 있다. 그의 철학의 핵심이 ‘추측론’에 있는데, 요샛말로 하면 인식론에 해당한다 할 것이다. 즉, 인식론의 정립이 그의 철학적 과제였던 것이다.

    경험은 감각기관을 통해 이루어진다

    최한기의 주장을 따라가 보자. 천지만물은 기로 이루어져 있다. 천지는 천지의 기로 이루어져 있고, 사람은 사람의 기로 이루어져 있다. 그런데 천지의 기와 사람의 기는 근본적으로 같다. 따라서 사람은 천지만물의 본 모습, 즉 끊임없이 움직이면서 작용하는 유행지리를 알아낼 수 있다.

    그러나 천지의 유행지리를 곧바로 알아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사람들이 헛된 관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성현의 말씀이라 하여 그것만을 믿고 따르는가 하면 망상에 사로잡혀 헛된 것을 추구하기도 한다.

    이것이 앞에서 말한 이학(理學)과 허무학의 오류이다. 그것들은 진리, 올바른 지식에 도달하지 못한다. 그러면 어떻게 천지의 유행지리를 인식할 수 있을까. 인간이 가진 헛된 관념과 망상을 버리면 자기 자신 안에서도 천지의 유행지리를 발견할 수 있다.

    최한기는 올바른 인식의 방법과 과정에 대해 <기측체의>에서 서술하여 놓았다. 그는 인식의 주체를 ‘신기(神氣)’라고 말한다. 신기란 사람의 기를 말한다. 그것은 지각의 기초이고, 지각은 신기가 하는 경험이다. 신기는 경험을 계속 기억하고 축적하기 때문에 이미 경험한 것으로 미루어 아직 경험하지 않은 것까지 알아내는 추측이 가능하다. 이렇게 하여 올바른 인식이 이루어진다.

    그는 헛된 관념이나 망상을 버리기 위해 경험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경험은 무엇을 통해 이루어지는가. 그는 <기측체의>에서 체통(體通), 목통(目通), 이통(耳通), 비통(鼻通), 구통(口通), 생통(生通), 수통(手通), 족통(足通), 촉통(觸通)에 대해 다룬다. 즉, 눈, 코, 입, 귀, 손, 발 등 인체의 기관들에 대해 다룬다. 그것들의 기능, 능력에 대해 검토하였으니, 감각기관으로서의 역할에 대해 말하고자 한 것이다.

    최한기는 만약 그런 기관들을 버린다면 ‘터럭만한 이치’도 얻을 수 없다고 말한다. 그래서 이학(理學)을 하는 사람들에 대해, 그들이 감각기관을 지엽적인 것으로 생각하니 눈 감고 귀를 막은 채 이치를 탐구하고자 하는 것에 불과하다고 비판한다. 또한 그들은 실제로 일어난 일을 살피기보다 책에 나온 내용으로 짜 맞추려 하는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고 말한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만약 자기 신체에 있는 감각기관을 버리고 사람이나 사물에 이르고자 하거나, 또 사람이나 사물에 이른 것을 버리고 오직 허망한 이론과 같은 것을 쫒는다면, 이는 덕을 성취한 사람의 기질이 어둡고 쇠잔하여 죽음에 가까운 자나 하는 짓이고, 학문을 깊이 하여 무거운 책임을 지고 원대한 목적에 도달하려고 하는 사람의 하는 일은 아니다. – <신기통서>

    감각기관을 통하여 사람이나 사물의 이치를 알아내야 한다는 말이다. 그 다음, 경험하지 않은 것을 알아내는 추측에 대해 말한다. 최한기는 <기측체의>에서 추측에 대해 다룬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추(推)’는 근거로 삼는다는 말이고, ‘측(測)’은 알아낸다는 말이다.

    그는 다섯 가지 추측에 대해 말한다. 추기측리(推氣測理), 추정측성(推情測性), 추동측정(推動測靜), 추기측인(推己測人), 추물측사(推物測事)가 그것이다. 사물을 근거로 원리를 알아내고, 움직이는 것을 근거로 움직이지 않는 것을 알아내고, 자기를 근거로 다른 사람에 대해 알아내고, 사물을 근거로 세상사를 알아낸다는 말이다.

    허황한 생각을 버리고 경험을 통해 알아낸 이치를 근거로 하여 다른 것을 알아내야 한다는 말이다. 이렇게 하여 천지만물의 이치를 알아낼 수 있다고 최한기는 일관되게 주장한 것이다.

    잊혀진 철학

    최한기는 19세기 철학자였다. 19세기는 조선 사회가 중세에서 근대로 이행을 하여 가고 있던 시기였다. 최한기는 그 이전 시기에 이루어진 세계관의 전환을 바탕으로 철학을 한 차원 더 높게 끌어올리고자 하였다.

    서경덕은 이(理)와 기(氣)의 관계를 바꾸어놓았다. 즉, 이 중심에서 기 중심으로 바꾸어 놓은 것이다. 임성주, 홍대용, 박지원은 인간과 동물의 본성에 관한 논쟁을 통해 사람과 사람, 사람과 동물, 사람과 사물 사이의 차별을 폐지하는 세계관의 혁명을 이룩하였다.

    최한기는 이상의 것을 토대로 하여 ‘추측론’이라 하여 인식의 새로운 길을 열었다. 그것은 기존 관념과의 전면전이었다. 불교나 도교는 물론 이기이원론에 입각한 성리학의 사고방식과 인식의 근저를 뿌리 채 뒤집어엎는 일이었다.

    그러한 철학이 가진 인식론적 오류를 밝혀냄으로써 그것들이 결코 진리에 도달할 수 없음을 보여주었다. 그것은 합리적이고 비판적인 사고를 튼튼하게 다지는 일이었다. 또한 그것은 경험을 존중하는 현실주의적 사고방식 전반의 철학적 근거를 제시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하여 최한기는 중세 철학을 철저히 극복하고 근대 철학을 일으키는 다리를 놓았다.

    그러나 최한기의 철학은 돌연 잊혀졌다. 그의 저서는 중국에서 간행되었을 뿐 국내에서는 사라졌다. 그의 이름조차 망각의 저편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소위 개화의 물결이 밀어닥치면서 이런 일이 일어났다.

    그의 이름이 다시 등장한 건 그가 죽은 지 수십 년의 세월이 지난 후의 일이었다. 그러나 그의 철학은 여전히 현재성을 갖지 못한 채, 과거의 한 ‘사건’으로만 기억되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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