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가 그려본 그녀의 '밑그림' & 당의 과제
        2010년 06월 02일 12:58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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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퇴 전날 밤

    5월 29일 밤 11시, 긴급 선대본 회의 소집을 받고 심상정 선거사무소로 들어갈 때 이미 심 후보가 무슨 이야기를 할지 모두 다 눈치는 채고 있었던 것 같다. 심 후보는 좀 늦는다는 연락이 왔고, 침통한 표정의 도당 위원장이 사퇴 요지를 전하며 참석자들의 의향을 물었다.

    내 차례가 왔을 때 나는 “심 후보가 지금까지 해온 말이 있으니, 그 말을 뛰어넘는 무슨 이유가 있는지 들어봐야 할 것 같다. 이것이 무슨 ‘승리하는 단일화’인지, ‘서민 속에서 쓰러지는 것’인지, 그도 아니면 그것보다 더 큰 이유가 있는지 들어보고 판단하겠다.”고 말했다.

    사실 심 후보가 이제 와서 갑자기 무슨 계기로, 무슨 의향으로 단일화를 하겠다는 것인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오히려 출정식 전의 심 후보는 유시민 단일화를 접하고 "다 예측한 대로야. (당으로서는) 최악의 사태대로 가는 거지 뭐."하고 말하면서도 조금 황망한 모습이었는데, 출정식 후에는 매우 단호하고 열정적으로 선거 운동을 해왔기 때문이었다.

    서너 명이 더 발언을 한 후 심 후보가 들어왔다. 후보가 매우 어렵게 운을 뗀 말의 내용은 다음날 기자회견과 그리 다르지 않았다. 요지는 ‘민심과 당심이 다를 때 지도자는 당심을 민심으로 이끌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후보가 이야기를 한 후 내가 물었다. “이건 논의에 따라 바뀔 수도 있는, 논의의 대상입니까 아니면 이미 결심을 하신 겁니까?” 후보는 굳은 얼굴로 “이미 결심을 한 겁니다.” 하고 말했다.

    "이미 결심을 한 겁니다"

    그 다음부터 회의는 회의가 아니었다. 간절한 설득을 한 당협 위원장들도 있었고, 분개하며 거의 싸울 기세로 대드는 위원장들, 또 심 후보의 결단을 이해하고 최대한 지역 후보에 유리한 쪽으로 활용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위원장들까지 스펙트럼은 다양했지만 후보는 침묵을 지키고 있다가 얼마 후 자리를 떴다.

    분격한 안산 당협 위원장이 그 자리에서 심의 징계-출당 제명을 의제로 상정했지만, 그것은 당기위원회에서 다룰 사안이지 경기도 선대본 회의나 운영위원회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일단 후보사퇴 기자회견의 시간과 내용을 확인하기로 하고 경기도 전역에서 달려온 참석자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울분과 허탈함을 못이긴 몇몇 당협위원장들이 남아 술잔을 기울이는 자리에서, 한 위원장이 물었다.

    “도대체 왜 그랬을까요?”
    그렇다. 심 후보가 민심이니 당심이니 하는 표면적인 이유로만 사퇴한다고 여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심의 복중에 있는 이유나 구상 따위 중요하지 않다고 화를 내는 사람은 있어도, 심이 다른 이유, 다른 구상을 갖고 있으리라는 생각은 다들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었다.

    아니, 우리는 심의 사퇴를 저지하지는 못할지라도 납득하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내가 동의하지는 못하지만 저 사람은 저런 이유로 저런 행동을 했구나. 그럼 나는 이렇게 행동해야겠구나. 그러나 심은 완주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납득할 만한 사퇴 이유를 주지 않았고, 그래서 “도대체 왜 그랬을까요?”라는 답답한 질문은 해답을 얻지 못하고 허공에 메아리칠 수밖에 없었다. 이 글은, 바로 그 의문을 풀어보고자 하는 몸부림이다.

    심의 이야기, 나의 추측

    사실 심 후보는 그날 많은 이야기를 했다. 기억나는 대로 몇 가지 들어보자면

    1. MBC 노조위원장을 방문했을 때, 노조위원장이 단식 후 초췌한 얼굴로 ‘반MB를 해야 한다. 이렇게 막돼먹은 정권 아래에서 진보신당이 우리의 힘이 되어줄 수 있느냐, 되어준 적이 있느냐’고 말했고, 이것이 민심이라고 느꼈다. 당심과 민심이 어긋날 때 지도자라면 당심을 민심으로 이끌어야 한다.
    2. 여론조사를 보니 진보신당 지지자들 중에서 심상정 지지자가 0%였다. 제일 많이 나왔을 때 20%였다.

    3. 선거 후 진보신당에 쏟아질 화살을 막아야 한다. 속죄양이 필요하다.
    4. 어차피 진보신당은 과도기적인 정당이었다. 선거 후 진보진영 재편이 필요하고, 그것은 민주노동당-진보신당이 축이 되고 국민참여당의 일부까지 포괄하는 범위가 될 것이다.

    5. 나는 당에 남을 것이다. 내가 무엇을 하든 나의 진지는 진보신당이 될 것이다.
    6. 단일화 압력에 굴복한 것은 아니다. 개인적 결단이다. 조건 없는 사퇴고, 단일화가 아닌 지지 없는 사퇴다. 이 사퇴가 지역후보들에게 최대한 힘이 되도록 하고 싶다.

    민심과 조직심

    이 정도 이야기들이다. 기자회견에서는 아예 안 나오거나, 나오더라도 모습을 달리해서 나왔던 이야기들. 그러나 이 이야기들은 심의 행보를 밝혀주는 불빛을 제공하고 있다.

    나는 심이 받은 압력의 성질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1과 2라고 생각한다. 심이 ‘민심’이라고 칭한 것은 사실은 ‘조직심’이었다. 선거에서 ‘조직’이 갖는 비중은 평상시의 정당활동에서 갖는 비중과 비할 바가 아니다.

    더구나 심상정은 민주노총의 심상정, 조직의 심상정이었다. 조직이 갖는 힘을 모를 리 없다. 물론 그 전에도 여러 형태의 압력이 있었지만, MBC 노조위원장의 말에서 심상정은 ‘공조직들이 진보신당에 등을 돌리고 있다’는 위기의식을 느꼈던 것이다.

    ‘그렇다면 진보신당은 조직이 아니란 말이냐’는 질문에 대해 심상정이 내밀 수 있는 답안이 바로 2다. 그렇다. 진보신당의 조직력은 자당에서 선출한 후보 지지율이 0%가 나오는 수준이다. 이것을 조직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당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심의 판단은 ‘아니다’였다.

    또, 심은 이것이 ‘말없는 민심’이라고 느꼈을 수도 있다. 최소한 당의 70~80%가 심을 지지하지 않고 있다는 여론조사는 역설적으로 후보 사퇴를 결행할 자신감을 주었을 것이다. 심은 ‘개인적 결단’이라고 말했지만, 만약에 이것이 밑으로부터 의견을 모으는 ‘조직적 결단’이었다면 당이 두 쪽이 났을지도 모를 일이다. 여론조사 결과대로라면 실제로 심상정이 후보를 사퇴하는 데 동의하는 당원이 적지 않았을 테니까.

    그래서 심은 자신이 ‘속죄양’이 되겠다는 결심을 한다. 물론 정치인으로서 자신의 앞날을 전혀 생각하지 않았을 리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단순히 일신의 영달만을 위해서 대통령 후보도 아니고 원래부터 가능성이 거의 없었던 경기도지사 후보를 사퇴한다?

    심상정 탈당 가능성 높지 않아

    아무리 이번 지방선거가 미니 대선이라고는 하지만 믿기 어려운 대목이다. 오히려 심은 당내에서 욕을 먹더라도 공조직들이 당에 등을 돌리지 않게 하기 위한 화살 받이, 속죄양을 자처하고 나선 것이 아닐까. 그리고 당내에 심의 행보를 지지할 흐름이 적지 않다고 판단한 것이 아닐까.

    그런 판단은 4와 이어진다. 심은 처음부터 진보신당이 도중 경유지라고 생각했고,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심의 구상인 ‘2012년 전 민주노동당-진보신당을 축으로 국민참여당 일부를 흡수’하는 방식을 실현하려면 민주노동당과의 구원(舊怨)에 바탕을 둔 현재의 적대적 분위기에 돌파구를 내어야만 했다.

    따라서 당원 일부가 혐오감을 담아 전망하듯이 심상정이 탈당하고 국민참여당으로 갈 가능성보다는, 심 자신의 말대로 진보신당 내부에 남아 민주노동당과 국민참여당에 진보신당이 내밀 면죄부 역할을 할 가능성이 더 높아 보인다.

    그렇게 본다면 오히려 ‘단일화 아닌 사퇴’라는 말이 궁색해진다. 장래의 합당을 염두에 둔 행보라면 단일화로서의 사퇴여야 하고, 유시민 후보를 적극적으로 지지할 수밖에 없다. ‘단일화 아닌 사퇴’라는 것이 경기도 당협위원장들 앞에서의 면피용 말이었는지 아니면 적어도 그때 심경은 그랬는지는 알 수 없으나, 지금 심이 보이는 적극적 지지의 모습이 논리적으로 앞뒤가 맞는 것은 사실이다.

    심이 던진 문제들

    지금 당 게시판에는 분노한 당원들이 올린 글이 넘쳐난다. 후보의 ‘개인적 결단’을 욕하고, 징계를 요구하는 글들이다. 각 당협에서, 지역에서 당 지지율과 심상정 후보 선거운동을 위해 열심히 뛰던 당원들의 분노는 충분히 정당하다. 그러나 심상정 후보의 사퇴는 분노만으로 덮어버리기에는 너무 커다란 문제들을 던져주고 있다.

    1. 진보신당은 자생력 있는 정당인가, 아니면 진보진영 재편을 위한 경유지인가

    정당의 자생력이란 물적 기반과 정치적 지향으로 나뉠 것이다. 물적 기반은 간단히 말해서 당원/지지자 수와 돈이다. 정당은 다른 당과 구분되는 정치적 지향을 갖고 당원과 지지자를 모은다. 과연 진보신당은 다른 당(민주노동당, 국민참여당, 창조한국당, 사회당 등)과 구분되는 정치적 지향을 갖고 있는가.

    원래 ‘진보신당 연대회의’는 진보진영 재편을 위한 경유지로 설계되었기에 처음에 이 문제는 그리 크게 부각되지 않았다. 그러나 2008년 선거와 촛불을 거치면서 지못미 당원들이 대거 유입될 때, 당으로서는 "우리는 중간 경유지고 곧 새로운 진보정당이 건설될 거예요"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당내에서 아무도 그 문제를 공론장에서 꺼내지 않고 여기까지 온 것이다. 이제 심의 구상은 우리 진보신당 당원들에게 다시 이 문제를 제기한다.

    진보신당의 정치적 지향은 미래의 커다란 진보정당 내의 한 분파 정도의 정치적 지향이고, 다른 분파와의 차이는 정당활동 속에서 극복될 수 있는가? 아니면 진보신당은 다른 정당의 정치적 지향과 융화할 수 없는 독자적이고 뚜렷한 정치적 지향을 갖고 있는가? 그렇다면 그 지향은 무엇인가?

    2. 진보신당에서 조직이란 무엇인가

    이것은 정치적 지향보다는 물적 기반의 문제이다. 조직이라는 면만 놓고 보면 진보신당은 양손을 뒤로 묶고 권투경기에 출전한 것과 다름없었다. 노동 문제에서 비정규직을 위한 당이 되고자 했으나 선거 때 비정규직은 조직적 도움이 될 수 없었다.

    민주노총은 비협조적이었고(심지어 적대적이라고밖에 볼 수 없는 기동을 한 곳도 있었다), 1만3천 당원들은 대부분 활동가가 아닌 생활인, 직장인이기 때문에 당의 일은 그들의 관심사에서 최우선을 차지할 수 없었다.

    돈 문제도 그랬다. 아무리 열심히 뛰는 당원이라고 해도 지인에게 세액공제를 부탁할 수 있는 숫자는 몇십 명 단위(그것도 적은 숫자가 아니다!)에 그친다. 그러나 막말로 ‘조직 하나만 잘 뚫으면’ 최소한 백 명 단위……천만 원 단위의 자금력이 왔다갔다 하는 것이다. 당원들의 자존심이 상할지 모르겠지만, 조직적인 면으로 보면 진보신당은 혼자 힘으로 선거를 치러내기 힘든, 자생력이 약한 정당이다.

    그렇다면 외부의 큰 조직들과 진보신당은 어떤 관계를 맺고 유지해야 할 것인가. 민주노동당-민주노총 상층부 사이의 연대를 비판하면서 출발했지만 진보신당은 그 연대를 뛰어넘을 만한 다른 연대를 만들어내지 못했다. 그렇다고 내부의 조직력이 엄청나게 강한 것도 아니다. 정당 보조금을 넉넉히 받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이런 현실을 눈감고, 마치 우리가 어디 손 벌릴 일 없이 독자적으로 운영할 만한 조직력을 가진 정당인 양 행동하고 말해 왔다. 조직적 연대나 조직력 부분은 집행부, 지도부, 혹은 노나 심이 알아서 하면 되는 거라고 미루어 버렸던 마음은 없었던가.

    이런 문제들에 대한 정밀한 검토와 논의 없이 심 후보의 행동을 ‘개인의 영달을 추구한 돌발행동’이라고 징계를 요구하는 것은 의도와는 상관없이 당에 대한 불성실한 태도다. 역시 이런 문제들에 대한 논의 없이는 심에 대한 징계 수준을 결정할 수도 없다.

    심이 한 행동은 이런 논의의 결론이 어떻게 나느냐에 따라서 당에 이로운 행동이었다고도, 해로운 행동이었다고도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정치적 기동’이기 때문이다.

    많은 당원들이 문제 삼는 ‘개인적 결단’ 부분만 해도 그렇다. 아까도 말했지만 이것이 개인적 결단이 아니었다면 당은 그야말로 풍비박산이 났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내 생각이 옳은지 그른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 해야 할 일은, 당원들이 모두 터놓고 이런 문제들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심의 행동에 분노하는 당원들뿐만 아니라, 당 지도부와 당 정책생산자들, 말이 없고 심을 지지하지 않았던 80%의 당원들까지 포함해서.

    배는 열두 척, 그러나……

    이 글을 쓰면서 몇 번씩 울컥했다. 나는 정치인 심상정을 정말 좋아했다. 그래서 심에게 최대한 호의적인 입장에서 글을 쓰려고 했다. 하지만 심의 이번 판단은 틀렸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지금의 진보신당은 독자적으로 생존해야 하는 하나의 정치적 지향이다. “민주노동당과 어떻게 다른데?”라는 질문에 아직 큰소리로 또박또박 대답은 못하지만, 말은 우리 입 안에서 만들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진보신당의 지금 형편이 명량대첩 이전의 조선 수군과 마찬가지라는 것도 우리가 직시해야 하는 사실이다. 그리고 누구에게나 배 열두 척을 준다고 이순신 장군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도. 그래서 나는 심이 틀렸다고 말하고, 잘못했다고 말하지만, 심을 비난하고 미워하지는 못하겠다. 비록 나는 그녀가 우리의 이순신 장군이라고 믿었지만 말이다.

    5월의 마지막 밤에, 존경하는 선배와 함께 술을 마셨다. “선거 막바지에 후보가 운동 안하고 뭐하는 짓이냐”는 핀잔을 받았지만 어지러운 마음을 어떻게 추스를 수가 없었다. 술을 마시다가 문득 물었다.

    “만약에, 한 달에 당비를 십만 원씩 내고 일주일에 여섯 시간 정도 당에 할애하는 당원이 1만3천 명 있었다면, 우리는 심을 지킬 수 있었을까요?”
    “무슨 소리야. 그 정도 당원이면 한국 사회를 몇 번은 뒤바꿀 수 있었지.”

    그 말에 다시, 우리가 가진 것은 쪽배 열두 척이라는 사실을 절감했다. 하지만 어쩌랴. 우리는 지금 우리 손 안에 있는 것으로 해나가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더욱 치열하고 치밀하게 우리 자신을 뜯어보아야 한다. 이 글이 그런 논의를 여는 단초가 되기를 바랄 뿐이다.

                                                      * * *

    * 이 글의 필자는 진보신당 초대 대변인을 지냈으며, 이번 지방선거에서 진보신당 경기도 비례후보로 나왔다. 소설가이며 번역가이기도 하다.

    필자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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