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심이 떠났다, 진보신당의 애매모호함"
        2010년 06월 01일 03:47 오후

    Print Friendly, PDF & Email

    심상정이 떠났다.

    침묵을 지켜왔다. 몇몇 지인들의 우려와 "뭐든 좀 하라"는 독촉에도 나는 끝까지 침묵을 지켜왔다. "심의 가슴은 믿을 수 없어도, 심의 머리는 믿을 수 있다"고 주어섬기며.

    2009년, 진보신당 적어도 진보신당의 유력한 일부는 ‘중도좌파통합’의 길을 걸을 것이라 판단했다. 이를테면 ‘민주당 좌파’로 상징되는 흐름들과의 통합. 다양한 언설이 가능하지만 결국엔 ‘소프트 사민주의’를 자기 이념으로 내세울 진보와 개혁의 동거, 민중과 시민의 동거, 87년과 2008년의 동거, 서민과 중산층의 동거. 아직 공식화되지 않았지만 이미 오래전부터 표면화되어온 경향. 알면서도 외면해온 그 경향.

    그 길을 동의할 수 없었고, 그렇다고 또 다른 길이 무엇인지 적시하기에도 마땅찮은 형국 속에서 나는 침묵을 일관했다. 그리고 지금 심이 떠났다.

    심은 현명했다

    심은 생각보다 현명했다. 생각해보면, 이른바 진보신당 내 좌파의 맹주로 여겨지던 자신의 포지션이 실은 허구의 것임을 이미 오래 전에 간파한 것이다. 이용길로 상징되는 진보신당 내 또 하나의 세력은 "우리는 다르다"고 격하게 선언하지만, 박근혜가 "내 아버지의 꿈은 복지 국가였다"고 선언하는 시대에 빈껍질뿐인 "반MB대안연대"와 "복지와 교육"이라는 구닥다리 상품으로 채워진 선거전략을 추인한 마당에 "나는 몰랐다"란 말은 그 영화만큼이나 "비겁한 변명"일뿐이다.

    문제는 심의 선택이 아니라 심이 거기까지 가서야 폭로한 "선거전략의 총체적 실패"며, 2008년부터 이어져온 진보신당의 애매모호한 "노선 자체"일 것이다.

    진보신당의 당원 게시판은 지금 분노와 성토, 그리고 자기희생적 고백으로 가득하다. 그러나 그 감정들은 노선과의 간격을 안고 있다. "지금은 선거에 집중할 때"라는 말로는 채울 수 없는 승인과 합의가 있어왔다. "복지혁명"이라는 슬로건과의, 심의 최후 회견문에도 명시된 "서민과 중산층"과의, 이른바 촛불의 감수성 속에 내재된 계급적 속성을 외면하는 아전인수식의 해석과의, 레토릭 정치의 매끈함에 대변되는 공허함과의 승인과 합의. 심의 정치적 행위가 갖는 폭력성에 분노하는 그들은 과연, 심의 정치적 노선에도 분노할 수 있을까?

    심의 선택이 안타까운 것은 바로 그 지점이다.

    이른바 "중도좌파"로 명명한 이 경향은 "좌파 정치 운동 질서 재편"이라는 또 더 큰 흐름, 사노위로부터 이도 저도 선택하지 못한 채 추이를 지켜보고 있는 사람들까지를 포괄하는 시대적 흐름 속에 있다. "좌파 정치 운동"은 지금 각자가 의식하든 아니든 간에 10년 혹은 20년을 내다보다는 질서재편 중이다.

    지방선거 이후에 진행될 진보신당의 선거 평가는 기실, 선거 전략과 전술에 대한 갑론을박을 넘어서서 중장기적인 "좌파 정치 운동 질서 재편"에서 진보신당의 과제가 무엇인지를 해명하고자 하는 논쟁일 것이다. 바로 이 시점에서 심은 쐐기를 박았다. "MB 정권 심판을 염원하는 국민" 그리고 "민심과 당심"을 논의하며. 자신이 바로 이른바 "중도좌파"를 향한 노선의 핵심이라고.

    심의 중도좌파 천명

    부족한 자원 탓이었을까? 심상정이라는 사람이 갖고 있던 퍼스낼러티 때문이었을까? 논쟁이 시작되기도 전에 심은 논쟁의 프레임을 설정해버렸다. 기자회견 한 번으로. A4지 몇장 분량의 성명서로. 거대한 논쟁의 서막에 일기토 승부를 벌여버렸고, 승패와 상관없이 하나의 상징적 자원을 획득해버렸다.

    내가 믿었던 머리가 그 머리가 아니었다는 것을 염두해두고 보면, 심은 현명한 선택을 한 셈이다. 어차피 가게 될 길을 "공세적"으로, 대중 정치인에게 필요한 "이미지"까지 획득하며. 덕분에 "그" 노선을 묵인하고 합의해왔던 사람들, 최소한 침묵해 왔던 사람들은 이 폭력적 정치 행위에 분노하고 있지만, 심이 바라보고 있을 "좌파 정치 운동 질서 재편"에 있어 그 분노가 결과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는 알 수 없다.

    심은 노선과 감정이 서로를 배반할 때, 살아남는 것은 노선일 것이라 판단하지 않았을까? 감정은 "진보신당"이라는 틀 안에서 작동하지만, 심이 바라보는 것은 "진보신당을 넘어서는 것"일 테니까.

    그래서 안타깝다. 이른바 "중도 좌파"라는 흐름에서 본다면야 크게 밑질 것 없는 장사겠지만, 소프트 사민주의라는 "명분"으로 만들어질 "동거"에 반대하는 입장에서 본다면 이건 논쟁을 시작도 하기 전에 한 방 맞은 셈이니까. 아래로부터의, 공개적인 논쟁 대신에 위로부터 던져진 충격적 한 방에 의해 논쟁지도가 그려질테니까.

    모든 것을 떠나, 노동자 민중의 더 나은 미래를 위해 노력해온 수 많은 진보신당 당원들과 활동가들, 지지자들을 한 순간에 그들이 동의하지 않는 프레임으로 밀어 넣어버렸으니까. 논쟁의 지반을 그동안 암묵적으로 추인되었던 바로 그 지평으로 한 순간에 이동시켜버렸으니까.

    심이 떠났다. 이것은 침묵의 댓가다. 나를 포함한, 진보신당 당원 모두의. 진보신당 경기 도지사 후보 심상정의 사퇴 결정은 2008년 이후, 진보신당이 지녀온 그 애매모호한 경향의 귀결이니까. 그리고 그 애매모호한 경향은 나를 포함한 진보신당 당원 모두의 침묵 즉, 공세적이고 수세적인 합의와 용인을 양식 삼아 만들어진 것이니까.

    이제, 싫든 좋든 각자의 패를 꺼낼 때가 온 듯하다.

                                                 * * *

    * 이 글의 필자는 기륭공대위 공동집행위원장이며, 미행(美行)의 기획자며, 쌍용 다큐멘터리 "당신과 나의전쟁"의 프로듀서이기도하다. 현재는 ‘비정규없는세상만들기’에서 활동 하고 있다. 2009년 12월까지는 진보신당 중앙당 비정규담당국장으로 재직했었다.

    필자소개
    레디앙 편집국입니다. 기사제보 및 문의사항은 webmaster@redian.org 로 보내주십시오

    페이스북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