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환상과 소격, 뮤지컬 <빨래>
    By mywank
        2010년 06월 01일 09:06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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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연극 등의 픽션이 만들어 내는 무대와 스크린의 세계는 관객을 스펙터클의 환상으로 몰아넣는다. 극중 인물의 상황에 몰입하고 그들의 감정에 자신을 동일시하도록 여러 장치가 동원된다. 이를 깨기 위해서 브레히트는 소격이론을 주장했고, 브레히트에게 영향을 받은 누벨바그 영화인들 역시 인물의 감정에 봉사하지 않는 영화를 만들어 내려는 시도를 했다. 그렇다면 역시 무대 장르이며 픽션 장르인 뮤지컬은 어떠할까?

    물론 2010년 현재, 대사가 없이 음악과 춤만으로 내용을 전달하려 하거나, 극에 완벽하게 몰입하지 못하도록 개별적인 내레이터를 둠으로써 뮤지컬의 환상성을 벗어나려는 다양한 시도가 존재한다. 하지만 대중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뮤지컬은 대사와 노래가 있는 공연이다.

    노래는 타인의 이야기가 아닌 ‘나’의 이야기를 한다. 등장인물들이 ‘나’를 주체로 하여 노래할 때, 관객은 뮤지컬로부터 호명되어 그 안의 세계로 이끌려 들어간다. 그리고 노래와 춤을 통하여, 주인공과 관객이 느끼는 많은 감정들은 모두 그 세계 안에서 승화되어버린다.

    당혹스러운 뮤지컬 <빨래>

       
     

    뮤지컬에 대한 이러한 선입관을 가진 상태에서 뮤지컬 <빨래>를 처음 접했던 순간, 나는 반가움과 당혹스러움을 동시에 느꼈다. 내게 있어서 뮤지컬의 세계는 닫혀있어야만 했다. 그들이 말하는 고통은 노래와 춤을 통해 그 내부에서 해소되고, 객석을 나서는 순간 모두가 잊혀야만 하는 것들이었다.

    뮤지컬 <렌트 Rent>에서 로저와 미미는 끊임없이 에이즈 환자로서의 공포와 고통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그러나 그들의 태도는 록 음악을 통해 시종일관 유쾌하게 그려진다. 마침내 죽음 직전의 미미가 살아남으로서 우리 모두에게는 마치 희망이 있는 내일이 있는 것처럼 느끼도록 만든다. 피날레에서 희망의 상징 엔젤이 재등장할 때, 관객들의 박수는 이 모든 것을 한층 더 공고하게 만든다. 우리는 객석을 나서는 순간 로저와 미미가 느꼈던 고통이나 슬픔보다, 그들이 노래하던 인생의 아름다운 순간들만을 기억한다.

    사실 <빨래>도 기본적으로는 <렌트>의 그것과 비슷하다. 직장에서 해고당하기 직전인 상황의 주인공 나영과, 불법체류자 신분으로 동대문에서 짐을 나르는 솔롱고는 서울 귀퉁이 옥탑방에서 그들의 삶을 이어가면서도 그들의 슬픔을 ‘빨래처럼 꾹 짜서 널며’ 감정을 승화시킨다. 모든 인물들이 겪었던 슬픔과 고통 역시 이 안에 녹아서 날아간다. 비참한 상황에 대한 판타지는 이 뮤지컬에서도 유효하며 여전히 뮤지컬의 해소되지 못한 호명의 효과를 남긴다.

    그러나 <빨래>의 호명이 다른 호명과는 다르게 여겨지는 이유는 그것이 닫혀있는 세계에서 인생의 보편적인 가치에 대해 노래하는 대신, 열려있는 세계에서 나의 현실을 노래하기 때문이다. <빨래>는 우리에게 너무나 가깝게 다가온 나의 현실이며, 내 이웃의 현실이다.

    나영과 솔롱고의 불안

    아무리 희망에 대해서 노래한다고 하더라도, 인물들은 뮤지컬이 가지고 있는 열린 세계 한 켠에 대해서 계속해서 기억한다. 나영은 계속 부당한 처우를 받으며 회사에 다녀야 할 것이며, 솔롱고는 언제 잡혀가 본국으로 송환될지 모르는 신세다. 이 불안감은 끝내 뮤지컬이 가진 환상을 불완전하게 만들며 우리의 현실을 상기시킨다. 그리고 이것이 <빨래>의 소격이다.

    그래서 <빨래>는 환상과 소격을 모두 가진 기묘한 작품이다. 나의 현실을 다루고 있기에 계속해서 세상에 대한 문을 열어두는 한 편으로, 뮤지컬로서는 저버릴 수 없는 스펙터클을 붙잡아두며 이로서 관객을 호명한다. 그리고 이 호명은 관객들을 다시금 자신들이 살고 있는 현실로 돌아오게 만들며, 결국 내가 사는 이 세상의 슬픔을 떠올리도록 만든다.

    <빨래>가 호불호가 갈리는 작품인 것은 이 때문인지도 모른다. ‘현실의 비참함을 눈으로 확인하기 싫다’는 관객들이 있는 한편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이다’라며 반기는 관객들도 존재한다. 관객이 어느 쪽을 선택하든, 이 뮤지컬이 가지고 있는 환상과 소격은 분명히 확인되는 셈이다. 그리고 이것이 <빨래>의 가장 큰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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