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의 진짜 문제, 무관심
    2010년 05월 29일 11:02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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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지금 이 글을, 핀란드 서부의 주요 도시인 투르쿠(Turku; 스웨덴 식 명칭은 어보 Aabo)에서 씁니다. 여기에서 국제 문화사 학회가 열리기에 여기에 와서 이런저런 발표들을 듣게 됐습니다. 어제 환영 만찬이 있었는데, 거기에 가서 호주에서 온 교수 부부를 우연히 만나게 됐습니다.

노르웨이 학생이 미국보다 호주 가는 이유

여자 분은 사학자이었지만, 남자는 외국인에게 영어를 가르치는 전문 영어 교육가였습니다. 그 쪽 전문가다 보니 외국으로 나가는 노르웨이 학생 중에서는 미국으로 가는 아이들보다 호주로 가는 아이들이 약 3~4배 많다는 이야기를 드렸는데, 그 분이 제게 그 이유를 물으셨습니다.

저는 정확한 이유를 다 알 리는 없지만 여러 가지 원인 추측을 해봤습니다. 호주의 독특한 기후, 여유 있는 ‘풀린’ 분위기, 지리적 이질성 등등의 요인을 생각해볼 수도 있지만, ‘미국 가기가 싫어서’ 호주를 선택하게 되는 경우도 종종 있다는 게 제 관측이기도 한다고도 말씀드렸죠.

미국에 가면 꼭 이라크와 아프간을 초토화시키는 미국의 범죄적 전쟁들을 용인하는 듯한 자괴감이 들 수 있다는 게, 제가 여러 노르웨이 청년들에게 들은 이야기이었기 때문이죠. ‘반미 감정’이라기보다는 미국의 전쟁에 대한 반감이지만, 거기에 가서 돈을 쓴다는 게 혹시나 아주 약간이나마 전쟁 수행에 도움될 수도 있고 해서 스스로 포기하는 것입니다.

호주 교수 분은, 그 이야기를 듣고 사실 호주도 이라크 침략에 동참했다고 응답하고, 노르웨이 사람들이 그걸 모르고 있냐고 물으셨어요. 사실, 모르진 않죠. 침략 동참국의 명단들은 신문에서 계속 나갔으니까요. 모르진 않지만, 거기까지 관심이 없다고 보는 것은 정확할 것입니다.

지금 호주의 내각은 노동당 내각이지만, 그 전의 보수적 내각이 부시 행정부와 아주 가까운 공범 관계였는데, 그 부분에 대해서는 일반 노르웨이 대중들이 단순히 무관심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호주에 가서 돈을 쓰고 공부한다는 것은, 전쟁 범죄를 방조하는 것과 무관하다고 보는 것은 통념이지요.

자기 정부의 범죄성에 대해서 훨씬 더 아프게 생각했던 호주 교수의 입장에서는 이는 아쉬운 이야기이었지만, 사실은 그렇습니다.

정보의 과잉생산, 대중 눈 멀게 해

대중, 즉 매체 소비자들의 주의 범위(attention span)란 굉장히 좁은 것이지요. 대개 노르웨이인 성인은 하루에 34분 동안 신문(대개 2개 정도) 읽고, 또 약 30~40분 동안 텔레비전 뉴스를 시청하는데, 신문과 텔레비전에서 가장 강조하는 정보, 그렇지 않으면 본인과 가장 밀접하게 관련돼 있거나 가장 충격적인 정보에만 주의를 기울이곤 합니다.

미국의 전쟁 범죄 정도면 보수일간지조차도 많이 강조하고, 또 그 충격성은 매우 높으니 노르웨이인들의 대중인식에 그 영향을 크게 미쳤지만, 호주의 공범 행각은 그냥 아무 주의를 끌지 않고 지나가고 만 것입니다. 그러기에 미국에 안가겠다는 이들이 호주를 쉽게 선택하죠.

자본주의의 기본 원칙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각종 과잉 생산입니다. 단순 소비재의 과잉 생산 같으면 오늘날과 같은 공황의 기본적 원인에 해당되기도 하죠. 충분한 수용 인프라가 뒷받침되어지지 않는 최고급 학력 소유자들의 과잉 생산은, 귀족적 위치에 있는 일부 ‘실력자’ 교수들이 프로젝트를 따오면서 비정규직 박사들을 마음대로 착취하고 자살로까지 내몰 수 있는 오늘날 파행적인 대학 구조를 낳은 것입니다.

그리고 정보의 과잉 생산은 결국 대중들의 눈과 귀를 어둡게 하고, 개인으로 하여금 자율적 세계관의 수립을 거의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매체들이 대중으로 하여금 진보든 무엇이든 체제에 잠재적으로 위협이 될 수 있는 요소들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게 하자면 굳이 비방전을 전개할 필요까지는 없습니다.

일단 뉴스를 개인의 경제적 생존에 요긴한 정보(부동산 등)와 일상적 고통들을 잊게 하는 ‘연성 정보'(모 연예인 과다 노출 시비부터 한일전에서의 축구 승리까지)로 그득 채우고, 충격에 대한 대중들의 요구를 충격적 범죄(특히 부모들을 자극하기에 좋은 유아 유괴 등)에 대한 이야기로 충족시키면, 이걸로 일반인의 ‘정보 욕구’가 거의 다 채워질 수 있다는 것이죠.

하루마다 땅값 시세를 몇 분 보고, 주식 시세를 몇 분 보고 방령 미녀(연예인) 허벅지의 하얀 살갗을 몇 분 보고, 태극전사의 만세 소리를 몇 분 듣고 하는 것을 일상으로 하면, 그 이상에 대한 욕구는 스스로 감퇴되죠. 이 정도로는 만족이 되고, 진보든 뭐든 뭔가를 크게 바꾸려는 ‘좀 이상한 사람들’에 대한 궁금증 자체가 잘 생기지 않다는 것입니다.

진보를 대중에게 알리려면

자본주의의 경제적 기반, 즉 시장은 늘 그 구성원을 불안하게 만들지만, 고도로 발전된 소비 자본주의의 매체 산업은 개인을 대단히 안락하게 만들 능력을 갖고 있습니다.

미녀들이 적당히 벗고, 태극전사들이 왜놈들을 적당히 까부수고, 나쁜 사람들이 가끔가다 충격적인 악행을 범해도 결국 경찰들에게 적당히 덜미 잘 잡히고, 땅값이 적당히 왔다갔하고, 북괴들이 가끔가다 도발을 하면서도 결국에 가서 우리 위대한 대한민국과 그것보다 더 위대한 우리 혈맹 미국의 위세에 눌러 꼼짝 못하게 되는 등 미디어들이 만들어낸 ‘재현의 세계’는 예측가능하고 안정적이다는 것이죠.

그리고 이 세계 속에서 안락하게 사는 선남선녀들에게 진보에 대한 관심이란 애당초 생기기가 힘든 것이죠. 진보가 그들의 ‘주의 범위’ 속으로 들어가 약간이라도 주의를 끌 수 있는 방법은 과연 무엇인가요? 진보의 전자 매체 등이 스스로 본질적으로 다른 세계관을 일리려는 노력도 중요하지만, 결국 ‘대중이 공감하는 거리투쟁’은 또 하나의 해답으로 떠오르기도 합니다.

예컨대 그나마 일부 젊은이 사이에서라도 진보신당이 알려지게 된 것은 바로 촛불시위 때 아니었습니까? 그러한 계기가 주어지지 않는 한 주요 매체들의 정보 봉쇄(informational blockade)를 뚫는다는 게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정보 범람의 시대에 사람들에게 장기적으로 진정으로 필요한 정보, 즉 이 체제를 어떻게 해서 보다 인간적으로 개조할 수 있을까에 대한 정보야말로 매체 소비자들에게 잘 들어가지 않는 게, 어떻게 보면 역설이지만 이게 바로 자본주의의 강고함의 비결 중의 하나입니다.

북한처럼 ‘바깥’에 대한 정보를 엄격히 통제하면 그 정보가 알려지고 나서 엄청난 대중적 분노를 맞을 수 있지만, 남한처럼 체제에 비판적 세력에 대한 정보를 자꾸 주변화시키면 결국 정보의 소비자들을 체제의 능동적 공범으로 만들기가 훨씬 편합니다. 대개 사람들이 북한을 ‘무서운 사회’라고 하지만, 거시적으로 본다면 개인에 대한 흡입력 등으로 봐서는 남한은 더 무섭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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