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함포 꽝…적 함정 화염” 전쟁르포 등장
        2010년 05월 28일 09:33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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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군사정권 때도 이렇지는 않았다. 전국단위 선거를 눈앞에 두고 선거 이성을 마비시키는 언론보도가 이렇게 연일 쏟아지지는 않았다. 분단의 한반도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시도를 대다수 언론이 노골적으로 편들지는 않았다. 언론도 국민 눈치를 봐야 하기 때문이다.

    지방선거가 5일 남았다. 한국 언론사에 길이 남을 기막힌 풍경이 연일 벌어지고 있다. 전쟁의 공포를 생생하게 전달하는 기사와 함께 지방선거에서 여당이 유리하다는 여론조사가 한 지면에 배치됐다. 유권자에게 무엇을 전달하려는 것인가. 유권자는 ‘언론의 의도’에 따라 거수기 역할을 해주길 기대하는 것인가.

    한반도 긴장을 완화해줄 버팀목들이 하나 둘 제거되고 있다. 국민은 불안하기만 하다. 이러다가 정말 무슨 일이 일어나는 것 아니냐는 걱정이 앞설 수밖에 없다. 이제는 생생한 전쟁 상황을 담은 ‘르포’까지 언론에 등장했다.

       
      ▲ 조선일보 5월28일자 5면.

    다음은 28일자 전국단위 아침신문 1면 기사다.

    경향신문 <4대강에 무슨 일이…>
    국민일보 <"중, 대북 비판 동참할 것">
    동아일보 <군, 개성공단 인질땐 무력대응>
    서울신문 <원자바오 오늘 방한…북 제재 분수령>
    세계일보 <북 "남북교류 군사적 보장 철회">
    조선일보 <북 "개성공단 차단 검토">
    중앙일보 <이란 돈줄 죄던 ‘저승사자’ 이번엔 북한 제재 지휘한다>
    한겨레 <선거 D-5…’한나라당 쏠림’ 가속>
    한국일보 <6.2 지방선거 후보 감별법>

    중앙일보 "어금니 꽉 깨문 함장, ‘격파 사격’ 명령"

       
      ▲ 중앙일보 5월28일자 8면.

    “‘삐삐삐~, 적 경비정 기동 중, 총원 전투 배치로!’ 27일 오전 9시. 천안함과 같은 초계함인 진해함(1200t급) 함장 부원일(42·해사 46기) 중령의 명령이 떨어졌다. 순간 잔잔한 파도의 충남 태안군 격렬비열도 북서쪽 32km 서해 해상은 긴박한 전투상황으로 바뀌었다.”

    중앙일보 28일자 8면 <76mm 함포 꽝·꽝·꽝…북 경비정 화염>이라는 제목의 기사이다. 기사의 내용을 좀 더 들여다보자.

    “북한 경비정의 남하가 계속됐다. 부 함장은 눈을 번득이며 어금니를 꽉 물었다. "격파 사격 실시하라"는 명령을 내리자 76mm 주포와 40mm 부포가 불을 뿜었다.…함장은 "적 함정에서 화염이 보인다. 함대에 보고하라"고 지시했다.”

    군 협조 아래 태안 앞바다 모여든 기자들

       
      ▲ 조선일보 5월28일자 5면.

    27일 오전 9시에 서해상에서 벌어졌다는 이 사건은, 함장이 어금니를 꽉 물면서 격파 사격 명령을 내렸다는 이 사건은, 언론이 생생하게 르포로 전달한 이 사건은 가상 전쟁을 실전처럼 전달한 사건이다.

    기자들은 군의 협조아래 태안 앞바다로 모여들었다. 군이 준비한 전쟁 시나리오에 생명력을 불어 넣고 생동감을 높여주는 역할, 언론은 그런 역할을 했다. 이 가상 전쟁 시나리오는 28일자 중앙일보를 비롯한 주요 언론 지면에 그대로 실렸다.

    한국일보는 4면에 <폭뢰 투하…함포 발사…"적 섬멸, 상황 끝">이라는 기사와 <타임지 ‘한반도 국지전 3가지 시나리오’>라는 기사를 함께 실었다. 동아일보도 1면에 <"북 도발 더는 용서없다" 해군, 서해 기동훈련>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내보냈다.

    국민일보 "백두산 북상하라 경고"

       
      ▲ 국민일보 5월28일자 4면.

    국민일보는 4면에 <"백두산, 북상하라" 경고 무시에 76mm·40mm포 불 뿜어>라는 기사를 내보냈다. 조선일보는 5면 <"미식별 잠수함 발견, 폭뢰 투하"…3초 뒤 20m 물기둥 솟구쳐>라는 제목으로 해군 서해 기동훈련 르포기사를 생생하게 전달했다.

    대한민국에서는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 언론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전쟁이라니. 전쟁이 일어나면 컴퓨터 게임 하듯 누군가는 승리하고 누군가는 패배하는 단순한 승패를 나누는 상황이 발생할 것이라고 보는가.

    중앙일보 논설위원이 지난 24일 칼럼으로 쓴 것처럼 국민이 3일만 참아주면 되는 일인가. 그렇게 된다면 국민은 별다른 피해도 없이 상황은 종료될 것이라고 보는가. 한국 경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평정심을 유지할 것이라고 보는가.

    동아일보 "’최고 전략사령관’ 이명박 대통령"

       
      ▲ 동아일보 5월28일자 35면.

    이제는 가상 전쟁 시나리오까지 등장하는 이 참담한 장면을 언제까지 지켜봐야 하는가. 그러나 언론의 행보는 점입가경이다. 동아일보 육정수 논설위원은 35면 <‘최고 전략사령관’ 이명박 대통령>이라는 칼럼에서 “전면전이 불가피하게 되더라도 우리의 희생을 최소화하면서 북의 도전 의지를 초기에 꺾는 방안은 강구해야 할 것이다. 서울 방어가 급선무임은 물론이다”라고 주장했다.

    전면전이 불가피하게 되더라도라니…. 그런 글을 쓴 동아일보 논설위원은 이명박 대통령을 최고 전략 사령관으로 치켜세웠다. 보수신문이 그토록 경멸하는 북쪽 어느 신문을 떠올리게 하는 제목 아닌가.

    ‘전쟁의 광풍’은 청와대와 이명박 정부, 한나라당, 언론이 발을 맞춰가며 흐름을 이끌고 있다. 그러나 나가도 너무 나갔다. 위기국면을 이끄는 수준이 아니라 진짜 위기가 올 수 있다는, 이번에는 다른 것 같다는 그런 상황을 몰고 왔다.

    한겨레 "지난 십 수년 사이 어느 때보다 불안"

       
      ▲ 한겨레 5월28일자 31면.

    한겨레 여현호 논설위원은 31면 <MB, 감당할 수 있나>라는 칼럼에서 “’이러다 진짜 무슨 일 나는 것 아니냐’는 불안은 지난 십수년 사이 어느 때보다 생생하다. 그동안에도 1·2차 연평해전이나 대청해전 따위 충돌은 있었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다”고 우려했다.

    경향신문은 3면 <"전쟁불사" 외치던 여, 역풍불자 "정쟁중단" 치고 빠지기>라는 기사에서 “한나라당이 천안함 침몰로 인한 ‘전쟁불사론’ 진화에 뒤늦게 나섰다. 주식·외환시장을 공포 속으로 몰아넣고 있는 ‘한반도 리스크’ 부상이 원인”이라고 분석했다.

    야당과 시민사회, 종교계 등은 최근 벌어지는 상황에 대해 깊은 우려를 전하며 ‘비상시국회의’를 결성했다. 하지만 그들의 목소리를 자유롭게 표출할 광장이 허용되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검찰과 경찰이 정부에 비판적인 목소리를 잠재우고자 두 눈을 번뜩이는 상황에서 시민의 목소리는 위축될 수밖에 없다. 이런 상황에서 여론조사를 진행할 때 전화 음성 상대를 향해 현 정권에 불리한 답변을 자유롭게 할 수 있겠는가. 그런 여론조사를 ‘100% 사실’인 것처럼 포장하며 지방선거 판세를 전하는 언론의 모습은 또 무엇인가.

    닫힌 서울광장, 미신고 보수집회 허용

       
      ▲ 서울신문 5월28일자 4면.

    경향신문은 <"봉쇄된 광장과 거리의 침묵은 평화가 아니다">라는 사설에서 “(국제엠네스티의) ‘봉쇄된 광장과 거리의 조용함은 결코 평화가 아니다’는 연례보고서의 충고를 귀담아 듣길 바란다”고 정부에 충고했다.

    경향신문 주장은 절반은 맞고 절반은 틀렸다. 정권의 입맛에 맞는 목소리가 표출되는 광장은 경찰 협조아래 열리고 있기 때문이다. 서울신문은 4면 <보수 ‘북응징’ 대회…미신고 집회 논란>이라는 사진 기사에서 “27일 서울광장에서 보수단체 회원들이 ‘북한응징촉구국민대회’를 갖고 있다. 서울시는 광장 사용을 불허했지만 경찰은 미신고 집회임에도 특별히 제지하지 않아 상반된 모습을 보였다”고 설명했다.

    대한민국 현주소를, 이명박 정부의 이중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권력도 선거를 앞두고는 긴장하게 마련이다. 국민 눈치를 보게 마련이다. 그러나 현 정부는 거침이 없다. 언론도 거침이 없다. 누가 이런 상황에 제동을 걸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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