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당장 고치지 않으면 나라가 망한다”
        2010년 05월 27일 10:25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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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학이란 무엇인가

    흔히 사용하는 말에 ‘실사구시(實事求是)’가 있다. <후한서>에 나오는 ‘수학호고 실사구시(修學好古 實事求是)’에서 유래한 말이다. ‘학문을 하는데 옛 것을 좋아하고 실제적인 일에서 올바름을 구했다’는 말이다.

       
      ▲ 정약용

    이 말이 유명해진 건 중국 청나라 때에 고증학자들이 ‘실사구시’를 자신들의 대표적인 슬로건으로 채택하면서부터였다. 그들은 성리학을 비판, 배격하였는데, 성리학이 공리공론만을 일삼고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공리공론에 대비되는 개념으로 실사구시를 채택하여 자신들의 슬로건으로 하였다. 그런데 그들이 말한 실사구시란 유교 경전의 글자와 구절의 뜻을 꼼꼼하게 실증하여 밝히고자 하는 방법론이었다.

    조선에서 실사구시라는 개념을 애용한 사람은 유명한 추사 김정희이다. 그가 실사구시를 애용한 이유는 그가 금석학을 연구하였다는 것과 연관이 있다. 금석학은 고증학의 주요한 한 분야인데, 비석 등에 새겨진 옛 글자의 뜻을 밝히고 해석하는 학문이다. 따라서 실증적인 연구가 이루어져야 하고, 김정희는 그 방법론으로 실사구시를 채택하였던 것이다.

    일제 강점기에 이르러 문일평이 실사구시학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 이 개념의 적합성 여부를 둘러싼 논란 끝에 그것을 줄여 ‘실학’이라 명명하게 되었다. 그 이후 실학은 조선 중후기의 사상을 연구하는 데 핵심적인 개념이 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가장 원초적인 질문, 즉 ‘실학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명확히 개념 정립을 하지 못하고 있다. 실학을 적극적으로 해석하는 입장에서는 그것이 성리학을 넘어 근대지향적인 세계관을 이루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것 역시 여전히 논란거리일 뿐이다.

    여기에서는 그 논란을 뒤로 하고 통칭 실학의 역사를 살펴보도록 하자. 실학이 언제부터 등장했는가 하는 점 역시 여전히 논란의 대상이다. 실학이 무엇인지가 아직 불분명하니 시작 시점을 결정짓는 것 역시 매우 어려운 일이리라. 대체적으로 보아서 이수광에게서 그 연원이 마련되었다고 한다.

    이수광 이전에 이이가 <격몽요결서>에서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 학문을 하지 않으면 사람이라 할 수 없다"고 말했다. 학자만이 아니라 사람이면 누구나, 일반 백성들도 학문을 해야 한다는 얘기이다.

    그래서 그는 누구나 매일 매일 하고 있는 일을 잘 하는 것을 학문이라 하였다. 요샛말로 하면 개별 학문의 유용성을 주장한 것이다. 통칭 실학은 이이의 주장과 맥이 닿아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수광은 이이의 주장을 이어받아 한 걸음 더 나아갔다. 그는 <학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학문을 하는 사람은 말을 정교하게 하더라도 실천을 하지 않으면 기술을 배우는 것보다 못하다.

    비록 학문을 기술보다 우위에 두기는 하였지만, 이수광이 주장하고자 한 것은 학문과 실천의 통일, 즉 실천을 위한 학문의 중요성이었다. 실천을 위한 학문이란 무엇인가. 당대의 사회를 비판적으로 인식하고, 그것을 개혁하기 위해 대안을 내놓는 학문이다. 이수광의 주장은 당대의 성리학이 인간의 도덕성과 예법에 치중하고 있었던 것과 대비하여 새로운 학풍을 열었다고 할 것이다.

    경세치용과 이용후생

    유형원이 이수광의 뒤를 이어받았다. 그는 "천지의 이(理)는 만물에 구현되는 것이요, 물(物)이 아니면 이는 구현될 수가 없다"고 말한다. 그래서 그는 옛날 제도의 정신을 연구하고 지금의 사정을 살펴서 세세한 부분까지 밝혀놓았다고 하였다.

    그는 <반계수록>에서 토지제도에서부터 군사제도에 이르기까지 다방면에 걸쳐 중국의 옛 제도를 근거로 하여 자세하게 서술하였다. 여기에 덧붙여 그는 그 제도들이 반드시 실행될 수 있는 것이라 말한다. 실천할 수 있는 것이라는 얘기이다.

    그 다음 세대인 이익에 이르러 실학은 더욱 구체화하였다. 그가 쓴 <성호사설>은 일종의 칼럼집인데, 30권 30책으로 이루어진 방대한 내용이다. 다루고 있는 항목이 3,000개가 넘으니 가히 백과사전이라 할 만하다.

    이익의 주 관심사는 경학과 경세치용이었다. 경학이란 유교 경전의 글자, 구절, 문장에 음을 달고 주석을 붙이는 것을 말한다. 특히 그는 공자, 맹자의 학문으로 돌아가 요순시대의 도와 정치를 되살려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경세치용이란 세상을 다스리는 데 유용한 학문을 말한다. 이익은 <성호사설>에서 사회개혁을 위한 수많은 방안을 제시하였다.

    유형원에서 이익에 이르는 실학을 경세치용학파라고 한다. 그것은 파탄 상태에 직면한 농촌사회를 구하는 데에 일차적인 주안점을 둔 학파였다. 그래서 유형원은 균전론, 이익은 한전론 등 토지제도 개혁에 일차적인 관심을 기울였다.

    사상적으로 볼 때, 그들은 기본적으로 보수성을 탈피하지 못하였다. 이익이 공자와 맹자 시대의 학문을 강조한 것은 당대의 성리학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하여 성리학 비판이 곧 진보성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의 성리학 비판은 그것이 경세치용, 즉 세상을 다스리는 데 유용한 학문으로서 역할을 하고 있지 못하고 있음을 비판한 것이었다. 철학의 혁신, 세계관의 전환은 그들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경세치용학파와 대비되는 학파로 이용후생학파가 있다. 이용후생이란 입고 쓰고 먹는 것을 넉넉하게 하여 백성들의 생활을 나아지게 한다는 말이다. 주로 홍대용, 박지원, 박제가 등이 속했던 북학파를 두고 그렇게 부른다.

    그들은 한양에서 생활하였고, 주 관심사 역시 농촌문제가 아니라 도시문제였다. 그들이 이용후생을 위해 역설한 것은 상업과 수공업의 발전이었다. 이것은 도시 상공인들의 생각을 반영한 것이기도 하였다.

    박제가의 ‘우물론’은 이용후생학파의 사고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재물은 우물과 같다. 우물의 물은 퍼서 쓸수록 가득 채워지고 사용을 하지 않으면 말라버리고 만다." 적절한 소비를 통해 상업과 공업이 발전할 수 있다는 얘기이다.

    이용후생학파가 경세치용학파와 또 다른 점은 세계관의 전환을 통해 철학의 혁신을 이루고, 성리학을 극복하고자 하였다는 점이다. 홍대용이 이 일을 주도하고 박지원이 보완하였다.

    이상과 같은 경세치용학파와 이용후생학파를 집대성한 사람이 정약용이다.

    진정한 유학자의 학문

       
      ▲ 정약용이 유배 생활을 한 전남 강진의 다산초당

    정약용(1762년~1836년)은 18년간 강진에서 유배 생활을 하였다. 그 기간 동안 그는 도탄에 빠진 농촌의 현실을 목격하고 깊은 사색을 통해 방대한 저술을 하였다. 그것은 조선 사회에 대한 일대 개혁론이었다.

    그는 직접 목격한 농민의 현실을 <표랑>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승냥이여, 이리여 / 우리 소를 잡아갔으니 / 우리 양일랑 그만두어라
    장 안에 저고리도 없다 / 옷걸이에 치마도 없다
    항아리에 남은 장도 없다 / 방 안에 남은 쌀도 없다
    무쇠솥, 가마솥을 다 빼앗아가고 / 숟가락, 젓가락도 모두 가져갔다
    도적도 아니고 원수도 아닌데 / 어째서 이런 일을 하는가

    승냥이, 이리는 지방 관리들을 말한다. 지방 관리들의 가렴주구가 극심해져 백성들은 모든 것을 빼앗겨 버리는 현실을 이렇게 썼다. 또 <전간기사서>에서 백성들의 참담한 현실에 대한 자신의 마음을 이렇게 썼다.

    기미년에 내가 다산 초당에 있을 때에, 아주 가물어서 겨울과 봄에서부터 입추가 될 때까지 풀 한 포기 없는 땅이 천 리나 이어졌다. 유월 초가 되니, 집 떠나 방황하는 백성들이 길을 메우니 마음이 아프고 그 광경이 참혹하여 살고 싶지 않을 정도였다.

    정약용의 농민들에 대한 애끓는 사랑을 엿볼 수 있다. 그는 농민들의 처참한 현실을 보며 임금이 덕으로 나라를 다스리면 백성이 편안해진다는 식의 알량한 주장만을 할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속유론>에서 속된 유학자를 나무라며 진정한 유학자가 나아갈 길을 제시하였다.

    속된 유학자는 옛 글의 글자나 구절만 풀이하면서 예의나 따지는 자들로, 세상을 이롭게 하지 못하는 자들이다. 진정한 유학자는 나라를 다스리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학문을 해야 한다. 재물을 넉넉하게 하고 오랑캐를 물리칠 수 있도록 문무에 능통하여 못할 일이 없는 학문을 해야 한다.

    정약용은 진정한 유학자의 길을 걷고자 한 사람이다. 진정한 유학자의 학문을 하고자 한 사람이다. 따라서 눈앞에 전개되고 있는 비참하고 엄중한 현실을 놓고 ‘백성을 사랑하라’, ‘덕으로 정치를 하라’는 공허한 주장만을 할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나라의 정치, 경제구조가 백성을 억압하고 수탈하도록 하고 있다고 인식하였다. 그래서 <감사론>에서는 "감사라는 큰 도적을 물리치지 않고는 백성이 편안히 살 수 없다"고 하였다. 관리들의 횡포에 대한 근본적 개혁 없이는 백성들이 제대로 살아 갈 수 없다는 얘기이다. 따라서 그는 근본적인 개혁만이 해결책이라고 보았다.

    당장 고치지 않으면 나라가 망한다

    정약용은 자신이 지은 ‘일표이서’로서 천하와 나라를 다스려야 한다고 하였다. ‘일표이서’란 <경세유표>, <목민심서>, <흠흠신서>를 말한다.

    <경세유표>는 행정제도에서부터 토지제도, 조세제도에 이르기까지 모든 제도의 개혁 원리를 밝힌 저서이다. 그는 여기에서 "조금이라도 병들지 않은 곳이 없다. 지금 당장 고치지 않으면 나라가 망할 것이다"고 말한다. 그만큼 조선 사회의 현실이 절망적이었던 것이다.

    <목민심서>는 관리들의 폭정을 비판하면서 관리들이 갖추어야 할 도리를 서술한 책이다. 여기에서 제시된 지침은 오늘날까지도 권력층에게 따끔한 교훈이 되고 있다. <흠흠신서>는 형벌에 관해 서술한 책이다. 사람의 생명을 다루는 일이므로 소홀함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경고를 담고 있는 책이다.

    이렇듯 1표 2서는 조선 사회의 총체적 개혁을 위한 원리와 내용을 담고 있다. 정약용은 제도적 개혁뿐만 아니라 경제 발전을 위한 방안도 제시하였다. 그 방안은 기술 발전이었다. 그는 <기예론>에서 "사람이 많이 모일수록 그 기술이 정교해지고, 세대가 내려갈수록 그 기술이 더 공교해진다"고 하였다. 널리 다양한 기술을 배우고 대를 이어가며 그것을 발전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도의와 기술을 비교한다. 도의는 사람의 성품에 근거를 두고 성현들이 이미 밝혀놓았으므로 힘들이지 않고 갖출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기술은 단 한 가지라도 새롭게 개발하지 않으면 낙후될 수밖에 없다고 했다. 새로운 기술의 개발을 중요시 한 것이다.

    정약용이 말한 진정한 유학자의 학문은 사회를 개혁하고 발전시키는 데 유용한 학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그는 경세치용학파에서 이용후생학파에까지 유용한 내용들을 모아 집대성하였다. 정약용이 말한 진정한 유학자의 학문. 이것이 흔히 말하는 ‘실학’이다. 요샛말로 하면 실용학문이다.

    철학의 빈곤

    정약용은 <자찬묘지명>에서 "육경(六經)과 사서(四書)로써 심신을 수양하고 일표이서(一表二書)로써 천하와 나라를 다스리니 이로써 본(本)과 말(末)이 갖추어졌다"고 했다. 육경과 사서는 유교 경전을 말하고, 일표이서는 앞에서 말한 그 자신의 저서를 말한다. 심신 수양과 나라를 다스리는 원리로써 모든 것이 다 갖추어졌다는 얘기이다.

    그는 <오학론>에서 배척해야 할 다섯 가지 학문에 대해 말한다. 성리학, 훈고학, 문장학, 과거학, 술수학이 그것이다. 성리학은 이(理)니 기(氣)니 하며 공연히 시비를 하고 헛된 명분만 내세우니 배격해야 한다고 했다. 훈고학은 지엽말단적인 것만 풀이하고 있으니 배격해야 한다고 했다.

    문장학은 도(道)를 크게 해치니 배격해야 한다고 했다. 여기에서 배격해야 할 문장은 주로 정약용 당대의 문장들인데 "간사하고 음탕하고 속이고 괴상한" 문장들이라고 보았다. 그래서 정약용은 정조가 문체반정을 일으켰을 때 적극 지지하여, 잡스러운 문장을 금지시키고 문장의 규범을 확립할 것을 진언하기도 하였다.

    과거학은 세상을 어지럽게 하기 때문에 배격해야 한다고 했다. 경전에 대한 깊이 있는 공부보다는 시험의 테크닉을 가르쳐 관리가 되기에 부적격한 자들도 과거에 합격할 수 있게 하는 현실을 개탄한 것이다. 술수학은 사람을 속이는 것이므로 배격해야 한다고 했다.

    정약용은 이 다섯 가지 학문을 세상을 이롭게 하는데 유용하지 않은 학문, 속된 유학자나 하는 학문으로 보아 배격하고자 한 것이었다. 이 주장이 성리학을 극복하고 실학을 정립하게 하였다 하여 높이 평가되고 있는 부분이다. 물론 실학을 크게 이루었다는 면에서 정약용은 높이 평가 받아 마땅하다. 그렇다고 하여 그가 놓친 부분까지 평가할 수는 없다.

    그는 성리학을 배격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옛날에 학문하던 사람은 본성이 하늘에 근본을 두고 있음을 알고 이치가 하늘에서 나온 것을 알았다. 인륜이 어디에나 통하는 도(道)인 것을 알아서, 효제(孝悌)와 충신(忠信)으로써 하늘을 섬기는 것을 근본으로 삼았다. <중략> 그 명칭을 인(仁)이라 하고 그 행하는 바를 서(恕)라 하고 그 인을 베푸는 것을 경(敬)이라 한다. – <오학론>

    공자와 맹자가 주장한 유교 철학의 근간을 이루는 내용이다. 이것이 정약용이 말하는 심신수양의 내용이기도 하다.

    여기에서 정약용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이렇듯 공자와 맹자가 이미 근본을 얘기해 놓았는데 이니 기니 하며 공연한 시비를 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것은 성리학에 대한 비판인데, 공자와 맹자의 정신으로 되돌아가자 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정약용은 결코 복고적인 사람이 아니다. 그의 주된 관심은 현실의 문제, 자기 시대의 문제였다. 현실 개혁의 엄중한 과제가 있는데, 현실과 동떨어진 논쟁을 일삼는 것에 대해 비판하고자 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비판하였다 하여 성리학이 극복되는 것은 아니다. 더욱이 현실에 유용한 학문, 즉 실용학문으로 철학을 대체할 수는 없는 일이다. 철학의 문제는 철학으로 결판을 내야 한다.

    정약용은 성리학자들 내에서 벌어진 논쟁을 공연한 시비라고 배척하여 버렸다. 그렇게 하여 그 시비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변화마저 놓쳐버렸다. 인간과 동물의 본성이 같으냐 다르냐 하는 일견 공리공론처럼 보이는 논쟁을 통해 이기이원론이 극복되고 기일원론이 확립되었다. 그것은 성리학을 극복하는 철학의 혁신이었고, 세계관의 혁명이었다.

    정약용은 이미 공자와 맹자가 다 밝혀놓았다고 하여 철학을 놓아 버렸다. 그는 심신의 수양 속에 본(本)과 말(末)이 다 있다고 하였다. 그것은 공자, 맹자 이래 성리학, 그리고 그 이후에 등장하는 여러 유학의 종파들에 이르기까지 근간으로 하고 있는 생각에 불과하였다. 그것은 윤리학의 문제이다.

    철학은 근본적으로 만물의 이치를 밝히고 세계관을 다투는 학문이다. 그것은 결코 실용학문으로 대체될 수 없다. 정약용의 업적을 들어 실학이 성리학을 극복하였다고 하는 것은 철학의 빈곤을 합리화하는 태도일 뿐이다. 이런 태도로 인해 한국 철학의 전통이 이어지지 않고 단절된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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