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패륜녀와 하녀 & 나이와 계급
    By mywank
        2010년 05월 24일 09:44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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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글은 스포일러가 될 수 있는 부분이 포함돼 있습니다. 영화를 보시지 않은 분은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나는 여전히 청소부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 그 문제는 당신이 어떻게 양육 받았는가 하는 문제와 결부된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이 어질러 놓은 것을 다른 누군가가 청소하는 문제에 대해 크게 곤혹스러워하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청소부 신분은 여느 직업과 다를 게 없다고 말하면서도 – 여타의 직업과 다르게 여겨서는 안 된다고 알고 있기 때문에 – 여전히,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다른 사람이 내 뒤를 청소한다는 사실이 당혹스럽다.” – 앤디 워홀

    청소부에 대한 앤디 워홀의 생각

    어째서 아름다운 이야기는 잘 알려지지 않고 흉한 이야기는 그토록 빨리, 널리, 쉽게 알려지는 걸까? 가령, 끊임없이 이어지는 ‘00녀’에 대한 이야기들이 그렇다. 이야기가 시작되는 것은 물론 상식적으로 받아들일 만한 수준을 넘어서는 모진 말이나 행동을 한 젊은 여성의 잘못으로부터다.

    그런데 그 잘못된 말이나 행동의 특징에 ‘녀’라는 접미사가 달리고, 인터넷을 통해 공개적인 비난이 쏟아지는 순간부터 ‘00녀’는 변명의 여지없이 실정법보다 가혹한 사회적 비난과 처벌을 받게 된다.

    이른바 ‘00대 패륜녀’ 사건도 그렇다. 한 대학에서 청소부로 일하는 부모 연배의 아주머니 노동자에게 위협적인 태도로 막말을 한 여대생 이야기를 이제는 모르는 이가 거의 없다. 처음에는 한 포털 사이트 게시판에 올랐던 아주머니 딸의 호소가 사이버 공간 이곳저곳에 퍼 날라지면서 베스트 게시물을 노린 자작극이 아니냐는 시비가 일었다.

    심지어 막말을 퍼부은 당사자를 사칭해서 ‘누군가’ 미니홈피를 만들어놓고 거기에 퍼부어지는 악플을 즐기는 어처구니없는 일까지 있었다. 그러다 ‘누군가’ 현장에서 오간 말들을 녹취한 음성 파일을 인터넷에 올렸고, ‘누군가’ 그 음성파일을 자막 동영상으로 만들었으며, ‘누구들인가’ 막말을 한 학생의 ‘신상 털기’에 나서서 엉뚱한 사람들을 지목해 괴롭히다가, 결국 학교와 부모의 중재로 잘못을 사과한 당사자를 찾아내 이름부터 얼굴까지, 나이부터 행적까지 모든 사람에게 탈탈 털려 내보이도록 만들었다.

       
      ▲ 임상수 감독의 영화 <하녀>

    패륜은 계급에서 비롯된다

    이 사건에서 ‘패륜’의 방점은 우선 나이에 있고, 다음은 계급에 있다. 그런데 나이에 대한 잘못이 저질러질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계급에서 비롯된 것이다. 김기영 감독의 <하녀>에서 주인집 아이들은 이모뻘 나이의 하녀에게 거리낌 없이 “야.”라고 부르며 하대를 하지만 집안 어른 누구도 나무라지 않는다.

    임상수 감독의 <하녀>에서도 교양으로 치장한 주인집 아내 해라(서우)는 자기 친정 엄마보다도 나이 지긋한 하녀 병식(윤여정)에게 "주둥아리 함부로 놀리고 다니지 말라"고 윽박지르는 걸 사람부리는 이의 당연한 자세라고 여긴다.

    가끔 내키면 ‘여사님’이라고 불러주기도 하지만 그렇게 부르는 것은 상대를 존중해서가 아니라 어린 딸 남희에게 가르쳤듯 순전히 ‘남에게 예의바르게 하는 게 남을 높여주는 것 같지만 사실 내가 높아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집에서 일하던 젊은 하녀 은이(전도연)가 어쩌다 주인 남자의 아이를 임신하자 그 아이를 없애기 위해 은이가 올라가 일하고 있는 사다리를 밀쳐 떨어뜨리고, 그래도 안 되니 몰래 약을 먹여 피를 쏟게 하고, 또 그래도 안 되니 당사자가 의식을 잃은 상태에서 강제로 낙태 시술을 시켜버린다.

       
      ▲ 영화 <하녀>의 한 장면

    계약보다 깊은

    이런 주인집 사람들에게 은이가 ‘찍 소리라도 해야겠다’며 찾아든다. 그런 은이를 끌어내라는 주인집 사람들에게 넌덜머리가 난 병식이 그만 두고 떠나겠다며 “이제부터 하고 싶으면 니들이 알아서 해!”라고 쏘아붙이자 해라는 “아줌마, 왜 이래? 버르장머리 없이.”라고 도리어 성을 낸다.

    그런 어른들의 말본새를 어린 딸 남희도, 품에 안겨 있는 갓난쟁이 쌍둥이들도 다 보고, 다 듣고 있다. 그렇게 보고 듣고 자란 아이들은 또 그렇게 말하고 행동할 것이다.

    해라에게 은이는 계약에 따라 적정한 임금을 받고 가사를 살피고 아이를 돌보는 동등한 인간이 아니라 그저 ‘내 빤스 빠는 년’이다. 그런데 정작 그런 해라를 두고 남편 훈(이정재)은 ‘개같은 년’이라고 한다. 심지어 장모에게 “이봐요, 당신 딸이 낳아야만 내 애인 것 같습니까?”라며 “어떻게 감히 당신들이 내 애한테 약을 먹여?”라고 따진다.

    이런 가정, 이런 사회에서 배우고 자라면 상대가 아무리 나이가 많더라도 자신보다 계급이 낮다고 생각되는 어른이 청소부라면 막말에 대해 사과를 하는 대신 “아줌마 하는 일이 뭐냐고, 저런 거 치우는 일 아니냐고! 저거 빨리 치우라고!” 식의 대응을 하는 것이 그다지 잘못이라고 여기지 않는 사람이 되기도 할 것이다.

    은이가 자신의 방을 찾아든 주인집 남자와 섹스를 하고, 어쩌다 임신까지 하게 된 것이 무슨 속셈이 있어서도 아니고, 그게 잘못된 일이었다는 것을 모르는 것도 아니며, 그 잘못에 대해 해라 앞에서 빌지 않은 것도 아니건만 주인집 사람들의 은이에 대한 처벌은, 그리고 영화의 결말은 가혹하기만 하다. 이런 가혹한 파국은 사실 병식 때문에 벌어진 것이다.

       
      ▲ 영화 <하녀>의 한 장면

    은이와 훈이 정사를 벌인 것도, 은이 자신도 알지 못했던 임신 사실을 해라 친정엄마에게 먼저 고해바친 것도, 예쁜 아이를 낳고 싶어하던 은이를 강제로 낙태시키는 현장을 고스란히 지켜본 것도 다 병식이다.

    병식은 그런 모든 일들에서 벌어지는 상황에서 한 번도 당사자들 앞에서 잘못을 짚어 내거나 바로 잡으려고 하지 않았다. 대신 자신이 하는 일이 원래 ‘아더메치한(아니꼽고,더럽고, 메스껍고, 치사스러운)’ 거라며 뒤에서 지켜보고, 말을 전하고, 상황이 끔찍하게 진행되어 가는 걸 내버려두고, 그러다가 정말 일이 심각해질 지경이 되자 떠나 버린다. 나중에 은이 앞에서 “미안해. 난 뼛속까지 이런 여자야.”라고 자책하지만, 그뿐이다.

    그렇다면 그런 병식의 뺨을 후려갈긴 은이는? 은이 역시 누군가 높은 건물에서 뛰어내려 죽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 일하다 말고 동료에게 “구경가자.”고 한다. 망설이는 동료에게 “뭐 어때~”라고 배시시 웃어 가면서. 그러나 막상 자신이 모든 것을 잃고 뛰어내리는 순간에는 어린 남희에게 자신을 기억해달라고 부탁한다.

       
      ▲ 영화 <하녀>의 한 장면

    패륜녀와 현장녀들

    ‘00대 패륜녀’ 사건에서 현장에 있었을 여러 사람 가운데 아무도 나서서 말리지 않은 것도, 일이 그토록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며 커지기 전에 당사자든 학교 차원이든 수습하려 하지 않은 것도 한편으로는 비정규직 청소 노동자를 낮추어 보는 계급의식 때문이며, 또 한편으로는 자신이 하는 일의 결과에 대해 책임지지 않으려는 비겁함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이 직장을 그만 두는 한이 있어도"라며 시비를 가리려했던 청소 노동자 아주머니는 막말을 들은데 더해 그토록 무심했던 주변 학생들에게도 서운함과 서러움을 느낀 것이다.

    이 과정에서 ‘신상 털린’ 당사자는 두고두고 힘든 삶을 살게 될 것이다. 이번 일 때문이기도 하지만 앞으로 또 다른 ‘00녀’가 문제로 지목될 때마다 소환되고, 비교되고, 비난 받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장에서 외면했던 사람들, 엉뚱한 사람을 지목해 괴롭혔던 사람들, 또는 이미 학교에서 신원을 파악해 수습에 나서고 있던 상황에서 누가 당사자인지 정보를 흘린 사람들은 자신의 잘못이 무엇인지 뉘우치는 대신 또 다른 ‘00녀’를 털기에 분주해질 것이다. 그러면서도 정작 이런 일이 빚어지도록 만든 ‘비정규직 청소 용역 노동자’ 문제는 속속들이 털어보려 하지 않는다.

    사적으로 잘못을 한 사람에 대한 처벌은 개인적 차원에서 해결되었지만 여전히 청소부 옷은 <빵과 장미>(켄 로치 감독)의 대사에서처럼 그 옷을 입은 사람을 투명인간으로 만든다. 그래서 <7급 공무원>(신태라 감독)에서 청소부로 위장한 젊은 여성 정보원 앞에서 남자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아랫도리를 내놓고 볼일을 본다.

       
      ▲ 영화 <하녀>의 한 장면

    ‘패륜’ 사건과 노동조합

    어쩌면, 아니 분명히 ‘00대 패륜녀’ 사건에서 문제가 될 배경을 만든 것은 패륜녀로 지목된 한 학생이나 그 현장에서 입 닫고 귀 막았던 여러 학생들보다 노조가 없는 노동 조건을 고수한 00대 당국이다. 노조가 없는 한, 청소부는 아무 때고 잘릴 수 있는 불안한 신분이며, 학교 당국과 용역회사 양쪽에서 시달리게 된다.

    그런 학교 분위기에서 학생들은 청소를 하는 용역 노동자를 무시하는 것을 부당하게 느끼지 않게 되고, 그러니 막말을 하게 되기도 할 것이다. 이미 성신여대, 이화여대, 고려대, 연세대, 덕성여대 등 노조가 있는 여러 학교에서는 학생들과 청소 노동자들이 함께 연대하고, 존중하고, 배려하는 문화를 키우고 있다. 

    임상수 감독의 <하녀>에서 가장 섬뜩한 장면은 은이에게 강제로 낙태 수술을 하는 의료진 가운데 간호사 하나가 가족에게 동의서를 받아야 문제가 없지 않겠느냐며 수술실 밖에서 지켜보고 있는 병식이 가족인가를 물을 때, 의사가 응급이니 그냥 하라며 병식을 “아무 관계도 아니야”라고 무시해 버리는 장면이다.

    아무 관계도 아닌 사람들이 00녀들을 단죄하고, 사회적으로 매장시키면서 사실은 00녀들을 자꾸만 만들어내는 사회. 이런 사회는 병식이 떠나든 은이가 죽든 새로운 하녀들을 들여 일을 맡기고 축배를 드는 <하녀>의 주인집과 다를 바 없다.

    이런 집, 이런 사회에서 벗어나 빵과 함께 장미도 누릴 수 있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키보드 워리어’들이 그저 ‘누군가’ ‘아무 관계도 아닌’ 존재로 가상공간 인터넷에만 머물지 말고 선거에 나서는 작은 실천 정도는 마다 않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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