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2년 예고하는 낯선 풍경들
        2010년 05월 24일 08:18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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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

    이번 지방선거에서 우리는 아주 낯익은 광경과 낯선 광경을 함께 목격하고 있다. 낯익은 광경은 진보정당 광역단체장 후보들의 악전고투다.

    낯익은 광경, 낯선 광경

    이것은 2002년에도, 2006년에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때나 지금이나 진보정당은 양대 보수정당의 틈바구니에서 고전을 거듭하고 있다.

    하지만 이번에 처음 경험하는 낯선 광경도 있다. 그것은 진보정당이라는 민주노동당이 과거 10년간 집권 세력이었던 민주당을 아낌없이 지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민주노동당 대표가 ‘후보는 민주당(혹은 국민참여당)에, 정당은 민주노동당에 투표해 달라’고 이야기한다. 민주노동당 국회의원이 민주당 서울시장 후보의 지원 유세에 나선다.

    민주당, 국민참여당, 민주노동당, 창조한국당의 ‘반MB’ 선거연합의 결과다. 필자의 글 이전에 <레디앙>에 실린 박상훈, 이대근 등의 글은 이 ‘반MB’ 연합의 문제를 잘 지적하고 있다.

    이 분들의 글에 더해 필자가 약간 첨언하고자 하는 것은 지방선거의 이 낯선 광경이 결국은 2012년에 우리가 맞닥뜨리게 될 모습의 예고편이라는 점이다. 필자는 바로 이 ‘2012년’과의 연관 속에서 민주노동당의 선택과 진보신당의 처지를 짚어보고자 한다.

    ‘반MB’ 연합, 2012년까지 간다 

    누구나 다들 2010년 지방선거가 2012년 총선, 대선의 전초전이라고 한다. 이번 지방선거는 2012년 초의 총선을 거쳐 2012년 말의 대선으로 이어지는 정치 과정의 첫 출발점인 셈이다.

    한나라당은 지금 이 출발선에서 유례없이 단결된 모습을 과시하고 있다. 여야 간 대립을 무색케 했던 불과 몇 달 전의 친이와 친박 격돌은 이제 자취를 찾아볼 수 없다. 이것은 한나라당이 2012년에도 단일한 대오로 재집권을 도모하리라는 것을 예고한다. 박근혜발 정계 개편은 없다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한나라당의 대동단결과 쌍을 이루는 것이 민주당, 국민참여당, 민주노동당 등의 ‘반MB’ 선거연합이다. 한나라당 내 친이와 친박이 결별하지 않는 한 ‘반MB’ 연합은 곧 ‘반한나라당’ 연합이다. 굳이 고상한 논리를 동원하려 애쓸 것 없이, 이것은 양강 구도의 한 축을 구성하는 데 한 몫 끼는 아주 현실적인 선택이다.

    꽤 괜찮은 세력 배합이기도 하다. 민주당의 호남 지지세와, 민주당, 국민참여당을 횡단하는 친노 세력의 비호남 지지세 그리고 민주노동당의 민주노총 기반을 결합시킨다면 대선 승리도 노려봄직하다. 미래 집권연합으로 손색이 없다.

    민주노동당 ‘단호한’ 선택의 배경

    그래서 ‘반MB’ 연합은 결코 일회적인 제휴로 끝나지 않을 운명이다. 우여곡절은 있겠지만 2012년 총선과 대선 때까지 ‘반한나라당’ 연합으로 이어질 것이다. 지금 ‘지방 공동 정부’를 이야기하는 것처럼 그 때에는 이른바 ‘공동 집권’을 이야기하면서 말이다.

    다른 당은 모르겠지만 민주노동당은 확실히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민주노동당은 현재 수도권과 영남권에서 민주당 혹은 친노 성향 광역단체장 후보를 지지하고 있다. 민주노동당은 단호하게 ‘진보대연합’이 아니라 ‘민주대연합’을 선택했다. 설령 민주노동당이 계속 ‘진보대연합’을 주장하더라도 그것은 분명히 ‘민주대연합’으로 나아가는 전 단계임을 전제한다는 게 드러났다.

    이것을 단지 이번 선거에서 실리를 쟁취하려는 행태라고만 볼 수는 없다. 그렇게 보기에는 민주노동당 쪽이 너무 진지하다. 민주노동당의 단호한 선택 이면에는 ‘반MB’ 연합을 2012년의 선거연합, 연립정부 추진 세력으로 발전시키려는 전망이 자리한다. 민주노동당 3만 당원이 다 이런 입장에 동의하지는 않으리라 믿지만, 어쨌든 지금 이 당을 이끌고 있는 ‘민족해방파’(NL) 성향의 지도자들은 그렇다.

    필자는 지방선거 전에 열린 이른바 ‘5 + 4’ 회의의 정책연합 협상에서 이것을 실감한 바 있다. 이 협상에서 민주노동당 측은 한미 FTA나 비정규직 문제 같은 쟁점에 대해 가장 먼저 타협안을 제출하고는 했다. 이들 쟁점에 대해 진보 진영의 입장을 관철하려 하기보다는 정당연합을 성사시키는 데 더 역점을 두는 모습이었다. 적어도 ‘반MB’ 연합에 관한 한 민주노동당의 진정성(?)은 알아줄만 했다.

    사실 이것은 민주노동당 현 지도부만의 입장도 아니다. ‘사회민주주의’를 주장하는 분들 중에도 민주당, 국민참여당, 민주노동당, 진보신당의 통합을 원하는 분들이 있다. 시류인 것이다.

    보수 양당 체제에 의한 진보 운동 흡수의 대단원 

    혹자는 이렇게 물을지도 모른다. ‘유연한’ 연합 전술에 무슨 문제가 있는가? ‘진보’정당이 연립정부에 참여하는 게 뭐가 문제인가?

    글쎄, 이런 반문에 대해 길게 이야기하고 싶지는 않다. 굳이 장황한 논리를 동원해서 설명할 필요도 없이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들이 앞으로 계속 반복될 상황을 잘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민주당 서울시장 후보는 MBC의 서울시장 후보 토론회에서 한미 FTA에 대한 변하지 않는 신념을 밝혔다. ‘개방형 통상국가’라는, 예전에 현재의 국민참여당 경기도지사 후보로부터 많이 들었던 말도 다시 꺼내 들었다. 그런데 민주노동당은 이것에 대해 별다른 입장을 표명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 당의 국회의원과 전 서울시장 예비후보가 총출동해서 민주당 서울시장 후보의 선거 유세를 대행해주고 있다.

    이럴 거면 민주노동당은 3~4년 전에는 왜 그토록 한미 FTA에 반대했던 것인가? 왜 2006년 말 도심 시위를 벌여서 지금 민주당 서울시장 후보인 당시의 국무총리가 ‘불관용 선언’까지 들고 나오게 만들었던 것인가? 왜 민주노동당의 당시 대통령 후보가 2007년 11월 11일에 한미 FTA에 맞서 총궐기하자고 부르짖고 나섰던 것인가?

    그렇다고 ‘한미 FTA 반대’가 무슨 대단히 급진적인 주장도 아니다. 기왕의 신자유주의적 사회 경제 체제를 더욱더 신자유주의적으로 개악하지는 말자는 정도다. 그런데 이조차도 ‘반MB’ 연합에서는 ‘걸러져야 할’ 쟁점 중 하나가 된다.

    보수 양당 체제에 헌납된 진보운동

    여기에서 ‘반MB’ 연합의 실상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범민주당 세력은 거의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어떠한 실질적인 재분배적 조세 체계도 제시하지 않으면서 ‘복지’ 유행에 편승하는 모습 정도가 그나마 변화라면 변화라고 할까. 이런 민주당과 높은 수준의 정당연합을 구성하자면 결국 민주노동당 쪽이 변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모습은 앞으로 2~3년간 ‘반MB’ 연합이 지속, 강화되는 과정에서 계속 반복될 것이다. 2012년에 야당연합이 제시할 정책 비전의 왼쪽 경계가 어디일지는 ‘비정규직’, ‘사회복지세’, ‘한미 FTA’ 등의 쟁점은 하나같이 비껴간 이번의 정책 합의가 이미 잘 보여준다.

    이런 류의 정당연합은 결국 진보정당운동의 나름의 성과인 민주노동당을 보수 양당 체제에 고스란히 헌납하는 것으로 귀결되고 말 것이다. 상황이 더욱 심각한 것은 민주노동당이 이른바 ‘배타적 지지’ 방침을 통해 민주노총과 긴밀히 연관돼 있다는 것이다. 즉, 민주노동당의 헌납은 진보정당운동만이 아니라 1987년 이후 한 세대 동안 지속된 진보 운동 전반을 자유주의의 헤게모니에 종속시킨다는 것을 의미하게 된다.

    1987년 민주화 이후 한국의 보수 정치권은 끊임없이 진보 운동의 일부를 흡수해왔다. 1988년 총선에서 통일민주당, 평화민주당에 ‘재야’ 인사들이 참여한 것이 그 시작이었다면, 이제 2012년 총선, 대선은 그 대단원을 장식하는 무대가 되려 하고 있다.

    새로운 진보정당은 2012년 진보 독자 대응을 지지하는 세력의 결집으로 

    사실 민주노동당만 비판할 일이 아니다. 진보신당도 흔들렸다. 진보신당은 ‘반MB 대안연대’, ‘진보대연합’ 등의 방침에도 불구하고 ‘5 + 4 회의’에 참여하면서 길을 잃었었다. 그리고 진보신당 부산시당은 끝내 광역 수준에서 ‘반MB’ 연합의 일원이 되는 길을 선택했다. 진보신당은 선거 이후 이러한 동요를 분명하게 정리해야 할 과제를 마주하고 있다.

    하지만 어쨌든 지금 다수의 광역단체장 선거에서 진보신당은 진보정당운동의 횃불을 움켜쥔 유일한 세력으로 분투하고 있다. 스스로 단호히 선택한 것은 아닐지라도 아무튼 진보정당운동의 명맥을 잇고 새로운 성장 기회를 모색한다는 과제가 진보신당의 몫으로 떨어졌다.

    이 운명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단지 이번 선거만이 아니라 이후 정치 과정 속에서 계속 이 운명을 짊어지고 나갈 것인가. 이것이 진보신당이 마주한 실존적 물음이다.

    지금도 인터넷은 진보신당 서울시장 후보, 경기도지사 후보의 사퇴를 촉구하는 글들로 넘쳐난다. 지지율도 좀처럼 오르지 않는다. 지방선거에서 이 정도라면 총선, 대선에서는 어떨지 짐작할만하다. 진보정당이 현실 정치에서 차지할 수 있는 위상과 지분도 크게 낮춰 잡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지방선거 이전 몇 달처럼 진보정당의 독자성도 강조하면서 ‘반MB’ 연합에도 문을 열어놓는다는 식의 어정쩡한 태도를 계속 취할 것인가? 이러한 태도는 더 이상 용납될 수 없다. 현실은 이미 민주노동당 식의 신념에 찬 ‘민주대연합’의 길과 고난에 찬 ‘독자 진보정당’의 길을 확연히 갈라놓았다.

    한 세대의 진보 운동을 스스로 정리하는 대열에 함께 하고 싶지 않다면, 선택은 하나뿐이다. 길게 보고, 단호해져야 한다.

    진보의 내포와 외연이 분명해졌다

    하지만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게 있다. 이것은 결코 ‘진보신당 고수’ 류의 자폐적인 입장으로 퇴행하자는 게 아니다. 진보신당은 ‘진보의 재구성’을 창당 정신으로 내세웠다. 진보신당은 ‘제2, 제3의 창당’을 염두에 두고 진보신당 ‘연대회의’라는 꼬리말을 당명에서 떼지 않고 있다. 진보신당은 지방선거 직전에도 ‘진보대연합’이 새로운 진보정당 건설로 이어져야 한다는 입장을 누차 밝혔다.

    이 지향에서 바뀔 것은 없다. 다만 지방선거를 계기로 달라진 게 있다면 이제까지 모호했던 ‘진보’의 내포와 외연이 이제는 분명해졌다는 점이다.

    이제 진보신당이 재구성하고 통합해가야 할 ‘진보’는 2012년 권력교체기를 ‘반한나라당’ 연합이 아닌 진보 정치의 독자적인 전망과 실천으로 돌파하려는 개인과 흐름, 세력을 뜻한다. 진보신당이 앞장서서 만들어가야 할 새로운 진보정당은 곧 2012년 진보 독자 대응을 지지하는 모든 세력들의 결집체가 되어야 할 것이다.

    여기에는 당연히 민주노동당의 많은 당원들도 포함된다. 민주노동당 당원들 중에는 민주노동당의 현 지도부와 견해를 달리 하는 분들이 다수일 것이라 믿는다. 이것은 민주노총의 수많은 조합원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2012년 진보 독자 대응에 동의한다면 모두 함께 모여야만 한다. 이것은 단순히 진보정당운동을 살리자는 것일 뿐만 아니라 진보 운동 자체의 해체를 막고 새 출구를 열자는 것이다.

    진보신당은 이러한 새로운 결집을 위한 만남의 무대가 되어야 한다. 외롭지만 확신에 찬 진지가 되어야 한다. 이 운명으로부터 도망치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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