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반MB 연대는 진보의 '자기 부정'
        2010년 05월 23일 08:46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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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을 연구하는 사람이면 보통 꼭 관심을 집중하는 일군의 ‘코드’들이 있습니다. 사회 분야에서의 ‘교육열’이라든가, 정치 분야의 지역주의라든가, 그리고 경제에 있어서의 원-하청 이중 구조와 재벌체제 등등입니다.

    정체성 포기, 기회주의적 투표

    논문을 쓰거나 강의를 할 때에 보통 이 부분에 대해 꼭 언급을 하고 넘어가곤 합니다. 특히 비전문가들을 독자로 상정했을 때에는, 이 ‘코드’들을 설명하지 않고서는 계속 논리 전개할 수는 없지요. 그러나 – 요즘 지방 선거 유세전의 현상을 보면서 드는 생각입니다만 – 이 ‘코드’ 뭉치에다가 하나를 꼭 더 집어넣어야 합니다. 바로 ‘비지론'(비판적 지지론), 즉 스스로 ‘진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사표 심리 등등으로 인한 자기 자신의 본래적 정치 정체성 포기와 기회주의적 투표 현상입니다.

    물론 ‘비지론’을 순수한 국산으로만 생각할 수는 없지요. 대개는 어느 정도 주류 정치에 진입할 만큼 힘이 있는 진보(사회주의)정당이 없는 보수주의적 민주주의 국가마다 ‘진보 지식인’들이 좀 ‘비지론’이라는 정치적 질병을 앓게 돼 있습니다.

    대표적으로는 우리 상국을 예를 들 수 있는데, 거기 같으면 촘스키와 같은 ‘사림의 사표’마저도 ‘차악’이라고 하여 종종 대선을 앞두고 민주당 후보 지지 발언을 하곤 하죠. 물론 아방의 ‘비지론자’들보다 이 촘스키라는 분은 한 수 위라고 봐야죠.

    민주당을 차악이라고 부르면서도 "공화당과 마찬가지로 대기업의 정당일 뿐"이라고 꼭 못을 박곤 합니다. 그러니까 좋아서 지지하는 게 절대 아니라는 걸 일단 명확히 한다는 것이죠. 한국의 ‘온건한 진보’ 지식인들이 "위대한 민주주의자 노무현의 유지를 받들어" 창당되었다는 당을 지지한다고 했을 때에는 그렇게 입바른 소리를 대개 잘 하지 못합니다.

    실용을 내세우는 무리들이 권병을 잡든, ‘개혁’을 팔아 성공하겠다는 정객들이 다시 그리운 청와대를 되찾든 간에 경제, 사회 정책의 윤곽을 어차피 삼성경제연구소 등 이 나라의 실질적 권력자들의 브레인들이 그릴 것이라는 말을, 우리의 ‘얌전한 진보 지식인들’이 잘 못한단 말이죠. 그런 면에서는 같은 ‘비지론자’ 치고도 촘스키는 그나마 멋이있기라도 하지요.

    촘스키의 경우

    한국에서의 비지론 같으면, 큰 역사적 안목으로 본다면 사회주의자를 학살해버리고 진정한 진보정당들을 파괴시켜버린 독재 권력의 또 하나의 유산이라고 보면 됩니다. 여운형계가 남한에서 제대로 정계에서 남았거나 진보당이 ‘민족의 태양 이승만 박사’에게 완전히 박살나지 않았다면 김철수와 같은 거물 사회주의자가 신익희 후보 지지 발언을 했었겠어요?

    사회주의자가 몸을 둘 수 있는 ‘진보의 집’이 없기에, 어쩔 수 없이 차악이라고 생각하여 부르주아 자유주의자에게라도 ‘투탁’을 하는 셈이지요. ‘민족의 태양’이나 ‘조국 근대화 지도자’보다 그나마 근대적 합리성이라도 좀 있겠다 싶어서입니다.

    사실, 작년에 서거한 김대중 선생도 애당초에 그런 케이스에 속했죠. 원래 건준계, 즉 여운형 등이 지도한 범진보계에 속했다가 결국 진보가 다 박살이 난 시절에 한민당 후계자들에게 간 셈입니다. 또 김대중과 같은 카리스마적인 ‘약간 좌파적 자유주의자’마저도 주류 자유주의 정치에 몸 담았다는 것은, 1987년의 미완의 혁명은 민주노조의 성립으로 이어져도 민중 정당 창당으로 바로 이어지지 못한 이유 중의 하나가 된 것이지요.

    IMF 충격이 오고 김대중이 반민중적 신자유주의 노선으로 돌아서고 그 주류정치인으로서의 ‘본색’을 드러내자 드디어 거의 40년 만에 민노당의 창당으로 ‘혁신계'(개혁적 사회민주주의) 노선이 다시 소생된 것입니다.

    문제는, ‘민족의 태양’과 ‘조국 근대화’의 광기가 어느 정도 가라앉아도 극도로 보수적인 한국 정치의 전체적 ‘판’이 전혀 업그레이드되지 않았다는 점이죠. 구 민노당의 좌파민족주의자들도 계속 김대중계에 대한 ‘보조원 노릇’을 해왔지만, 분당 이후의 지금의 (잔류)민노당도 반세기 동안의 비지론을 전혀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민주노동당, 비지론 벗어나지 못해

    스스로의 무력함을 고백하고 주류 부르주아 자유주의자 ‘형’들에게 ‘몸과 마음’을 맡긴다는 게 이제 어떻게 보면 대한민국 자칭 ‘진보계’의 전통이 아닌 전통이 다 된 셈이죠. 이를 좋은 말로는 ‘반MB’ 전선이라고들 하는데, 저는 도저히 대북 정책 이외에는 MB가 그 전 자유주의 정권과 뭐가 그리 다른지를, 전혀 모르겠어요.

    예컨대 쌍용자동차를 보면, 파업 파괴를 MB때 했지만 쌍용의 비극의 씨앗이 된 해외 매각을 과연 누구 때에 했습니까? MB야 사라질 때가 되면 사라지고 또 새로운 극우 정객에 의해서 교체되겠지만, MB가 있든 없든 간에 이미 무한 경쟁의 정글이 다 된 대한민국의 전체적 상황이 전혀 개선될 것 같지 않다는 게 문제입니다.

    공기업 매각부터 국외 파병까지 거의 모든 반민중적 정책을 지지 내지 방관해온 부르주아 자유주의자들을 "비판적으로 지지한다"는 것은, 진보정당으로서는 일종의 ‘자기 부정’에 가깝습니다. 진보정당의 힘과 슬기란 한국을 신자유주의화시킨 사람들에게 들러리 서줄 정도 밖에 안된다면 그러면 진보정당을 굳이 할 필요는 뭐가 있겠습니까?

    그러한 측면에서는 ‘반MB 연합’에 참여한 자칭 진보 정치인에 대해서는 아주 실망하고 만 것입니다. 그리고 개인으로서의 ‘비지’는 결국 일종의 정치적인 ‘자아 포기’가 아닌가 싶어요. 정치란 꼭 권력을 획득하는 장만은 아니지 않습니까?

    정치라는 장에서는 사람마다 그 소신, 그 생각을 외면화시켜 타자들과의 소통과 연대를 모색하는 것이죠. 그러한 측면에서는 정치의 장이란 대자적 자아 형성의 장이기도 해요. 그래서 자신의 내면에 전혀 맞지 않은 정치인을 오로지 ‘사표 심리’ 등 정치공학적 고려 때문에 찍는다는 것은 결국 자율적인 자아 형성 및 외면화에 대한 스스로의 포기 정도입니다.

    에릭 홉스봄의 경우

    자율적 개인으로 살지 않겠단 이야기죠. 영국 사학계 석학 에릭 홉스봄이 영국 공산당의 집권 가능성을 믿어서 평생 공산당원으로 산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집권 가능성은 당연히 제로이었지만, 공산주의에 대한 꿈을 떠나서 홈스봄이라는 개인이 도대체 존재할 수 없었던 것이죠. 결국 그로서는 당비를 내고 공산당에 투표한다는 것은 자아의 외면화의 한 표현이었어요. 그는 그렇게 해서 세상과 소통한 것이죠.

    그런데 대한민국의 소위 진보적 지식인 중에서는 그렇게 살만한 용기가 있는 사람은 좀 적은 것 같아요. 압도적 힘에 머리를 숙이는 훈련이 하도 잘 돼서 그런 것인지, 어쨌든 ‘비지론’의 망령은 이 땅을 쉽게 떠나지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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