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구에 맞선 전문작가
        2010년 05월 20일 05:07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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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벌과 북학

    효종 이후 북벌론은 조선 사회의 이데올로기였다. 병자호란 때 청나라에 모욕을 당했기에 복수를 해야 한다는 게 그 단초였다. 그러나 당시 조선은 북벌을 감행하여 청나라와 일전불사를 할 능력을 가지고 있지 못하였다.

    효종은 송시열 등을 기용하여 북벌을 준비한다 하였으나, 실제적으로 진행된 것은 별로 없었다. 숙종 때 다시 북벌론이 등장하여 전담 기구가 만들어지기는 하였지만, 역시 실효성 있는 준비를 하지는 못하였다.

    북벌론은 실제적인 준비와는 관계없이 이데올로기적으로는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그것은 조선을 소중화(小中華)라고 자부하는 이데올로기의 정치적 표현이었다. 명나라가 멸망함으로써 중화는 사라졌고, 조선만이 중화주의적 문화를 간직하고 있는 나라이다. 중국을 지배하고 있는 청나라는 단지 오랑캐의 국가에 불과하다. 이런 주장이 조선 중후기를 이데올로기적으로 지배하는 논리였던 것이다.

    청나라와 접촉과 교류는 극도로 제한되었다. 그렇지만 정부 차원의 접촉은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때가 되면 선물 보따리를 한 아름 안고 정부 사절단이 청나라에 가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사절단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수행하기 마련이다. 수행원들은 자신들의 눈으로 직접 목격한 청나라의 현실을 입으로든 글로든 전파하는 역할을 하게 되었다.

       
      ▲ 박지원 초상

    조선 후기에 이르러 여전히 북벌론의 영향력이 지배적이기는 하였지만 새로운 주장이 제기되기 시작하였다. 박지원은 <호질>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지금 청나라가 중국을 통치한 지 4대가 되었지만 황제들은 모두 문무를 겸했고 오래 살았다. 지난 1백 년 동안 나라가 편안하였으니, 지금까지 잘 다스렸다고 알려진 한나라와 당나라 시대에도 없던 일이다. 이렇게 나라를 편안하게 안정시키고 하는 것을 보면 하늘에서 내려준 통치자이다.

    청나라를 오랑캐의 나라라고 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시각이다. 물론 박지원은 청나라를 폄하하는 발언을 여기저기에 서술해놓았지만, 그것은 북벌론이라는 칼날을 피하기 위한 것이었을 뿐이다. 박지원이 말하고자 한 것은 사실을 있는 그대로 보자는 것이었다. 청나라의 현실 역시.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모이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 박지원, 홍대용, 박제가, 이서구, 유득공, 이덕무 등의 학자들이 교류하면서 자신들의 생각을 발전시켜 나갔다. 그들은 청나라로부터 배울 건 배워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들을 가리켜 ‘북학파’라 한다.

    ‘북학’은 청나라를 정벌의 대상으로 보는 ‘북벌’과 대립되는 개념이다. 박제가는 아예 자신의 주저의 제목을 <북학의>라고 하였다.

    북학파의 주요 인물들은 집권 노론 소속이었다. 청나라와의 접촉이 극히 제한되어 있었기에, 주로 집권당의 인사들이 청나라를 드나들 수 있었던 사정을 반영하는 것이리라. 그렇다고 하여 청나라를 다녀온 사람들이 모두 북학을 주장한 것은 아니니, 북학파들의 열린 사고를 알 수 있다.

    무엇보다도 집권파인 노론 내에서 북학의 주장이 제기되었다는 점에 의미가 있다. 북학파는 단지 청나라에서 받아들일 건 받아들이자는 주장만 한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철학의 쇄신을 요구하였고, 세계관의 혁명을 주도하였다. 홍대용이 이 일에 앞장섰고, 박지원이 그것을 보다 명확하게 보여주었다.

    전문작가, 박지원

    박지원(1737년~1805년)은 학통으로는 이이의 6세대 제자이고 계열로는 인간과 동물의 본성이 같다는 낙론 계열이다. 그러나 홍대용과 마찬가지로 이런 학통과 계열은 박지원에게는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아들 박종채가 아버지 박지원의 생애를 기록한 <과정록>에 따르면, 박지원은 어렸을 적에 공부를 제대로 하지 않았다. 16세 때 결혼하고 나서야 본격적인 공부를 시작했는데, 장인에게서 <맹자>를 배웠고 처삼촌에게서 <사기>를 배웠다.

    그 뒤로 그는 자기 나름대로의 글을 써서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그는 과거시험을 준비하기 위해 글공부를 한 것이 아니었다. 주변의 성화에 못 이겨 마지못해 과거장에 가서는 답안을 다 쓰지도 않고 제출하는가 하면, 이상한 그림을 그리며 시험 시간을 때우기도 하였다.

    박지원의 관심 분야는 다른 데에 있었다. 요샛말로 하면 그는 전문적인 작가였다. 그가 쓴 소설은 오늘날까지도 잘 알려져 있다. 그는 <방경각외전>에서 자신이 쓴 소설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미치광이 행세를 하는 세 사람이 친구가 되어 떠돌아다니며 남의 비위만 맞추려는 세상 인심을 풍자하기 위해 <마장전>을 썼다. 먹고 살기 힘들어 굶주리던 선비가 높은 자리에 올라가면 탐욕스런 생활에 빠져버리는데, 엄 씨 성을 가진 사람이 똥을 치우면서도 깨끗하게 사는 것을 기리기 위해 <예덕선생전>을 썼다.

    <민옹전>은 뜬구름 같은 명예를 잡으려 하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자신의 처지와 비슷한 옛사람들의 이름을 써서 비분강개했다는 민옹을 빗대어 이상만 크고 실천하지 않는 자들을 풍자하기 위해 썼다.

    선비는 지조를 지켜야 하는데 오히려 자신의 지위나 문벌을 팔아먹는 시장 장사치와 다를 바가 없게 된 것을 보고 <양반전>을 썼다. 물욕과 명예욕에서 벗어나 초연하게 사는 것이 부러워 <김신선전>을 썼다. 거지가 명예를 얻으니 그 명예가 실제보다 부풀려져 세상을 떠들썩하게 하는 것을 보고 <광문자전>을 썼다. 우상이라는 사람이 비록 신분은 낮으나 문장에 힘써서 일찍 죽었음에도 그 이름이 일본에까지 알려지게 된 것을 보고 <우상전>을 썼다.

    세상이 기울어져 가고 있음에도 허례허식만 찾고 문장을 좀 쓴답시고 세상을 어지럽히며 출세나 꿈꾸는 자들을 풍자하고자 <역학대도전>을 썼다. 가난하더라도 부모에게 효도하고 아내와 서로 존경하며 열심히 농사짓고 가정생활을 잘 하는 사람은 글을 모르더라도 진정한 학자라는 의미에서 <봉산학자전>을 썼다.

    이렇듯 박지원은 소설을 통해 세상에 대한 풍자와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하였다. 특히 그는 신분제에 얽매이지 않고 참다운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말하고자 하였다. 그는 이 소설들을 20세 이전에 썼다고 한다. 그는 일신의 출세가 아니라 사회의 근본적 변화를 위해 학문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글쓰기는 전투이다

    전문적 작가 박지원은 글쓰기를 군대에 비유했다.

    글을 잘 쓰는 사람이면 병법을 알 것이다. 비유하자면 글자는 졸병이고 뜻은 장수이다. 제목은 적국이고 고사(故事)는 전쟁터이자 성루이다. 글자를 묶어서 구절을 만들고 구절을 모아서 장(章)을 만드는 것은 군대가 대오를 지어 행진하는 것과 같다. – <소단적치인>

    박지원이 글쓰기를 군대에 비유한 데에서 그가 보통의 글을 쓰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뭔가와 싸워서 이기기 위해 글을 썼다는 것이다. 그가 무엇과 싸우고자 했는가는 앞서 자신이 쓴 소설에 대한 소개에서 잘 드러난다.

    그는 기존 사회의 가치관, 제도 그리고 신분제적 질서 등과 싸우고자 한 것이다. 그것은 글을 통한 비판과 반란이다. 반란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전략전술이 필요하다. 비록 약해지기는 했지만 여전히 ‘사문난적’이란 딱지가 존재하지 않는가.

    따라서 그는 글 한 편 쓰는데도 세심하게 준비하고 이길 수 있는 작전 구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마치 군대를 지휘하는 것처럼. 박지원은 글쓰기에 있어서 모방을 경계하고 비판한다. 그는 다음과 같은 비유를 든다.

    관우의 동상을 보면 시뻘건 얼굴, 늘어진 수염이 완전 관우의 모습이다. 남자나 여자나 학질을 앓는 사람을 그 동상 아래 밀어 넣으면 겁을 먹고 벌벌 떠는데 학질로 인해 춥고 떨리던 증세마저 도망가 버린다. 그런데 어린 아이들은 무서운 줄 모른다. 동상의 눈망울을 굴려보고 콧구멍을 쑤셔본다. 그렇게 하여도 눈을 깜박이지 않고 재채기도 하지 않는다. 그것은 흙으로 만든 동상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 <영처고서>

    많은 사람들이 관우의 동상을 보고 관우라고 생각하여 앓던 학질이 떨어질 만큼 놀란다. 그러나 어린 아이들은 다르다. 눈망울도 만져보고 콧구멍에 손도 넣어보고 하여 그것이 동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아낸다. 앞의 사람들은 선입견에 사로잡혀 있다. 그러나 아이들은 스스로 경험을 통해 진리를 알아낸다.

    글쓰기 역시 마찬가지이다. 많은 사람들이 옛 문헌에 나오는 문구를 대단하게 여겨 그것을 베낌으로써 좋은 글이 된다고 생각한다. 박지원은 어린 아이의 예를 들어 그러한 자세를 비판한다. 눈앞에 놓인 현실을 직접 경험, 관찰하는 데서 좋은 글이 나온다는 것이다.

    박지원은 <초정집서>에서 "천지가 아무리 오래 되었어도 끊임없이 새롭게 생겨난다. 해와 달이 아무리 오래 되었어도 그 빛은 날마다 새롭다"고 말한다. 천지만물이 새롭게 생겨나므로 실제로 관찰하고 경험하여 그것을 글로 써야 한다. 새로운 사실과 경험을 옛 문헌에 나오는 구절을 이용하려 제대로 표현할 수는 없다.

    그래서 박지원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옛 것을 본떠서 쓴 글은 마치 거울에다 모습을 비추어 보는 것과 같다. 그것은 비슷해 보이지만 좌우가 서로 반대이니 비슷한 것이 아니다. 본말이 거꾸로 나타나니 어찌 비슷하다고 하겠는가. – <녹천관집서>

    그가 주장하고자 한 것은 창조적인 글쓰기이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 변화하는 현실을 끊임없이 탐구하라는 것이다.

    박지원의 글은 당대에 이미 파장을 불러 일으켰다. 정조는 그가 쓴 <열하일기>를 읽고 "근래에 문체가 타락한 것은 박지원의 죄이니 제대로 된 문체로 속죄의 글을 쓰라"고 명령하였다. 일부 학자들은 <열하일기>를 불태워 버려야 한다고까지 하였다.

    이에 박지원은 "벼슬을 하지 못하여 궁핍하고 심심해서 자신의 처지에 대한 불평을 늘어놓거나 남을 웃기기 위해 장난거리로 쓴 것"이라며 납작 엎드려 반성한다고 했다. 기회주의적인 처신처럼 보이지만, 나름대로는 작전이었다. 자신을 잔뜩 낮춤으로써 풍자와 사회적 비판으로 가득 찬 글 자체는 공격을 피하고 유지될 수 있게 하였던 것이다.

    인간이 선한가, 동물이 선한가

    홍대용은 사람과 사물을 하늘에서 바라보라고 하여 상대적 관점을 주장하였다. 박지원은 아예 관점 바꾸기를 시도한다. 그는 "사물에서 나를 보면 나 또한 사물이다" 하고 말한다. 기일원론에 입각하여 볼 때 사람과 사물은 같다. 그러나 사람과 사물은 또한 다르다. 따라서 사람의 입장에서 사물을 볼 수도 있고, 사물의 입장에서 사람을 볼 수도 있다.

    홍대용이 사람이 가져야 할 관점을 제시하는데 그쳤다면, 박지원은 사물의 관점에서 인간을 보자고 한 것이다. 이런 관점 바꾸기는 홍대용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도덕성을 절대 불변의 가치로 보는 독선에 대한 비판이다.

       
      ▲ `맹호도’ (오동섭 作)

    박지원은 아예 "만물 가운데 삶을 누리는 것에 선하지 않은 게 없다"고 말한다. 인간만이 선한 본성을 갖는 게 아니고 삶을 누리는 모든 것이 선하다는 얘기이다.

    이런 박지원의 주장이 집약적으로 드러난 글이 소설 <호질>이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호랑이이다. 호랑이는 말한다. "이 세상의 본성은 한 가지이다. 호랑이의 성품이 악하다면 사람의 성품도 악할 것이요, 사람의 성품이 착하다면 호랑이의 성품도 착한 것이다."

    인간과 동물의 본성이 같다는 얘기이다. 이렇게 전제한 후 호랑이가 인간을 질타한다.

    호랑이가 표범을 잡아먹지 않는 이유는 자신과 같은 무리를 차마 희생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호랑이가 잡아먹는 사슴과 노루는 사람이 잡아먹는 것보다 많지 않다. 호랑이가 잡아먹은 말의 숫자가 사람이 잡아먹은 것에 비해 훨씬 적다.

    호랑이가 사람을 잡아먹는 숫자는 사람이 서로 잡아먹는 숫자에 비하면 훨씬 적다. 지난해 관중에 큰 가뭄이 들자 사람들이 서로 잡아먹은 숫자가 수만 명에 이른다. 그 전 해에 산동 지방에 큰 홍수가 나자 수만 명의 사람들이 서로 잡아먹었다. – <호질>

    호랑이와 인간 중에서 누가 선한가. 호랑이는 삶을 누리는데 필요한 만큼만 잡아먹는다. 삶을 누리는데 필요한 만큼만 먹는 호랑이는 선하다. 그러면 인간은 어떠한가. 삶을 누리는 데 필요한 것 이상의 것을 잡아먹는다. 호랑이는 동족을 잡아먹지 않지만, 인간은 같은 인간을 잡아먹는다.

    호랑이의 질타는 계속 된다.

    자기 물건이 아닌 것을 가져가는 것을 도둑이라 한다. 생명을 해치고 물건을 강제로 빼앗는 것을 도적이라 한다. 너희들은 밤낮으로 바쁘게 돌아다니며 팔을 걷어붙이고 남이 물건을 함부로 빼앗으면서도 부끄러운 줄을 모른다. 어떤 자는 돈을 보고 형이라 부르고, 어떤 자는 자기 아내를 죽여서 장수가 되려고 한다.

    관점 바꾸기

    호랑이가 훈계하고 있는 대상은 북곽이라는 유학자이다. 그는 나이 마흔 살에 만 권의 책을 교정보았고 경전에 뜻을 달아 만오천 권의 책을 저술하였다. 대단한 학자 같지만 자신만의 저술은 없다. 그는 과부와 간통하다 발각되어 도망을 치다 호랑이를 만나게 되었다. 그가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가운데, 호랑이의 질타와 훈계가 시작되었다.

    호랑이는 유학자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음과 양은 한 가지 기운에서 나왔는데 그들은 그것을 둘로 나누었으니 그 고기는 순수하지 못하고 잡스러울 것이다."라고. 이기이원론을 주장하는 유학자들에 대한 비판이다. 만물의 이치를 잘못 파악하고 있으니 순수하지 못하다는 얘기이다.

    그런 다음 유학자들이 세상에 주는 폐해에 대해 이렇게 비판한다.

    부드러운 털을 빨아 가지고 아교풀에 붙여 날카로운 모양을 만드는 데 그 길이는 한 치가 안 된다. 이것을 오징어 먹물에 담갔다가 가로세로로 찌르고 치고 하는데, 칼같이 날카롭고 창같이 굳고 화살같이 곧고 활처럼 팽팽하다. 이것이 한 번 움직이면 귀신들이 밤에 나와 울 정도로 가혹하다. 사람끼리 서로 못살게 하는 것보다 더 큰 괴로움이 있겠는가.

    여기에서 부드러운 털은 붓을 말한다. 붓은 부드러운 것이지만, 이것을 사용하는 유학자들에 의해 칼처럼, 창처럼, 활처럼, 화살처럼 되어 사람을 괴롭힌다.

    그러면 유학자의 붓은 누구를 괴롭히는가. 여기에 관점 바꾸기를 시도하는 박지원의 의도가 담겨있다. 성리학은 사람의 입장에서 동물을 보게 하고, 유학자의 입장에서 백성을 보게 한다. 그러나 박지원의 관점 바꾸기는 동물의 입장에서 인간을 보고, 백성의 입장에서 유학자를 보는 것이다. <호질>에서 호랑이가 북곽을 질타하는 것은 인간의 악행에 대한 질타일 뿐만 아니라 백성의 입장에서 유학자를 질타하고 있는 것이다.

    성리학에서 인간과 유학자가 중심이고 동물과 백성이 주변이다. 홍대용은 이런 중심-주변 관계를 부정하여 그 둘을 동등하게 보라고 하였다. 박지원은 아예 관점을 바꾸어 버린다. 물론 그것이 뒤바뀐 중심-주변 관계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는 "삶을 누리는 모든 것이 선하다"라고 하지 않는가. 박지원은 관점 바꾸기를 통해 동물이 사람을 질타하고 백성이 유학자를 비판하는 형식으로 철학의 혁신을 보여주고자 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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