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반MB, 희망이 아니라 절망이다"
        2010년 05월 17일 11:16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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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MB 담론이 유일한 희망처럼 얘기되고 있다. 그것의 발화자들은 주로 현 정권 이전 10년 동안 집권했던 세력들이다. 거기에다 소위 말하는 주요 시민단체들이 강력한 외부 우군으로 ‘연대’하고 있다. 물론 적지 않은 유권자들도 이에 동의하고 있다.

    하지만 진보신당이나 사회당에게는 이 같은 반MB 담론이 희망이 아니라 족쇄로 작용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진보정당 통합’을 강조하던 민주노동당이 민주당과 정치적 연대를 이룬 이후, 진보신당의 고민은 더 커진 듯하다.

    눈앞의 선거에 승리하기 위해 정치 집단들은 웬만한 일은 다 한다. 반MB 담론이 당장의 선거 ‘투쟁’에서 지지자를 모아낼 수 있는 유력한 도구가 될 수는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선거에서 유력한 도구라는 사실과 한국 민주주의의 발전 사이에는 모순 관계가 성립될 수도 있다.

    선거 구호로서 요란하게 울려 퍼지고 있는 ‘반MB’ 나팔 소리의 본질을 본격적으로 분석해볼 필요가 있다. 이게 드러내는 것과 은폐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따져볼 필요가 있다. 선거를 위해서도 그렇고 한국 민주주의를 위해서도 그렇다. <레디앙>이 ‘반MB’ 담론을 몇 차례에 걸쳐 집중 분석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편집자 주>

    1.

    누군가 필자에게 이번 지방선거의 가장 큰 특징을 말하라면, 진보가 배제 혹은 소외된 정치경쟁의 구도가 실현된 점을 꼽고 싶다. 흥미로운 것은 그것이 보수에 의해서가 아니라 넓은 의미의 진보 내지 진보 개혁 세력 내부에서 만들어졌고, 이를 가능케 했던 것은 속칭 ‘반MB’라고 불리는 강력한 반정부 투쟁론이었다는 사실이다.

    그 결과 향후 한국정치는 미국이나 일본과 유사한 ‘진보정당 없는 민주주의’로 귀착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이번 선거에서 진보 후보들의 표가 어떻게 나타날까 하는 문제보다 이 점을 훨씬 중요하게 고려해야 한다고, 필자는 본다.

    2.

    권위주의 시절의 민주주의는 반체제를 특징으로 하는 것이었다. 그 시절 민주화는 곧 전복적인 열정을 나타내는 말이었다. 민주화가 된 이후 상황은 달라진다. 정치체제에 참여하는 문제가 더 중요해지고 결국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는 정치체제의 운영권을 둘러싼 다툼 내지 경쟁의 내용을 더 많이 갖게 되는 것으로 귀결된다.

    그러면서 상대를 절멸하고자 하는 태도를 갖는 세력은 정치의 장에서 힘을 갖기 어렵게 되며, 공존을 전제로 한 경쟁에서 유능함을 발휘하는 자가 승자가 된다. 초기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민주주의를 거부했던 많은 사례들에서 볼 수 있듯이, 민주주의만큼 혁명에 대한 가장 확실한 안티테제는 없다.

    결국 민주주의가 지속될수록 점진주의적 진보파만이 살아남고 ‘관용’, ‘타인에 대한 정중함’, ‘상호성’ 등의 가치는 움직일 수 없는 규범으로 자리 잡게 된다. 필자가 아는 한 민주주의의 역사가 비교적 오래된 나라들의 사례를 놓고 볼 때, 이를 벗어나는 경향을 발전시킨 나라는 없다.

    민주주의와 혁명

    이 점에서 반MB는 민주주의의 규범과는 거리가 있는 접근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마치 과거 보수파들의 잘못된 열정으로 표출된 ‘반DJ’나 ‘반노’와 크게 다를 바 없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 인격적 모독과 인간적 무례함 속에서 우리가 발견했던 것은 우리 사회 보수파가 갖는 권력 상실에 대한 극도의 두려움 내지 적대감이었는데, 형태는 다르지만 내용적으로 별다르지 않은 반MB 담론이 진보와 개혁 세력 사이에서 자유롭게 유통되었다는 사실은 부끄러운 일이라 생각한다.

    현직 대통령이나 보수를 존재해서는 안 될 ‘악의 축’으로 보는 태도는 권력을 상실한 개혁파나 누구보다 강한 반정부성을 자랑하고 싶은 진보진영 내부자들에게는 자연스러울지 몰라도 보통의 상식을 갖는 시민들에게는 매우 부정적인 효과를 미쳤다고 생각한다.

    집권 2년 반을 지나고 있는데도 역대 정부와는 달리 현직 대통령이 급격한 지지율 하락과 같은 사태를 맞지 않고 있는 데에는, 지금 정부와 대통령이 잘해서라기보다 반대세력의 잘못과 과도함이 훨씬 크게 작용하고 있다는 게 필자의 생각이다.

    3.

    민주주의는 ‘다수 지배’의 형식으로 실현된다. 그런데 그때의 다수는 수많은 소수파들로 이루어져 있다. 따라서 내용적으로 보면 다수 지배는 ‘소수파들의 지배’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다수를 형성하고 정치경쟁에서 승리하는 문제는, 잠재적 다수를 구성하는 내부의 이견과 차이를 조정하고 통합하고 변화시키는 과정을 어떻게 잘 하느냐에 달려 있게 된다.

    더 중요한 것은 그러한 이견과 차이가 민주정치가 치러야 할 어쩔 수 없는 비용이나 장애가 아니라 거대한 에너지원이라는 사실을 이해하는 데 있다. 논리적 순서를 제대로 해서 말하자면, 그러한 이견과 차이를 다루면서 광범한 대중의 에너지와 힘을 조직하는 것이 민주주의가 갖는 역동성의 비밀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정치에서 이견을 다루는 방법에는 크게 두 방법이 있다. 하나는 이견을 부정하고 억압하는 방법이다. 총화단결을 강조하고 연합이라는 대의를 위해 이견과 차이가 희생되는 게 필요하다는 태도 등이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다른 하나는 이견의 시민권을 인정하고 상호 조정하는 방법이다. 여기에도 두 방법이 있다 하나는 각각의 견해를 일정한 영향력으로 환산해서 거래하고 타협하는 방법이다. 다른 하나는 현재의 협의와 토론을 통해 현재의 이견을 변화시켜 새로운 견해를 형성하는 방법이다. 전자의 경우 조정 이후에도 기존의 이견은 그대로 존재하는 반면 후자의 경우에는 이견의 구조나 분포 자체가 달라진다는 차이가 있다.

    시민 원로 사제적 권력의 반민주성

    반MB 연합 논의는 기본적으로 이견을 억압하는 형태로 이루어졌다. 악의 축에 대항하는 공동전선이 도덕주의적으로 강요되었고 따라서 협력과 연대는 무조건적이고 절대적인 가치가 됨으로써 그 자체 매우 강한 이데올로기적 권력효과를 낳았다.

    이 과정에서 시민운동 원로를 자임하는 사람들의 역할은 컸다. 그들이 발휘했다고 알려진 영향력의 기초는 물론 역사적 요청을 대행하는 윤리적 명령이었다. 선출된 대표에게 권력을 위임하는 민주적 규범과는 거리가 있는 일종의 ‘사제적’ 권력 행사의 유형이라 할 수 있다.

    흥미로운 것은 반MB 연합이 후보단일화의 문제로 집약되었을 때, 누가 왜 후보가 되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에 대한 윤리적 기준은 사라지고 후보가 누가되든 결과만 좋으면 된다는 무규범적 공리주의 내지 맹목적 성과주의로 전면화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다보니 후보 조정의 최종 단계는 어느 후보가 더 협박 능력이 강한가를 시험하는 차원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의 부정적 결과는 반MB 연합 내부적으로는 경선이라는 민주적 후보선출 과정을 무의미하게 만들고 다른 한편 외부적으로는 진보정당들을 포함한 약한 정치세력들을 희생시키는 것으로 이어졌다.

    이 상태가 지속된다면, 이번 선거 이후 한국의 정당체제는 이명박 정부를 중심에 두고 김대중 정부(민주당)와 노무현 정부(국민참여당), 나아가 박정희 정부(박근혜당)라는 과거 세력들이 경합하는 구조로 퇴락해 버릴 가능성이 높다.

    4.

    반MB가 이견을 억압하는 형태로 이루어짐에 따라, 한편으로 집권세력 대 반MB 세력 사이의 정치적 적대는 격렬하게 나타나는 반면 다른 한편 일반 대중들의 참여는 오히려 위축되는 이상한 결과를 낳았다. 정치학에서는 경쟁이 참여를 자극하는 기제로 작용한다는 점에서 경쟁을 민주주의의 엔진으로 간주한다.

    그런데 한국정치에서 지금의 경쟁 구도는 대중 참여를 오히려 약화시키고 언론의 영향력에 대한 의존을 높이며 나아가서는 자신들의 독점적 지지 시장을 갖고 있는 정당들 사이의 퇴행적 다툼으로 이끌어내고 있다.

    이런 선거가 사람들에게 적극적인 열정을 갖게 만들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당장 지난 주 마감된 후보등록 상황만 봐도, 지난 지방선거에 비해 자유선진당, 국민참여당, 진보신당 등 새로운 정당이 더 생겼음에도 불구하고 출마자 비율은 크게 낮아진 것으로 나타났다.

    출마자 비율이 낮아진 이유

    유권자는 어떨까. 중앙선관위가 방송을 통해 내보내고 있는 투표 참여 독려 광고를 보면, 4명씩 두 번 나눠서 기표하는 선거 방식이 쉽고 편하니 이제는 ‘투표로 말하라’고 하는데, 필자가 보기에 이는 그야말로 현실을 호도하는 것이 아닐 수 없다.

    필자가 사는 선거구를 기준으로 말한다면 8명을 선택해야 하는 이번 선거에서 필자가 놓고 고민해야 할 후보의 숫자는 23명에 이른다. 그런데 그 가운데 이름이라도 들어본 사람은 3명에 불과하다. 나머지는 무슨 세탁기 세제 고르듯 선택해야 할 판이다.

    물론 선관위는 각각의 후보들이 만든 홍보물과 공약자료를 우편으로 보낸단다. 선거법의 규정대로 모두가 다 보낸다면 아마 그 분량은 500쪽 가까이 될 것이다. 과거 선관위가 보낸 후보 관련 우편물을 받아본 사람이면 알겠지만, 그런 자료를 보고 투표 결정을 하긴 어렵다. 이번 선거에서 대부분의 유권자는 누군지로 모르는 후보들 이름을 놓고 장막으로 가려진 ‘기표소 안에서의 고독한 독백’을 해야 할 가능성이 높다.

    이런 선거를 민주적이라고 할 수 있을까. 누가 이런 선거에 책임을 져야할까. 많은 원인이 있겠지만, 굳이 반MB 연합을 두고 말하자면 그것은 한국정치의 희망이기보다는 절망에 좀 더 가까운 결과를 낳았다는 게 필자의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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