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광주가 지면, 이 땅과 인류의 반이 진다”
        2010년 05월 14일 01:23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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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망각에 저항하는 기억들

    5․18 광주 민중항쟁은 ‘과거’로써 완료된 듯하지만, ‘현재’로써 변혁의 기억을 환기시킬 수 있다. ‘기억’과 ‘해석’이라는 측면에서 광주의 경험은 한국사에서 희귀한 것이기도 하다. 이제 어느덧 30년을 맞이하게 된 5․18 광주 민중항쟁은 지금의 현실에서 어떻게 다시 의미화될 수 있을까? 문학이 그 ‘기억’과 ‘해석’을 단초를 제공해 줄 수 있으리라 믿는다.

    민주주의와 한국사회를 놓고 봤을 때, 5․18 광주 민중항쟁은 여전히 사건을 둘러싼 힘의 역관계 속에서 긴장하고 있다. 그 긴장은 문학작품을 통해 핍진하게 재해석될 수 있을 듯하다. 역사를 바라보는 시선에서 ‘객관적’이라는 것은 자신을 개입시키지 않은 것이기에 유보적일 수밖에 없다.

    이러한 ‘가치판단 유보’가 동시대인들의 삶을 규정하고 있음에도, ‘입장 없음’이라는 태도 속에서 ‘삶의 진실’을 회피하는 수단이 된다. 동시대인으로서 우리는 5․18 광주민중항쟁이 발발한 지 30년을 맞는 2010년에 살고 있지만, 80년 광주의 경험이 촉발시킨 ‘민주주의를 향한 의지와 국가 폭력 간의 충돌’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으로 토의되어야 한다.

       
      ▲ 사진=5.18기념재단

    ‘국가와 폭력’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5․18 광주민중항쟁은 완결되지 못한 사건이고 앞으로 완결될 수 없는 사건이기도 하다. 광주의 기억은 국가가 나서서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를 만들어서 보상을 한다고 해서 종결되거나,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위원회’에서 사실적 진상규명을 해냈다고 해서 망각의 바다에 놓아둘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잊지 않으려는 노력의 가치

    지금은 ‘광주가 잊혀지고 있는 시대’이지만, ‘광주를 잊지 않으려는 노력’이 여전히 가치 있는 시대이기도 하다. 그 상처를 어루만짐으로써, 국가 폭력에 대해 끊임없이 성찰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기에 광주를 형상화한 소설은 시대에 대한 증언이면서 인간에 대한 증언이기에 되짚어 볼 가치가 있다.

    비극적 세계관과 풍자적 기법의 임철우 소설, 계급적 관점의 완결을 지향하는 홍희담, 광주문제 재해석을 통해 새로운 화해를 모색하는 정찬, 그리고 2000년대 들어 젊은 감각으로 재현되는 김연수의 광주 등은 흥미로운 논의의 대상일 것이다.

    이들은 각각 1980년대초, 1980년대 중반, 그리고 1990년대, 2000년대에 이르기까지 ‘광주문제’를 형상화한 주목할 만한 작품을 남겼다. 광주는 이들 작가들에게만 목울대를 울리는 아우성인 것은 아니었으리라. 하지만, 이들의 작품에 초점을 맞춰 논의를 진행하고자 한다.

    이 글은 임철우의 「봄날」(1984)과 「수의(壽衣)」(1987), 홍희담의 「깃발」(1988)과 「그대에게 보내는 편지」(1995), 정찬의 「완전한 영혼」(1992), 「슬픔의 노래」(1995)를 통해, 특정 시기의 문학이 어떤 방식으로 광주를 기억했는가를 추적할 것이다. 더불어, 문학 속에서 재현된 광주의 경험이 어떤 보편적 울림을 전할 수 있는 지에 관해서도 논의하고자 한다.

    2. 죄의식이 어떻게 인간을 주체화할 수 있을까

    소설은 시보다 더디다. 이 ‘더딤’은 소설이 역사적 사건에 대한 반응에 있어 총체성을 지향하기 때문이다. 흔히 1980년대 초를 ‘시와 무크의 시대’라 규정되는 것도 역사적 사건에 대한 소설의 느린 반응 때문일 것이다.

    시는 광주의 그 사건 중에 작자미상의 구전시(口傳詩) 「민주의 나라」, 강제진압 직후 <전남매일신문>에 실린 김준태의 「아아 광주여 우리나라의 십자가여」 등을 통해 강력한 응전력(應戰力)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소설은 1984년까지 닫힌 입을 열지 못하는 무거운 침묵을 지켜왔다.

       
      ▲ 임철우의 「봄날」

    1984년 유화국면, 그리고 재갈은 풀렸다. 1984년 발표된 임철우의 「동행」, 「직선과 독가스」(세계문학, 1984년 겨울), 그리고 「봄날」(실천문학, 1984년 겨울), 「사산하는 여름」(외국문학, 1985년 여름) 등은 소설이 광주와 대면하면서 부르짖은 최초의 신음소리였다.

    ‘광주’를 형상화한 초기작이면서, 연작의 형식을 띠고 있는 「봄날」(1985)과 「수의(壽衣)」(1987)는 주목할 만한 작품이다. 어느 작품보다 임철우의 특징들을 잘 드러내면서도 대상에 접근하는 작가의 태도 변화가 명확히 보이는 작품들이기 때문이다.

    이 작품들을 통해 한 사건에 대한 작가의 집요한 집착을 엿볼 수 있고, 1984년과 1987년이라는 시대상황의 변화가 작가에게 미친 미세한 변화의 결을 느낄 수 있다. 또, ‘광주’에 대한 1980년대의 보편적 정서를 임철우의 작품을 통해 도출할 수 있다.

    개별적이면서도 보편적이었던 죄의식

    「봄날」은 오월에 죽은 명부로 인한 상주의 정신분열증(精神分裂症)을 추적한다. 상주의 죄의식은 개별적이면서도 1980년대의 보편적 감성이기도 했다. 임철우는 죄의식에 허우적대는 한 개인이 어떻게 자신의 육체와 정신을 마모(摩耗)시키는가를 통해, 1980년대의 훼손된 육체와 정신을 이미지화해 했다. 상주에게 광주는 과거의 사건이면서 현실을 잡아당기는 끈이 된다.

    이 소설에는 한 인간의 의식을 어지러운 낙서로 채워버리는 광기에 관해 이야기 한다. 그 광기의 주인공은 상주다. 하지만, 상주는 바로 나이고, 병기이고, 순임이기도 하다. 그리고 1980년대를 산 우리 모두였다. 단지 상주는 보다 섬세하고, 여리고, 민감했을 뿐이다.

    상주야아……상주야아……나야. 내가 왔어. 문 좀 열어줘……상주야아아. 하지만 안에서는 아무런 기척도 귀에 잡히지 않는다. 두두두두두…… 소리는 점점 가까와 오고 명부는 더욱 다급히 상주를 부르며 문을 흔들어 대기 시작한다. 상주야아……상주야아아. 나야. 문좀 열어달라니까. 대문이 덜컹덜컹 흔들린다. 그러나 여전히 안에서는 기척이 없다. 나야…… 내가 왔다니까. 늦기 전에 어서……무,문좀 열어줘.(임철우, 󰡔그리운 남쪽󰡕, 「봄날」, 문학과 지성사, 1985, 145쪽.)

    상주의 의식 속에 있는 비극적 상황이 가져다준 상처는 깊다. 계엄군에 쫓겨 찾아온 명부에게 문을 열어주지 않은 그때의 상황은 부끄러움을 넘어 죄악의 차원에 이른다. 그것은 1980년 5월이 남긴, 사람들의 가슴에 인두질된 원죄(原罪)이리라.

    광주라는 원죄는 “그림자처럼 내 등뒤에 바짝 붙어서 언제 어디서나 끈질기게 내게 속삭인다. 번잡한 거리를 걷거나 육교를 오르내릴 때도, 책을 읽거나 밥상 앞에 앉았을 때도 ……” 어김 없이 붙어 다닌다. 그렇다면, 누가 그런 죄의식을 강요했을까?

    물론, 임철우 소설의 주요한 소설적 탐구 대상은 개인이다. 개인의 ‘비겁’ ‘부끄러움’ ‘죄의식’이 광주문제와 관련된 그의 소설에 끊임없이 나온다. 그에게 적(敵)은 명부를 죽인 ‘총칼’이 아니라 문을 열어주지 못한 ‘비겁함’이다. 「불임기」에서도 문을 열어주지 못한 부모의 ‘굴욕’이 똑같이 등장한다.

    1980년대의 정신분열증

    「사산하는 여름」에서도 팽팽한 긴장속에 ‘민중병원’ 앞에 모였던 수 많은 군중들이 ‘아으으으으……읏’하는 민방위 훈련 사이렌 소리에 ‘모래벽이 허물어지듯 빠른 속도로 해체’되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체제’와 ‘이데올로기의 폭력’앞에 나약하기만 한 개인들의 모습을 허무적으로 보여준다. 이들 소설에 나타나는 인물들에게는 체제와 당당히 대면하는 모습은 없다. 단지 상처받은 개인으로 존재할 뿐이다. 모두들 문을 열어주지 못하고 ‘닫힌 공간’에 자신을 내몰고 있다.

    그 ‘닫힌 공간’의 의미는 상주의 ‘한적한 기도원’이거나 ‘병원’일 수도 있고 ‘닫힌 의식’일 수도 있다. 그리고 항쟁 중에 고립돼 있었고 항쟁 이후에도 수년간 고립된 채로 방치돼 있던 ‘광주’가 상주의 닫힌 의식으로 형상화된 것이기도 하다.

    막다른 골목에 몰려 갈 곳을 잃고 ‘내부적 쟁투(爭鬪)’에 닫혀 버린 상주의 의식은 일상속에 정상적인 삶을 살아가는 살아남은 자들의 숨겨진 원죄의식을 적나라하게 폭로한 것이다. 즉, 임철우 소설 속 개인은, 살아남은 자들의 슬픔을 감각하는 우리 모두였던 것이다.

    ‘광주‘에 대한 진상규명 논의가 국회에서 있기 전까지, 광주는 철저한 금기였다. 그 금기를 깨뜨리지 못한 상황은, 명부에게 문을 열어주지 못한 상황과 대비된다. 지금은 광주를 스스럼 없이 이야기할 수 있지만, 1980년대의 온 시기 동안 광주에는 빗장이 걸려 있었다. 금기를 만든 이는 권력이었지만, 스스로 빗장을 지른 이들은 우리 모두였다. 상주의 정신분열증은 실제로는 1980년대의 정신분열증이었다고 할 수 있다.

       
      ▲ 사진=5.18기념재단

    민주화 이후 광주 문제

    닫힌 공간에서 발버둥 치는 「봄날」과 좋은 대비를 보이는 작품이 1987년에 발표된 「수의(壽衣)」다. ‘봄날.2’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이 작품은 정신병원에 있던 상주가 의사의 퇴원통보를 받고 자신을 돌아보는 것으로 돼 있다. 「봄날」이 나의 시선을 통해 본 상주의 의식 세계라는 구도를 취하고 있다면 「수의(壽衣)」는 상주가 자신의 의식세계를 스스로 펼쳐 보인다.

    이 작품에는 민주화의 열풍 속에서 광주문제에 대한 작가의 대응양식이 변하고 있음을 적절히 보여준다. 「수의」에서는 그간 은유적이고 암시적으로 제시되어 왔던 항쟁 당시의 모습이 “만세소리, 박수소리, 환호소리를 들으며 감동에 겨워 주먹으로 눈등을 훔쳐내는” 감격으로 직접 제시되어 있다. 무엇보다도 태도의 변화는 병기의 언술에서 직접적으로 드러난다.

    죽은 자들과 산 자들의 소원은 아직도 풀리지 않은 채 그대로 엉켜 있고, 살아있는 자거나 죽은 자거나 똑같이 폭도나 부랑배가 되어, 시체처럼 강제로 수의를 뒤집어 쓰고 살아가고 있어……그런데도, 넌 끝내 네 자신의 악몽 속으로 도망쳐 들어가 숨어 있어야만 하겠니? 아냐. 그건 안될 말이야. 끝나지 않았어. 아무것도. 싸움도 끝나지 않았고, 네 몫의 일 역시 그대로 남아서 널 기다리고 있어……상주야. 어서 네 자신의 감옥으로부터 걸어나와서 우리들에게로 돌아오렴. 난 그러리라는 걸 믿고 있어. 상주야……(임철우, 「壽衣」, <문예중앙>, 1987년 가을호, 1987, 53 ~ 54쪽.)

    마음의 감옥을 파괴하고 자기 몫의 일을 찾는다는 것은 살아남은 자들의 의무다. 바로 이 지점에서 1980년대 광주는 ‘슬픔’에서 ‘의무’로 변화해 나간다. 자폐증적(自閉症的) 답답함에서 열린 가능성의 길목으로 들어서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상주는 “악몽만 같은 그런 기억으로부터 멀리멀리 도망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느끼며 주저한다. ‘도피(逃避)’가 아닌 ‘대결(對決)’이 필요하다는 것을 감지하면서 두려움을 느낀 것이다. ‘밖을 내다봐, 상주야.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어’라는 병기의 말에 대한 소설 말미(末尾)의 상주의 대답은 이러한 주저함과 가능성을 함께 암시한다.

    정말……늦지 않았을까? …… 아직?
    상주는 불현듯 그렇게 중얼거렸다. 갑자기 형언키 어려운 어떤 그리움으로 울컥 목이 메여왔다. (66쪽.)

    끊임없이 내부적으로 함몰해 가던 임철우의 비극적 세계관이 극복(克服)의 한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1984년과 1987년의 한국사회는 3년이라는 시간의 흐름을 넘어서는 변화를 경험했다. 이러한 변화의 연장선상에서 임철우의 내적 변화도 이해될 수 있다. 실제로 임철우의 변화는 1980년대적 감성의 변화를 대표하는 것이기도 하다. 87년 6월 항쟁 이후 한국사회는 그제서야 광주의 부채를 ‘저항의 감성’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싹을 틔워낸 것이다.

    1987년 이전의 광주문제를 다룬 소설들은 두가지 특징을 공유하고 있었다. 서술형식이 방관자나 관찰자적 입장을 취하고 있으며 1980년 광주에 대한 부채의식, 죄의식 속에서 ‘죽지 못 한 자의 번민’이 주요한 테마였다. 그러나 「수의(壽衣)」는 기존의 양식에서 벗어나 있다. 이는 1987년 이후의 변화된 상황을 반영한 것이기도 하다. 1988년 말에 이르면, ‘광주’에 대한 언급 자체가 금기(禁忌)에 대한 도전이던 때는 지나갔다. 1988년 11월 제13대 국회에서 ‘광주 청문회’가 개최되면서, ‘광주’는 복권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 상주는 자신의 얘기를 들려주면서 병기와 광주를 기억하려 한다. 이제 작품은 표면상 불안함과 주저함의 정서가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과거의 상처와 당당히 맞서려는 태도를 갈무리하고 있다. 또 부채의식도 끝나지 않은 싸움에 대한 살아남은 자의 의무로 변화된다. 문을 완전히 열어젖히지는 못했지만 빼꼼이 열고 밖의 상황을 모색하려 하고 있음을 「수의(壽衣)」는 보여준다.

    3. 저항하는 주체의 탄생

    광주문제 소설은 변화된 시대를 맞는다. 87년 6․29로 대별되는 정치적 변화 이후 6공화국은 폭력적 억압이 아닌 ‘의사개량정책’을 표방하며 한국사회를 도닥거린다. 6공화국 정권은 문학, 운동권, 출판물 속에서만 논의되고 성토(聲討)돼 왔던 광주문제를 공식적으로 도마위에 올려놓기 시작했다. 이제 소설 속의 광주도 중심부를 파고든다.

       
      ▲ 홍희담의 「깃발」

    이 과정에서 홍희담의 「깃발」(1987)은 1980년대 문학의 한 전형을 형성한다. 숱한 평자들의 찬사와 질타를 함께 받은 이 작품은 당시의 사회과학적 성과를 집약적으로 형상화하면서 ‘노동자들의 부상(浮上)’에 주요한 방점을 찍고 있어 특징적이다.

    당시 이 작품을 수록한 <창작과 비평>은 이 중편을 “광주의 5월을 민중의 시각으로 보는데 크게 진일보한 뜻 깊은 수확”이라 했고, 최원식은 「광주항쟁의 소설화」에서 “노동자의 눈으로 광주항쟁의 역사적 의미를 침통하게 추적하고 있는 이 작품은 여러모로 획기적”이라고 상찬했다.

    깃발은 힘차게 펄럭인다. 그러나 그 팽팽한 긴장은 위태로움을 자아낸다. 곧 찢길 것 같은 위태로움 같은 것이 그 흔들림에 내재해 있었다.

    80년 광주의 중심부에서 주위를 에둘러 보는 「깃발」은 이전의 광주문제소설과는 확연한 변별력을 가진다. 순분과 형자를 비롯한 여성노동자들이 화자(話者)로 등장해 항쟁 이 본격화됨에 따라 핵심적 지위를 차지하는 노동자들의 변모를 추적한다. 또 노동자들의 혁명성과 견결한 의지를 현재형의 언어로 진술했다.

    여성노동자 시각에서 광주를 바라보다

    절대악과 광주의 대립, 그 속에서 윤강일이라는 지식인과 노동자 형자의 갈등은 계급성에 입각한 선긋기 작업이었다. 이러한 대립을 통해 노동자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해 간다. 이 소설은 여성노동자들이 도청 취사반으로 활동하는 과정을 통해 노동자의 자각과정을 보여주고, 손자를 찾는 할아버지를 통해 역사속의 미국에 대한 재평가도 시도했다.

    “결국 도청이나 외곽방어를 위해서 죽은 사람들만이 남았을 뿐이야. 대부분이 없는 사람들이고.”
    “투쟁이란 과연 어떤 것일까?”
    순분이가 자문하듯 물었다. 턱에 손을 고이고 있던 영순이가 생각할 겨를도 없이 대답했다.
    “형자언니 같이 행동하는 것이지.”
    “그래. 끝까지 책임지는 것만이 투쟁이라고 말할 수 있어.”
    하면서 순분은 손가락으로 이마를 짚었다. 생각을 모으는 듯 했다.
    영순이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미국이라는 정체를 이번에 분명히 알았어.”
    “정체고 나발이고 미국은 적이야. 형자 언니가 죽었잖아. 도청 함락은 미국의 동의하에 이뤄진 것이니까.” (홍희담, 「깃발」, 󰡔창작과 비평 1988년 봄호󰡕, 창작과 비평사, 1988, 213쪽.)

    「깃발」은 당파성이 강한 작품이다. 계몽적 의도 속에서 너무 많은 메시지를 담으려 했고, 그렇기에 섬세한 감정의 미학적 형상화는 거칠다. 그래서, 거친 힘이 넘치는 에너지를 발산한다. 여성 노동자의 시선에서 ‘광주’를 형상화했다는 것은 징후적이다.

    80년 광주가 소외된 하위계층이 함께 어우러져 공동의 운명을 경험했던 곳이라면, 여성 노동자를 호명한 방식은 의도된 상징으로 읽을 수 있다. 그 의도성은 약소자의 주체화이고, 억압받았던 자들의 저항에 대한 열망이다.

    80년 광주는 한국사회에서 보기드문 공동운명, 그리고 일시적 해방의 경험이었다. 엄청난 폭력과 거기에 무방비였던 광주시민들이 자주적 힘으로 고난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이 그 경험 속에서 담겨 있다. 이 속에서 광주의 공동체의식은 형성됐고 갈등이 배태됐다. ‘노동자 우위의 문학’은 강력한 주체형성이라는 계몽적 의도 때문에 “무기를 반납하자는 놈들은 모두 배신자”라는 강한 저항성을 주장하게 되었다.

    홍희담의 이항대립구도는 1980년대 후반의 사회적 분위기와 긴밀히 연결돼 있었다. 적이 명료한 시대에는 친구도 명료해야 한다. 하지만, 세계는 사로잡힌 주체가 바라보려 한 것처럼 명료하지 않다. 명료하게 그려진 세계는 ‘의도된 세계’일 뿐이다.

    80년 광주의 그림자 속에서 바라보려 한 세계는 ‘명료한 적과 명료한 친구’가 있는 세계여야 했다. 하지만, 세계의 복잡성은 독일 통일과 현실 사회주의의 몰락으로 갑작스럽게 한국 사회에 들이닥쳤다. 80년 광주가 명료해지자, 세계체제가 모호해졌다. 역사는 이렇듯 항상 불협화음 속에서 전진한다.

    1990년대식의 동요와 혼란

    홍희담의 「깃발」에는 그의 다른 작품인 「그대에게 보내는 편지」(1995)로의 변화 가능성이 내재(內在)돼 있었다. 1990년대에 이르면, 먼발치에서 성찰적 자세로 팽팽한 긴장감으로 펄럭이는 ‘깃발’을 다시 한 번 바라볼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홍희담은 「그대에게 보내는 편지」를 통해 현재의 일상 속에서 광주를 바라보고, 운동을 회고하며, 찢겨진 삶들을 추적했다. 영빈은 항쟁에 참가했다가 투옥된 후 후유증(後遺症)으로 뇌가 손상돼 정신병원에 있는 사촌오빠 형철의 피해자 신고 문제에 관계하게 된다. 그러면서 ‘배상금’보다는 ‘신고’ 자체에 의미를 두려하지만, 과거의 상처는 여전히 그를 옥죈다.

    영빈은 형철의 옛 애인 인하를 찾아나서면서, 감수성이 예민했던 인하의 삶이 시대의 폭력 속에서 어떻게 파괴(破壞)됐는가를 목도하게 된다. 거기에는 “매사에 철저해야 한다”는 경직된 익서의 태도가 있고 “끝내 노동자가 되지 못한” 인하의 좌절이 있다. 이념의 시대는 가고 있음을 인하의 두번째 애인인 익서를 통해 얘기할 때는 90년대식의 동요, 혼란이 느껴진다.

    “세상이 달라졌다고는 하지만 모순은 그대로 남아 있는 것 아니예요? 모순이 있는 한 우리의 투쟁도 일도 여전히 유효한 것이지요.”
    안간힘을 써 강조하는 마지막 말투는 익서 자신의 내면과 밀착되어 있지 못하다는 것을 은연중 나타내고 있었다. 이제 그의 결연함도 동요의 일종으로 영빈에게 느껴졌다. (홍희담, 「그대에게 보내는 편지」, <창작과 비평>, 1995년 여름호, 창작과 비평사, 1995. 282 – 283쪽.)

    ‘고개를 꺾어 등이 굽어보이는’ 익서의 뒷 모습은 ‘90년대식 광주’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첨예한 투쟁의 거리에 있던 ‘광주’도 ‘신고’와 ‘보상금’과 관련한 현실의 문제로 귀착(歸着)되게 됐다. 그리고 가방 안에 가득 차 있는 형철의 편지는 잊을 수 없는 우리들의 상흔(傷痕)으로 확인된다.

       
      ▲ 사진=5.18기념재단

    5월 광주는 그나마 형철을 통해 순수성이 보존된다. 그 순수는 형철의 기억이 오른쪽 뇌수에 이상이 생겨 “80년 5월에 끝나 있음”으로 해서 훼손되지 않은 채 남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남은 사람들은 “계절은 바뀌고 태양은 빛나고 꽃은 피어나고 주위의 친구들은 결혼하고 아이도 낳고 하는데 어떻게 망월묘역과 정신병동만을 생각하며 살아갈 수 있겠는가”라며 단지 그 때의 도시를 “빛바랜 활동사진”으로만 기억할 뿐이다.

    그리고 사랑을 버리고 조급함으로 “노동자들에 대한 헌신, 자기희생, 선에 대한 노력”을 외쳤던 이들은 “한참 후에 길을 잃고 헤매”게 된다. 그리고 독백처럼 외친다. “우리 안에 무너질 요소를 이미 갖고 있었다고 봐요.”라고 말하기도 한다. 홍희담은 그것을 경직성이고 조급함이며 살아남은 자들의 빗나간 권력에의 의지였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

    한참 후에 길을 잃고 헤매는 사람들

    돌이켜 보면, 이러한 태도는 ‘탈이념의 시대’를 거치면서 갖게된 회의주의적 태도이기도 했다. 90년대의 회의주의적 태도는 불의 시대로서의 80년대와 대비된다. 그렇다면, 「깃발」의 형자와 「그대에게 보내는 편지」의 영빈이 다른 모습을 보인 것도 1980년대식과 1990년대식의 대비라고 할 수 있다. 형자는 1987년이라는 광장의 거울을 통해 광주를 봤고, 영빈은 1995년의 손거울을 통해 자신을 꼼꼼히 읽고자 했다.

    형자는 의지의 표상이고 견고한 노동자 계급의 주체성 확립이라는 구조 속에서 사람들을 대면하면서 자기 정체성을 획득해 나간다. 그러나 영빈은 의지 과잉의 상태를 벗어나 성찰적으로 자신을 바라본다. 영빈이 만나는 사람들은 의식이 닫혀 있기에 순수성을 보존하고 있는 형철과 스스로를 자책하며 동요하는 노동운동가 익서, 그리고 망가진 인생을 살고 있는 인하 등이다. 1990년대의 영빈은 사회를 변혁하려는 의지의 인간형에서 벗어나 “사랑을 잃고도 진리를 찾으려 했던” 형자를 질책하는 위치에 서 있다.

    물론, 홍희담은 광주를 질책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살아남은 자들이 강박적으로 구현하려 했던 ‘닫힌 광주’에 대한 이해방식을 성찰한다. 그것은 운명공동체의 신성을 파괴한 자기 자신에 대한 공격이기도 하다. 홍희담은 싸웠던 자들과 싸우지 못했던 자들의 내적 긴장의 와중에서 싸웠던 자들에게 손을 들어주고 싸우지 못한 자들을 질책했다.

    그러나 총을 들었던 사람들이 총을 들지 못하고 이불을 뒤집어 쓰려고 도청을 떠났던 이들에 대한 사랑을 포기하는 순간 광주의 공동체적 경험은 훼손된다. 홍희담은 노동자의 당파성이라는 이름으로 총을 들었던 형철의 순수성을 고립시켰던 자신의 과거를 1990년대 방식으로 반성하고 성찰한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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