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아, 미안해 우리 땜에 너 망하겠어
    좌파는 네 적이 아니란다…누구냐고?
    By mywank
        2010년 05월 14일 09:53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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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일보는 훌륭한 신문이다. 비아냥대는 것이 아니다. ‘선택적 기억상실증’에 걸린 한국 사회에서, 지식인들이 더 이상 현실을 비평하지 않는 이곳에서, 그들은 여전히 ‘2008년 촛불시위에 대한 비평’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역설한다. 그래서 그들이 중앙일보와 동아일보를 앞서는 일등 신문인가 보다.

    조선은 진짜 1등신문

    내가 그들에게 가지는 유일한 불만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최소한의 ‘선량함’이다. 우희종 교수의 인터뷰를 왜곡해야 했던 사정이야 이해는 가지만, ‘촛불소녀’의 인터뷰를 왜곡할 거였다면 무엇 하러 실존하는 인물을 끌어냈는가? ‘가상의 촛불소녀’는 오마이뉴스에 반론을 쓸 수도 없었을 텐데 말이다.

       
      ▲ 촛불 관련 조선일보 기사들 (이미지=미디어오늘)

    한국 사회를 통치하려면 좀 더 뻔뻔해질 필요가 있다. 이런 경우엔 쪼잔한 왜곡기사보다는 통째로 날조해내는 쪽이 더 잘 먹혔을 것이다. 설마하니 조선일보도 ‘언론윤리’에 신경 쓴다는 변명을 할 생각일까?

    물론 조선일보조차도 ‘반성하는 촛불소녀’를 통째로 날조해내지 못하는 이유가 있다. 조선일보는 기자들에게 양질의 교육을 제공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조선일보의 회사 분위기에 적응하지 못하는 기자라면 조선일보에서 교육받은 경력으로 방송국으로 가면 된다는 얘기가 있을 정도다.

    성실한 인터뷰는 취재의 기본이다. 이걸 어그러뜨리면 결국엔 모든 기사의 수준이 낮아지게 될 위험이 있다. 그래서 기자는 실존하는 인물과 열심히 취재를 해야 하고, 데스크는 ‘정치적 필요’에 따라 ‘마사지’를 하는 것일 게다. 이것은 조선일보가 ‘품질’과 ‘정치성’을 동시에 추구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필연적인 긴장관계 같은 거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조선일보의 정치적 계산은 무엇이었는지를 물어볼 수밖에 없다. 조선일보 데스크는 나같은 사람보다 훨씬 더 세밀하고 정확한 정보를 통해 한국 사회를 판단하고 있을 거다. 아마도 그들은 지방선거의 판세를 정확히 파악하고 공격포인트를 설정했을 것이다.

    지금 왜 촛불을 공격했을까?

    야권단일화를 강요하는 소위 개혁매체들의 ‘희망’에도 불구하고 선거판세는 한나라당의 우위다. 기회주의적으로 생각한다면 굳이 이 판국에 촛불을 비판하여 얻을 것이 없다. 사람들이 지금 열심히 촛불을 들고 있는 것도 아니고, ‘촛불’이 ‘전교조’처럼 쉽게 색깔공세를 할 수 있는 상대도 아니다. 그런데도 왜 ‘촛불은 괴담의 결과’라는 사실을 입증(?)하려고 했을까?

    쉽게 말하면 사인을 보내고 있는 거다. 너희들의 패배는 확정되었으니 손 들고 나오라고 말하고 있는 거다. 죄를 고백하고 넘어오는 녀석들은 받아줄 수 있다고 말하고 있는 거다.

    2008년에 촛불을 들었던 그 사람들이 지금 “선거 때 두고보자”라고 말한다고 한다. 그런데 그렇게 얘기하는 사람들이 민주당과 성향이 전혀 다른 군소야당들을 폭력적으로 낙마시켜가며 표를 모아도 30~40% 득표율 밖에 안 될 것 같다.

    이것이 촛불을 둘러싼 ‘현실’이고, 조선일보는 그 현실 속에서 당신에게 속삭인다. “넌 운동권에게 세뇌당했을 뿐이야. 그 사실만 인정하면 넌 주류사회로 돌아올 수 있어. 어서 돌아와… 이게 마지막 기회야.”

    만일 조선일보가 파악한 ‘현실’이 실제로 지방선거의 결말이 될 경우 사람들이 경험하게 될 열패감을 가늠하기는 어렵다. 많은 사람들이 다시 정치에 흥미를 잃을지도 모르고,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은 야권 단일화를 거부한 진보신당에게 떠넘겨질지도 모른다.

    야당 사라지고, 촛불시민 한나라와 경쟁

    2008년 촛불시위를 2002년과 2004년의 촛불시위와 구별하는 특징은 이 시위가 ‘정치적 수혜자’를 낳지 못했다는 것이다. 정당정치를 ‘제대로’ 강화해야 한다는 정치학자들의 외침에도 불구하고, 촛불시위는 정당정치를 허무는 결과를 가져왔다.

    거의 반정부시위를 방불케 했던 촛불시위의 최전성기에도 제1야당이라는 민주당 지지율이 한나라당을 압도하지 못했다. 계급투표가 고착된 유럽과는 달리 ‘바람’ 한 번에 20~30%가 차기도 하고 빠지기도 하는 이 한국 땅에서 말이다.

    이제 한국의 정치는 한나라당과 야당이 경쟁하는 공간이 아니라 한나라당과 국민이 경쟁하는 공간이 된 거다. 국민 모두가 이명박을 싫어하는 건 아니니 촛불시민이란 단어로 대체해보자. 촛불시민들은 한나라당의 유일한 경쟁자이다. 그들의 머릿속에는 한나라당과 자신들의 대립구도 밖에 없다. 촛불시민은 동질성을 지닌 국민(=한국인)이고, 한나라당은 그 바깥에 있다. 한나라당은 딴나라당이며 이명박은 일본인이다. 한나라당을 지지하는 것들은 친일파 후손들이다.

       
      ▲ 2008년 촛불 집회 장면 (사진=미디어오늘)

    진보신당이 민주당의 노선과 자신의 다름을 강변하는데도 촛불시민이 짜증을 내는 이유는 간단하다. 그들의 정서는 예전의 ‘비판적 지지’ 노선 같은 것이 아니다. 촛불이 민주주의이고 촛불이 진보인데 "내가 민주당보다 진보적이다."라고 잘난 척 하는 놈이 있으면 꼴보기 싫은 거다.

    니들이 뭘 가졌다고 주장하지 말고 까불지 말고 한국인이면 우리가 시키는 대로 하라는 거다. 이런 이들이 선거에 참여하는 유권자의 30% 정도가 되었고 상황에 따라 한나라당을 이기거나 말거나 할 것이다.

    진보신당, 자살과 타살 사이 무수한 삽질

    이런 환경은 진보정당을 꿈꾸는 이들에게 최악의 환경이다. 이럴 수도 없고 저럴 수도 없다. 촛불시민 말을 들으면 자살이고 안 들으면 살해당한다. 진보신당은 자살과 타살이라는 선택지 사이에서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무수한 삽질을 거듭하고 있다.

    그러거나 말거나 사람들은 별 관심이 없다. 노회찬은 ‘투명인간’들이 주인이 되는 서울을 만들겠다고 출사표를 던졌지만 그 스스로가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가 되었다. 심상정은 경기도를 순회하며 지역마다 맞춤형 공약을 선포해도 주목받을 수가 없다. 그나마 이들이 2012년에 여의도에 복귀하는 것이 진보신당이 희망할 수 있는 최대한이겠으나, 이마저 장담할 수 없는 목표다.

    국민이 스스로 야당이 된 세상에서 행정부는 여론조사 결과를 쳐다보면서 정치할 것이다. 사실상 입법부와 사법부가 무의미해진 상황인데, 입법부와 사법부의 구성원들부터가 그런 ‘무의미’를 앞장서서 의도하고 있기도 하다.

    이런 상황에서 정치에 희망을 가진다는 것이 가능할까? 조선일보가 원하는 대로 정치에 관심을 끊는 것이 살길일까? 사실 조선일보는 좌파들에게 참 관심이 많은 신문이다. 가령 김문수, 유시민, 심상정이 모두 서노련 출신이라는 건 운동권들이 술자리에서나 낄낄 대며 하는 소리인데, 조선일보는 그런 것도 기사로 만든다.

    사람이 악마에게 영혼을 팔려면 내 영혼의 값을 셈해줄 악마가 필요하다. 중앙일보나 동아일보와는 다르게, 조선일보는 운동권의 영혼 값을 셈해주는 그런 악마다. 오늘도 조선일보는 누군가의 ‘변절’을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조선일보 세상이 얼마 남지 않은 이유

    그래서 ‘변절’하란 말인가. 아니다. 실은 조선일보의 말을 듣지 말아야 할 이유가 더 많다. 큰 이유는 두 가지인데 하나는 감성적인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성적인 것이다. 감성적인 이유는 ‘아무리 그래도 우리가 변희재를 선배로 받아들일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만하면 무슨 짓을 하지 말아야 할 충분한 이유가 된다. 그리고 그보다 더 중요한 이성적인 이유는 ‘조선일보의 세상도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이다.

    조선일보의 영향력은 어째서 쇠퇴했는가? 안티조선 운동이 성공해서? 그 운동은 실패했다. 참여정부가 조중동과 잘 싸워서? 노 전 대통령 본인 표현으로 참여정부는 조중동에게 일방적으로 얻어맞았다. 개혁언론들에게 공기업 광고 배분 해줬던 건 이명박 정부 치하에서 ‘도루묵’이 되었다. 운동권이 조선일보를 효과적으로 공략해서? 택도 없는 소리다. 그 모든 것들이 아니라면 도대체 조선일보의 영향력은 왜 쇠퇴하는가?

       
      

    기술진보 때문이다. 방송이 영향력이 커지고 인터넷이 영향력이 커지고 소통방식이 변하기 때문이다. 다른 이유가 없다. 운동권이 정치의 한 축을 담당하던 시대가 아니기 때문이다. 조선일보여, 옛 적수가 너무 초라함을 견디지 못해 정신줄을 놓지 말지어다. 운동권은 촛불시민을 괴담으로 선동할 능력이 없다. 오히려 촛불시민이 우리를 선동(?)한다.

    블로고스피어와 트위터에서 얘기하는 사람들은 가끔 보면 더 이상 신문도 필요로 하지 않는 것 같다. 한겨레신문이나 경향신문이 망해도 ‘우리 편’이 갔다고 슬퍼할 뿐 그것 때문에 뭐가 안 된다고 느끼지는 않을 것 같다.

    촛불은 민주주의이며 진보이면서 한편으로는 언론이다. 좋은 건 다 가졌다. 이 ‘집단감성’의 시대에 조선일보나 운동권의 선전선동이 무슨 쓸모가 있단 말인가. 좌파들은 대중을 세뇌할 능력이 없고, 천천히 말라죽어가고 있을 뿐이다. 조선일보가 잘 안 풀리는 건 운동권이 유능해서가 아니라 너무 무능해서다. 좌파가 말라죽어가는 그 세상에서 조선일보도 적응하기가 힘든 것이다.

    조선일보의 진짜 적은?

    조선일보의 적은 더 이상 좌파가 아니다. 조선일보보단 좀 더 세련되게 한국의 담론생태계를 통치하려고 하는 중앙일보도 아니다. 중앙일보도 조선일보에게 버거운 경쟁자인지 모르지만, 따지고 보면 더 무서운 적들이 우글우글하다.

    미디어법을 따라 방송계에 진출하면, 조선일보는 저 섹시한 케이블 방송국들과 경쟁을 해야 한다. YTN이 마음에 안 들면 ‘좌파’라고 몰아부칠 수도 있겠으나, ‘방송장악’ 이후에도 장사가 안 되면 TVN의 예능프로그램들이 ‘좌파적’이라고 우길 텐가? (왠지 그럴 것 같다)

    한국의 보수주의자들은 입으로는 시장을 신봉한다 말하면서도 정작 자신이 시장에서 실패하면 좌파세력이 자신을 방해했기 때문이라고 우기는 경향이 있다. 그리하여 조선일보는 시장에서 실패하면 방송국을 자신에게 달라고 떼를 쓰고, 변희재는 담론시장에서 무시당하면 창업을 할 테니 투자를 해달라고 떼를 쓰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생떼가 언제까지나 통하지는 않을 것이다.

    신문기업이 한국 사회의 방향을 설정하던 시대는 갔다. 과거에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는 중앙일보와 경쟁하다가 삼성의 비리를 폭로할 수도 있었다. 그런 일은 앞으로 없을 거다. 신문시장은 내리막길이고, 그들은 삼성이 그들을 관리하기 위해 던져주는 광고를 통해서만 존속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삼성을 비판하지 못한다는 건 한겨레신문이나 경향신문에게만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다. 조선일보로서도 그것은 이제 그들이 더 이상 지배체제의 ‘머리’가 아니라 ‘꼬리’로 전락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개는 주인이 주는 밥을 먹으며 말을 잘 들어야지 엉뚱한 야망을 가져서는 안 된다. 조선일보가 가진 기득권을 유지하고 오래오래 존속하려면 가슴에 깊이 새겨야 할 진리다. 이번처럼 쓸데없이 사회를 어지럽히고 대통령의 오판을 유도해서는 안 된다는 거다.

    진보정당이 조선일보를 이기려면

    ‘부잣집 망하는 데 3대가 걸리는’ 길을 가고 있는 조선일보와는 달리 금방이라도 말라죽을 것 같은 진보신당이란 곳에 여전히 당비를 내고 있는 처지로 우리의 지리멸렬함에 대해 조선일보에게 사과하고 싶다. 우리가 이렇게 무능하지 않았더라면 조선일보도 좀 더 버텼을 거다.

    우리는 한국 정치를 고민하기 전에 우리 자신의 생존을 고민해야 할 것 같다. 기동전은 모든 것을 다 가진 촛불시민들에게 맡기고 조금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그 생각을 가진 채로 생존할 수 있는 생태계를 조성하는데 힘을 기울여야 할 것 같다.

    국가 보조금이나 공기업 광고 없이도 사회운동단체나 진보언론사들이 생존하는 방법을 고민해야 할 것 같다. 그리하여 우리의 무능함이 너희들이 처한 고난의 본질이라는 것을 고백하는 한 진보신당원의 반성문은, 너희들보다 더 오래 살아남기 위해 매우 노력하겠다는 다짐으로 끝나야 한다. 적들보다 더 행복하게 오래 사는 것이 진정한 승리라는 말은 언제나 진리였다. 그 무거운 진리를 실천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 이외엔, 아무런 답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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