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의 광주, 끝나지 않은 '화려한 휴가'
By mywank
    2010년 05월 13일 09:37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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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 전, 그러니까 1980년 5월에 우리집에는 손님이 묵고 있었다. 미국인과 결혼해서 십수년 만에 고국을 찾아와 너무 많이 바뀐 고국의 모습에 놀라기도 하고, 그리웠던 사람들을 만나 어디 놀러 가면 좋을지 날마다 새로운 계획을 세우던 그 손님에게 어느 날 미국에서 다급한 전화가 왔다. 그 손님의 미국인 남편으로부터였다.

멀리 있는 남편으로부터의 전화에 반가이 수화기를 건네받은 손님의 얼굴 표정과 목소리가 갑자기 당황스럽게 바뀌어갔다. 영어로 뭔가 심각하게 대화를 하다가 우리에게 광주에서 무슨 일이 있는지 뉴스에 나왔느냐고 물었다. 지금 광주에서 좀 심하게 시위가 있다는 정도 말고는 아는 바가 별로 없던 어른들은 제대로 대답해 줄 수 없었다.

1980년 5월 서울과 광주

그러자 미국의 남편은 지금 총격전으로 수백 명이 죽어가는 전쟁상황인데, 서울에서 광주까지가 얼마나 된다고 그렇게 태평히 있냐며, 한국에는 뉴스도 없느냐, 무슨 일 당하면 어떻게 하려느냐며 어서 빨리 미국으로 돌아오라고 불안해했다. 그러나 서울은 그 손님도, 우리 가족도 도무지 무슨 위험을 느낄 분위기가 아니었다.

그러다가 몇 줄씩 검은 띠로 문장이 지워진 채 발행되곤 하던 신문이나 사회안전과 국가안전을 보장하겠다는 국보위의 노고를 치하하는 방송에서 광주의 소요는 고정간첩과 거기에 휘둘리는 폭도들의 소행이라는 뉴스가 나왔다. 그리고 군이 성공적으로 간첩과 폭도를 소탕했다는 뉴스가 이어졌고, 손님은 그런 와중에 가끔 미국의 남편을 안심시키는 통화를 하며 ‘즐겁게’ 한국 방문을 마치고 떠났다.

그러나 남은 우리는 그때 그곳에서 벌어진 일에 대해 흉흉한 소문을 듣게 되었고, 광주의 소요를 성공적으로 진압해서 사회안전과 국가안보를 지킨 공을 내세워 그해 가을, 전두환 장군이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그때부터 시작이었다. 그해 5월, 광주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그 도시에 흐른 피를 제물삼은 권력의 실체가 무엇인지 밝히는 싸움이 길고도 험하게 이어진 것이. 처음에는 소문이었다. 간첩도, 폭도도 아니라더라, 일반 시민들이었다더라, 만삭의 임산부를 어찌 했다더라, 어린 학생도 무참히 당했다더라, 총만 쏜 것이 아니라더라, 대검으로 막 쑤셔댔다더라……

뭉개지고 난도질 당한 ‘진실’

그러다 은밀히 외국 기자가 촬영한 비디오가 돌았고, 사진전이 열렸다. 처음에는 지하공간에서, 나중에는 학교며 교회, 성당, 시민모임같이 사람들이 모이는 여러 곳에서. 무시무시한 진실이 ‘말’이나 글이 아니라 생생한 ‘영상’으로 눈앞에 되살아나면서 아무도 제3자가 될 수 없었다. 학교에서, 일터에서, 거리거리에서 진실을 본 자, 불의를 참을 수 없는 자들이 ‘물러가라’고 외치다 또 많은 이들이 피 흘리고, 목숨을 잃었다. 마침내는 전국 방방곡곡 모든 도시가 ‘광주’가 되고서야 결국 군사독재는 끝났다.

   
  ▲ 영화 <오! 꿈의 나라> 포스터

군사독재가 끝났다고 해서 바로 ‘그해 5월, 광주’도 끝난 것은 아니었다. 한 도시를 제물 삼아 권력을 잡았던 이에게 죄를 묻기보다 ‘화해와 용서’라는 이름으로 뭉개버린 정치놀음은 총탄과 대검날 못지않게 역사와 진실을 난도질했다.

‘광주 비디오’와 ‘광주 사진’을 통해 영상의 힘을 알게 된 저들은 한사코 진실이 알려지는 것을 막으려했고, 그래서 5·18이 영화나 드라마로 다루어지지 못하도록 했다.

그러므로 정치권에서 5·18에 대한 최초의 장편 극영화 <오! 꿈의 나라>(1989년)가 16mm독립영화로 제작되었을 때, 사전 제작신고 및 사전 심의 규정을 어겼다며 불법으로 몰아 상영을 막고자 기를 쓴 것도 당연하다.

<오! 꿈의 나라>부터 엎어진<29년>까지

영화를 제작한 독립영화집단 장산곶매는 “16mm 영화가 제작신고나 사전심의 없이 공공장소에서 공연되어 왔는데도 유독 이 영화를 탄압하는 것은 광주민중항쟁을 소재로 한 영화이기 때문에 이의 대중적 공개를 방해하려는 의도이며 영화인들은 이 탄압이 민족영화에 대한 전면적인 탄압을 전제로 한 것으로 인식하면서 결연한 투쟁으로 창작과 표현의 자유를 수호할 것을 다짐”했지만, 공연윤리위원회(이하 공륜)의 규정을 빌어 벌어진 상영금지 공작은 집요했다.

그 공륜은 1996년 헌법재판소로부터 헌법이 금지하는 사전검열기관이라는 판정을 받아 영상물등급위원회로 이름과 역할이 바뀌게 되었고, <오! 꿈의 나라>는 ‘표현의 자유’ 를 위한 영화 운동의 선례로 남게 되었다. <오! 꿈의 나라>의 각본은 <선택>의 홍기선 감독과 <알 포인트>의 공수창 감독이, 연출은 <접속>의 장윤현 감독, <해가 서쪽에서 뜬다면>의 이은 감독, <크리스마스에 눈이 내리면>의 장동홍 감독이 공동으로 참여했다.

   
  ▲ 영화 <부활의 노래>의 한 장면

이렇게 여전히 표현의 자유가 억압되던 시기인 1990년, "한국영화에 닥쳐올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영화진흥과 창작자유를 위한 법적, 제도적 장치가 마련되어야 합니다. 그렇더라도 강하고 자주적인 영화를 만들어내는 일 자체는 계속 영화인의 책임으로 남습니다." 라는 인식을 가진 젊은 영화인들이 모여 독립 프로덕션 ‘새빛 영화제작소’를 만들고, 첫 영화로 만든 이정국 감독의 <부활의 노래>가 5·18에 대한 최초의 35mm 극영화이자 정식 제도권의 스크린에서 상영된 영화다.

그러나 여전히 심의라는 암초에 걸려 <부활의 노래>는 무려 28분13초가 싹둑 잘리고서야 극장에 걸렸고, 관객은 상처투성이로 만듦새가 온전하지 못한 상태의 영화를 보려하지 않았다. 3년이 지나서야 공륜 재심에서 무수정 통과되었지만 이미 대중의 관심은 식어버린 뒤였다.

   
  ▲ 영화 <꽃잎> 중에서
   
  ▲ 영화 <박하사탕>의 한 장면

이렇게 가위질을 일삼던 공륜이 퇴출된 해인 1996년, 영화가 비로소 검열로부터 자유로워지면서 만들어진 장선우 감독의 <꽃잎>은 멀티플렉스 이전 시기에 서울 관객 21만을 불러들여 5·18에 대한 영화로는 처음으로 대중적인 성공을 거두었고, 1999년 이창동 감독의 <박하사탕>은 47만, 그리고 2007년에 개봉된 김지훈 감독의 <화려한 휴가>는 무려 730만이라는 흥행 성적을 기록하면서 5·18은 영화 소재로서의 대중성을 키워 나갔다.

나는 <화려한 휴가>를 당시 중학생이었던 조카와 함께 보았다. 아직 만 15세가 안되었던 조카는 사회 시간에 배웠던 5·18을 꼭 영화로 보고 싶다며 보호자인 나와 함께 극장에 가서, 영화가 상영되는 내내 눈물을 흘리며 보았지만 막상 영화를 보고 나서는 “마음 아프긴 하지만… 좀 아쉽고 뭔가 부족해.” 라고 했다.

   
  ▲ 영화 <화려한 휴가> 중에서

이유를 물으니 “저런 일이 벌어졌었다는 걸 영화로 만드는 것도 의미가 있지만, 저런 일을 저지른 사람들은 여전히 잘 살고 있잖아. 혹시 <26년>이라는 만화 봤어? 난, 영화가 그 만화 정도는 얘기 하는 줄 알았어. 그런 일이 있었다는 건 학교에서도 배웠는데, 저런 끔찍한 짓을 저지른 사람들이 멀쩡히 살고 있는데 대해서 영화같은 건 뭔가 말해줄 줄 알았지.”라고 대답했다.

5·18 영화들에게 부여된 역할

그렇다. <오! 꿈의 나라>에서 <화려한 휴가>까지 5·18에 대한 영화들은 모두 ‘그해 5월, 광주’를 재현하는데, 그러니까 과거를 그려내는데 집중하고 있었다. <꽃잎>의 주인공은 뒤늦게 친구의 여동생을 찾아 떠나고, <박하사탕>은 아예 영화 자체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며, <화려한 휴가>는 광주비디오와 사진으로 이미 보았던 딱 그때 그 장소를 소환해서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의 동선을 따라 공간을 그려낸다. 아직 영화는 거기까지였다. 그러나 아직 5·18이 과거 속에서 박제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그때 그 시절을 겪지 않았던 세대가 더 정확히 짚어낸 것이다.

그렇기에 ‘5ㆍ18 관련 소재를 영화화함으로써 대중적 파급효과가 큰 영화를 통해 5ㆍ 18 정신의 승화를 꾀하고, 세계적으로 보급하여 새로운 관심과 관점을 유도하고, 국내외 영화 팬들에게 5ㆍ18정신 내면화에 기여’하겠다는 취지로 2006년 5ㆍ18기념재단이 1억 원의 상금을 내걸고 ‘5ㆍ18민중항쟁 극영화 시나리오 공모’를 크게 벌였다가, 96편의 응모작 가운데 한 편도 당선작을 내지 못하는 일도 생겼던 것이리라.

   
  ▲ 강풀 만화 <26년>의 한 장면

당선작을 선정하지 못한 재단 측의 심사평은 대부분의 응모작이 5ㆍ18을 다큐 형식으로 재구성하거나, 현재를 시점으로 5ㆍ18 당시의 피해자나 가해자가 어떤 형태로든 5ㆍ18이 자신의 삶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작품들인데, 안타깝게도 이 두 성향의 작품들이 5ㆍ18민중항쟁이라는 소재의 중압감을 극복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시각 또한 미흡하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후 시나리오 공모 자체가 없던 일이 된 것은 공모 자체의 진정성을 의심스럽게 만드는 일이기도 했다.

그런 와중에 조카가 얘기했던 만화가 강풀의 <26년>의 영화화가 발표되었다. <26년>은 인터넷을 통해 연재된 웹툰이었다. 5·18로부터 26년이 흐른 시점에서, 남겨진 이들이 그동안 어떻게 살아 왔으며, 무엇 때문에 여전히 고통 받고, 그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지금 여기에서 무엇을 해야 할 지, 그러나 그것을 막는 것은 또 무언지를 그려낸 <26년>은 아니나 다를까, 곧 영화화가 결정되었다고 보도되었다.

워낙 원작 만화가 강풀이 <아파트>, <순정만화>, <바보>를 비롯해 발표하는 만화마다 바로바로 영화판권이 팔려나가는 인기있는 작가이기도 했지만, 특히 <26년>은 연재 당시 일일 조회 수 200만 건, 매회 댓글 2천여 건 이상을 기록했던 화제작이었으니 영화화가 안된다는 게 오히려 이상할 일이었다.

불발로 그친 <29년>

<천하장사 마돈나>로 이름을 얻은 신예감독 이해영에, <미녀는 괴로워>로 당시 충무로의 캐스팅 일순위로 떠올랐던 김아중과 <주먹이 운다>를 비롯해 숱한 작품에서 개성 강한 연기를 보인 유승범이 캐스팅되었다는 기사를 보며 영화가 이렇게 차근차근 나아가는구나 생각했다.

원작 만화가 발표된 후 세월이 흘렀으니 그만큼의 시간을 보태 <29년>이라는 제목으로 바뀌었다는 영화에 대해 한동안 이런저런 기사들이 쏟아져 나왔다. 심지어 샴푸 광고 모델인 김아중의 계약 조건이 긴 생머리를 유지한다는 것인데, 영화 설정 상 짧은 헤어스타일의 역할을 하려면 어찌해야 할까를 미리 걱정하는 기사까지 있었더랬다.

   
  ▲ 촬영이 무산된 영화 <29년>의 스케치 이미지

그런데 갑자기 어떤 설명도 없이 <29년>은 프로젝트 자체가 취소되어 버렸다. 그러나 이 프로젝트가 왜 취소되었는지는 굳이 설명하지 않더라도 알 수 있다. 5·18 당시 시민군의 아이들이 자라, 당시의 최고 권력자를 심판하려 한다는 내용의 영화가 정권이 바뀌면서 만들어질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을.

공륜은 없어졌지만, ‘절차로서의 검열’이 아니라 ‘총체적 시스템으로서의 검열’은 여전히 작동 중이라는 것을 <29년> 해프닝은 분명히 보여준다. 아쉽게도 당선작을 선정하지 못했지만 5ㆍ18민중항쟁이 대중에게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영화로 탄생할 수 있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겠다더니 슬그머니 발을 뺀 5ㆍ18기념재단도, <29년>이라는 영화 프로젝트를 아무런 해명없이 엎어버린 영화사도, 그런 일들에 대해 아무것도 따지지 않는 영화계도, 그리고 이런 일들이 벌어지도록 남의 집 불구경하듯 무심한 우리 사회도 모두 ‘검열’에 길들여져 있는 것이다.

이렇게 총체적인 검열을 당연히 받아들이고 있는 한국 사회는 30년이 지나도록 ‘1980년 5월 광주’에 대해 여전히 빚지고 있는 것이며, 그 빚에 대해 어린 세대들에게 부끄러워해야 한다. 물려줄 것이 없어서 이런 빚까지 떠넘기는 것도 부끄럽지만, 그 빚에 역사가 이자까지 붙여 더 무거운 짐으로 불려나가고 있는 것을 모르쇠하는 것은 더 참담하다. 그들의 ‘화려한 휴가’는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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