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광주-월드컵-촛불, 꿰뚫은 노래는?
    By mywank
        2010년 05월 11일 09:50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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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80년 광주, 5월의 광장 (사진 출처: 5.18 기념재단 홈페이지)

    5.18 광주항쟁 30주년을 맞았다. <레디앙>에서는 문화 영역에서 지난 30년 동안 광주가 어떻게 존재해왔고, 기억됐으며, 변모해왔는지에 대한 기획을 몇 차례 연재한다. 대중음악, 문학, 미술, 영화의 4개 분야를 살펴본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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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랜 세월 동안 많은 사람들은 광장을 만들고 광장에 모여 함께 걷고 뛰고 외치고 불렀다. 특히 5월은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많은 광장이 열리는 시절이다. 알다시피 이것은 1980년의 5월로부터 비롯되었던 것이다. 1987년의 민주화 대투쟁 이후 이 5월의 광장은 80년 5월과 더불어 1886년 시카고(chicago)의 5월을 광장의 대열에 합류시켰다.

    5월이 열어준 광장들

    그렇게 해서 해마다 5월은 아주 많은 광장을 우리에게 열어주었는데 그때 열린 광장에 함께 했던 많은 것들 가운데 그 무엇보다도 우리에게 잊을 수 없는 감각의 기억으로 남겨진 것은 건조한 아스팔트 내음, 동료의 다부진 어깨와 더불어 서로가 서로의 가슴을 울리게 했던 것, 바로 노래다.

    큰 소리로 퍼져나가는, 스피커 소리로는 다 채워지지 않는 어떤 정서적 여백에 대하여 광장에 모인 사람들은 집단적으로 노래를 부르며 스스로 채워나가곤 했다. 그리고 광장에서 벗어나 가두를 행진할 때도 노래를 부르며 걸었고, 광장이 사라진 늦은 시간에는 곳곳에 옹기종기 모여 술잔을 기울이며 광장의 한낮을 추억하고 내일의 광장을 기약하곤 했다.

    물론 그때도 광장을 추억하고 기약하는 가장 좋은 방법의 하나는 함께 노래를 부르고 서로의 노래를 들어주는 것이었다. 광장에서의 노래는 거기 모인 다채로운 군중들을 하나로 맺어주는 매우 고맙고 유용한 수단으로 널리 사랑 받아 왔다.

    이명박식 파시즘이 폭주하는 2010년에도 변함없이 5월이 찾아들었다. 우리 현대사에서 가장 숭고한 광장이 만들어졌던 그때로부터 정확하게 30년이 지난 시점이다. 사람들은 광주의 기억을 지렛대삼아 이번에도 크고 작은 수많은 광장들을 불러낼 것이다.

    그리고 또 함께 모여 하나 된 함성으로 노래하리라. 그래서 문득 궁금해진다. 30년 전 그 거대한 광장에 극한의 분노와 두려움을 함께 가슴에 담고 모여 앉았던 이들은 어떤 노래를 부르며 스스로를 다독이고 서로서로를 응원했을까.

    그 때, 그 자리에선 무슨 노래를 불렀을까

    5월 광주를 생각하면 우리들은 ‘임을 위한 행진곡'(백기완 작시, 김종률 작곡)을 떠올리지만 알다시피 그 노래는 1982년, 황석영의 집에서 만들어지고 녹음된 것이었다. 우리는 5월 광주를 생각하며 이 노래를 부르지만 광주의 5월 광장에서 울려 퍼졌던 실제 노래는 ‘아리랑, 애국가, 우리의 소원, 선구자, 고향의 봄, 봉선화’ 등이었으며 도청에서, 거리에서 살인 기계들의 총에 스러진 시민군들이 불렀던 노래는 ‘진짜 사나이’와 같은 노래들이었다.

    행동의 급진성에 비해 그들이 불렀던 노래들은 지극히 평범하고 소박한 것이었다. 상황이 비장하고 급진적이었을 뿐, 음악 자체로서 비장함, 급진성을 표현하는 것들은 거의 없었다.’진짜 사나이’ 역시 그 시절 이후의 광장에서 불렸던 노래들에 비해 훨씬 비장감이 덜한 행진곡이지만, 손에 총을 든 선량한 일반인들이 선택하여 부를 수 있는 노래가 이것 말고 다른 것이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뒤따른다.

       
      ▲ 위) 5월의 거리를 행진하고 있는 각양각색의 광주 시민들 (출처: 5.18기념재단 홈페이지)
    아래) 1886년 시카고 5월의 광장을 재현한 그림. 경찰의 발포로 사람들이 쓰러지고 있다. (출처: www.wsws.org)>

    당시에 이미 ‘아침이슬’이나 ‘상록수’와 같은 노래들이 어느 정도 알려져 있었고 ‘우리 승리하리라’와 같은 교회 기반의 저항음악들도 있었지만, 대학가를 중심으로 불리던 그 노래들은 80년 광주에서 수만의 시민이 함께 부를 수 있는 노래는 되지 못하였다.

    어떤 회고담에 의하면 김민기가 1978년에 제작했던 <공장의 불빛>의 테이프 소리가 도청을 점거한 시민군의 긴장감 사이사이로 흘러 다니기도 했다지만 그것은 매우 특별한 일이다.

    광장에서 사람들이 그 순간에 원했던 것은 아마도 누구 하나 소외되지 않고 모두가 하나됨을 확인할 수 있는 노래, 그 속에서 서로에 대한 신뢰를 얻고 두려움을 이겨낼 수 있도록 서로를 인도해주는 그런 노래였을 것이다.

    그러니까 손에 총을 쥔 사람들은 ‘진짜 사나이’를, 손에 손을 맞잡은 사람들은 ‘애국가’, ‘아리랑’, 때로는 ‘고향의 봄’ 등을 부르며 5월의 거리를 내달린 것일 게다.

    교과서의 노래들

    약간 다른 측면에서 보자면 광주에서 불렸던 노래들은 대부분 교과서에 등장하는 노래들이다. 그러니까 모두가 알고 있는 노래이면서도 나름 약간의 건전함, 진정성 등을 연상할 수 있는 것들이다. 이런 노래들이야말로 광장에서 모두가 하나 되어 함께 부르기에 가장 적절한 것이다. 모두가 알고, 적당히 건전하고, 쉽고.

    예컨대 2002년 월드컵에서도 사람들이 수십만에 이르게 되면 모두가 함께 부를 수 있는 노래는 거의 ‘아리랑’밖에 남지 않게 되었던 것처럼 말이다.

    이처럼 거리와 광장에서 노래의 존재는 필수적이지만 그곳에서 흘러 다니는 노래들은 그 자체로는 현장의 가치와 비교적 동떨어져 있을 수가 있다. 80년 5월의 광주가 보여준 것이 바로 그러한 모습이었다. 그러면 21세기 하고도 10년을 더 흘러온 요즈음, 광장에서의 노래는 어떠한 모습으로 세월을 지내고 있는 것일까. 지금도 같은 모습일까.

       
      ▲ 87년 6월 항쟁 당시 거리에서 구호를 외치고 노래를 부르는 시민들. 가장 비장하고 긴박한 순간 광장에서는 언제나 아리랑이 울려 퍼졌다. 20년이 지난 2008년 촛불집회의 시민들도 마찬가지였다. 

    21세기로 넘어오기 전에 87년의 광장을 살짝 들러보면 그때 불렸던 노래들은 사실 80년 광주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광주의 노래에 광주로 인해 만들어진 새로운 노래 일부가 덧붙여지고, 광주로 인해 분출된 크고 작은 광장에서 수년 간 애창되었던 노래가 덧붙여진 것이다.

    대표적으로는 ‘임을 위한 행진곡’과 ‘아침이슬’을 떠올릴 수 있다. 그러나 역시 거대한 군중들이 모이는 순간에는 어김없이 그 노래보다도 먼저 ‘아리랑’, ‘애국가’ 등이 울려 퍼져 나갔다. 굳이 이야기하자면 앞선 두 노래들 역시 광장에서 꼭 필요한 노래여서 의식적으로 학습되고 전파된 것이라고 보긴 힘들 것이다.

    월드컵과 촛불 그리고 광주

    그보다 도도한 물결의 시위대에 합류한 젊은 사회인들은 대학 시절 교과서처럼 배워 두었던 ‘아침이슬’, ‘임을 위한 행진곡’을 애국가 부르듯이 쉽게 따라 부를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 노래를 통해서도 이제는 서로 하나가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21세기의 한국이 마련한 최대의 광장은 누가 뭐래도 2002년 월드컵이었을 테고 그 다음으로는 2008년의 광우병 관련 촛불집회가 될 것이다. 촛불집회에서 탄생했던 광장은 80년 이후 광주가 일으켰던 광장과는 또 다른 외양을 지니고 있었다.

    금남로 거리에서, 광주 이후로, 또다시 그 이후로 광장이 거듭 변해왔으니 오늘 광장에서 울려 퍼지는 노래도 과거와는 뭔가 달라진 면이 있어야 할 것만 같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가 않다. 2008년 광화문 광장에서도 남녀노소가 대규모로 등장하게 되자 또다시 ‘애국가’와 ‘아리랑’이 울려 퍼졌다.

    변한 것은 세대와 옷차림, 구호와 시위 도구 등이지만 광장을 흐르는 노래는 지난 30년 동안 사실 거의 변하지 않은 것이다. 그 노래를 불렀던 사람들, 30년 전이나 지금이나 평소에는 두 노래를 전혀 부르지 않을 그런 사람들이었다. 노래에 집중해서 차분히 생각해보면 이는 월드컵의 군중들과도 사실상 아무런 차이가 없는 것이다.

    광장 주인들의 선택

    그러므로, ‘이번에는 이 문화를 변화시켜 볼까’, 하는 질문이 따를 수도 있겠다. 실제 그런 고민들이 없지도 않았던 것 같다. 그러나 이런 질문은 애초에 질문으로서 성사될 것 같지가 않다. 몇몇 개인이 제아무리 바꾸고 싶어 해도 절대 바뀌지 않을 테니까 말이다. 사실 저런 발상 자체가 다소 폭력적일 수도 있는 것이고.

    그렇다면 그냥 개인의 소원 문제로 돌아와 편하게 물어보는 건 어떨까, ‘이런 문화를 바꾸는 것이 좋은 일일까.’ 그러나 그렇지도 않을 것 같다. 문화라는 것은 정치권력이 교체되듯 어떤 한 지점에서 90도 180도 뭐 이렇게 확 꺾고 자를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옆 나라의 문화혁명처럼 말이다.

    그러므로 오늘의 광장에서 우리들이 어떤 노래를 부르게 될 것인가에 대한 해답은 사실 이미 뻔히 나와 있는 셈이다. 특정한 정체성을 지닌 사람들끼리 모였을 때는 그들끼리 하나될 수 있는 특정한 경험과 정서에 맞는 노래를 부르는 것이고 다양한 정체성들이 광장에 모여 하나가 되면 그때는 또 그에 맞는 노래,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앞에서 이야기한 ‘애국가’, ‘아리랑’, 거기에 ‘아침이슬’ 정도를 더 부르게 될 것이고 87년 이후 새롭게 대중성을 확보한 ‘광야에서’ 정도가 울려 퍼질 것이다.

    정치적으로 좀 더 비장해지면 ‘임을 위한 행진곡’도 자연스럽게 흘러나올 것이고 구체적인 구호가 절실해지면 지금까지 언급은 안 했지만 역시 광주에서부터 울려 퍼진 바 있던 ‘훌라송’이 흘러나올 것이다.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광장의 주인들이 그렇게 노래를 선택할 것이기 때문이다.

       
      ▲ 당원들 앞에서 적기가(赤旗歌)를 함께 부르고 있는 영국의 전(前) 수상 토니 블레어의 모습 (출처: LIFE 誌)

    악덕 자본가가 ‘리트윗’하는 ‘그날이 오면’

    돌이켜보면 광장의 노래는 오랜 전통을 품었거나 매우 격렬했던 역사적 사건을 경유하며 선택되었던 노래들이다. 물론 전통이라는 게 몇 년이 지나면 누가 전통으로 인증해주고 뭐 이런 명백한 경계선이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국가 혹은 민족적 정체성 등이 구성되고 교육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명목상 의미로 따지면 사실 별 것 아닐 수도 있는 전통들을 존중하지 않기란 상당히 힘든 일이다. 그러니 영국의 토니 블레어도 수상 시절에, 이라크에서 마구 살육을 자행하던 시절에, 그야말로 급진적이기 짝이 없는 ‘적기가(Red Flag)’를 반복적으로 불러야 했던 것이다.

    그런데, 노래는 시대가 바뀌고 맥락이 바뀌면 자신이 품고 있는 의미도 함께 바뀐다는 사실을 환기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오늘 광장에서 울려 퍼질 그 노래들은 과거의 그 노래들이지만 또 그와 꼭 같은 것이 아니기도 하다.

    우리가 어떤 의미를 담아 노래를 불렀는가 혹은 어떤 주장과 지향 속에서 그 노래를 통해 서로 정서적 교감을 나누었는가에 의해 노래의 의미가 바뀌는 것이고 그 노래의 시대적 주인이 바뀌어가기 때문이다.

    ‘봉기가’처럼 일본 군가가 독립군 군가로 바뀌고 ‘민족해방가’처럼 우익의 노래가 좌익의 송가가 되듯, 또한 ‘애국가’처럼 친일 행위자의 음악이 민족주의를 고양시키고 ‘그날이 오면’처럼 악덕자본가를 겨냥한 음악이 그들에 의해 다시 ‘리트윗’ 되는 것, 이처럼 정처 없이 대세를 따라 떠도는 것은 영원히 부정할 수 없는 노래의 운명이다. 물론 그것은 노래와 함께 광장을 내달리는 우리의 운명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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