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색조는 밝아졌는데, 시민군 낯설어 보이고
    By mywank
        2010년 05월 11일 09:45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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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해로 5․18민중항쟁 30주년이 됩니다. 개인으로 치면 가정을 꾸릴 나이가 찬 거니까, 짧은 시간은 아닙니다. 그런데 금년은 5․18민중항쟁만 아니라, 경술국치 100주년, 6․25전쟁 60주년, 4․19혁명 50주년, 전태일 분신 40주년이기도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5․18민중항쟁은 걸어온 지난 30년보다 앞으로 가야할 역사의 길이 훨씬 많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더불어 투쟁했지만, 5․18민중항쟁이 역사의 바다에 닻을 내리기엔 여전히 더 많은 열정과 수고가 필요한 것입니다.

       
      ▲ ‘대동세상’ (김경주 作)

    불온함에서 보편적 가치로

    1980년 5월 광주는 처참한 죽음의 현장이었습니다. 그 충격적인 학살 장면은 우리 현대사의 트라우마로서 결코 지울 수 없는 역사의 지문이 되었습니다. 지난 30년은 5․18민중항쟁의 기억을 지키기 위한 투쟁의 시간이었습니다.

    국가폭력의 진상을 폭로하고 역사적으로 책임소재를 묻는 일은 가시밭길이었습니다. 그러하여 5∙18민중항쟁은 ‘불온한 광주사태’에서 ‘광주민주화운동’을 거쳐, ‘민주∙인권∙평화’의 보편적 가치를 지향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정당성과 사건의 참혹성만으로 5․18민중항쟁이 역사에서 기억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우린 지난 투쟁 속에서 절감했습니다. 그것은 진실을 망각의 늪에 파묻는 세력에 맞선 또 다른 5∙18민중항쟁이었습니다. 돌이켜보면, 우리 현대사는 비극적인 역사의 상흔들로 아물 날이 없었습니다.

       
      ▲ ‘그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다’ (최재덕 作)

    하지만 명예회복은 고사하고 진상규명조차 오리무중인 비극적 사건들은 또 얼마나 많습니까? 1948년 제주도에서 촉발된 4․3항쟁을 회상하면 사건의 충격성과 사상자의 수, 야만성에 지금도 우리는 전율하지만, 명예회복까지 60여년의 세월이 걸렸습니다. 역사는 냉정하게도 그 당위성만으로 역사적 기억의 자리를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캔버스 위에 아른거리는 시민군

    미술인들도 지난 30년을 5․18민중항쟁과 더불어 살아왔습니다. 이름 모를 들꽃만 봐도, 사태 난 황토 언덕만 봐도, 푸른 여명과 붉은 노을만 봐도, 스스로 목숨을 끊은 농사꾼만 생각해도, 야근하는 누이의 얼굴만 떠올려도, 부모 없이 울고 있는 아이만 봐도, 파지를 줍는 등허리 굽은 노파만 봐도, 공연히 그날의 금남로와 도청, 시민군이 흰 캔버스 위에 아른거렸습니다.

    비록 차가운 머리로 5․18을 분석하지 못할지언정, 가슴만은 절로 뜨거워져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함께 물감을 개고 붓을 잡고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 중에는 잘 그린 그림도 있었고, 못 그린 그림도 섞여있었지만, 5․18민중항쟁을 예술로서 기억하려한 그 열정에서는 잘나고 못나고가 전혀 무의미했습니다.

       
      ▲ <10일간의 항쟁, 10년간의 역사전> 포스터

    1990년 5월, 5․18민중항쟁 10주년에 광주전남미술인공동체의 주최로 <10일간의 항쟁, 10년간의 역사전>(5.3-19, 남봉미술관, 광주)이 열린 바 있습니다. 광주전남미술인공동체는 미술대학을 갓 졸업한 청년작가 중심의 민중미술운동단체였습니다.

    당시 전시에 출품된 작품의 면면들을 살펴보면, 5․18민중항쟁 이후 이들이 얼마나 치열하게 살았던가를 실감하게 됩니다. 청년미술인들은 1987년의 6월항쟁과 통일운동까지 광주항쟁의 역사적 지평을 확대했습니다.

    특히 대동세상의 시민공동체로서 오월광주를 형상화함으로써 피해자의식을 극복하고 5․18민중항쟁의 역사적 정당성을 뚜렷하게 제기하였습니다.

    이제 중견이 된 그때 작가와 20대 작가가 함께

    2000년 5월, 5․18민중항쟁 20주년을 기념한 <칼로 새긴 5․18항쟁_오월판화전>이 전남대학교에서 열렸습니다. 1980년대 민중미술운동의 견인차였던 판화운동을 통해 5․18민중항쟁의 20년 역사를 정리하는 전시였습니다.

    김경주, 김진수, 이준석, 이상호, 전정호, 한희원, 홍성담 등 1980년 당시 5․18항쟁을 직접 체험한 작가들의 판화작품에서 관객들은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시대의 질곡과 억압을 묵묵히 칼로 새긴 그들의 노고에 힘입어 5․18항쟁의 기억이 세월을 거슬러 오히려 더욱 또렷해 감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2010년 5월, 광주에서는 <제2회 평화미술제>가 5․18민중항쟁 30주년 기념전시의 형태로 열리고 있습니다. <오월 그 부름에 答하며>(5.7 – 20, 유 ․ 스케어 문화관 금호갤러리, 광주)를 주제로 한 금번 전시에는 전국에서 130여명의 작가들이 참여했습니다. ‘기억의 시간’, ‘오월의 의미’, ‘지평을 넘어’라는 세 주제를 놓고 어느덧 50대 중견작가가 된 1980년에 20대 청년이, 당시 자기 또래의 젊은 작가와 함께 작품을 출품했습니다.

       
      ▲ 전시장 실내

    색조가 밝아졌지만

    전시장 입구에 들어섭니다. 꽃이 피고, 별이 빛납니다. 강이 흐르고 바다에 파도가 넘실댑니다. 밭을 일구고 씨앗을 뿌립니다. 땅이 있고, 물이 흐릅니다. 농부는 씨앗을 뿌리고, 장터에는 국밥이 따뜻합니다. 전체적인 색조도 무겁지 않고 밝습니다. 금남로 앞 도청건물도 잔상만 희미하고, 시민군의 초상은 낯설어 보입니다. 죽음과 삶의 기로에서 피눈물을 쏟고 함성을 지르던 5월의 모습은 찾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오늘도 역시 작가는 ‘내일도 꽃이 필까?’ 자문할 수밖에 없는가 봅니다. 붉은 색안경엔 여전히 ‘공산당은 싫어요!’가 선명하고, 거울엔 좌경의 붉은 칠이 섬뜩합니다. 사람들은 각자가 고립된 섬이 되었고, 삽과 굴삭기가 산천을 파헤칩니다. 하늘엔 자본의 뭉게구름이 피어오르고, 그 누구도 자유롭지 못합니다.

    30년의 세월이 무색한 오월입니다. 무참한 기분이 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는 기꺼이 차 한 잔 차려놓고 5․18로 우리를 초대합니다. 황량한 겨울 산의 복숭아나무는 봄꽃을 피우고, 전경의 방패가 밟고 지나간 자리에도 민들레 꽃 한 송이 오롯이 피어납니다. 그래도 새싹은 피어납니다.

       
      ▲ ‘구토’ (이상호 作)

    이처럼 2010년 5․18민중항쟁 30주년에 오월은 참혹한 죽음의 현장에서 평화를 화두로 우리에게 묻고 있습니다. 전시장의 분위기는 차분하고 조심스러운 분위기입니다.

    높지도 낮지도 않은 화음들이 지난 세월의 연륜 같으면서도 엄혹한 현 정세에 대한 반응 같기도 해서 아직은 우리가 가야할 길이 여전히 많이 남았음을 알게 됩니다.

    1980년 5월은 현재다

    우리가 역사에 답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일까요? 과거의 진실을 규명하고 결코 잊지 않겠다는 다짐일 것입니다. 성찰적 존재로서 역사에서 자기 처소를 갖게 될 때 역사적 기억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세월 앞에 견딜 기억과 다짐은 없습니다. 망각은 고통도 기쁨도 가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역사적 기억의 관건은 과거가 아닌 현재에 달려있다고 생각합니다. 과거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현재를 사는 우리에게 쉼 없이 질문을 던지고 미래에 대한 역사적 상상력을 자극할 때, 비로소 그 사건은 역사적 기억의 본령을 수행하는 것입니다.

    5∙18민중항쟁이 지난 30년간의 기억투쟁을 통해서 역사적 처소를 마련했다면, 5∙18항쟁이 현재적 역사로서 줄기차게 우리에게 응답을 요구한다는 의미입니다. 5∙18항쟁이 1980년에 머물지 않고, 여전히 인간의 보편적 가치에 대한 질문을 멈추지 않는다는 사실 자체도 역사적 기억행위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5∙18민중항쟁이 여전한 현재적 역사라면, 우린 끊임없이 기억을 형성해야 할 책무를 지니게 됩니다. 2010년 5월, 5․18민중항쟁 30주년을 맞이한 우리에게 여전히 1980년 5월이 현재가 될 수밖에 없는 이유입니다.

       
      ▲ ‘생명의 꽃’ (정희승 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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