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종교는 왜 폭력적인가?"
    2010년 05월 09일 10:26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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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월요일에 저희 학교 종교학 교수들 앞에서 ‘종교와 폭력성’이라는 주제로 발표했습니다.(http://www.uio.no/forskning/tverrfak/plurel/forskning/plurel_seminarene/2010/) 지금 연구하고 있는 것은 불교와 근대적 군사주의의 관련성인데 그 연구의 한 ‘서론’으로서 종교에 내재돼 있는 어떤 ‘기본적 폭력성’을 이야기해야 하니 이렇게 발표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고대 종교들의 폭력성 

   
  ▲박노자 교수 

제 발표의 요지는, 고대 사회, 즉 초기계급 사회의 종교가 대개 매우 폭력적인 반면에 또 동시에 폭력을 조절하는 기능을 담당했다는 것이었습니다.

나중에는 초기 불교나 기독교는 폭력을 문제화시켜 적어도 관념적으로 – 그리고 적어도 수행자 내지 독실한 종교인에 한해서 – 비폭력을 지향해본 일도 있지만 결국 ‘의전론’ (義戰論, Just war theory)의 미명하에 국가와 유착돼 종교의 속성인 폭력으로 돌아왔다는 것입니다.

고대 종교들의 폭력성은, 특히 그 어느 종교도 전쟁을 죄악시하지 않았다는 점에서도, 그리고 대다수의 초기계급사회 종교들이 전쟁에서의 ‘영웅적 싸움’을 찬양한 데에서도 나타납니다.

순장(殉葬)제의 범위 내에서 죽은 추장의 무덤에 그 노비나 가솔을 죽여서 저승으로 같이 보냈다는 사실은 고대 한국도 예외는 아니었지만, 자신의 형을 포함한 사람은 물론이거니와 신들까지도 그 칼로 죽이곤 했던 야마토다케루(日本武尊)라는 전형적 전투영웅을 배태시킨 고대 일본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고대 내지 중세초기의 유럽은 더하면 더 했을 터인데, 아테네 발라다라는 싸움의 여신이 직접 전장에서 나타나 트로이의 전사들을 마차에서 떨어뜨렸다는 기술이 포함돼 있는 <일리아스>나, 죽은 전사들의 영혼들이 신들과 함께 매일 싸움을 즐기고 그 다음에 잠깐 자고 다음날 더 싸운다는 전사들의 낙원인 ‘발홀’에 대한 기술을 <에다>에서 읽으시면 되는 것입니다.

희생양과 악마

포로든 죽은 추장의 노비든 공동체 전체의 차원에서 누군가를 같이 인신제사식으로, 의례적으로 죽이는 것은 많은 고대 종교들의 주된 의례이었고, 공동체의 ‘적’들을 무수히 살육한 야마토다케루와 같은 ‘건아’가 신들이 좋아하고 보호해주는 ‘영웅’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종교 생활이란 가축이든 인간이든 그 어떤 희생양을 신들에게 공동체적으로 같이 죽여서 바치고, ‘악’이라고 생각되어지는 타자들과 잘 싸운 싸움꾼들을 기리는 데에서 출발했다는 것입니다. ‘희생양’과 ‘악마’없이는 고대 종교는 대체로 성립되어지지 않았죠.

고대의 신들이 왜 이렇게 흡혈귀적이었을까요? 구약의 야훼를 포함해서 말씀입니다. 우리는 지금 거의 인식을 안하지만, 구약의 야훼는 ‘선택받았다’는 종족의 싸움꾼들을 적극 방조하는 싸움꾼들의 신이죠. 예컨대 여걸 보시기를:

"여호와여 나와 다투는 자와 다투시고 나와 싸우는 자와 싸우소서
방패와 손 방패를 잡으시고 일어나 나를 도우소서
창을 빼사 나를 쫓는 자의 길을 막으시고 또 내 영혼에게 나는 네 구원이라 이르소서" (시편: 35).

지금이야 그걸 하나의 ‘비유"로 보는 게 일반적이겠지만, 이 시가 만들어졌을 당시에는 문자그대로 야훼 (여호와)가 ‘우리 편’에 서서 싸우기를 기대하는 건 통념이었어요. 신의 세상이 왜 그랬을까요? 전통적인 마르크스주의적 해석은, 고대 종교의 전투성이 초기 계급 사회, 즉 계급 분화 과정의 폭력성을 그대로 반영했다는 것입니다.

초기 계급사회와 종교의 전투성

즉, 희랍의 아테네 발라다와 대화정권의 야마토다케루, 유대족의 야훼 등의 무서운 모습에서 초기 계급사회의 전형적 ‘지배자’의 모습을 볼 수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기본적으로 이 설명의 틀을 지지하지만, 여기에다 두 가지를 첨부해야 합니다.

첫째, 초기 종교 만들기에 지배자들이 앞장선 것이야 의심할 여지는 없지만, 자연과 타자에 대한 공포에 사로잡힌 원시 공동체 일반 구성원들도 그 무서운 신들의 권위에 쉽게 압도 당해 그들의 ‘비호’를 갈망하는 심리를 쉽게 가질 수 있었던 것이고, 둘째 레네 지라르 교수의 말대로 사냥으로 그 잔혹성을 단련한 고대 남성들의 심리상으로는 가축이든 인간적 타자든 ‘희생양’ 하나를 의례적으로 죽임으로써 ‘집단 단결’을 도모하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웠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결국, 레닌의 말대로, 그렇게 함으로써 인간의 능력으로서 조절이 불가능한 대자연에 대한 공포를 달래고 또 이 살인적 의례를 주관하는 지배자에 대한 공포 심리를 또 가졌다는 것이죠. 그리고 지배자의 입장에서는 집단의 살기를 바깥의 ‘악마'(적대적 타자)나 내부의 ‘희생양’에 돌림으로서 자신에 대한 충성과 신뢰를 강화시킬 수 있었던 것입니다. 초기 종교, 초기 지배 조직은 그렇게 해서 인간의 폭력성을 조절하면서 또 동시에 필요에 따라 강화시킬 수 있었죠.

이제 몇천 년이 지난 것이고, 적어도 포면적으로는 불교나 기독교와 같은 종교들이 ‘공포’와 ‘살기’보다 ‘자비’와 ‘평화’를 이야기합니다. 물론 이야기할 뿐이지 실천은 별로 없지만 말입니다. 그런데 여전히 계급사회의 순조로운 운영에 ‘희생양’과 ‘악마’가 아주 절실히 필요합니다.

예컨대 지난 번에 보수언론의 저주들을 들어가면서 살인적 진압을 당한데다가 거의 죽음의 문턱에서 어쩔수 없이 타협을 했음에도 계속해서 사법 탄압과 해고 등을 당해온 쌍용노동자들은, 사실 고대의 순장제 희생자 못지 않게 우리 사회의 일종의 ‘희생양’들입니다.

현대의 신 ‘경제’

유산자는 물론 "파업으로 경제가 멍든다"는 지배자의 논리에 그대로 세뇌된 상당수의 무산자들마저도 ‘우리 나라 위기 탈출, 우리 경제 발전’을 위해 쌍용사태에서의 노동자의 패배를 사실상 바랬던 것이고, 노동자들이 희생돼도 ‘경제’만 살면 된다고들 여깁니다.

소수 노동자들이 일자리를 잃어 자식 학비도 못대주는 도시 빈민으로 전락된다 해도, ‘우리 모두’가 그래도 부동산 가격 상승의 덕을 보면서 잘 살면 되지 않겠느냐는 논리는, 눌지마립간의 노비 쇠덩이를 마립간의 장례식에 죽여 저승으로 보냄으로써 사로국을 보호해주느 국조 성한이라는 국가의 신을 기쁘게 하고, 마립간의 혼백을 기쁘게 해 ‘모두들의 복리’를 도모해보자는 심리와 뭐가 다릅니까?

지금의 우리 신의 이름은 ‘경제’인데, 아무리 파업하는 노동자들을 이 신에게 계속 인신제사한다 해도 머지 않아 ‘우리 모두’가 이 신의 원한을 크게 당할 것 같은 것은 제 예감입니다. 그리스 사태도 그렇고 한국 부동산 시장의 상황도 그렇고 보시면 바로 아시겠지만, 우리는 아직 세계공황의 서곡만 봤지 본격적 진행올 지금부터 보게 될 것입니다.

야마토 다케루의 ‘악마’는 구주섬의 구마소족이었고, 야훼의 악마는 가나안(팔레스타인)의 원주민이었지만, 우리 악마는 시종일관 북한이죠. 특히 악마를 쫓아낸다는 굿판을 벌이는 걸 전공으로 삼는 이번 정권 하에서는, 이 악마에 대한 저주의 소리는 매일씩 높이 들립니다.

어떤 부정이 일어나도, 어떤 액운을 맞이해도 모든 게 다 악마의 탓으로 돌려지죠. 예컨대 침몰된 천안함의 선체에서 한국군이 사용해온 독일제 화약의 성분이 검출된다 해도, 보통 우리 제사장들의 설명이란 "악마 북한이 세상을 속이고 자신의 소행임을 감추기 위해 일부러 독일제 화약을 썼을 것" 정도입니다.

북한이라는 ‘악마’

일단 ‘악마의 소행’임이 분명하니 그 다음에 무슨 디테일들이 밝혀진다 해도, 무조건 악마에 대한 저주에 잘 꿰맞추면 되죠. 결론은 이미 나와 있으니까요. ‘악마의 우두머리’가 그 왕궁을 벗어나 혹시나 상국의 황궁에 알현하러 간다 해도, 모든 외교적 관행을 무시하면서 우리와 무관한 두 타국의 외교행위에 비난을 해도 됩니다.

일단 악마니까 정상적 외교행위를 벌인다 해도 그게 다 ‘악마의 짓’입니다. ‘경제’라는 우리 유일신의 화를 우리가 곧 크게 입을 것을 우리 제사장들이 잘 아니 ‘내부 단결’, 즉 신의 화를 면케 해줄 능력이 없는 제사장에 대한 ‘밑에 것들’의 원망을 원점에서 봉쇄시키기 위해 이렇게 미리부터 ‘악마 퇴출 능력’을 과시하려 드는 것인가요?

제가 악마를 좋게 본다고 오해하실 분들이 계실는지 모르지만 제발 오해 마시기를 바랍니다. 저는 북한의 ‘주체사상’ 교과서들을 보면 정말이지 우스워서 죽을 지경이죠. 인간이 창조성과 자주성 등을 갖추고 모든 것의 주인이며 모든 것의 주인이라고? 정말이지 웃기는 소리 다 하네.

인간이란, 매우 아쉽게도 초기 계급사회 이후로는 별로 바뀌지도 않은 동물이라오. 고대 희랍이나 나전(라틴) 시대처럼 지금도 공동체 전체가 희생양 몇 명을 죽이거나 크게 괴롭힘으로써 복 받을 걸 기대하고 악마화된 타자를 집단으로 혐오하고, 검투사의 싸움 격인 시각적 폭력을 잘 즐기는, 그런 동물이라오. 그리고 계급사회가 존속되는 한, 바뀌지도 않을 것입니다.

마르크스의 말대로, 계급사회의 종말이야말로 인간의 ‘진정한 역사’의 시발점일 것입니다. 그런데 그 ‘진정한 역사’가 정말 시작될는지, 아니면 계급사회의 구성원이라는, 탐욕과 공포에 사로잡힌 동물들이 결국 서로 집단적으로 물어뜯기 시작해 다들 같이 사는 그 ‘숲’까지 다 망가뜨릴 것인지 아직도 모를 일입니다. 어쨌든 인간은 아직도 ‘세계 주인’ 되기에 별로 자격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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