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태일이 못본 청계천 ‘7번 시다’
    2010년 05월 08일 09:38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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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순애씨.(사진=이재영)

올해, 성공회대학교 NGO대학원에는 처음으로 정치경제학 석사과정이 개설됐다. 그 입학생 중 신순애가 있다.

신순애는 1966년, 열두 살의 나이로 평화시장 ‘시다’ 생활을 시작해, 1981년 전두환에 의해 청계피복노조가 강제 해산될 때까지 내내 청계천을 지켰다.

“경제를 알아야 내 주장을 펼 수 있겠구나 생각해서 정치경제학을 공부해요.” 초등학교 중퇴 학력이었던 그는 정치경제학이라는 학문을 공부하게 된 이유를 이렇게 말한다.

“친구들 대부분이 아직도 미싱일을 하며 월세나 3,000만 원짜리 전세집에 살아요. 그 친구들이 40년씩 일하면서도 먹고살기 어려운 게 열심히 일 안해서가 아니라, 사회적 모순 때문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게 내가 공부하는 목적이예요.”

아직 정치경제학을 공부한 지 몇 달밖에 안 됐지만, 신순애에게는 나름의 대안이 서가고 있다. 그는 공공 일자리와 복지가 청계천 ‘시다’로부터 시작되어 88만 원 세대로 이어지고 있는 현실을 깨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말한다.

“저임 노동자에게 국가 재정을 투자하자”

“아직도 낮은 임금을 받는 노동자들에게 정부 돈을 투자해서 정상적인 삶을 살 수 있도록 만드는 데 일조하고 싶어요. 복지제도, 기본소득제 같은 정책이 실현된다면 88만 원으로도 어느 정도 살 만하지 않겠어요?”

‘청소년은 잠자리에 들 시간’에도 일해야 했던 12살의 평화시장 ‘7번 시다’. 57살이 된 이제 낮에는 청소년을 위한 내일여성센터에서 일하고, 밤에는 정치경제학을 공부한다. 인터뷰는 4일 오후 성공회대 연구실에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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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치경제학을 공부하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 이유야 여러 가지가 있다. 검정고시를 하고, 성공회대 학부에서 사회학과 정치학을 공부했다. 4학년 때 김수행 교수 수업을 들으며 ‘전태일이 보지 못한 평화시장’이라는 레포트를 썼다. 전태일이 여성이었다면 또 다르게 평화시장을 봤을 것이라는 내용이었는데, 그 레포트를 보고 김수행 교수가 정치경제학을 공부하라고 권했다.

그리고, 경제를 알아야 내 주장을 펼 수 있겠구나 생각해서이다. 70년대에 미싱일 하던 친구들이 아직도 일하는 경우가 있다. 오십 살, 육십 살이 훨씬 넘어 아직도 일하고 있는데, 예전에는 희망이라도 있었지만 지금은 희망도 없지 않느냐. 이런 사람들을 위한 정책을 만들어 보고 싶었다. 조금 더 공부를 해서 정부를 상대로 싸우고 싶다.

노동자 아닌 사람이 노동자의 권리를 찾아주지는 않는다. 김수행 교수님 같은 분들도 계시지만, 아주 드물다. 노동자들이 열심히 일하면 아이들 편히 공부시킬 수 있는 제도를 꿈꾸는 게 나의 희망이다.

– 정치경제학 공부해보니 어떤가, 어떤 게 어렵나?

= 숫자 다루는 거, 새 용어가 조금 힘들기는 하다. 경제 돌아가는 걸 알 수 있고, 전체 구조를 볼 수 있어서 굉장히 재밌다.

– 평화시장 ‘시다’ 시절, 전태일 분신, 청계피복노조(이하 청피) 당시의 이야기를 해달라.

= 1966년, 12살 때 평화시장에 처음 발을 들여놨다. 초등학교는 중퇴했다. 60년대, 70년대 당시에도 초등학교 졸업자가 30% 정도였고, 중학교 졸업자도 많았기 때문에 학력이 더 낮은 사람들이 평화시장으로 왔다. 평화시장 여성노동자 중에서는 중학교 졸업자가 아주 적었다.

“구름다리에서 깡패가 죽었다”

그나마 잠잘 자리가 있는 친구들이 평화시장에서 일할 수 있었고, 잠잘 자리가 없는 친구들은 직업소개소에서 자기도 모르게 미군기지로 팔려가기도 했다. 저는 부모님과 함께 상경했기 때문에 평화시장을 다닐 수 있었다.

동일방직이나 원풍 같은 회사들은 나이가 너무 어리면 들어갈 수 없었고, 평화시장에서는 취업연령 같은 걸 따지지 않았기 때문에 취업하기가 쉬웠다.

– 1970년 전태일이 분신할 때 10대 후반이었는데, 당시에 그 사실을 알았나?

= 몰랐다. 공장장이 “구름다리에 가지 말아라. 거기 깡패가 죽어서 가마니로 덮어놨으니 가지 말아라”라고 말해서 그런 줄만 알았다.

전태일 열사의 분신 사실은 72년에 알게 됐다. 노동교실에서 무료로 공부시켜 준다고 해서 거기 가서 알게 됐다. 노동교실 개관식에서 처음 데모하는 데 참석하게 됐다. 당시 상황은 선배들한테 더 확인해봐야 하는데, 개관식에 육영수 참석 문제, 함석헌 참석 문제로 데모를 했었다.

– 학부 때 썼다는 ‘전태일이 보지 못한 평화시장’ 논문은 전태일과는 다른 어린 여성 노동자의 시각으로 쓴 거 같은데, 주 내용이 무엇이냐?

= 조영래 변호사가 쓴 『전태일 평전』을 읽으면서 구구절절이 가슴이 와 닿거나 뼈아프지 않았다. 왜 그런가 생각해보니, 근로환경도 나쁘고 월급도 적은 것은 맞지만 그것보다 더 어려웠던 건 물 먹고 싶어도 물 먹을 수 없고, 화장실 가고 싶은데 화장실 갈 수 없고, 생리할 때 생리대 처리할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그런 게 눈물 나도록 힘들었는데, 『전태일 평전』에는 그런 얘기들이 하나도 없었다.

『전태일 평전』에는 없는 평화시장의 삶

사람들은 다들 『전태일 평전』을 읽고 눈물을 흘렸다는데, 나는 눈물을 흘릴 수 없었다. 그 책보다 훨씬 더 힘들었기 때문에 감동할 수 없었던 것이라는 느낌이 들어 그 레포트를 쓴 것이다.

– 같은 시대 같은 곳에 있더라도 보는 게 다를 수 있고, 조영래 변호사가 재가공한 거라서 그런 것 같다.

= 가장 힘들고 자존심 상했던 건 친구들하고 점심 먹는 거였다. 다른 친구들은 시골에서 부쳐준 콩자반, 두부조림, 콩나물 같은 것도 싸오고 하는데, 나는 그런 걸 싸올 형편도 못 됐다. 도시락 싸오면 그나마 다행이고, 항상 김치나 단무지였는데, 그걸 친구들하고 나눠먹는 게 너무 창피했다.

– 노동을 한다는 걸 제외하면 학생, 청소년의 감수성을 가진 때였을 텐데, 노동현장에서는 그런 게 무시되었겠고.

= 그렇다. 그 때는 라디오 듣는 것도 싫어했다. 밤 9시 55분이 되면 “청소년 여러분 밤이 깊었습니다. 부모가 기다리는 가정으로 돌아가십시오”라는 말이 라디오에서 나오는데, 우리는 “야, 끝내줘야 가지. 보내주지 않는데, 어떻게 하라고…”라고 말하면서 사회에 대한 반감을 갖게 되었다.

버스를 타면 나보다 훨씬 큰 고등학생들은 싼 회수권을 사용하는 혜택을 받는데, 학교 못가고 공장 다니는 우리는 그런 혜택도 못 받았다. 나는 차비를 아끼려 평화시장에서 중랑교까지 걸어다녔다. 이런 상황 속에서 사회에 대해 화가 났다. 그런데 항의할 곳은 없었다.

노조 활동 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건, 너무 힘들어서 병원에 가면 의사가 쉬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쉴 수 있는 구조가 아닌데 어떻게 하냐. 지금은 엑스레이 찍는 데 3,000원인데, 78년에 엑스레이 찍는 데 8,000원이었다. 몇 달 월급이 거기 다 들어가는 것이다. 아파도 죽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 기억 때문에 지금도 병원에 다니지 않는다. 남편은, 아픈데 왜 병원 가지 않느냐고 타박하는데, 그 시절 기억 때문에 병원에 못 가겠다.

– 청피노조 얘기를 더 해달라.

청피노조를 만나 ‘인간 신순애’가 되다

= 청피노조를 만나면서 ‘인간 신순애’를 발견했다. 그 전에는 그저 못난 나였을 뿐이고, 모든 걸 운명으로 받아들였다. 노조를 만나기 전에는 내 이름도 없었다. 66년에 ‘7번 시다’였다. 그 미싱사 언니랑 3년을 일했는데, 지금도 그 언니 얼굴은 기억하지만 이름을 모른다. 그 언니도 내 이름을 모를 것이다. 그냥 ‘7번 시다’로만 통했다.

그러다 노조에 가니 ‘순애’라 불러주더라. 그 때 청피 조합원들은 다 같은 마음이었는데, ‘전태일을 내가 죽였다. 내가 조금만 더 바보가 아니었다면 전태일이 죽지 않았을 텐데’라는 마음이었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으니 죽을 각오로 싸울 수밖에 없었고, 그래서 전두환이 가장 먼저 청피노조를 없앤 거 같다.

전태일과 노조가 우리 조합원들에게 새 생명을 줬다. 그러니, 온 열정을 노조에 쏟았다. 일 끝나고 노조에 안 들르면 마치 밥을 안 먹은 거 같았다. 항상, 노조에 무슨 소식 있는지 알아 보고. 그 때부터 당당한 노동자 신순애로 생활할 수 있었다.

– 노조 활동은 언제까지 한 것이냐?

= 81년 아프리 사건(아시아아메리카자유노동기구 본부장 방한에 맞춘 청피 노동자들의 농성-편집자 주) 당시 집행유예 기간 중이었는데, 우연히도 우리 집에서 그 준비회의를 세 번 했다. 우리집이 이사한 지 얼마 안됐을 때라 정보기관이 잘 모를 것이라는 판단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 사실이 탄로 났고, 사실은 내가 주도자가 아니었지만 관에서는 나를 주도자로 알게 됐다. 기관에서 엄마에게 “당신 딸이 간첩이다”고 협박하여 엄마가 쓰러지셨다.

1981년 전두환 정부에 의해 강제 해산되었지만, 청피노조는 진짜 대단한 노조였다. 다른 노조들은 조합원을 모은 다음에 노조를 설립하는데, 청피는 조합원도 없는 상태에서 간판을 먼저 달고 조합원을 모아나간 것이다. 지금도 당시 만났던 선배들과 인연을 계속 가지고 있다.

– 60~70년대 청계천 시다와 요즘의 88만 원 세대를 정치경제학적으로 비교한다면 어떤가?

= 옛날에는 무식해서인지, 노동을 그리고 노조활동을 열심히 하면 잘 살 수 있다는 희망이 있었다. 나는 어렵지만 내가 고생하면 내 후대는 분배받고 살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살 수 있었다. 78년엔가 서울대 학생들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영국에서는 의사와 노동자 월급이 크게 차이 나지 않는다는데 우리 나라도 그렇게 돼야 한다고 말했더니, 학생들이 박수를 쳐줬다.

모든 모순은 박정희로부터

그런데 지금은 너도나도 나 하나만 잘 살겠다고 이기려는 사회가 되고 말았다. 나는 그 뿌리가 박정희라고 생각한다. 박정희가 경제를 발전시켰다는 학자들 글을 보면 정말 화난다. 노동자들이 열심히 해서 경제가 성장한 건데, 그 공을 대통령에게 다 주다니 말이 되느냐. 그 때 고생한 노동자들이 지금 다 잘 사느냐? 아니다.

그 때 고생했던 노동자들이 다 부모가 돼서는 자기 자식은 노동자로 안 키우겠다고 악을 쓰고 있다. 그런데 노동자가 없으면 경제 성장을 누가 하느냐. 우리 사회가 공부에 소질 없고 공부하기 싫어하는 아이들도 다 학교로 몰아넣는 세상이 된 것은 박정희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나 같은 사람이 이 나이에 뭘 하겠느냐? 공부 안 하면 보험외판원이나 청소밖에 못한다. 나 같은 사람까지 공부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건 사회적 낭비다.

– 만약 전태일이 살아있었다면 지금의 노동현실에 대해 뭐라 했을까? 노동운동의 선배로서 지금의 노동운동에 대해 어떻게 평가하나?

= 민주노총이나 한국노총을 보면서 그들이 진정한 노동자 편인지 의문이 든다. 현장에 있는 노동자들을 절대 인정하지 않는 것 같다. 경제가 어려워서 자본가들이 노동자들을 끌어안지 못한다면, 더 어려운 노동자들을 조금 나은 노동자들이 끌어안아야 한다. 정규직이 비정규직을 도와줘야 정규직도 살고 비정규직도 사는데, 나만 정규직에 있으면 된다는 생각들이 많은 것 같다.

비정규직과 여성노동자에게는 희망이 없다. 우리 나라 경제가 성장했다고 하는데, 아무리 열심히 일해봤자 자기 자식 대학 보낼 수 없는 게 어려운 노동자들의 현실이다.

같이 할 노조가 없다

– 만약 청피노조 시절로 돌아간다면 지금의 민주노총에게 뭐라고 하겠느냐?

= 우리 나라에서는 과거청산이 안 됐다. 일제 잔재뿐 아니라 한국노총도 마찬가지다. 노동자 블랙리스트 만들던 문제가 제대로 청산되지 않고 오늘날까지 왔다. 청피노조 설립신고를 할 때 어쩔 수 없이 한국노총을 상급단체로 표기했지만, 절대로 함께 할 수 없는 노조라 생각했다. 그런 건 지금도 마찬가지다. 밑에서부터 싸워 만든 청피노조가 함께 할 수 있는 노조가 과연 있을까?

– 민주노총에 대해서도?

= 그렇다. 민주노총과 한국노총 사이에 큰 차이가 있는 게 분명하고, 이렇게 싸잡아서 얘기하면 섭섭한 분들도 있겠지만, 민주노총에는 구조적인 문제가 분명히 있다. 대의원을 배당할 때, 청피노조 같은 곳에는 단 한 명의 대의원도 배정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계층별로 따로 놀 수밖에 없다. 한국노총 따로 놀고, 민주노총 따로 노는 것처럼, 이제는 비정규직 따로 놀 수밖에 없다.

70년대 청피 노동자들은 콘트롤데이타의 고졸 노동자들을 엘리트처럼 인식했었는데, 지금 민주노총이 그렇게 보인다. 보수언론의 공격과 의도적 조장에 의한 것이지만, 연봉 6,000만 원짜리 노동자들의 파업에 보통 사람들이 동조하지 않는 이유를 잘 봐야 한다. 잔업 안 하고 일자리 나누는 노력 같은 게 많이 부족하다.

내 오빠가 IMF 전에 인쇄공으로 일했었는데, 120만 원씩 받았다. 그러다 IMF 맞고 정리해고 돼서 아파트 경비로 일하는데, 76만 원을 받는다. 88만 원 세대의 희망을 이명박의 시내버스 공영화 같은 데서 찾을 수도 있다.

이명박이 서울시장 시절 잘한 것도 있는데, 시내버스 공영화가 그 중 제일 낫다. 공영화 하니 버스 운전사들 월급이 250만 원씩 됐다. 버스 운전 같은 것도 예전에는 3D 업종이라고 기피했었는데, 지금은 다들 버스 운전사가 되고 싶어들 한다. 이런 방식으로 지금 우리에게 닥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40년 동안 변하지 않은 삶을 변화시키고 싶다

– 구체적인 전공을 무엇으로 할 것인가?

= 70년대 이야기를 논문으로 쓸 것이다. 2007년에 청피 해고자 12명에 대한 명예회복 신청을 해서, 다 받아들여졌다. 그런데 그 친구들 대부분이 아직도 미싱일을 하며 월세나 3,000만 원짜리 전세집에 산다. 그 친구들이 40년씩 일하면서도 먹고살기 어려운 게 열심히 일 안해서가 아니라, 사회적 모순 때문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게 내가 공부하는 목적이다.

– 석사 과정을 마치면 무엇을 할 것인가? 정치경제학 배운 게 어떤 쓸모가 있을까?

= 내가 대학원 공부하리라고 상상도 하지 못했던 것처럼 앞으로 뭐 할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아직도 낮은 임금을 받는 노동자들에게 정부 돈을 투자해서 정상적인 삶을 살 수 있도록 만드는 데 일조하고 싶다. 복지제도, 기본소득제 같은 정책이 실현된다면 88만 원으로도 어느 정도 살 만하지 않겠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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