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치, 20대 먹고사니즘을 자극하라"
        2010년 05월 06일 12:21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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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린이날이었던 5월 5일 저녁 7시. 홍대앞 두리반에는 가난한 ‘청춘’들이 모여들었다. 지상에서의 방 한 칸 마련이 쉽지 않은 20대들이었다. 이 글은 진보신당의 ’20대 주거기획단’이 주관한 이날 행사에 참여한 필자가 보내온 참관기다.<편집자 주>
       
      ▲ 홍대앞 작은 용산 ‘두리반’에 몰려든 젊은이들 (사진=Tari)

    건물 안은 비좁았다. 게다가 공간에 비해 많은 사람이 몰리는 바람에 열기는 뜨거웠다. 서울 홍대앞 두리반에서 소설가 유채림씨와 그의 아내가 농성을 벌인지 131일째. 많은 단체에서 그들에게 지지를 표현했고 어느새 그 곳은 철거민의 ‘성지’가 된 것 같았다. 

    고시원, 옥탑방에서 ‘서식’하는 20대

    어린이날 이었던 5월 5일. 편히 잘 곳을 찾아 해매는 가난한 20대들이 이곳에 모였다. 자신들의 주거권에 대한 간담회가 열렸다. 진보신당 ’20대 주거기획단’이 주관한 간담회 제목은 "방 있어요?"다. 방이야 많다. 우리를 위한 방이 없을 뿐이지. ‘고시원과 반지하, 옥탑에 서식하는 20대 이야기’라는 간담회 부제에서 보듯이, 가난한 20대들은 변변한 방에서 살지 못한다. 

    뉴타운과 재개발에 자신들의 삶의 터전을 잃어가는 현실은 20대도 마찬가지다. 이날 간담회에서는 자신도 집을 가지지 못한 신세라고 말하는 노회찬과 함께 힘든 서울살이에 대해 얘기하고, 이택광과 우석훈은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에 투항한 한국사회의 문제점을 진단했다.

    다큐영화 <자신만의 방>을 함께 보고, 20대의 빈곤함을 이 사회에 자랑(?)하며, 가난한 젊은이들이 처한 현실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 가에 대한 열띤 토론이 진행되었다. 과연 현재의 우리는, 앞으로 살아가야할 날이 많이 남은 20대라는 것에 희망을 걸고 살아갈 수 있는 존재인 것일까. 두리반이 20대에게 던져주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고민하게 만드는 자리였다.

    ‘당신이 사는 곳이 당신을 말해줍니다.’

    유명한 아파트 광고 문구다. 인간의 정체성이 무엇을 소유하느냐에 따라 재단된다는 자본주의적 욕망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문장이다. 그러나 공간이 개인과 더 나아가 집단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 미치는 영향 또한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내가 다니는 사회과학대학에는 학회나 동아리 소모임 등이 거의 사라지고 그나마 몇 개만이 ‘가뭄에 콩 나듯’ 겨우겨우 연명하고 있다.

    그러나 힘든 여건에도 불구하고 꿋꿋하게 지켜나간 동아리들의 공통점은 바로 그들만의 자치공간을 확보했다는 점이다. 학내 공동체가 사라져가는 이유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지난 몇 년간 사회과학대는 학생들의 자치 공간들을 강의실이나 교수들의 재량 공간으로 전환해왔다.

    학교 공간에서 철거되는 자치 공간

    그 결과, 많은 동아리들이 자치 공간이 없어 구성원 간에 일상 속 생활공동체로써 끈끈한 유대관계를 형성하지 못하고 이리저리 방황하다가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소멸해갔다. 학회나 동아리 모임이 사라진 데에는 이런 종류의 ‘철거’가 크게 작용을 했다. 

       
      ▲ 우석훈 박사가 참가자들과 이야기를 하고 있다 (사진=Tari)

    유대민족이 팔레스타인과 지겹도록 분쟁을 하면서도 이스라엘을 사수하려는 것도 구약성경에 나오는 약속의 땅이 그들 민족의 정체성을 지탱하는 데 상당한 기여를 한다는 점을 인식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처럼, 한 공간은 어떤 개인이나 집단이 살아온 과거부터 현재까지 기억을 담아내고, 미래에 대한 연속성의 느낌을 부여함으로써 정체성을 형성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지닌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20대가 살아가는 공간은 어떠한가. 20대의 주거권을 얘기하는 데에도 다양한 스펙트럼이 존재하기 때문에 함부로 왈가왈부할 순 없다. 그러나 흔히 20대 주거권 문제를 얘기할 때 가장 중점이 되는 케이스는 지방에서 멀리 떨어져 서울에 있는 대학에 다니고 있는 자취생들과, 부모와 얹혀사는 것이 불편해(?) 독립한 세대일 것이다.

    그 중에서도 아직 예비 사회인 단계로 일정소득을 안정적으로 벌 수 있는 형편이 되지 못하는 지방 학생들은 더 심각할 것이다. 이들 대부분이 삶의 공간으로 선택할 수 있는 곳은 반 지하나 한 평짜리 고시원이다.

    그러나 집만 구해서 끝난 것은 아닐 것이다. 식기부터 시작해 집안살림용품, 식비, 통신비, 공과금, 등록금 그리고 월 평균 50만원의 주거비용은 모두 20대가 혼자 살아가면서 혼자서 스스로 책임져야할 것들이다.

    사람이 살기 위한 집이 단순히 개인의 문제일 것인가. ‘모든 국민은 건강하고 쾌적한 환경에서 생활할 권리가 있음’을 헌법에서도 천명하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오늘날 20대는 헌법정신에 유린된 채 퀴퀴한 공간에서 사회진출의 기회를 노리며 근근이 살아가고 있다.

    쫓겨나는 20대

    ‘나는 돌아갈 곳이 없었다. 내 집이지만 따뜻하게 맞이할 곳이 없었다.’ 다큐 <자신만의 방>에서 한 여성이, 아니 20대가 사회에 던진 목소리다. 20대에게 있어 현재 자신이 살아가는 공간은 ‘내 집’으로 인정되지 못하고 단지 임시거처일 뿐이다. 그러나 공간과 개인의 정체성 형성의 밀접한 관계를 생각할 때 20대가 박탈당한 것은 단순히 쾌적한 공간에서 살 권리만이 아닐 것이다.

    내가 살아가는 공간을 내 집으로 불리길 거부하는 것은 결국 내가 이 공간에서 살아가는 시간이 내 삶에서 ‘삭제’되어야 하는 기억임을 의미한다. 인간의 삶 속에서 매순간순간이 중요하고 어느 순간도 ‘임시’일 순 없을 것이다. 결국 20대는 어느새 스스로 자신의 정체성을 부정하려 애쓰고 있는 것이다.

    두리반, 이 곳에서 20대가 모여 주거권에 대해서 이야기 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두리반은 가난한 소설가 남편을 둔 한 여성이 네 식구의 생존을 위해 버텨온 삶의 공간이다. 두리반은 살기 위해 꿋꿋하게 버텼던 그녀의 삶에 대한 의지가 새겨진 공간이며, 네 식구의 정체성이다. 그 공간이 한 순간에 거대자본에 의해서 무자비하게 짓밟힌 광경은 20대가 처한 현실과 다르지 않다.

    대학 내 기숙사 수용률은 저조하고, 학교당국은 민간자본에 의존하여 기숙사를 건설하고 있으며, 또한 서울 33개 지역에서 시행되는 뉴타운 계획으로 ‘불필요하게’ 늘어나는 40평형 이상의 큰 집들은 20대들을 쫓아내고, 또 다시 찾아나서는 방들은 계속해서 비싸지기만 한다. 

       
      ▲ 노회찬 진보신당 대표 (사진=Tari)

    많은 대학들이 밀접해있는 신촌지역은 더 심각하다. 지구개발계획에 따르면 두리반은 결국 홍대 동교동 삼거리에서 신촌 로터리까지를 잇는 대자본의 벨트에 서 있는 ‘요충지’이다. 만약 두리반이 이대로 자본에 무너진다면 다음 차례는 신촌 지역에서 거주하고 있는 ‘지방 학생들’일 것이다.

    두리반 다음은 신촌 

    평균 월세 50만원도 힘든 현황에서 지역 재개발이 진행된다면 많은 학생들이 철새처럼 자신의 보금자리를 찾아 떠나야하는 상황이 야기될 수 있는 것이다.

    수많은 인디밴드들이 음악으로 자신의 정체성의 ‘분신’으로 쌓아온 홍대라는 공간을 같은 이유로 잃었다. 그렇기에 얼마 전 노동절 두리반에서 <뉴타운 컬챠 파튀 51+>를 치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중요한 건 ‘연대의 정신’이다. 이제 우리 20대가 두리반에게 연대의 정신을 발휘할 때가 아닌가 싶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학생운동과 진보정당에 미래가 있을 것이다.

    학생운동권이 신자유주의 시대에 ‘노동해방’ 이나 ‘통일조국’이라는 거대 담론에 매몰되었기에 많은 학생들로부터 정치적 냉소를 샀다면, 이제는 20대의 ‘먹고사니즘’을 자극하는 정치가 필요하다.

    더 이상 대학생이 특권층이 아닌 오늘날, 사회적 약자로써 당사자가 처한 문제를 의제화하려는 노력이 절실한 시점이다. 뉴타운 개발로 자신의 집값을 오르기를 바라는 욕망을 자극해 대중을 현혹시키는 것이 보수진영의 ‘간지’라면, 더 이상 사회에서 박탈되지 않도록 안정된 삶을 보여주는 것이 진보진영의 ‘간지’가 되어야 한다.

    이 모든 가능성이 두리반에 있다. 용산 참사와 같이 평범한 이들이 길거리로 나서서 투사가 되어야하는 몰상식한 사회에서 철거민, 인디음악가, 학생, 진보진영 모두가 자신의 정체성을 지켜나가기 위한 ‘투쟁의 최전선’에 바로 두리반이 서있는 것이다.

    이 세상이 더 이상 ‘철거민의 무덤’ 위에 싸늘한 ‘자본의 묘비’들로 덮이도록 하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모두 두리반에서 연대해야 한다. 어느 노랫말처럼 ‘끈질긴 우리의 삶을 위하여’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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