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철학 혁명의 길을 열다
        2010년 05월 06일 12:01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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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일원론의 부활

    새벽에 잠깨면 <논어> 중 한 편을 외운다. 아침에 일어나 다시 앞서 외운 <논어> 구절에서 의심나는 곳을 찬찬히 되짚어 본다. 세수하고 머리 빗고 나서 <주역>의 한 장 또는 두 세장을 힘닿은 데까지 읽는데 30번씩 읽는다.

    아침을 먹고 나서 <주자대전>과 <주자대전차의>, <고증초고>를 자세히 따져가며 읽고, 몇 쪽씩 베껴 쓴다. 피곤하면 눈을 감고 잠시 쉬다가 다시 고요히 앉아 책을 읽는다. 어떤 때는 <남헌집>을 몇 쪽씩 뒤적여 보기도 한다.

    아침 식사 전에 읽은 회수가 30번이 안 되면 다시 읽어 30번을 채운다. 저녁을 먹은 뒤에는 등불을 밝혀놓고 <주역>의 계사를 10번씩 읽는다. 밤마다 지금까지 읽은 것을 합쳐 외우고, 날마다 읽은 것을 되풀이하여 음미한다.

       
      

    공부를 하려면 이 정도는 해야 하지 않을까. 임성주가 옥화대라는 곳에서 공부할 때 자신의 하루 일과를 적어놓은 것이다.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읽고 또 읽어 외운다고 한다.

    소위 ‘암기식 공부’에 대해 부정적인 의견들이 많은데, 조선 6대 유학자의 한 사람으로 꼽히는 임성주의 공부법을 보면 암기에 대해 부정적으로만 볼 것은 아닌 것 같다. 창의력이라는 것도 뭘 알아야 발휘될 수 있는 게 아니겠는가.

    임성주(1711년~1788년)는 조선 영, 정조 시대의 사람이다. 벼슬을 하기도 하였지만, 주로 학문 연구를 하였다. 그의 여동생 중에 임윤지당이 있다. 그녀는 대표적인 여성 유학자로 <윤지당고>란 유고집을 남겼다.

    윤지당은 오빠인 임성주로부터 학문을 배웠다. 여성들의 바깥출입조차 엄격히 통제되던 시대였는데, 임성주는 여성도 학문을 하여야 한다는 생각에 동생을 가르쳤다. 동생이 시집을 가고난 뒤에도 편지를 주고받으며 학문을 전수하고 토론을 하였다.

    <윤지당고>에는 유교 경전에 대한 연구, 성리학에 대한 고찰, 유학자들에 대한 인물평 등이 담겨 있다. 그 유고집에서 윤지당은 “남성과 여성은 현실에 처한 입장만 다를 뿐 하늘에서 타고난 본성에는 하등 차이가 없다”고 말한다. 시대를 몇 걸음 앞서 나가 있던 것이다.

    임성주는 윤지당에 대해 “누이는 우리 가문이 낳은 태임이요 태사이다. 정자의 따님은 대수롭지 않다”고 말했다. 태임은 중국 주나라 문왕의 어머니이고, 태사는 문왕의 부인이다. 정자는 중국 북송의 대유학자이다. 임성주는 중국에서 인품과 학식으로 인정받았던 여성들과 견주어 윤지당을 극찬하였던 것이다.

    윤지당은 학문으로는 대성하였지만 개인적으로는 불행하였다. 아이를 사산하였고 남편이 일찍 죽었다. 임성주는 동생을 위로하고 학문을 함께 하기 위해 동생이 살던 원주에 몇 년간 머무르기도 하였다.

    이러한 배경으로 해서 윤지당의 철학은 임성주로부터 상당한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임성주는 당대의 탁월한 학자였다. 그러나 자신의 철학을 표방하는 데 있어서 매우 조심스러웠다. ‘사문난적’이란 딱지를 받지 않기 위한 힘겨운 노력을 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기일원론을 부활시켰다. 서경덕이 기일원론을 체계화한 지 200여 년이 흐른 뒤였다. 기일원론은 이황과 이이가 비판하면서 물밑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송시열이 자신의 주자 해석만이 정통이고 여타의 모든 것은 사문난적이라 선을 긋자 기일원론의 입지는 사라지는 듯하였다.

    그러나 시대의 변화는 새로운 철학을 요구하는 법이다. 조선 후기 들어 체제 위기가 더욱 가중되자, 이것을 극복하기 위한 철학적 논의가 활발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런 가운데 임성주에 의해 기일원론이 부활하게 되었던 것이다.

    사람과 동물의 본성은 같다

    이이의 제자들인 집권 노론 내에서 논쟁이 시작됐다. 논쟁의 주제는 사람과 동물의 본성이 같은가 다른가였다. 서양의 관점에서 보면 이것은 문제가 될 수 없는 것이다. 당연히 사람과 동물은 다른 존재이고, 그 차이점을 증명하는 수많은 증거들을 제시해오지 않았던가. 이성, 언어, 노동 등등…….

    그러나 동양철학에서는 다르다. 불교철학, 노자와 장자의 철학은 사람과 동물, 인간과 자연을 차별짓는 일체의 것을 부정한다. 심지어 언어가 나와 나 이외의 것을 구분하는 데 사용되고 있음을 들어, 언어 자체에 대해서 불신을 하기도 한다.

    유교는 불교나 노 ․ 장 철학과는 다르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인간 중심의 철학이다. 인간을 자연 속에서 특별한 존재라 주장한다. 인간의 본질과 도리를 밝히고자 하는 게 유교 철학의 중심 주제이다.

    주자에 의해 체계화된 성리학은 이(理)와 기(氣)로 인간을 비롯한 우주 만물의 생성과 운동을 다룬다. 물론 기본적으로는 인간 중심이다. 이황과 이이 역시 인간의 문제를 다루었다. 그들은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에 입각하였는데, 이황이 이를 중심에 두었던데 반해 이이는 기 또한 중시하였다는 데에 차이점이 있다.

    이를 중심에 둔다는 것은 보편적인 도덕을 최상위에 둔다는 것을 의미한다. 기를 중시한다는 것은 현실의 변화에 대처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이는 보편적인 도덕을 중시하면서도 현실 변화 역시 강조하였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철학을 ‘이통기국(理通氣局)’, ‘이는 통하고 기는 국한한다’라고 정식화하였다.

    이이의 철학은 서인 정권이 들어서고 노론이 배타적인 지배권을 확립하면서 조선의 중심적인 철학이 되었다. 이런 가운데 이이의 4세대 제자 이간은 "인간과 동물의 본성은 같다"는 주장을 제기하였다. 그의 주장은 그 시각이 인간에서 인간과 동물의 관계로 확장되었음을 보여준다.

    성리학에서 본성을 다룰 때 ‘본연지성(本然之性)’과 ‘기질지성(氣質之性)’이라는 개념을 사용한다. 본연지성이란 본래부터 가지고 있는 본성을 말한다. 지극히 착하고 조금의 사리사욕도 없는 심성이다. 기질지성은 후천적인 본성을 말한다. 착한 것과 악한 것, 깨끗한 것과 더러운 것이 섞여 있는 심성이다. 이(理)와 기(氣)로 말하면, 본연지성은 이이고 기질지성은 기이다.

    이간의 주장은 본연지성이란 측면에서 볼 때 사람과 동물의 본성은 다르지 않다는 얘기이다. 그 근거는 이이가 말한 ‘이통(理通)’이다. 즉 이의 보편성이다. 이는 보편적인 것이기에 우주 만물 어디에나 존재한다. 그러니 사람의 이와 동물의 이가 다를 수 있겠는가. 이런 주장을 지지하는 학파를 낙론(洛論)이라 한다.

    사람과 동물의 본성은 다르다

    이간의 주장은 상식에 어긋난다. 이는 보편적인 도덕을 말하는 것이니, 이간의 주장에 따르면 인간의 도덕과 동물의 도덕이 같다는 얘기이다. 어른을 공경하고 친구를 사랑하는 도덕심이 개나 돼지에게도 있다는 말인데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말이다.

    그래서 이간의 주장은 곧바로 반대에 부딪힌다. 역시 이이의 4세대 제자인 한원진이 반론을 제기하고 나섰다. 그는 이간이 이의 보편성만 중요시하였지, 이이가 말한 또 다른 측면 인 기국(氣局), 즉 기의 특수성, 국한성을 무시하였다고 비판한다.

    한원진은 본성을 기질을 중심으로 하여 세 가지로 구분한다. 첫째, 기질을 초월해서 보면 인간과 동물의 본성은 다르지 않다. 둘째, 기질로 인해 인간 사이의 본성은 다르지 않지만, 인간과 동물의 본성은 다르다. 셋째, 잡스러운 기질로 인해 인간과 동물은 물론 인간 사이에서도 본성이 다르다.

    그는 이 중에서 첫째와 둘째를 본연지성, 셋째를 기질지성이라 하였다. 첫째를 본연지성, 셋째를 기질지성이라 하는 데는 이간과 한원진의 생각이 다르지 않다. 문제는 둘째의 것이다. 이간은 이런 것을 상정하지 않는다. 그에게 있어 본연지성과 기질지성은 엄격하게 구분되는 것이다. 한원진은 둘째의 것을 상정하고, 그것을 자기 주장의 주요한 근거로 하였다.

    한원진의 주장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다. 본연이 기질에서 생겨났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 이(理)와 기(氣)를 놓고 말하면, 이가 기에서 생겨났다는 얘기이다. 이러한 한원진의 주장을 따르는 학파를 호론(湖論)이라 한다.

    윤봉구는 한원진의 주장을 지지하며 논의를 더 밀고 나갔다. 그도 역시 이이의 4세대 제자이다. 한원진은 본연지성이 본래 그 자체로 존재한다는 것을 부정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윤봉구는 본성을 기를 중심으로 설명한다. 그는 인간의 기는 동물의 기보다 뛰어나며, 따라서 인간의 본성과 동물의 본성이 다르다고 말한다. 그러면 인간의 본성인 본연지성은 어디에서 오는가. 그는 기에서 온다고 말한다. 즉 이가 기에서 생겨난다는 데까지 밀고 나갔다.

    그러나 다음 순간 윤봉구는 멈춰 선다. 성인과 보통 사람의 본성은 어떠한가? 그것 역시 다르다고 하였다. 왜? 기의 차이 때문이다. 성인이든 보통 사람이든 인간은 누구나 기를 타고 난다. 그러나 성인의 기는 특히 더 맑고 아름답다. 타고 난 기가 다르니 보통사람은 성인이 될 수 없다. 그래서 성인과 보통사람 사이에 넘어설 수 없는 벽이 생겨버렸다. 그 벽은 본연지성이었다. 윤봉구는 그것이 기에 의해 생겨났다고 보았음에도 본연지성의 절대성을 버리지는 못했던 것이다.

    한원진과 윤봉구는 기의 중요성을 말하였다. 이가 기에서 생겨났음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이기이원론을 벗어나지는 못하였다. 이의 보편성, 절대성을 전제하는 한 이원론의 극복은 불가능한 일이기도 하였다.

    조선 성리학의 완성으로 보였던 이이의 철학은 그의 제자들에 의해 파탄이 났다. 이통기국에서 이통을 중시하는 학파와 기국을 중시하는 학파로 분열하면서 이이가 애써 이룩해놓은 절충은 붕괴되었다. 그것은 시대의 변화에 따라 새로운 철학이 등장하게 되는 과도기적 현상이라 할 수 있다. 새로운 철학의 정립은 그 다음 세대들의 몫이었다.

    사람의 잣대로 동물을 보지 말라

    임성주는 이이의 5세대 제자이다. 학문적 계통으로 보면 인간과 동물의 본성은 같다고 보는 낙론 계열이었다. 그러나 그는 낙론이나 호론이 모두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새로운 길로 나아갔다.

    낙론이든 호론이든 그 전제는 이의 보편성이었다. 낙론이 그것을 집중 부각하는 입장이었다면 호론은 기의 운동성을 강조하면서도 이의 보편성은 침해하지 않는 입장이었다. 호론파는 기가 특수하고 제한적인 것이어서 이와 같은 보편성을 가질 수 없다고 보았던 것이다.

    임성주는 이기이원론을 벗어던지고 기일원론으로 나아갔다. 그는 먼저 생성과 변화에 대해 말한다. 이기이원론은 기와 독립된 절대 불변의 이가 존재한다는 데 근거를 둔다. 따라서 생성과 변화, 즉 운동을 내세운다는 것은 불변인 이를 부정하는 것일 수밖에 없다.

    그는 ‘텅 비고 둥글고 성대하고 큰 것’이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존재하는 모든 것을 말한다. 그리고 그것들은 "쉬지 않고 흘러가면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물(物)을 낳는다"고 말한다. 즉, 생성과 변화, 운동이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참모습이라는 얘기이다. 그렇게 생성과 변화를 강조하고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주에는 안과 밖이 없고 처음과 끝도 없이 가득차서 넘쳐서 무수한 변화를 일으켜 사람과 물(物)을 만들어내는 것이 있으니 기(氣)일 따름이다. 조그만 틈도 없으니 이(理)가 들어설 수 없다. – <녹문잡지>

    이렇게 얘기하고 나니 이와 기의 관계가 명확해진다. 이는 들어설 틈이 없다. 이것은 매우 위험한 주장이다. 절대적 존재인 이를 부정하는 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이라는 개념을 폐기하지 않는다. 에둘러 말하기를 "이라는 것은 기를 두고 하는 말이다."

    이와 기는 같은 것을 다르게 표현한 말이라는 얘기이다. 그러나 그 뜻은 명확하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기일 뿐이다. 기일원론에 대한 명쾌한 설명이다.

    임성주는 본성의 문제를 다룸에 있어 본연지성과 기질지성을 구분하는 일이 의미 없는 것이라 말한다. 그러한 구분은 이와 기를 다른 것이라 보는 데서 오는 잘못이라고 비판한다. 본연지성은 기질지성을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인간이 착한 본성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기질지성 때문이다. 그래서 임성주는 윤봉구가 성인과 보통 사람의 기가 달라서 본성에 차이가 있다는 주장을 비판한다. 성인의 기질이나 보통 사람의 기질이나 똑같다고 말한다.

    이 글의 서두에서 윤지당이 "남성과 여성의 본성은 똑같다"고 한 것은 임성주의 이러한 주장에 영향을 받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임성주와 윤지당은 인간 사이의 차별을 부정하였던 것이다.

    그러면 인간과 동물의 본성 사이에는 어떠한 관계가 있는가. 이간은 이의 보편성을 내세워 인간과 동물의 본성이 같다고 주장했다. 한원진은 기의 특수성, 기의 제한성을 내세워 인간의 본성과 동물의 본성은 다르다고 주장했다.

    임성주는 두 주장이 모두 잘못되었다고 말한다. 사람과 동물은 기에 의해 생겨났음으로 같을 수밖에 없다. 인간과 동물 사이에 차별이 없어진다. 그러나 이간이 직면하였던 문제, 즉 어찌 사람과 개, 돼지가 같을 수 있느냐는 상식적인 질문에 어떻게 대답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그대로 남는다.

    임성주는 기의 운동의 차이에서 이 문제를 해결하려 하였다. 그는 특히 인간의 잣대를 동물에 들이대지 말 것을 주장한다. "인간의 도덕률로 동물을 평가하지 말라." 그는 "닭이 울고, 개가 짖고, 새가 날고, 물고기가 뛰는 것"은 사람의 도덕률로 평가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러한 것들에 대해 사람의 도덕률이 드러난 것이라고 한다면 애초에 말이 안 된다. 그렇다고 하여 그러한 것들이 사람의 도덕률이 드러나지 않은 것이니 악이라고 하는 것도 말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임성주는 이 문제에 대해 그 이상으로 나아가지 못하였다.

    철학 혁명의 예고

    사람과 동물의 본성이 같으냐 다르냐 하는 논쟁은 시대적 상황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조선 후기 들어 체제 위기가 깊어갔고, 새로운 시대로의 이행이 서서히 진행되고 있었다. 이런 체제 위기에 대처하기 위한 철학적 논쟁이 인간과 동물의 본성에 관한 논쟁으로 나타났다. 그것은 한 시대를 지배한 사상의 한계가 폭로되고 다음 시대의 사상을 예비하는 과정이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며 조선이 살아남기는 하였지만, 그 권위는 이미 땅에 떨어질대로 떨어졌다. 송시열은 지배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이데올로기적 통제를 강화하고자 하였다. 그러한 시도가 순간적인 약발이 있을지언정 근본적인 처방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조선은 서서히 붕괴되어 가고 있었다. 붕괴의 징표는 지속적인 민란과 신분제 동요였다. 임진왜란 당시 백성들은 자발적으로 일어나 조국을 지켜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백성들은 각성되어 갔다. 각성된 의식과 경제적 어려움은 민란으로 표출되었다. 민란은 초기에는 소규모 자연발생적인 봉기였지만, 점차 조직적인 대규모 봉기로 발전해갔다.

    이런 가운데 신분제가 서서히 붕괴되어 갔다. 돈을 번 농민, 상인 등이 생겨나면서 양반을 사고 파는 일이 생겨났다. 양반의 숫자가 급격히 늘어나면서 사농공상이라는 피라미드 구조의 신분제는 붕괴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중세적 신분제의 동요는 새로운 시대를 예고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즉 조선 후기에 이르러 중세에서 근대로 이행이 시작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인간과 동물의 본성에 관한 논쟁은 이런 배경 속에서 시작된 것이었다. 이간의 주장은 이의 보편성, 도덕의 절대성을 말하고자 한 것이었다. 그는 자신의 주장을 확고하게 하기 위해 인간뿐만 아니라 동물의 본성까지 밝혀 이의 보편성을 재확인하고자 하였다. 도덕성이 없는 인간은 개, 돼지만도 못하다는 얘기이다. 그는 도덕성의 강조를 통해 체제 위기를 극복하고자 하였다. 이런 시도는 시대 역행적일 수밖에 없었다.

    한원진과 윤봉구는 기를 내세워 이간을 비판하였다. 그렇다고 하여 그들이 도덕의 중요성을 부정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도덕을 시대 변화에 맞춰 새롭게 재정립하자고 주장했던 것이다. 그들이 본연지성을 버리지 못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들이 현실 변화에 주목했던 점에서 시대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하고자 했던 면이 있다. 그러나 절대 불변의 가치를 전제로 하는 한 그들의 주장은 언제든 시대 역행적이 될 수가 있었다.

    임성주는 기일원론을 통해 이의 보편성, 절대성을 부정하였다. 그것은 현실의 변화를 제대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생의(生意)라는 개념을 제시하였다. 있는 그대로의 것, 그리고 그것의 변화를 보자는 얘기이다. 인간의 도덕률로 동물을 평가하지 말라는 얘기는 동물을 있는 그대로 보자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주장을 일반화하지는 못하였다. 그것은 세계관의 혁명을 가져오는 일이었고, 그 다음 세대들의 몫이었다. 그럼에도 임성주가 다음 세대들의 철학 혁명에 길을 열었다는 점에서 그의 철학을 평가할 수 있다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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