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지국가의 역사적 기원에 대하여
    2010년 05월 03일 02:47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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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환위기 이후 한국 사회는 양극화, 빈곤화, 저성장 상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안타까운 사실은 진보의 기대를 안고 탄생한 김대중, 노무현 정부가 제대로 된 복지정책을 시행해보지도 못한 채 “분배가 우선인가, 성장이 우선인가”라는 의미 없는 논쟁으로 시간만 소모했다는 것이다. 만일 제대로 된 복지정책을 통해 양극화, 빈곤화를 해결하고 이를 통해 성장의 기반을 쌓았다면 한국 사회는 지금과는 매우 다른 모습을 보였을 것이다.

그런데 왜 그렇게 하지 못했는가?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그 중 하나는 복지국가에 대한 편견이 우리 사회에 뿌리 깊이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복지정책의 확대를 마치 자본주의 체제의 부정으로 생각하는 경향은 이런 왜곡된 시각을 잘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유럽 복지정책의 과정을 살펴보면 오히려 국가 주도의 복지정책이 자본주의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등장한 자연스런 역사적 산물임을 알 수 있다.

중세 :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빈민과 안정적 사회 시스템

근대 이전의 중세사회는 봉건적 신분제에 기반을 둔 안정적인 사회였다. 사람들은 농촌 공동체와 수평적 관계를 맺는 동시에 영주와 수직적 관계를 맺었으며, 서로에게 져야 할 의무와 함께 그로부터 보호도 받는 시스템을 가지고 있었다. 프랑스의 중세사가인 조르주 뒤비가 “중세는 위계적인 농촌사회였지만 동시에 경제적으로는 안정된 사회였다”고 말했던 것은 바로 이 점을 강조한 것이었다. 물론 상호의존에 기반을 둔 사회라 할지라도 불안은 존재했다. 예를 들어 고아, 신체 불구, 기아 등은 이 시기의 불안을 나타내는 가시적 상징이었다.

그럼에도 중세는 빈민에 대처하는 방법에서 근대와는 큰 차이가 있었다. 즉 근대와 같은 부의 창출이 없었고 사람들은 생계를 위해 고단한 노동을 해야 했지만 당시의 빈민들은 사회 밖으로 쫓겨나지 않은 채 공동체 내에서 사회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들의 부재는 자선을 베풀 기회가 없어지는 것으로, 이는 곧 천당으로 갈 통로의 차단을 의미했다. 따라서 빈민과 걸인의 부재는 사회의 불안을 의미했다. 당시에 걸인은 하나의 직업이었다고 할 수 있다.

중세의 자선은 가난한 자에 대한 책임이 개인적 선택이 아니라 상호의존의 체계 내에서 의무적인 것이었다는 걸 보여준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가 강했던 것은 자선이 중세를 지배하던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덕목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이것은 중세 내내 기독교에 의해 조직적으로 자선활동이 이루어져 왔다는 사실을 봐도 알 수 있다. 한편 자선행위는 중세의 부자들에게도 이익이 되었다. 부자들은 자선을 통해 덕을 실천하고 죄를 씻었다. 상업이 발달하여 사람들 사이에서 거래관념이 강하게 자리 잡게 된 것도 자선활동을 부자와 빈자의 거래 혹은 일종의 교환행위로 여기게 한 요인이 되었다. 즉 부조를 통해 부자는 저승에서의 구원을 약속 받았고 이승에서의 삶을 즐길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의 자선이 모든 빈민을 무조건 도와야 한다고 본 것은 아니었다. 이 시기에도 도울만한 빈민이 있고 그렇지 않은 빈민이 있다는 인식은 존재했다. 우선 그리스도의 가난과 같은 자발적 가난이 그 가치를 인정받았다. 사람들은 그러한 사람에게 자선을 베풀 때 그 행위를 신이 더욱 인정해준다고 생각했다. 육체적 불구 역시 신성화되었는데, 이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순교자들의 고통 덕분이었다. 또한 순례자와 유랑하는 빈민들에 대한 부조도 이 시기에는 중요한 일이었다. 중세 전기에 수도원은 이들을 구제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렇지만 그들도 부조할 빈민과 그렇지 않은 빈민들을 구별하고자 노력했다. 예를 들어, 프랑스의 클뤼니 수도원에서는 지나가는 여행자에게 단지 하루 동안만 숙소를 제공했지만 진정한 빈민들에게는 그곳에서 계속 머무를 수 있게 해 주었다. 이 때문에 수도원 문지기는 좋은 빈민과 나쁜 빈민을 선별하는 역할을 담당하는 사람이기도 했다. 물론 이들 간의 구별이 그리 쉬운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빈민은 자선을 받을 만한 빈민으로 여겨졌다.

중세 시대의 빈민 부조에 있어 가장 중요한 기구는 교회였지만 시립병원이나 자선병원과 같은 구호소 역시 그 역할을 맡았다. 구호소는 프랑스 파리지역에서는 1180~1350년에 크게 증가했다. 자선활동은 지역적 기반 위에서 조직화되었고 부조대상은 엄격히 선별되었다. 이미 13세기 말부터 자선 행사가 지방의 사회적 서비스가 되었고, 도시 당국도 적극적으로 행동에 나섰다. 수도원, 영주, 성직자 모두가 비슷한 방식으로 빈민 부조를 위해 노력했다. 당시에는 자선활동이 사회안전망의 구실을 했으며 가난한 사람들의 삶을 사회가 충분히 담당할 수 있었다.

근대 : 자본주의의 발전과 감금 위주의 정책

이러한 안정적인 사회시스템은 중세 말의 위기를 거쳐 16세기로 넘어오면서 점차 붕괴하기 시작했다. 부가 한 쪽으로 집중되기 시작하면서 빈민과 유랑민이 급증하는 양상이 나타난 것이다. 당시의 인구 증가는 토지의 세분화를 가져왔고, 이는 토지 없는 농민을 양산했다. 소농들은 식료품을 사기 위해 돈을 빌려야 했으며, 빌린 돈에 대해 이자를 지불하지 못한 사람들은 토지를 팔아야만 했다. 농촌 내에서 뿌리가 뽑힌 사람들은 결국 도시로 몰려가든지 이곳저곳을 떠도는 유랑민이 되고 말았다. 당시 “거리에 빈민이 너무 많아 걸어 다닐 수가 없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그 정도는 매우 심각했다.

이제 더 이상 빈곤은 자선 위주의 사회안전망 속에서 해결될 수 없었다. 그리고 이런 상황은 빈민에 대한 부정적 태도를 확산시켰다. 중세시대의 빈민과 주변인들이 신에게로 가는 구원의 길로서 사회를 유지시켜주는 윤활유 역할을 했다면, 이제 그들은 사회의 낙오자로 취급받기 시작했다. 동정심은 이렇게 경멸감으로 바뀌었다.

근대사회는 이 문제를 그대로 두고 볼 수 없었다. 16-17세기에 유럽의 시당국과 국가는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해 억압적 정책을 사용했다. 국가는 빈민의 도시 유입을 막았고, 그들을 가둔 채 강제노동을 시켰다. 빈민은 이제 노동하지 않는 게으른 자라는 낙인 속에서 살아야만 했다. 1535년 2월 5일 파리 고등법원은 빈민들을 다루기 위한 다음과 같은 법령을 채택했다. “첫째, 파리에서 태어났거나 적어도 2년 동안 파리에서 머문 건장한 걸인들은 공공사업에 복무해야 한다. 둘째, 파리에서 태어나지 않았거나 파리에서 머문 지 2년이 채 안된 건장한 걸인들은 3일 이내에 도시를 떠나야 한다. 셋째, 병이나 신체불구를 위장한 걸인들은 채찍질을 당하거나 추방될 것이다. 넷째, 이를 어긴 자는 사형 혹은 재판관의 자유재량에 맡겨진다.”

가톨릭 인문주의자인 비베스(Juan Luis Vives) 역시 “빈민들이 무시당했을 때 그들은 자신의 결핍을 극복하기 위해 반란을 일으킬 위험이 있다”고 말하면서 빈민을 철저히 감시하고 통제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미셀 푸코의 ‘대감금 정책’도 이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푸코는 1656년에 파리에서 창설된 종합병원의 주된 목적을 빈민과 주변인에 대한 ‘배제의 정책’으로 파악했다. 하지만 빈민들의 반발 속에서 국가의 배제정책은 그 실효성을 거두지 못했다. 당시에 유사한 법령이 계속해서 만들어졌다는 사실은 이를 잘 보여준다.

국가의 억압정책과는 달리 민간 차원에서는 자선을 강조하는 흐름이 계속해서 이어져 오고 있었다. 빈민에 대한 관대한 자선을 주장한 쪽은 주로 성직자들이었다. 그들은 종교 교육을 통해 빈민을 교화하고자 노력했다. 그들에게 자선사업은 필수적으로 자기희생, 명상 그리고 기도를 근간으로 했으며, 이를 위해 그들이 추구한 것은 전국적으로 많은 병원을 창설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빈민을 사회의 위험으로 여기지 않았으며, 오히려 빈민을 배제시키려는 노력이 사회를 더 위태롭게 만든다고 생각했다. 그들에게는 여전히 중세적인 빈민의 이미지가 강하게 자리 잡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자선활동은 대규모의 빈민화를 야기하는 사회구조의 변화에 주목하지 못했기 때문에 근본적인 해결책은 되지 못했다.

자본주의의 심화와 불안의 증가, 그리고 복지국가의 등장

중세의 ‘신성한 노동’이라는 종교적 외피는 17세기 말과 18세기 초를 기점으로 완전히 벗겨졌다. 이 시기에 노동은 잉여가치를 창출하는 자본증식의 원천이었으며, 더 많은 잉여가치를 생산해 내기 위한 재조직의 대상이었다. 이로 인해 18세기에 나타난 빈곤은 이전의 빈곤과는 또 다른 양상을 띠었는데, 그것은 ‘불안한 노동’이라는 말과 긴밀히 연결된다. 즉 노동자는 자주 실업 상황에 빠졌기 때문에 항상 고용되어야 한다는 불안감에 시달려야만 했던 것이다. 자본주의가 팽창하던 당시에도 현재와 비슷하게 노동의 재조직으로 인한 실업문제는 심각했다.

이 시기의 빈곤은 18세기의 낙관주의에 커다란 실망을 불러 일으켰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농촌에 살았던 중세에는 풍족하지는 않았어도 실업이라는 문제로 고통을 당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자본주의와 산업화의 시기에 실업을 당하게 되면 생계가 막막해지기 때문에 이는 물리적 죽음을 의미했다. 부를 창출해야 할 자본주의 하에서 오히려 빈민이 양산되었던 것이다. 토크빌이 포르투갈과 영국을 비교하면서 산업사회인 영국에 더 많은 빈민이 있다고 보고한 것이나, 경제학자 뷔레(Eugène Buret)가 “가난이 문명과 풍요를 따라 다닌다”고 말한 것은 바로 이를 지적한 것이다.

국가가 억압 일변도의 정책을 반성하고 실업문제와 사회불안을 공공의 책임으로 인식하기 시작한 것은 바로 이러한 현실적 상황 때문이었다. 일하고 싶어도 일자리를 얻을 수 없음에도 그들에게 일하라고 강요하는 것은 부도덕한 일이라는 공감대가 형성된 것이다. 프랑스 혁명은 부르주아 혁명이라고 규정되지만 혁명가들도 이 문제를 깊게 인식하고 있었다. 혁명 당시 국민공회는 노동에 의한 생계유지의 권리를 모든 인간이 다 갖지만 노동의 바깥에 위치한 경우에는 무상원조를 해주어야 한다고 보았다. 그러나 테르미도르의 반동 이후 외국과의 전쟁, 내부 분열에 의해서 이러한 시도는 무산되고 만다.

국가에 의한 빈곤과 실업 문제의 해결이 지체되는 동안 사회적 불안감은 더욱 커져 갔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과거 자선활동의 연장선에서 새로운 민간운동이 조직되기도 했다. 그러나 노동계급의 교화와 도덕성 회복 등에 기초한 이러한 운동들은 여전히 새로운 산업 환경에는 부적합했고 근본적 해결책이 되지 못했다. 노동자들이 보기에 자신들에게 더욱 필요한 것은 교화가 아니라 사회체제의 변화였다. 따라서 노동계급은 이러한 운동보다는 자본가에 대항할 스스로의 조직을 건설하는 데 더욱 집중했다.

19세기 들어 사회적 충돌과 불안감은 더욱 고조되었고 국가도 이러한 상황이 그대로 방치되면 자본주의 자체가 위기에 처할 수도 있다고 인식했다. 결국 국가가 나서서 상황을 통제하는 역할을 맡아야 했고, 그 해결책은 복지정책의 확대로 나타났다. 개인적 온정주의와 계급투쟁이라는 두 가지 해결책 사이에서 ‘복지국가’가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제시된 것이다.

다시 말해, 복지국가는 1930년대 세계적 대공황 이후 케인즈 이론에 의해 도입된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가 야기한 새로운 사회문제에 대해 서구사회가 오랜 시행착오를 거쳐 내린 결론이었다. 무엇보다 복지국가의 주요 요소인 사회부조와 사회보험은 불행한 사람의 상태를 더 이상 개인의 책임만으로 보지 않겠다는 국가의 인식 전환을 반영하고 있다. 다시 말해, 복지국가는 사회적 보호 없이는 사회적 통합도 없다는 생각, 빈민들의 배제보다는 긍정적 개인주의에 기반을 두어야 사회가 유지될 수 있다는 생각이 실체화한 제도인 것이다.

유럽에서 아직도 배워야 할 것

사회의 밑바닥에 처하는 것만큼이나 잉여인간이 된다는 것 역시 사람들에게는 불행을 준다. 중세에도 노동자들은 물론 착취를 당했지만 불필요한 존재는 아니었다. 그러나 산업사회에서 ‘여분이 되어 버린 사람(잉여인간)’은 사회적 가치를 창출할 능력을 소유하지 못했기 때문에 착취의 대상도 되지 못한다. 현재 우리 사회의 수많은 주변인들은 마치 근대 초기에 농촌에서 쫓겨난 채 지속적인 실업의 위협을 안고 도시에서 살게 된 노동자들, 아무 곳에도 정착하지 못하고 이곳저곳을 떠돌게 된 유랑민과 비슷하다. 그 상태를 낳은 과정이 그렇고, 그들이 안정된 사회적 지위를 차지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사회문제의 기형은 생활의 빈곤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확실성의 위협, 즉 불안정성을 의미한다.

서양은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다양한 시도를 했고, 어렵게 복지국가라는 귀착점에 도달했다. 즉 자본주의 체제의 연속성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자본주의의 부작용을 국가가 나서서 해결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한 것이다. 1880년대 독일의 비스마르크 사회보험 정책과 1940년대 영국의 베버리지 보고서 역시 바로 이러한 역사적 흐름에 기인한 것이다.

이제 자본주의 심화와 함께 유럽이 겪었던 동일한 문제, 즉 양극화, 빈곤화 그리고 잉여인간의 발생은 우리에게도 심각한 문제가 되었다. 물론 우리도 산업화와 더불어 근대적 복지체제를 도입하는 데 나름의 노력을 기울여왔고, 지난 민주정부 시기에 많은 성과를 이룬 부분도 있다. 그러나 국가가 아닌 가족이 사회문제의 주된 해결사 역할을 한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지금까지는 가족이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주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사회문제가 더욱 심각해지면서 복지를 담당하던 가족 자체가 오히려 해체의 길을 걷고 있음을 우리는 목도하고 있다. 우리가 아직도 서양으로부터 배울 것이 남아 있다면 복지국가의 필요성에 대한 사회의 폭넓은 공감대와 복지국가 정책의 실행을 위한 정부의 의지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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