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자본주의자들, 유쾌한 연대 필요하다
    2010년 05월 02일 09:53 오후

Print Friendly

요즘 세상을 보면 불가사의한 현상이 하나 보입니다. 예컨대 한때 세상을 호령했던 영국을 보십시오.

신자유주의적 정책의 결과로 정상적인 산업이 쇠퇴하거니 국외로 이동하고 금융업이라는 기생성이 강한 부문만이 기형적으로 발전된 그 나라는 지금 세계 공황을 제일 아프게 맞고 있는 국가 중의 하나가 됐습니다.

10년 전만 해도 국내총생산 대비 공공 부문 총부채가 30%였는데, 계속 눈덩이처럼 늘어나 이제 60%나 된 것입니다.

예산 적자가 국가 증권(국채)의 신뢰도를 위협할 정도가 되니 세율을 높일 만한 정치력이 없는 보수당과 노동당 등 극우와 중간 우파 정당들이 다 하나같이 공공부문 지출 감소를 외치는데, 아주 최소한으로 잡아도 다음 3년간 공공부문 지출의 실제 감소의 폭은 약 11% 정도로 봐야 할 듯합니다.

80년 전 대공황 때보다 타격

뭐, 공무원의 임금을 평균 45%나 감봉시킨 라트비아에 비해서야 그나마 살만한 세상이겠지만, 수많은 공공부문 종사자들은 잘 돼야 임금 동결, 운이 나쁘면 감원 당할 게 뻔합니다.

   
  ▲필자

내년 국가 고등교육 예산이 약 5%나 깎이니까 대학가에서 벌써 감원 바람이 세차게 불어 수백 명에서 수천 명의 교수, 전임강사, 행정 직원들이 사랑하는 일터를 강제로 떠나야 할 것도 분명합니다.

영국으로서 초유의 사태죠. 80년 전 대공황 때는 고등교육의 대중화 이전이라서 그렇다고도 볼 수 있지만, 대공황 당시에도 학계가 그렇게 타격을 입지 않았어요.

초유의 자본주의 위기인데 놀라운 게 급진 좌파가 전혀 득을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이에요. 예컨대 이 난리 중에서도 국내에서 ‘다함께’ 활동 덕택에 약간 알려진, 그 모태인 영국의 트로츠키주의적 사회주의노동당이 당원들이 가시적으로 늘거나 언론 등 사회의 주목을 더 받게 되는 것은 전혀 아니었어요.

특히 젊은이 중에서는 자본주의에 절망한 사람들이 가시적으로 늘긴 하는데, 이 사람들은 ‘구좌파’라는 동네를 그렇게 잘 찾아가지 않아요. 물론 영국보다 탈산업화와 신자유주의화를 훨씬 덜한 독일에서나 프랑스에서는 급진좌파는 소폭의 세력 강화를 보이고 있는데, 역시 지금 위기의 규모에 비해서는 놀라울 만큼 느리고 소폭적인 상승세입니다.

또 그리스 같으면 요즘 ‘구좌파’를 중심으로 해서 거의 ‘혁명 준비 태세’가 갖추어지기 시작하는데, 그건 영-불-독과 확연히 다른 세상이죠. 준주변부 젊은 노동자들이 영-불-독의 젊은이에 비해서 잃을 게 없어요. 800유로 월급을 잃어봐야 뭐 아쉬울 게 있습니까? 뭐, 청년 실업률이 약 22%에서 30%까지 추산되는 그 나라에서는 800유로 짜리 일자리 얻는 것도 별따기인데 말입니다. (http://www.independent.co.uk/news/world/europe/are-the-greek-riots-a-taste-of-things-to-come-1064479.html)

별다른 급진성 보이지 않는 진보 양당

그러한 ‘절망의 땅’에서는 급진적 경향의 ‘구좌파’는 예상대로 잘 늘지만, 아직도 번영의 과실이 좀 남은 서구에서나, 수많은 비정규직의 희생과 대다수 노동자의 장시간 노동, 그리고 아직까지는 집값 폭락의 지연으로, 그나마 지금까지 본격적 위기를 면해온 한국에서는 급진파에 대한 사회적 관심은 비교적으로 저조해요. 뭐, 한국과 같은 ‘초자본주의적’ 사회에서 별다른 급진성이 보이지도 않는 진보신당이나 민노당도 거의 ‘주류 진출’을 못하고 있는데 말입니다…

왜 그럴까요? 물론 보수적 언론의 역할부터 소비사회의 ‘달콤한 족쇄’까지 온갖 사회적 원인들을 쉽게 찾을 수 있지만, 자성, 즉 ‘자아’에 대한 비판적 성찰의 의미에서는 급진파들이 자기 자신의 모습과 행동에서도 고립을 자초할 수 있는 일부의 원인들을 찾아봐야 할 의무가 있는 것 같아요.

저는 그 동네를 약간 외부에서 보면서도 상당한 정서적 동질감을 느끼지만, 이러한 입장에서 관찰을 하자면 다음과 같은 결론이 나와요. 20세기 벽두에 형성된 활동의 형태, 방법, 표현 방식, 조직 문화를 갖고 21세기 벽두의 자본주의에 절망한 젊은이들에게 어필하기가 어렵다는 것이죠.

이게 무슨 말인가 하면, ‘좌파’의 고전적 형태들이 만들어진 제1차 세계 대전 전후의 유럽을 상기해보세요. 절대적 빈곤에 허덕이는 다수의 노동자, 세기말적인 열강 각축과 세계대전의 분위기, 멀리 러시아에서 제일 급진적인 사회주의 정파가 집권했다는 낭보… 90~100년 전 유럽의 풍경에서는 급진파들이 곧 올 것 같은 승리의 예감에 충만돼 있었어요.

그래서 볼셰비키와 같은 전위당 하나 제대로 만들고, 절대 빈곤에 허덕이는 다수를 잘 결합하고 세계대전과 같은 계기만 잘 타면 ‘제2 10월혁명’이 곧 다가올 것으로 봤어요. 그러한 풍토에서는 ‘당’은 모든 활동의 중심이 돼야 됐고, 당에 대한 높은 충성이 요구됨과 동시에 당에 대한 기대도 거의 절대적이었어요. 천지개벽의 주도기관으로 인식됐으니 당연한 일이겠죠.

반자본주의자들의 유쾌한 연대

‘당의 이론’에 이의를 제기한 친구와 절연하는 것은 90년 전 급진파적 유럽인에게 거의 당연시되는 일이었죠. 그리고 전체적으로 권위주의적인 – 거기에다 전쟁 영향으로 많이 군사화된 – 그 당시 유럽 문화 풍토에서는 당에서 ‘지도자'(장군)와 ‘이론가'(참모본부)를 받드는 것도 당연시됐어요. 뭐, 그 시대 치고 이게 다 통념에 가까웠어요.

그런데 지금 과연 어떤 시대적 배경인가요? 서구는 물론 한국과 같은 ‘비교적으로 부유한 준주변부’만 해도 절대 빈곤은 50~60%에서 10~15%로 줄어들었고, 제3세계에 대한 침략들은 계속 지속돼도 주요 열강 사이의 경쟁은 아직도 열전 수준으로까지 비화되지 않고 있어요.

열전으로 가도 이스라엘-이란전과 같은 대리전으로 갈 확률이 높지 중-러와 미-일이 직접 붙을 가능성은 (최소한 아직까지) 좀 적습니다. 러시아와 중국은 ‘혁명의 본고장’에서 가장 보기 안 좋은 초기 자본주의의 모습을 다 보이는 나라들이 되고, 세계화된 자본주의는 수많은 새로운 ‘완충 장치’들을 개발해놓았어요.

신자유주의 ‘개혁’으로 경제가 완전히 망가진 키르기스스탄이나 몰도바에서 노동인구의 20~30%를 선진권이나 준주변부권에 이민노동자로 보내 얼마든지 진정한 의미의 혁명을 모면할 수 있게 된 것은 그 사례 중의 하나입니다.

이러한 세상에서는 전위당과 ‘무오류의 이론’을 내세우면서 천지개벽의 ‘그날’을 무작정 기다리는 것보다는, 유연한 ‘화이부동’의 전략을 구사하는 것은 훨씬 더 효과적일 수 있어요. ‘심판의 날’이 오든 말든 중요한 것은 자본주의에 체질적으로 거부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유쾌하게 뭉쳐 의미 있는 일을 같이 할 수 있는 게 아닌가요?

그래서 정치적으로 ‘당’은 당연히 있어야 하지만, 중요한 것은 반자본주의적 급진 분자들이 사회 각분야에서 벌이고 있는 부문 운동들일 것입니다.

대중 투쟁과 집단적 지혜

이 운동들은 굉장히 다양할 수 있습니다. 학술적으로 ‘수유연구실’과 같은 비영리, 탈권위, 무형식 ‘배움터’일 수도 있지만, 예를 들어 국방부와 같은 한국사회의 성역을 겨냥하는 운동일 수 있어요. 기존 군 시설 관리, 정비에 제대로 충분한 예산을 주지 않아 인명 피해 사고들이 계속 일어나는 군은, 지금 이 세계에서 미국산 무기를 제일로 많이 사고, 전체적으로 세계 3번째 무기 수입국에요. 중국, 인도 다음으로 말에요.(http://www.koreatimes.co.kr/www/news/nation/2010/03/117_62485.html)

저도 한국에서 원고료를 받을 때에 세금을 떼이지만, 제 세금으로 그 필요성이 아주 의심될 때 많은 미국산 흉기가 무더기로 사재기 되어진다는 생각에 아주, 아주 화가 납니다. 이 문제를 겨냥하는 운동이 아직까지 왜 없는지도 모르겠어요.

이것도 그렇고 학교와 가정 체벌 폐지 운동부터 대다수가 부당노동행위의 피해자가 되는 청년 아르바이트생에 대한 지원 운동까지, 자본주의에 반대하려는 사람이 이 사회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대단히 많습니다.

궁극적으로 ‘탈자본주의’를 도모하는 그러한 운동들이 하나의 사회적 ‘문화’를 이루게 된다면, 한국에서도 프랑스나 독일처럼 정치적인 급진파가 어떤 미래를 보장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정치도 중요하지만, 정치를 뒷받침하는 사회적 ‘인프라’가 없으면 그 정치에 생명이 부어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섹트적 기질, ‘지도자’ 중심주의나 ‘이론’에 대한 과도한 집착이 극복되지 않는다면 ‘그날’을 향해서 힘차게 나아갈 만한 생기가 생기지도 않을 듯합니다. ‘이론’이란 결국 어떤 ‘위대한 지도자’의 완벽한 머리 속에서 나오는 게 아니고, 다수의 투쟁과 그 투쟁에 대한 성찰 과정 속에서 얻어지는 집단적 지혜의 성격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필자소개
레디앙
레디앙 편집국입니다. 기사제보 및 문의사항은 webmaster@redian.org 로 보내주십시오

페이스북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