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달 뒤, 어떤 나라를 물려줄 것인가
        2010년 05월 03일 12:31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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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록 천안함 참사로 많은 일들이 묻혀 가고 있지만, 앞으로 다가올 선거도 계속 묻혀버리지는 않을 것이다. 선거 한 번 잘못하면 나라꼴이 어찌 되는지 잘 알면서도, 막상 선거 열심히 해봤자 나아지는 것 하나 없더라는 경험도 진저리나게 겪어왔지만, 한국사회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간접적으로나마 정치에 관여할 수 있는 기회라고는 그나마 선거 밖에 없으니까.

    어쩌다보니 공휴일이 죄다 토요일 아니면 일요일인 이상한 해에 선거일이 그나마 쉬는 날이라고 모두 들로 산으로 놀러가기야 하겠는가?

    어른들이야 어쨌든 아이들이 가장 신나게 여기는 일 가운데 하나가 학교에 가지 않아도 되는 일이다. 그래서 달력을 넘길 때마다 빨간 날을 열심히 챙기고 손꼽아 기다린다. 일요일도 아니고, 공휴일도 아니고, 개교기념일도 아닌데 갑자기 노는 날이 되는 흔치 않은 경우는 아주 특별한 날이다.

    기막힌 시절의 이야기

    초등학교 2학년 때 처음으로 그런 특별한 날을 맞은 적이 있었다. 32년이나 지난 그날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 까닭은 담임선생님이 학교를 쉬는 의미에 대해 귀에 못이 박히도록 강조에 강조를 거듭했기 때문이다. 그날은 1972년 10월 17일, 바로 유신헌법으로의 개헌을 위한 ‘국민투표’를 하는 날이었다.

       
      ▲ 영화 <효자동 이발사> 포스터

    이미 달포 전부터 모든 학생이 가슴에 ‘10월 유신’이라고 프린트된 리본을 달고 다니던 터였다. 선생님이 달뜬 목소리로 나라의 앞날에 몹시 중요한 일이라 특별히 하루 쉬는 거니까 집에 가거든 부모님께 꼭 찬성투표를 하시라고 해야 한다고 다짐하시는 모습은 결연하기까지 했다. 북한은 주민투표를 했다하면 100% 투표에 100% 찬성인데 우리나라가 그보다 단결을 못하면 다시 6.25같은 전쟁이 나게 될 거라고 겁도 주셨다.

    결국 91.9%의 투표율과 91.5%의 찬성율로 그날의 대대적인 국민투표가 끝이 났고, 그렇게 해서 우리들은 더 이상 대통령 선거 때문에 노는 날이 없는 나라의 학생이 되었다. 그 후 오랫동안 ‘한국적 민주주의’라는 이상한 체제를 가진 이 나라에서 대통령은 국민에 의해 선출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군림하는 자가 되었고, 투표를 위해 특별히 쉬는 날이 다시 생기기까지 수많은 눈물과 한숨과 피가 흘러야했다.

    <효자동 이발사>는 이 기막힌 시절로 우리들을 불러들인 영화다. 효자동이라는 동네는 눈이 돌아갈 정도로 빠르게 변해버린 서울에서도 세월이 비껴간 듯 예전의 모습을 하고 있는 곳이다. 청와대를 이웃한 덕에 집을 고쳐 짓지도 못하고, 길도 새로 내지 못하다보니 지금도 동네 자체가 도심 속의 타임캡슐과도 같은 모습이다.

    어쩌다 된 ‘각하’의 이발사

    이 고색창연한 동네에 있는 이발소가 우리를 그때 그 시절로 안내하는 타임머신이고, 그 안내자는 이발소 주인 성한모의 아들 성낙안이다. 굵고 짧게 살기보다는 가늘고 길게 살라고 붙여준 이름과는 달리 권력의 중심부 가까이에서 태어난 덕에 팔자가 꼬인 낙안이의 눈으로 돌아본 기억은 역사적 사실과는 사뭇 모양새가 다르되 진실을 비켜가진 않는다.

    이승만에서 박정희를 거쳐 전두환에 이르기까지 시작은 그럴 듯하다가 마무리는 부끄럽기 짝이 없던 세 대통령의 부침을 지척에서 함께 겪어내는 이발사 성한모는 썩 자랑스러운 아버지가 못된다. 고용주라는 쩨쩨한 권세를 무기 삼아 버젓이 정혼자가 있는 여종업원을 덜컥 임신시키더니, 아이를 못 낳겠다는 이 여자를 ‘사사오입’이 법이라는 시대 정서로 밀어붙여 부인으로 만든 위인이다. 어쩌다 ‘각하’의 이발사가 되고 나서도 그럴 듯하게 폼 잡을 일보다는 혹시라도 ‘용안’에 상처내면 어쩌나 가슴 조이며, 실컷 봉사하고도 정강이 차이지 않으면 다행인줄 아는 소심하기 짝이 없는 아버지.

       
      ▲ 영화 <효자동 이발사>의 한 장면

    불의고 뭐고 간에 그저 굽신굽신 몸을 낮추는 것도 죄로 쌓인다는 것을 이 아버지가 깨닫도록 하기 위해 시대가 요구한 제물이 아들이다. 나라가 하는 일이 그저 옳은 줄 알고 자기 손으로 파출소에 데려간 어린 아들이 고문 끝에 다리가 허물어져 돌아오고 나서야 아버지는 비로소 아닌 건 아니라는 걸 깨닫는다.

    아이들에게 어떤 나라를 물려줄 것인가

    고문을 받으면서 비명을 지르는 대신 까르르 깔깔 웃어대며 아버지를 지켜주느라 만신창이가 되어버린 어린 아들이 다시 온전히 걷게 되기 위해서 필요했던 것이 단지 세월과 정성만이 아니라 숨어서라도 우상의 눈을 후벼 파는 작은 용기라는 것을 배운 것이다. 그 깨달음 덕에 묵사발이 되더라도 다시는 그릇된 흐름에 가위질 하나 보태지 않게 되기까지 아버지는 참으로 기나긴 세월을 겪어야했다.

    이 모진 시절이 영화처럼 돌이켜보면 기막히고 우스꽝스러울 지라도 막상 겪을 때는 얼마나 끔찍한 것이었는지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아이들에게 만신창이가 된 나라를 물려줄 것인지, 그보다 어영부영 아이들 자체를 만신창이로 만들어버리고 말 것인지 우리 모두 심각하게 고민하고 결정하기 위해 앞으로 한 달, 정말 많이 고민해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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