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송시열, 조선 왕조의 이데올로그
        2010년 04월 29일 02:35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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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성의 신망을 잃은 왕조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7년여에 걸친 전쟁으로 조선은 거의 초토화되다시피 하였다. 조선군은 전투다운 전투 한 번 제대로 못한 채 패퇴하였고, 일본군은 부산에 상륙한 지 불과 20일만에 한양을 점령하였다. 선조는 개경, 평양을 거쳐 국경 지대인 평안도 의주로 도망을 쳤다. 여차하면 중국 명나라로 망명할 계획도 세웠다.

    전쟁의 피해는 고스란히 백성들의 몫이었다. 일본군은 양민을 학살하고 잡아가 노예로 삼았다. 특히 일본군이 퇴각하기 시작하는 전쟁 후반기에 대대적인 양민 학살이 자행되었다. 오늘날과 같은 인구 통계 제도가 없었던 시대라 정확한 통계는 어렵겠지만, 임진왜란 전후의 인구 추이를 보면 전쟁으로 희생된 인구가 대략 300만 명인 것으로 추산된다. 조선군의 경우 대략 70%가 사망하였다.

    백성들은 전쟁을 피해 도망 다니며 초근목피로 연명하였다. 그들을 더욱 힘들게 하는 건 군량미 징발이었다. 특히 명나라가 참전하면서 군량미 조달 문제는 더욱 심각해졌다. 조선 정부에서는 납속책이란 것을 세워, 군량미를 낸 사람들에게 특권을 부여하는 조치를 취하며 군량미 징발을 채근하였다. 백성들은 아사 직전의 상태로 몰렸고 사람을 잡아먹는 일까지 벌어지게 되었다.

    임진왜란으로 인한 피해의 정도를 알 수 있는 또 다른 자료로 경지면적의 축소를 들 수 있다. 전쟁 전 170만 결이던 경지면적이 전쟁 후에는 54만 결로 급감하였다. 전쟁으로 국토가 황폐화되고 수많은 농민이 희생된 데다 농사짓는 데 사용되는 소마저 거의 살아남지 못한 결과였다.

    임진왜란은 국제정세에 큰 영향을 미쳤다. 중국 명나라는 전쟁 개입으로 인한 경제적, 군사적 손실로 국력이 크게 쇠퇴하고, 국가 재정이 문란해졌다. 이에 만주의 여진족을 중심으로 하는 청나라가 일어나 명나라를 멸망시키고 패권을 잡게 되었다. 일본에서는 전쟁을 주도하였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하고 치열한 권력투쟁 끝에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집권하였다.

    반면에 조선에서는 별다른 정치적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다. 도망갔던 선조는 다시 한양으로 돌아왔고, 그의 둘째 아들인 광해군으로 정권이 이어졌다. 그러나 조선 왕실은 백성의 신망을 완전히 잃었다. 이미 전쟁 이전에 백성들의 삶이 피폐해져 원망이 높았던 상황에서, 전쟁이 일어난 지 불과 17일만에 임금이 도망을 쳤다. 이는 결정적으로 왕실의 권위를 땅에 추락시켰다. 분노한 백성들은 왕궁인 경복궁을 불태워 버리기까지 하였다.

    전쟁 기간에 이몽학의 난 등 각지에서 민란이 일어났다. 난을 일으킨 백성들은 궁궐과 관청을 습격하여 노비문서 등을 불태워 버렸다. 선조는 아들들인 임해군과 순화군을 함경도와 강원도에 보내 병사를 모집하려 하였지만, 오히려 백성들은 그들을 붙잡아 일본군에 넘겨 버렸다.

    백성이 두려운 왕조

    전쟁을 통해 조선 왕조의 총체적 무능력이 폭로되었다. 조선군은 이순신의 해군을 제외하면 거의 궤멸하였다. 전쟁 초기 육군의 거의 전 역량을 모아 충주 탄금대에서 방어작전을 폈으나 하루도 버티지 못하고 몰살되고 말았다. 조선의 정부는 중국과 국경지대인 의주로 도망가 명나라에 파병해 줄 것을 간청하며, 유사시 망명할 준비를 할 뿐이었다.

    정부가 이러는 사이 나라를 구하고자 들고 일어난 건 백성이었다.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봉기하였다. 여기에서도 백성들은 정부에 대해 강한 불신이 드러났다. 백성들은 의병으로 참가하고자 하였지, 관군으로 편입되는 것에는 반대하였다. 물론 관군과 합동작전을 펴기도 하였지만 의병의 독자성을 잃지 않고자 하였다. 임진왜란 3대 대첩이라 불리는 행주대첩, 진주대첩은 백성들의 불굴의 희생정신, 의병과 관군의 합동작전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의병 활동이 본격화하고 이순신이 해상권을 장악하면서 일본군은 진지 방어에 급급하게 되었다. 그런데 정부는 의병 활동에 대해 의구심을 품고 견제하려 하였다. 의병을 바라보는 정부의 시각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가 경상도 감찰사 김수가 선조에게 보낸 편지의 내용이다.

    최근 현풍에서 곽재우란 자가 백성들을 모아 의병을 자칭하고 있는데… 아직 이들에게서 역모의 의도는 보이지 않으나 앞으로 역적화할 가능성이 있사오니…

    선조와 정부 관료들은 의병들이 자신들을 공격할까봐 전전긍긍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의병들에 대해 가혹한 탄압을 하기도 하였다. 의병장 중의 한 사람인 김덕령의 경우, 난을 일으킨 이몽학과 공모하였다는 누명을 쓰고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을 당하다 죽었다. 곽재우 역시 전쟁이 끝나자 의병을 해산하고 자식들과 산으로 도망쳐 들어갔다. 정부의 탄압이 두려웠던 것이다.

    전쟁이 끝나자 조선 정부는 전쟁 승리의 모든 공을 명나라에 돌렸다. 의병 활동은 무시되었다. 조선 수군의 장수였던 이순신조차 견제를 받았고 그 공이 폄하되었다. 그가 전라도 일대의 백성들로부터 신망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순신이 전쟁 중임에도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을 당하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이야기는 너무도 유명하지 않은가.

    붕당정치의 경과

    조선 왕조는 임진왜란에서 가까스로 살아남았다. 그러나 정권의 정당성은 이미 상실된 상태였다. 그래서 그들은 백성을 두려워하게 되었다. 정권은 정당성을 잃고 백성은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진 상황, 조선은 총체적인 위기를 맞이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상황을 극복하기 위한 조치는 취해지지 않았다. 오히려 지배계급 내의 정치투쟁만이 극성을 부렸다. 조선 시대의 붕당정치에 대해 다양한 시각에서 평가할 수 있다. 정치에서 붕당은 기본적인 요소이다. 뜻 맞는 사람끼리 당을 만들고 정권을 잡아 자신들의 뜻을 펼치는 것은 정치의 자연스러운 과정이다.

    문제는 전쟁이라는 엄중한 상황에서 왕실과 각 붕당들이 민심을 수습하고 국가의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였느냐 하는 점이다. 이 점에서 조선의 붕당정치는 비판의 대상이다. 그들은 국가의 총체적 개혁이 아닌 반동의 방향으로 나아갔다.

    조선 시대 붕당정치는 보통 선조 대에 이르러 권력을 잡은 사림파가 동인과 서인으로 갈라진 것에서 시작되었다. 붕당의 계기는 자리다툼이었다. 이익은 <붕당론>에서 "이익이 하나이고 사람이 둘이면 두 개의 당이 생겨나고, 이익이 하나이고 사람이 넷이면 네 개의 당이 생겨난다"고 말한다. 그의 말처럼 자리가 하나이고 하려는 사람은 여럿이니 당이 생겨나게 되었다.

    붕당의 직접적인 발단이 된 것은 이조전랑직이었다. 그 자리는 급수는 낮으나 인사권을 가지고 있어 매우 중요한 자리였다. 이 자리를 두고 동인과 서인이 갈라졌던 것이다. 처음에는 동인이 우세하였다. 그런데 동인은 서인에 대한 처리를 둘러싸고 다시 대립하여 온건파인 남인과 강경파인 북인으로 나뉘었다.

    임진왜란 직전 중앙 정계는 이렇듯 남인과 북인, 그리고 서인으로 나뉘어져 있었고, 남인이 권력을 잡고 있었다. 전쟁이 일어나자 그 책임을 물어 남인이 퇴진하고 서인이 권력을 잡았다. 전쟁이 진행되면서 남인 계열의 인사들이 다수 의병 활동에 참여하게 되고, 민심 무마 차원에서 남인이 다시 권력의 전면에 등장하였다.

    전쟁이 끝나자 북인이 권력을 잡았다. 견제와 탄압의 대상인 의병장들과 우호적 관계를 가지고 있던 남인을 권좌에 그대로 둘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북인은 다시 둘로 분열하는 데, 선조의 후계문제를 두고 광해군을 지지하는 대북파와 그에 반대하는 소북파로 나뉘어졌다.

    광해군이 집권하자 대북파의 권력은 공고해졌다. 그들은 후환을 없애기 위해 영창대군을 죽음으로 몰고 갔다. 이에 반발한 서인이 쿠데타를 일으켜 인조가 왕위에 오른다. 이른바 인조반정이다. 인조반정을 계기로 북인은 대북파든 소북파든 완전히 중앙 정계에서 제거되고, 중앙 정계는 서인과 남인으로 재편되었다.

       
      ▲ 송시열(1607년~1689년)

    서인과 남인의 치열한 투쟁은 숙종 대에 이르러 서인의 결정적 승리로 끝이 났다. 권력을 잡은 서인은 다시 둘로 분열한다. 남인에 대한 처리를 둘러싸고 강경파인 노론과 온건파인 소론으로 나누어진 것이다. 노론이 승리하였고, 노론은 이후 조선의 정치를 좌지우지하게 되었다. 이 노론의 영수가 바로 송시열이다.

    송시열이 추앙받는 이유

    송시열(1607년~1689년)은 조선시대에 유일하게 ‘공자’, ‘맹자’ 할 때의 ‘자’자를 붙이는 사람이다. 그래서 그의 저서를 <송자대전>이라 한다. 그만큼 그의 학문이 탁월했던 것인가. 실상은 그렇지 않다. 그는 자신이 이이의 철학을 계승하였다고 말한다. 그의 스승이 이이의 제자였던 김장생이므로 그렇게 말해도 무리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이가 이(理)와 기(氣)는 하나이면서 둘이라고 했던 주장 중에서, 송시열은 둘이라는 입장을 주로 받아들였다. 즉 이이가 이와 기 사이에 균형을 잡아보려고 했던 반면에 송시열은 이와 기를 구분하고 이를 중심에 두는 철학을 표방하였다. 따라서 송시열의 철학은 이이의 철학을 발전시킨 것이 아니라 오히려 후퇴시켰다.

    송시열이 자신의 스승으로 더 강조했던 사람은 주자이다. 그는 주자에 대해 "말마다 옳은 것은 주자이며, 일마다 마땅한 것도 주자이다. 총명하고 밝은 지혜로써 온갖 이치를 밝혀놓았으니 주자야말로 성인이다"고 말했다.

    그는 또한 "내가 배운 것은 <주자대전>뿐이다. 어찌 배운 것을 버리고 다른 학문을 하겠는가"라고 하는가 하면, "학문을 하는 자는 하루라도 <주자어류>가 없으면 공부할 수 없다. 옷을 팔아서라도 그것을 사야 한다"고 말했다. 주자에 대한 송시열의 충성심이 어느 정도였는지 알 수 있다.

    송시열이 남긴 방대한 저서도 따지고 보면 주자의 어록을 해석한 것이 태반이다. 더욱이 그는 자신만의 해석을 정통이라 하여 일체의 다른 해석을 ‘사문난적’이라고 이단시하였다. 이렇듯 송시열의 학문은 ‘자’자를 붙일 만큼 대단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면 왜 송시열은 그렇게 추앙되었는가. 그 답은 그의 이름이 <조선왕조실록>에 3,000번 이상 올랐다는 데에 있다. 임금이 아닌 사람 중에서는 그만큼 많이 <조선왕조실록>에 실린 사람이 없다. 이것은 그가 가진 정치적 위상과 영향력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가 주도한 노론은 조선 후기 정치를 좌지우지하였다. 60년 세도정치를 연 김조순은 그를 가리켜 ‘신과 같은 사람’이라 하였다.

    그는 분명 지배계급에게는 ‘신과 같은’ 존재였다. 왜 그럴까. 송시열이 중앙 정계에 진출한 것은 효종 때였다. 효종은 치욕을 안고 왕위에 올랐다. 조선은 임진왜란의 상처가 채 아물기도 전에 이번엔 청나라의 침략을 받았다. 광해군 때에는 명나라와 청나라 사이에 교묘한 줄타기 외교를 통해 평화를 유지할 수 있었다. 임진왜란으로 치명상을 입은 상태였고, 이미 명나라가 쇠망기에 들어섰고 청나라가 급격히 세력을 확대하는 시기였기에 그러한 외교정책을 통해 평화를 유지하는 게 필요했다.

    그러나 인조반정이 일어나 인조가 왕위에 오르면서 사정은 달라졌다. 명나라에 대한 의리를 강조하면서 청나라를 백안시하기 시작한 것이다. 결국 조선은 청나라의 침략을 받게 되었고, 인조는 삼전도(지금의 서울 풍납동)에서 청나라 황제에게 무릎은 꿇고 항복을 하였다. 병자호란이다.

    항복조건의 하나로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청나라에 인질로 잡혀갔다. 인질에서 풀려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소현세자가 갑자기 죽게 되어 봉림대군이 왕위에 오르게 되는데, 그가 바로 효종이다. 효종 앞에 놓인 제1과제는 왕실의 권위를 회복하는 일이었다. 이미 조선 왕실의 권위는 임진왜란으로 땅에 떨어졌고, 병자호란으로 무덤 속에 들어가기 일보직전이었다.

    효종은 북벌론을 들고 나왔다. 청나라에 복수를 하자는 것인데, 그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얘기였다. 그러나 백성들의 여론을 모으는 데는 역할을 하였다. 즉, 북벌론은 그것을 위한 준비 등 정책으로 추진된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이데올로기적인 구호였다. 효종은 이데올로기적 지배의 강화를 통해 조선을 유지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는 이런 일에 적합한 이데올로그로서 송시열을 발탁하였다.

    예송논쟁에 담긴 의미

    송시열은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였다. 그는 청나라에 복수하여 치욕을 씻자는 ‘복수설치론’을 주장하여 반대파들을 억눌렀다. 그는 복수설치론을 ‘존주양이론’과 연결짓는다. 존주양이, 즉 주나라 왕실을 높이고 오랑캐를 물리치자는 얘기인데, 공자 이래 중국에서 지속되어 온 한족(漢族) 중심의 중화주의이다.

    명나라가 멸망함으로써 본래 의미의 중화는 사라졌다. 중국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변방의 오랑캐들일 뿐이다. 중화의 전통을 유지하고 발전시킬 나라는 조선밖에 없다. 이것이 송시열의 논리이다. 그래서 그는 조선을 소중화라 불렀다.

    복수론과 존주양이가 결합되면서 조선의 유학자들은 송시열의 논리에 대항하기가 어렵게 되었다. 그것은 자신들의 사상적 토대인 성리학을 허무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송시열은 사상적 우위를 확보하였다.

    그는 예법을 매우 강조하였다. 그는 성리학 중에서도 예법을 깊이 연구한 사람이다. 성리학의 예법은 임금과 신하, 부모와 자식, 남편과 부인 등의 관계에서 지켜야 할 규칙을 의미한다. 이것은 일종의 사회제도이다. 따라서 송시열의 예법에 대한 강조는 백성들을 제도적, 이데올로기적으로 통제하자는 의도를 가진 것이었다.

    송시열의 논리가 더욱 빛을 발한 것은 예송논쟁에서였다. 예송논쟁이란 효종이 죽자 그의 계모인 자의대비가 몇 년간 상복을 입을 것이냐를 두고 벌어진 논쟁이다. 성리학의 예법에 따르면 자식이 먼저 죽었을 경우, 장자일 때는 부모가 3년상을 지내고 차자 이하일 경우 1년상을 치르는 것으로 되어 있다.

    효종은 인조의 두 번째 아들이다. 그렇지만 왕위를 계승하였으니 적통자로 인정하여 3년상을 치러야 한다는 것이 남인의 주장이었다. 그러나 송시열은 단호하였다. 아무리 임금이지만 둘째 아들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전통 예법에 따라 1년상을 지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것은 매우 예민한 문제였고, 송시열의 주장은 위험천만한 것이었다. 왕위의 장자 계승을 원칙으로 하고 있는 나라에서, 자칫 송시열의 주장은 효종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것이 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도의적으로 볼 때도 송시열은 효종이 발탁하여 키운 인물이 아닌가.

    그러나 송시열은 뜻을 굽히지 않았고 그 뜻을 관철하였다. 그는 예송문제를 국가적 차원의 문제로 보았다. 왕실에서부터 예법을 제대로 지켜야 백성들이 따르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자칫 역적으로 몰릴 수도 있음에도 자신의 뜻을 관철코자 한 것이었다.

    송시열의 영향력

    예송논쟁은 송시열에게 승리와 패배를 안겨주었다. 1차 예송논쟁은 송시열의 승리로 끝났다. 그에게 반대하였던 세력들은 대부분 숙청되었다. 그러나 15년 뒤 다시 벌어진 예송논쟁에서는 패배하여 유배를 가게 되었다. 그 뒤로 그는 중앙 정계에서 벗어나 자신의 고향인 화양계곡에 머물렀다.

    그렇다고 하여 그가 정계에서 은퇴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노론파의 정신적, 이론적 지주로서 끊임없이 정치문제에 개입하였다. 숙종 대에 노론파가 확고하게 권력을 장악하면서 그는 가장 추앙받는 사람이 되었다.

    송시열은 소중화 논리를 내세워 무너져 가는 조선을 다시 세우고자 하였다. 그의 논리는 철학적이기보다는 교조적, 이데올로기적이었다. 사상적 통제와 예법의 강화를 통한 통제가 그의 목적이었다. 특히 예법의 강화를 통한 백성들의 통제는 그 이후로 오늘날까지도 짙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강릉 오죽헌에 전시되어 있는 신사임당의 유물에는 딸 아들 구별하지 않고 재산을 균등하게 분배한다는 문서가 있다. 선조 때 영의정까지 지낸 유성룡은 경북 의성 사람이지만 그의 집은 안동에 있다. 처갓집에서 살았던 것이다. 조선 중기까지도 이러한 일들이 가능했던 사회였다.

    그러나 조선 후기로 오면서 이러한 것들은 사라졌다. 여자들은 결혼하면 출가외인이라 하여 집안으로부터 일체의 권리가 박탈되었다. 처가살이하는 남자는 팔푼이라 하여 손가락질을 받아야만 하였다. 삼강오륜이니 칠거지악이니 하는 백성들에게는 아주 생소했던 말들이 널리 보급되었다. 송시열 이후 이데올로기적 통제가 얼마나 강했는가를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데올로기적 통제만으로 백성들의 불만을 누를 수는 없다. 조선 후기에 들어 각지에서 민란이 일어났다. 이런 가운데 노론파 내에서부터 새로운 철학을 모색하는 흐름이 생겨났다. 그것은 송시열이 말한 ‘사문난적’이라는 딱지, 즉 사상적 통제를 피해가야 하는 어렵고도 힘겨운 과정이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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