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민요적 감수성, 민중가요에 담겨
    By 나난
        2010년 04월 30일 09:16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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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중가요가 확산되던 80년대 중반에 대학의 문화써클들은 단순히 자기 장르만 배우고 익힌 게 아니라 다른 문화써클들과도 활발하게 교류했습니다.

    탈춤반, 민요반, 풍물반, 마당극 등의 써클 성원들은 날씨가 좋은 주말, 노천강당에 모여 민요를 배우거나 새로운 민중가요를 배우거나, 간단한 탈춤 동작을 배우곤 했습니다.

    물론 뭐 탈춤을 배운다고 해봐야 고작 오금질과 사위 정도를 가볍게 배우는 것이었고, 장단도 굿거리나 노래에 필요한 간단한 장단을 배우는 정도였을 뿐입니다. 그리곤 막걸리 한 잔 하면서 함께 해방춤이나 농민춤을 추며 놀거나 써클대항 차전놀이, 기마전 등을 하면서 놀았다고 할 수 있겠지요.

    그 중 민요는 제대로 배우려고 하면 아주 어렵지만 멜로디만 간단하게 익히면 자기 음역에 맞게 키를 잡아서 앞소리를 즉흥가사로 바꾸어 돌아가며 부를 수 있는 노래였습니다. 그러고 보면 노래가사바꿔부르기(노가바)가 유행을 했던 것도 아마 이런 민요운동의 영향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민요연구회, 안양민요연구회, 우듬지

    민요연구회는 84년 6월에 창립이 되어 활발한 활동을 하다가 90년대 중반에 해산을 합니다. 안양에도 80년대 후반 민요연구회가 결성되어 활동하다 역시, 90년대 중반 해산했지만, 당시 안민연 활동가들이 중심이 되어 2000년대에 우듬지라는 노동자 민요패를 결성하고 공연을 다니기도 했었지요. 노동자대회 때나 집회 때 우듬지의 공연을 보신 분들도 계실 겁니다.

    민요연구회는 민요 부흥 운동으로 시작해서 전통 민요의 발굴 및 보급 뿐만 아니라 창작 민요까지 아우르는 활동을 합니다. <둥당에타령>, <액맥이 타령>, <질꼬내기>, <비타령>, <노세소리>, <이어도사나>, <진도아리랑>, <아리랑타령> 같은 전통민요와 신민요를 발굴, 보급하였고, 그 밖에 동요, 구전가요, 독립군가까지 계승하고자 하였습니다.

    창작민요로는 <돌아가리라>(신경림 시), <모두들 여기 모였구나>(신경림 시), <저 놀부 두 손에 떡 들고>(양성우 시 /이상, 김용수 작곡), <우리 것이다>(신경림 시․김석천 작곡), <비야 비야>(김석천 작사․작곡), <광주천>(박선욱 작시․이정란 작곡) 등을 꼽을 수 있습니다.

     

       
     

    민요연구회는 한 달에 한 번씩 민요의 날 정기공연을 개최했고, 전래민요와 신민요를 전파하면서 노동자들과의 결합도 적극적으로 시도하여 새로운 노동요를 창작하고자 하였습니다.

     

    또한 국악계의 보수성을 무너뜨리고, 시대에 맞는 음악문화를 만들어가고자 진보적인 국인인들을 규합하는 데도 힘을 쏟았습니다. 주 1회 교사모임들을 만들어 중고등학교의 음악문화를 바꿔보려는 시도도 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해서 민요운동은 기존 노래패에서는 적극적이지 못했던 국악과 민요의 진보적, 민중가요적 계승에 노력을 기울여 커다란 성과를 남겼습니다. 포크를 중심으로 한 노래써클의 발전으로 이루어진 노래운동과는 달리, 풍물운동처럼 마당극을 중심으로 한 연행예술운동의 발전과정에서 만들어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새로운 성과, 그러나 민중가요를 넘어서지는 못하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대중의 자생적인 민중가요 문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민요는 쉽게 대중화되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민중가요가 점점 대중화되면서 아이러니컬하게도 민요운동의 세는 점점 약해졌습니다.

    노래운동에서는 민요운동의 성과를 적극적으로 계승하고 수용하지 못했으며, 그 당시 노래풍들이 가곡이나 고급음악적인 요소들이 강한 것에서 보여지듯이 오히려 일반 대중보다도 더 민요적, 국악적 감수성이 적은 실정이었습니다. 따라서 이 시기의 민요운동은 대중성을 위해서 서양음악적, 대중음악적 측면을 받아들이면 노래운동과 다른 독자적 민요운동의 영역이 없어지게 되는 딜레마를 안고 있었다고 불 수 있습니다.

    민요는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앞소리와 뒷소리를 배우고 나면 다같이 뒷소리를 부르고, 앞소리는 돌아가면서 각자 지어서 부를 수 있다는 것이 또한 특징이지요. 그렇게 사람들을 거치면서 가사가 더 붙기도 하고, 또 변형되기도 합니다.

    <저 놀부 두손에 떡들고> 역시 처음에 양성우 시인의 시로 1절만 발표되었으나 이후 불려지고 퍼져나가면서 공연 주제나 상황에 맞게 가사가 덧붙여졌습니다. 아마도 다른 집단에서 또 새로운 가사가 덧붙여졌을테지만, 아래 적어드린 2절만큼은 참 많이 불려졌답니다.

    여기서 들으시는 곡에는 발표될 당시 민요연구회 성원이었던 김애영님이 부른 노래로, 1절만 있습니다. 하지만 2절을 생각하며 한 번 더 들어보시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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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음원 : 민중문화운동연합 제6집 [우리가락 좋을시고] 중에서

    <저 놀부 두 손에 떡들고>

    양성우 시, 김용수 곡

    1. 저 놀부 두 손에 떡들고 가난뱅이 등치고
    애비없는 아이들 주먹으로 때리며 콧노래 부르며 물장구치며
    저 놀부 두 손에 떡들고 순풍에 돛을 단 듯이 어절씨구 침묵의 바다
    호박에 말뚝박고 똥싸는 놈 까뭉개고 애 밴 년 배 차대고
    콧노래 부르며 덩실덩실 저 놀부 두 손에 떡들고 저 놀부 두 손에 떡들고
    저 놀부 떡 들고 덩실 춤춘다.

    2. 저 목사 한 손에 십자가, 또 한 손엔 헌금통
    믿음의 척도는 헌금의 액수라, 찬송가 부르며 놀랠루야
    저 목사 뱃때지 볼~록 포니에 몸을 싣고서 어절씨구 방석집으로
    기생첩 옆에 끼고 교회 가서 설교하고 내일이면 말세라네
    하늘엔 영광 덩실 덩실, 땅에는 비교적 평화, 땅에는 어쩌면 평등
    예수님 땅치고 통곡하신다.

    (85, 6년 당시 공연 중에 불려졌던 부분이며 특정 종교를 비방하거나 할 의도가 아님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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