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율곡 “이는 통하고 기는 국한한다”
        2010년 04월 22일 11:38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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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재, 이이

    오만 원 권 지폐에 어떤 사람의 초상을 넣을 것이냐를 두고 여론조사를 하였다. 오만 원 권 지폐의 발행이 옳으냐에 대한 논쟁이 치열한 만큼 그것의 도안 초상 인물에 대해서도 의견이 구구하였다. 국민 여론 조사와 전문가 조사를 거쳐 ‘영광의 인물’인 된 사람은 신사임당이다.

    외국의 경우 역사상 가장 큰 업적을 세운 사람을 가장 많이 사용하는 지폐의 도안 인물로 사용하는 경우들이 있다. 예를 들면 미국의 경우 미국 독립전쟁을 승리로 이끈 조지 워싱턴이 1달러짜리 지폐의 도안 인물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경우, 가장 큰 화폐 단위 지폐의 도안 인물이 가장 큰 업적을 남긴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대단한 물신성이다. 업적이 화폐 단위로 나타낼 수 있다니 말이다. 그러니 지폐의 인물을 놓고 의견이 분분할 수밖에 없었다.

       
      ▲ 율곡 이이

    본래 오만 원 권과 십만 원 권을 모두 발행하기로 하고 조사를 하였는데, 십만 원 권 인물은 백범 김구, 오만 원 권 인물은 신사임당이 선정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십만 원 권 발행은 유보되어 언제 발행될지 모르고, 아예 발행이 안 될지도 모른다고 하니 당분간 최고액권의 인물은 신사임당이 되었다. 이를 두고 백범 김구를 지지했던 사람들은 ‘백범을 두 번 죽였다’고 말한다고 하니, 정말로 이런 물신성에서 벗어날 날은 언제일런지.

    어쨌든 모자지간에 ‘영광’을 나눠가졌다. 오만 원 권의 인물은 신사임당이고, 그의 아들 이이는 오천 원 권의 주인공이니까. 어느 모자지간이 안 그러겠느냐마는 신사임당과 이이는 아주 각별했던 것 같다. 이이는 신사임당의 고향인 강릉에서 태어났다. 그는 유년, 소년, 청소년기에 이르기까지 어머니로부터 강한 영향을 받았던 것 같다.

    이이는 어머니 신사임당이 죽자 정신적 방황을 하다 산에 올라 불교를 공부하게 되었다. 당시 성리학이 불교를 배척하고 있었음을 감안할 때, 어머니를 잃은 이이의 충격이 얼마나 컸는지를 알 수 있다.

    이이(1536~1584)는 한 마디로 천재였다. 불과 8살 때 <화석정>이라는 오언절구 한시를 지었다고 한다. 지금은 80살이 되어도 한문학을 공부한 사람이 아니면 해석하기도 어려운 시이다. 또한 한문책을 한 눈에 열다섯 줄밖에 못 읽는다고 겸손해 하였다고 한다. 참 사람 기죽이는 방법도 여러 가지다.

    12살 때 과거에 합격하였다. 중간에 어머니를 여의고 방황하던 중 입산수도하다 하산하여 23살 때부터 다시 과거 시험을 보기 시작하여 29살 때까지 9차례의 시험에서 장원을 하였다고 한다. 요새 가끔씩 사법고시, 행정고시, 외무고시 3과에 모두 합격했다고 목에 힘주는 분들 있는데, 이이 앞에서는 명함도 내밀지 말라.

    이런 천재성을 가진 사람은 조선 전 역사를 통틀어 이이 외에 김시습 정도가 있었다 할까. 그런데 김시습과 이이는 전혀 다른 삶을 살았다. 김시습은 방외인의 삶을 살았던 반면에, 이이는 적극적인 참여의 삶을 살았다.

    중쇠기에 접어든 조선

    이황은 자신이 살던 시대를 말세라고 규정했다. 그리하여 그는 말세를 극복하기 위해 자신의 도덕 철학을 세웠다. 동시대인인 이이 역시 자신의 시대를 비판적으로 바라보았다. 다음의 글을 보자.

    온 세상이 잘못된 인습을 따르다가 더러워졌고,
    관직은 부를 탐하는 마음에 무너졌다.
    정치는 쓸데없는 얘기로 어지럽고,
    백성은 쌓이고 쌓인 폐단으로 곤궁해졌다.

    이황이 단지 말세라고 규정한 것과 달리, 이이는 구체적인 실상을 들어 비판하며 조선 사회를 중쇠기(中衰期)라 규정하였다. 이런 현실 인식이 차이가 두 사람의 철학을 가르게 되었다.

    이이는 말세라는 정세 인식이 안일한 것이라 생각하였다. 그는 체제 위기의 징후를 느끼고 있었다. 따라서 그는 이황의 도덕 철학, 즉 마음을 바르게 하는 철학으로는 위기를 해결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정치에 직접적으로 참여함으로써 위기를 극복하고자 하였다. 그래서 그는 이황이 관직에 나서지 않고 물러서기만 하는 태도에도 불만을 표시하였다.

    조선이 건국한 지 1세기가 지나자 ‘말세’니 ‘중쇠기’니 하는 현실 진단이 나온 이면에는 지배계급의 철학적 경향이 자리 잡고 있었다. 조선은 유교 경전을 공부한 사람들이 과거를 통해 관직에 진출하여 국가 통치에 참여하는 시스템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당대의 유교 철학의 경향은 국가 통치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었다.

    유교 철학의 경향은 집권 초기와 그 이후가 달랐다. 집권 초기 정도전은 백성을 중심에 둔다는 민본 사상을 중시하였다. 또한 통치, 행정을 함에 있어 ‘처사접물’을 강조하였다. 즉, 매사 일을 할 때 사물을 연구하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정도전이 피살된 후 이러한 학풍은 뒤로 밀려났다.

    조선 건국, 이방원의 난, 수양대군의 난 등에서 공을 세워 권력을 잡은 훈구파들에게 처사접물의 자세는 자취를 감추었다. 출세주의자들이 득세했고, 유교 경전은 과거 시험을 준비하는 고시용 참고서에 불과하게 되었다.

    이런 세태에 대해 이이는 <문책>에서 "재주가 있는 자는 글짓기에만 힘쓰고, 재주가 없는 자는 과거 시험에만 분주하게 드나든다"고 비판하였다. 현실을 연구하여 철학을 하는 학풍은 사라졌음을 한탄한 것이다.
    백성을 중심에 두는 민본 사상 역시 퇴색해버렸다. 반면에 훈구파들은 자신들의 재산 불리기를 노골화하였다. 이것의 폐단은 조선시대 녹봉제도의 변화에서 읽을 수 있다.

    조선은 건국하면서 전 현직 관리들에게 월급 대신 토지를 나누어주고 조세를 받을 수 있게 하였다. 물론 토지는 관리들이 사망하면 반납하는 조건이었다. 그러나 지급할 토지가 부족해지자 현직 관리에게만 지급하는 것으로 제도를 바꾸었다. 이렇게 되자 ‘있을 때 한 몫 챙기자’는 식으로 관리들은 백성들에게 가혹한 세금을 거두어 들였다.

    이에 대한 민원이 일자, 관리에게 토지를 나누어주되 그 토지에 대한 세금은 국가가 거두어서 관리들에게 나누어주는 제도를 시행하게 되었다. 그러나 국가가 거둔 세금 이외에 관리들이 음성적으로 갖은 명목의 세금을 거두어들여 농민들의 생활은 더욱 피폐해졌다.

    결국에는 관리들에게 토지를 지급하지 않고 월급만 지급하는 방식으로 바꾸었다. 그렇다고 농민들의 살림살이가 나아졌느냐 하면 그렇지 못했다. 음성적 수탈은 더욱 기승을 부렸다. 이이가 "백성들은 쌓이고 쌓인 폐단으로 곤궁해졌다"고 한탄한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성종 때부터 재야 인사였던 사림파들이 중앙 정계에 진출하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훈구파와 대립하면서 중종 초에는 일시적이나마 조광조를 중심으로 하여 권력을 잡고 정치개혁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연이은 사화를 거치면서 그들은 대부분 숙청되었다.

    굳은 의지를 가지고

    이이는 백성들의 생활이 피폐해지고 사림파의 정치개혁이 좌절되는 것을 보면서 위기의식을 가지게 되었다. 사화에 대한 기억이 채 가시지 않은 시기인지라 많은 학자들이 관직을 버리고 낙향하고 있었지만, 그는 정치에 적극 참여하는 길로 나아갔다. 때마침 시기적으로도 맞아 떨어졌다. 선조 때에 이르러 훈구파가 쇠퇴하고 사림파가 다시 중앙 정계의 전면에 등장하였던 것이다.

    이이는 의지가 강한 사람이었다. 그는 청소년기에 어머니를 잃고 정신적 방황을 하고 입산수도를 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하산을 하고 다시 세상에 나올 때에는 청운의 꿈을 더욱 굳세게 다진 뒤였다. 그는 하산 직후 <자경문>을 썼는데, 이렇게 자신의 의지를 밝혔다.

    먼저 뜻을 크게 세워 성인을 표준으로 삼을 것인 바, 털끝만큼이라도 성인에 미치지 못한다면 나의 일은 끝나지 않는다.

    그는 조선에 왕도정치의 이상을 실현하는 데 자신의 몸을 바치고자 하였다. 그는 23살 때 이황을 방문하여 세상의 이치에 대해 물었다. 그러나 만족스러운 답은 얻지 못한 듯하다. 그 해부터 과거 시험을 보기 시작하여 29살 때까지 9차례 장원을 하고 호조좌랑직에 부임하였다. 이후 승정원우부승지에 이르기까지 중앙 부서를 두루거치며 정치적 식견을 인정받게 되고 40세 무렵에는 정국의 주도적 인물로 부상하였다. 잠시 관직에서 물러나기도 하였지만 45세에 다시 복직하여 호조, 이조, 형조, 병조 판서를 역임하였다.

    이이가 관직에 진출할 무렵, 중앙 정계에 진출한 사림파들은 동인과 서인으로 분열하고 있었다. 서인은 명종 때부터 관직에 진출한 사람들로 구성되었는데, 그들이 주로 왕궁의 서쪽에 살았으므로 서인이라 이름 붙여졌다. 반면 동인은 선조 때 들어와서 관직에 진출한 사람들이었는데 주로 왕궁의 동쪽에 살았다. 동인은 특히 이황의 학풍에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었다.

    이이는 이러한 분열에 반대하였다. 그는 사림파들이 훈구파의 잔재를 청산하는 일에 힘을 모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래서 동인과 서인을 중재하기 위한 활동을 적극적으로 하였다. 그러나 그는 동인으로부터 배척을 당했다. 그가 이황과 다른 주장을 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서인으로 몰리게 되었다. 그가 청소년기에 입산하여 불교를 공부한 사실이 도마 위에 올랐고, 그로 인해 그는 동인으로부터 탄핵을 당하기도 하였다. 그래서 그는 잠시 관직에서 물러나기도 하였다. 다시 관직에 컴백하였지만, 동인과 서인의 갈등은 더 극심해진 상태였다. 결국 동인의 탄핵을 받아 3년 만에 다시 관직에서 물러나게 되고, 그 이듬해에 사망하였다.

    이이는 ‘왕도 정치의 실현’이란 이상을 품고 중앙 정계로 나아갔다. 그러나 동인, 서인의 갈등 속에서 자신의 이상을 제대로 실현할 수 없었다. 특히 그는 이황과 다른 주장으로 동인에게 탄핵을 당하는데, 그러면 그의 주장은 무엇인가.

    이는 통하고 기는 국한한다

    서경덕은 은둔 생활을 하며 스스로 사물을 연구하여 기일원론을 체계화하였다. 이황은 은둔까지는 아니지만, 중앙 정계와 거리를 두며 유교 경전을 연구하여 이(理) 중심의 도덕철학을 세웠다. 이이는 그들과 달리 적극적으로 정치에 참여하고 불교에 대해서도 연구하는 등 폭넓은 독서를 통해 자신만의 철학을 세웠다.

    우선, 이이는 서경덕의 기일원론에 반대를 한다. 기(氣)가 아니라 이(理)가 중심이라는 것이다. 이 점에서 그는 이황과 생각을 같이 한다. 이이 역시 이황과 마찬가지로 도덕심을 중시하고 도덕정치의 실현을 추구하였다.

    반대로 이이는 이황의 주장에 반대한다. 이황은 이가 발동하여 사단(四端)이 생겨나고, 기가 발동하여 칠정(七情)이 생겨난다고 주장한다. 그는 앞의 것을 도심(道心)이라 하고 뒤의 것을 인심(人心)이라 하여, 인심을 다스리고 도심을 기르자고 하였다. 여기에서 이이는 이가 발동한다는 이황의 주장에 반대하였다.

    이이가 볼 때 오로지 기만이 발동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이는 형체도 움직임도 없다는 성리학의 전통적 주장에 부합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는 기만이 발동하고 이는 이것에 올라탄다고 주장한다.

    기만이 발동한다면 사단과 칠정, 도심과 인심이 구별되지 않는다. 사단도 칠정도, 도심도 인심도 모두 기가 발동해서 생겨난 것이기 때문이다. 이이는 사단은 칠정 중에서 선한 부분으로 보았고, 그것이 도심이라 하였다.

    여기에 이이 철학의 의의가 있다. 이황은 이의 발동, 즉 이의 운동을 인정한다. 따라서 거기에서 생겨나는 도덕심을 기르기 위해 개인의 수양을 강조한다. 반면 이이는 이의 발동을 인정하지 않고 기의 운동만을 인정한다. 기는 현실 세계의 재료이자 운동이다. 기의 운동에서 도덕심 역시 생겨나는 것이므로, 이이는 현실세계에 대한 적극 참여 속에서 도덕심을 길러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황의 철학이 이상주의였다면 이이의 철학은 현실주의로 내려온 것이었다. 따라서 이이는 자기만의 수양에 치중하는 자세를 버리고 현실 세계에 나아가 백성들을 인도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이이는 자신의 철학을 총괄하여 ‘이는 통하고 기는 국한한다’는 이통기국론(理通氣局論)을 주장한다. 이는 단 하나로서 우주만물에 공통적이다. 그러나 기가 달라서 온갖 사물, 동물, 인간이 생겨난다는 것이다. 따라서 세상 만물에 대한 연구를 통해 이를 발견해 내는 것이 중요하게 된다.

       
      ▲ 격몽요결서

    이와 관련하여 이이는 <격몽요결서>에서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 학문을 하지 않으면 사람이라 할 수 없다"고 말한다. 학자나 선비만이 학문을 하는 게 아니라는 얘기이다. 사람이면 누구나 학문을 해야 한다는 얘기이고, 사람의 범주에는 당연히 일반 백성이 포함된다.

    백성이 하는 학문은 유교 철학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일상생활을 해가면서 자신의 일에 필요한 것을 얻는 것을 학문이라 하였다. 요즘 말로 하면 유용성이 있는 개별 학문을 인정한 것이다. 이것은 이이가 실학(實學)의 개념을 도입하였음을 의미한다. 조선 후기에 번성하는 실학의 연원을 이이에게서 찾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조선 성리학의 완성

    이이에 이르러 조선 성리학은 완성된다. 그는 이와 기를 모두 중시하였다. 그리고 그것들의 역할을 해명하였다. 이는 통하고, 기는 국한한다고 하여 각각에서 제기되는 문제를 대등하게 취급하여 대응할 수 있는 철학을 세웠다.

    이런 철학에 바탕을 두고 개인의 수양을 통한 도덕의 실현과 현실 문제에 대한 연구를 통한 사회 개혁을 함께 추구하였다. 이것은 그가 스스로 규정한 ‘중쇠기’를 극복하기 위한 철학이요 정치적 실천이었다.

    이이의 사회 개혁 방안을 ‘경장론(更張論)’에서 드러난다. 그는 <만언봉사>에서 "정치에 있어서는 때를 아는 것이 중요하고, 일에 있어서는 실질적인 것에 힘쓰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하며, "때에 알맞게 법을 마련하고 백성을 구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시대가 바뀌었으니 법과 제도를 바꾸어야 한다는 얘기이다. 지배층의 탐욕과 백성들의 경제적 파탄을 보며 이이가 가졌던 현실 인식과 그에 대한 처방을 제시한 것이다. 그의 경장론은 정치, 경제, 사회, 국방에 이르기까지 전 분야에 걸친 것이었다.

    그러나 동인과 서인의 갈등, 그리고 선조의 소극적 태도로 인해 이이의 경장론은 거의 실현되지 못하였다. 이이는 ‘때’를 강조했다. 조선의 지배계급은 때를 놓쳤다. 그들에게 있어 이이의 ‘위기론’은 과장되었거나 무시해도 좋은 것에 불과하였다. 그 결과는 처참했다. 임진왜란, 병자호란을 거치며 조선은 총체적 붕괴 위기에 직면했던 것이다.

    철학적으로 볼 때, 이이는 서경덕의 기일원론과 이황의 이 중심 철학을 종합하려 하였다. 그의 이통기국론은 보편성으로서 이를 강조함과 아울러 기만이 운동한다 하여 기 역시 중시함으로써 이전의 철학을 종합하는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이이의 철학은 이원론의 문제를 극복하지 못하였다. 이와 기의 관계는 무엇인가 하는 성리학의 근본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못하였다. 이와 기는 하나이냐 둘이냐 하는 물음에 대해 그는 하나이면서 둘이라고 대답한다. 하나라면 이가 중심이냐 기가 중심이냐 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둘이라면 둘은 어떻게 결합되느냐 하는 문제가 남는다.

    이이가 이전 철학을 종합하려 하였음에도 근본문제는 그대로 남았다. 결국 그의 철학은 절충론이었다. 그렇지만 그가 살았던 당시에는 그의 철학이 해답으로 받아들여졌다. 성리학의 이상인 도덕주의와 ‘격물치지(格物致知, 사물을 연구하여 이치를 발견함)’라는 현실주의를 모두 포괄하는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 이르러 위기의 징후가 더욱 뚜렷해지자 이이의 절충론은 파탄을 맞이할 수밖에 없게 된다. 이통기국에서 ‘이통’을 중시하는 쪽과 ‘기국’을 중시하는 쪽으로 갈라지게 되었던 것이다. 즉 이와 기는 하나인가, 둘인가 하는 문제로 다시 갈라지게 된다.

    이이는 한편으로는 현실 세계의 개혁을 강조한 기 중심론자였다. 또한 다른 한편으로는 철저한 도덕정치의 실현을 주장한 이 중심론자였다. 그의 철학은 당시로 볼 때 선각자적인 것이었다. 중쇠기에 조선을 구원할 철학으로 보였다.

    이이는 ‘때’를 강조하였다. 때가 지나면, 시대가 흐르면 새로운 시대에 맞는 새로운 철학이 등장할 수밖에 없다. 이이의 철학은 자신이 주장한 대로의 운명을 맞이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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