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장'을 늑대로 만드는 체제
        2010년 04월 18일 11:22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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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일주일 동안 오정희 선생의 소설 <새>를 계속 읽었습니다. 이제 완독이 돼 아직도 읽었을 때의 감동을 잊지 못하고 있는 마음으로 그 독후감을 적어보렵니다. 소설을 읽게 된 사연은, 노르웨이의 권위 있는 문학 출판사 ‘솔룸’의 의뢰 건이었습니다.

    오정희 소설에 반하다

    노르웨이어 번역본을 내고 싶은데, 이 책을 노르웨이 국가문화협회에서 추천해야 나중에 공립도서관마다 의무적으로 사주기 때문에 추천서가 필요했단 것입니다. 국가문화협회를 통해 공립도서관 필수 구입 도서 목록에 들어가게 되면 국내 납세자들에게 손 벌릴 일도 없어 참 좋으니 일단 추천서 작성용으로 소설을 읽게 됐는데, 아주 반해버렸어요.

    근대 소설의 백미가 내면 묘사라면 이 소설은 근대적 글쓰기의 표본에 가까워요. 줄거리야 거의 상투적이지만 – 빈민 아버지, 가출한 어머니, 소녀 가장, 위선적이고 폭력적인 어른들, 날아보고 싶은 꿈 – 12세 소녀의 눈으로 본 세상은 정말 다릅니다.

       
      ▲박노자 교수. 

    사실, 어떻게 보면 이 12세 소녀가 본 것은 대한민국의 ‘혼네’, 즉 온갖 가면들이 다 벗겨진 상태의 맨얼굴입니다. 이 얼굴을 가리켜 ‘괴물’이라고 하면 아마도 도를 지나친 악담일 것입니다.

    어른의 보호없이 12세 소녀가 누군가의 꾐에 빠져 인신매매 대상이 되지 않고 그래도 나름의 ‘삶’을 영위할 수 있다는 것 자체는, 이미 어느 정도 안정된 자본주의 사회를 전제로 한다는 것입니다.

    브라질이나 태국, 어쩌면 러시아의 가난한 지방의 소도시 같으면, 그냥 노예, 성노예 내지 부자들에게 이식될 장기를 제공했다가 어디에선가 암매장될 범죄조직의 피해자가 됐을 가능성은 훨씬 높았을 것입니다.

    대한민국에서만 해도 그런 가능성들이 없지 않아 있지만(소설에서도 역전 홍등가가 좀 묘사됩니다), 그래도 사회가 제공하는 일부 기본 서비스(의무적 초등교육 등)도 존재하고, 십년이든 이십년이든 범죄자를 계속 수배하는 전지전능한 ‘관’도 존재합니다.(소설에서 장기 수배자가 경찰에 적발되는 장면도 있습니다)

    즉, 자본주의 시대의 지구별이라는 지옥에서는 이 대한민국이라는 동네는 어디까지나 ‘중간 지대’에 속하는 셈이 됩니다. 지구별의 변두리 지대에서 보호를 받지 못하는 어린이들에게 대개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를 궁금하시면, 양석일 선생님의 <闇の子供たち>(어둠의 아이들)의 일독을 강력하게 권고합니다. 요즘 김응교 교수님이 국역하신 것도 있답니다.(http://www.darkchildren.com/ – 영화 이야기와 국역 이야기 등이 다 있습니다)

    폭력의 먹이사슬

    물론 심장이 약하신 분들이 차라리 안보시는 게 좋을는지도 모르겠어요. 태국에서 어린이를 잡았다가 장기 하나하나씩 뜯어내고 그 다음에 ‘폐품 처리’하는 이야기, 그리고 지체 높으신 ‘문명국’ 관광객들에게 어린이들을 ‘대접'(?)하는 이야기 등등입니다.

    그런데 나름의 규칙들이 있고, 또 나름의 인간적 정도 분명히 존재하는(집세가 밀리고 밀려도 소녀 가장이 그래도 셋집에서 쫓겨나지 않거든요) 이 세계의 하나의 일관된 ‘코드’를 이야기하자면, 그게 폭력일 것입니다. 이 폭력이란 하나의 ‘먹이사슬’처럼 이루어집니다.

    일단 자연이 인간에게 일종의 폭력을 가하고, ‘시장’이란 얼굴없는 우리 상전이 폭력을 가하는 것부터 스토리의 발단입니다. 꽃을 재배했던 박만식이라는 영세 업자가 우박 등으로 장사가 망하고 빈털털이가 됩니다. 그 다음에 남성이 여성에게 가하는 폭력입니다.

    일용잡직 노가다가 된 박만식이가 아내를 마구 패서 가출하게 만들고, 또 아마도 홍등가에서 ‘새로운 여자’를 샀지만, 그 여자도 폭행과 동거남의 장기 부재 등을 참지 못해 결국 도망가고 맙니다. 그다음에는 어른들의 어린이에 대한 폭력입니다.

    박만식이가 아들 우일이를 삼층에서 떨어뜨리는 등 학대해 결국 정신지체를 일으키게 만들고, 술에 취해 딸의 젖꼭지를 만지작거리는 등 자녀에 대한 성추행에 가까운 행동도 벌입니다.(이 부분은 비몽사몽간에 이루어지는 반 꿈, 반 현실입니다)

    사회복지와 폭력

    학교에서는 학교대로 만만하다 싶은 소녀 가장을 체벌합니다. 그리고 어린이들 사이에서도 당연히(?) 폭력이 행해집니다. 숙제를 도저히 하지 못하는, 몸과 마음이 다 만신창이가 된 우일이를 누나 우미가 벌주고 원산폭격 등의 체벌을 가합니다.

    끝으로, 인간이 동물에 대해 가하는 폭력도 만만치 않습니다. 우일이를 침쟁이 할아버지의 개가 물었을 때에, 우일이와 우미가 사는 셋집의 어른들이 이 개를 죽여 그 고기를 우일이에게 먹입니다. 그래야 성처가 낫는다는 것이랍니다. 이 책에서 묘사되는 그 어떤 ‘관계’를 봐도, 비폭력적 관계는 없습니다. 현실대로 적은 것이죠.

    왜 폭력이 이처럼 난무하게 되는가요? 기본적으로는 사회/국가가 그 어떤 ‘배려’를 행하지 않는 이상 사회적 관계가 폭력화될 위험이 높습니다. 빈털털이가 된 박만식이가 노르웨이처럼 기존 소득의 62%이 이르는 기본 수당(dagpenger)과 무료 재취업 훈련, 재취업 알선 서비스 등을 국가로부터 받을 수 있었다면 과연 아내와 아이들에게 조금 더 인간적으로 대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요?

    물론 노르웨이라고 해서 가정폭력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한국보다는 비교적으로 ‘덜’ 한 걸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노르웨이 여성의 약 25%가 평생 동안 남편을 위시한 그 어떤 남성으로부터 폭력을 한번이라도 당한다고 통계가 나와 있지만(http://www.dagbladet.no/kultur/2005/10/17/446594.html) 한국에서야 남편들의 61%가 결혼 이후에 한번이라도 아내 구타를 하는 것입니다.(http://drchoi.pe.kr/famvio3.htm)

    정기적인 남성 폭력이 일어나는 가정들은 약 34%가 되는데, 그 이유는 당연히 매우 다양하지만 (한국 사회 군사화의 정도, 폭력적 학교 양육 및 사회화 등) 복지가 제대로 없다는 것은 분명히 큰 이유 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복지망이라는 안정판이 없는 곳에서 ‘밥벌이’ 책임지는 가장이 약육강식의 정글에 내던져져 있다면, 그도 결국 그 정글의 전형적인 늑대가 될 확률이 높을 수밖에 없죠.

    ‘가장’을 늑대로 만드는 정글 사회

    복지 없는, 그러나 기업하기가 너무나 좋아서 즐거운 비명이 나올 정도의 군사 안보 국가의 자본이 남성 일용직 노동자를 쮜어짜고 괴롭힐 만큼, 그 노동자도 자신의 ‘가국'(家國) 안에서는 자기 ‘밑에’ 있는 존재들을 그만큼 괴롭힐 것이고, 그들도 폭력을 내면화해 계속 그 길로 갈 것이고… 그리고 끝이 없습니다. 이 폭력의 사슬을 예리한 필체로 보여준 것은, 비판적 사실주의의 페미니스트 작가 오정희의 커다란 공헌이라 생각합니다.

    사회의 비폭력화란 아주 험하고 먼 길입니다. 아동에 대한 일체 학대 (소위 ‘체벌’)를 법으로 엄금하고, 살인 교육(군대 복무)을 받지 않을 선택의 권리를 법적으로 주는 것은, 이 사회 비폭력화 길의 출발점에 불과합니다. 사회에 기본적인 복지제도부터 도입해 그 제반 관계의 폭력성을 사회적 배려로 어느 정도 녹여주고 제한시켜주는 것도 그 길에서 하나의 출발 정도일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아직은 이 출발조차 하지 않고 있지요. 그리고 민중 세력들이 사회, 정치적 헤게모니를 어느 정도 장악하지 않는다면 출발할 것 같지도 않아요. 영남 지벌이 뜨든 호남 지벌이 뜨든, ‘원산폭격’은 대한민국 사회 문화의 기본 형태로 남아 있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그 소중한 한 표를 누군가에게 던질 때에 그 생각을 좀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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