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경, 법정의 죽음과 김예슬
        2010년 04월 15일 03:21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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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개인과 사회의 기로에서

    아서 밀러의 희곡 『세일즈맨의 죽음』에서 주인공인 세일즈맨 윌리(Willie)의 성(姓)은 로먼(Lowman)이다. 로먼(Lowman)이란 성은 Low man, 즉 ‘(사회적) 신분 ․ 계급이 낮은 자’를 뜻한다 할 수 있다. 한편 윌리(Willie)란 이름의 Will은 개인의 ‘의지’를 상징한다.

    성이 뿌리, 즉 사회적 기반에 해당한다면, 이름은 개체, 즉 사회와 무관한 개인의 자유의지에 상응한다. 윌리 로먼은 그의 어울리지 않는 이름과 성처럼, 결코 타협점을 찾기 힘든 개인의 자본주의적(혹은 소시민적) 욕망과 (대공황 직후) 미국사회의 태생적 하층민이란 사회신분 사이에서 길을 잃은 인물이다.

    욕망에 현실을 맞추는 법 따윈 애초에 가능하지 않으며, 현실에 욕망을 낮추는 길은 (개인의 출세욕 따위의 문제가 아닌) 생존 그 자체를 위협하는 일이다. 도시 빈민의 삶을 벗어나기 위한 윌리의 초인적인 노력은 그래서 함부로 속물적이라 비난하기 힘들다.

    그리고 윌리의 상층부를 향한 개인적 의지가 이루어질 수 없는 환상으로 전락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그래서 더욱 서글프다. (윌리의 의지는 이제 환상으로 대체된다.)

    개인과 사회, 환상과 현실 사이에서 보통 사람들은 한쪽을 선택한다. (대부분의 성인들이 후자를 택한다) 하지만 윌리는 둘 다 놓칠 수 없다. 양 극단을 절망(切望)처럼 움켜쥔 채, 절망적(絶望的)으로 놓아주지 않는다. 그것은 어쩌면 죽고 싶지 않다는 간절함이다.

    현실을 택하면 ‘죽음에 가까운 삶을’ 사는 죽음이 있거나 혹은 ‘죽은 채로’ 살아야 하는 죽음이 있다. 하지만 환상을 택하는 순간 ‘실제의’ 죽음이 닥쳐올 수 있다. (애초에 그 환상은 현실에서 불가능<=없음>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윌리가 현실에 순응한 채 자기 자신을 가루가 될 때까지 착취하면서도, 아들 비프에 대한 소시민적 환상을 포기할 수 없는 이유이다.

    2. 누가 세일즈맨을 죽였는가?

       
      ▲영화로 만들어진 <세일즈맨의 죽음> 포스터. 

    개인과 사회처럼 결과가 빤히 들여다보이는 대립구도가 또 있을까. 윌리의 환상(Will)은 그의 사회적 현실(Low man) 속에서 결코 살아남을 수 없다.

    윌리(윌리의 환상)와 로먼(윌리의 사회적 지위 혹은 윌리의 가족들)의 대립이 임계점에 도달할 때쯤, 윌리의 ‘길 잃은 길’은 자동차 사고를 위장한 자살로 길 위에서 길을 잃고 만다.

    윌리의 가족들인 로먼 가(家)는 윌리의 죽음으로 받은 보험금으로 태어나서 처음으로 모든 빚을 청산하게 되지만, 그들 곁에 윌리는 없다.

    가장으로서의 역할을 다하기 위해 가정으로부터 떨어져 일에 매달리지만, 가정으로부터 떨어져 일만 하다 보니 가장으로서의 역할에 충실할 시간이 없게 되는 역설적 상황. 빚을 갚기 위해 죽을 듯이 제 몸뚱이를 착취하지만 이자조차 감당하기 힘든 절망적 현실.

    그리고 ‘죽을 듯이’가 아니라, 실제로 제 몸뚱이를 죽여야만 제 몫의 빚을 완전히 탕감해주는 섬뜩한 사회. 이 모든 역설과 절망과 섬뜩함이 아우러진, 윌리의 장례식장에서 『세일즈맨의 죽음』의 작가 아서 밀러는 극중 윌리의 친구 찰리의 입을 빌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 중 누구도 윌리를 욕할 수 없습니다.”

    3. 그리고 세 개의 죽음

    좀 생뚱맞은 얘기인지 모르겠지만, ‘세일즈맨의 죽음’을 목도한 2010년 3월, 그와 비슷한 세 개의 죽음을 대한민국에서도 마주했다. 바로 <지붕 뚫고 하이킥>(이하 하이킥)의 세경의 죽음, 법정 스님(=무소유)의 죽음, 그리고 고대생 김예슬의 자퇴.

    먼저, 하이킥의 죽음. <하이킥>의 등장인물 중 세경은 유일하게 자기 욕망을 발산하기 못하고 ‘죽은 듯이’ 사는 인물이었다. 그래서 세경의 지훈을 향한 사랑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었다. 세경의 사랑이 존재하지 못했던 이유는 당연히 계급의 문제 때문이다.

    여기서 개인적 욕망(사랑)은 사회적 계급의 문제 앞에 죽임을 당한다. 아니, 죽임을 당하기 전에 미리 자살한다. 하지만 마지막 회에서 그녀는 공고하게 굳어진 사회적 관계망에 균열을 일으킨다. 지훈을 향해 처음으로 사랑을 고백한 것이다.

    하지만 그녀가 그런 용기를 낼 수 있었던 건, 그녀의 개인적 욕망이 사회 구조적 억압을 이겨내서라기보다는 이제 곧 이 억압적 계급구조에서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추방되기 때문이다. 이 사회에서 이미 그녀는 곧 죽기로 되어 있다. 하여 끝내 목구멍으로 꺼내지 못한 말을 ‘죽기 전에’ 내뱉는다. “좋아한다”고. “이대로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고.

    그리고 <하이킥>의 김병욱 피디는 세경의 소원을 들어준다. 어쩌면 그것만이 학(學)벌, 재(財)벌, 직(職)벌, 미(美)벌 따위의 벌 떼들로 촘촘히 구조화된 대한민국 사회 내에서 김 피디가 할 수 있는 (그리고 세경이 행복할 수 있는) 유일한 해피엔딩이니까.

    다음, 법정 스님의 죽음. 법정 스님은 생전 무소유의 화신처럼 여겨지던 분이었다. 법정 스님하면 으레 무소유를 떠올렸다. 그러던 법정 스님이 돌아가셨다. 사람이 나이가 들면 죽는 것을 피할 수 없다. 그건 부처님조차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문제는 법정 스님 한 사람의 죽음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법정 스님의 죽음은 법정 스님으로 상징되는 ‘무소유’의 죽음이었다. 말빚을 갚겠다며 자신의 책들에 대한 절판을 요구한 법정 스님의 마지막 유언은 소유에 눈이 먼 중생들에 의해 참담할 정도로 유린되었다. 바로 『무소유』 투기 열풍이 불었던 것이다.

    중생들은 법정 스님의 뜻을 간직하기보다 (가격이 폭등할지 모르는) 법정 스님의 ‘말빚’을 소유하려 했다. 그리고 그들의 계산은 적중했다. 법정 스님의 1993년 판 『무소유』가 경매 사이트 옥션에서 110만원에 팔렸다는 뉴스를 접했을 때, 나는 그동안 존경하던 법정 스님이 입적했을 때보다 더 큰 상실감에 떨어야 했다. ‘무소유’가 죽었던 것이다.

    마지막, 고대생 김예슬의 자퇴. “쓸모있는 상품으로 ‘간택’되는 길 대신 쓸모없는 인간으로 ‘선택’되겠다”며 대학을 박차고 나온 김예슬의 자퇴는 요즘처럼 학위와 학벌이 무한경쟁시대의 최우선 무기로 사용되는 시대에 일종의 자살 행위처럼 보였다.

    어떤 이들은 김예슬의 자퇴를 1970년대 유신정권 때 독재정권에 항거하던 대학생들의 자결에 비유하기도 했다. 또 이 같은 사건 자체가 학문의 장으로서의 기능을 전혀 못하고 있는 현 대학에 대한 사형선고처럼 비춰지기도 했다.

    하지만 더 큰 죽음은 대중들의 김예슬에 대한 곱지 않은 시선에서 찾을 수 있었다. 어떤 이들이 김예슬을 적극 지지한 반면, 어떤 이들은 운동권 스펙(?)을 올리려는 행위라고 김예슬을 오히려 욕했다. 나는 태어나서 이때 처음으로 ‘운동권 스펙’이란 희한한 단어를 접했다. 그리고 모든 행위의 동기를 스펙과 연관시키는 그들의 그 ‘스페셜(special)’ 추리력에 경악했다.

    그들에게, 쓸모가 없는 일은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들에게, 세상의 모든 일은 자기 자신에게 유용한 일이어야 하며, 세상의 모든 시간은 ‘프랭클린 플래너’에 의해 관리되어야 하는 것이었다. 아침에 일어나서는 성공한 자신의 모습을 그리며 흐뭇하게 입 꼬리를 올려줘야 자신의 몸값도 올라간다고 믿는다.

    아무리 불쾌한 일이 일어나도 『시크릿』에서 가르쳐준 대로 긍정적으로 생각해야 미래에 좋은 일이 일어난다고 생각한다. 모든 게 계산이다. 매 순간 한 발씩 더 나아간다. 그래서 순간은 매번 유폐되고, 행복은 매회 유예된다. 순수한 동기는 그들에게 죽은 지 이미 오래다.

    ‘쓸 데 없는(?)’ 일에 몰두하는 사람은 그들에게 결코 이해받을 수 없다. 허세나 허영 혹은 운동권 스펙과 같은 음흉한 의도가 있다고 판단될 뿐이다. 과장이 아니다. 내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다. 한 번은 정기적으로 독서모임을 하고 있다고 친구에게 말 한 적이 있다. 들려오는 대답은 다음과 같았다.

    “신춘문예 등단하려고 스터디 하는 건가?”

    4. 죽음과 죽음의 기로에서

    『세일즈맨의 죽음』을 읽고 대한민국 사회에서 벌어지는 세 개의 죽음을 지켜보며 4월을 맞았다. 사방(四方)이 죽음으로 둘러싸인 듯한 느낌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세일즈맨의 죽음』의 윌리에 비해 대한민국도 나도 훨씬 더 좋은 여건에 있다. 그래서 윌리처럼 미치거나 자살하지 않고 버티고 있는지 모른다. 하지만 촉수(?)에서 감지되는 이 비인간화의 냄새, 이 비릿함을 지나치기 쉽지 않다.

    꿈이라는 단어로 자신의 무능을 합리화하며 현실과 마주하기를 미루는 행위만큼 가련한 일도 없다. (또 그러면서도 그만큼 이해가 가는 일도 없다) 그리고 그 꿈이라는 것이 반드시 반자본주의적이어야 할 까닭 역시 전혀 없다. (게다가 그들의 자본주의적 꿈을 자본주의적 욕망의 포로라거나 속물이라고 함부로 무시할 수도 없다. 그 누구도 다른 사람의 의도를 제 멋대로 ‘스페셜하게’ 추리해 무시하거나 비난할 권리는 없다)

    하여 때로는 자본주의적 꿈, 그러니까 열심히 스펙을 쌓고 『시크릿』을 읽으며 재테크에 열중하는 삶을 사는 이들이 한편으로 속편해 보일 때도 있다. 하지만 어쨌든 나는 나의 자본주의적 무능의 문제를 떠나서도 별로 그렇게 살고 싶은 욕망이 없는 사람이다.

    그래서 스펙에 열중하는 삶 대신 다른 삶을 꿈꾸는 어떤 이들에게 인생이란 삶과 죽음의 기로가 아니라 죽음과 죽음의 기로가 아닌가 하고 생각해본다. <하이킥>의 세경처럼 자기 욕망을 죽인 채로, ‘죽은 채로’ 사는 삶이나 아니면 역시 세경처럼 진짜 삶(사랑)을 선택하는 순간 ‘실제의’ 죽음을 맞아야 하는 사회경제적 조건 하에서 어떤 선택도 내리지 못하는.

    한편 다시 생각해보니 스펙을 쌓는 인생을 선택한 친구들 역시 나 같은 이들의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는 생각도 슬며시 든다. 죽어라 일하지만 다 갚을 수 없는 세일즈맨 윌리의 빚처럼, 죽어라 스펙을 쌓지만 다 쌓을 수 없는 88만원 세대들의 스펙. 정신분석학자 라캉이 말하는 죽음의 욕망처럼 죽어서 완전히 없어져야만 잉여(=빚=더 쌓아야할 스펙)가 남지 않는 상황 하에서 죽을 수도 스펙 쌓기를 멈출 수도 없는.

    어떤 젊은이들은 삶이냐 죽음이냐의 기로가 아니라, 죽음과 죽음의 갈림길에 놓여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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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디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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