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황, “정치판은 짐승 우리”
        2010년 04월 15일 11:13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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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림파의 시련

    1519년, 기묘사화가 일어났다. 기묘년에 훈구파에 의해 조광조 등 사림파가 숙청된 사건이다. 조광조가 귀양을 갔다가 사형당하는 등 수십 명의 사림파들이 사형을 당하거나 귀양을 갔다.

    기묘사화는 사림파에게 일대 타격이었다. 잠시 쥐고 있던 권력은 훈구파에게 다시 넘어갔고, 사림파는 선조 이후 다시 권력을 잡을 때까지 시련의 시기를 겪어야 하였다. 기묘사화 이후에도 1545년 을사사화, 1547년 정미사화 등 사림파를 제거하기 위한 여러 차례의 숙청 조치가 취해졌다.

    이러한 시련이 계속되자 상당수의 사림파 학자들은 중앙 정계 진출을 꺼려하거나 중앙 정계에 진출했다가도 자신의 안위를 생각하여 은퇴를 하곤 하였다. 그 대표적 인물 중의 한 사람이 퇴계 이황이다.

       
      ▲ 퇴계 이황

    이황(1501년~1570년)은 과거 시험에 급제하여 여러 벼슬을 거쳐 대제학에까지 이르렀으나 여러 번 사직계를 내고 고향인 도산으로 돌아갔다. 왕이 여러 차례 불러들였으나, 그는 신병, 노쇠, 재능 부족 등 갖가지 이유를 들어 거절하였다.

    이런 거절 사유는 명분에 지나지 않았다. 이황이 왕의 거듭된 요청에도 거절한 이유는 여러 차례의 사화로 사림파들이 중앙 정계 진출을 꺼려하고 있었던 점, 특히 이황의 형인 이해가 사화로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는 점이 크게 작용하였다.

    더욱이 이황은 성격이 매우 소극적인 사람이었다. 자신은 정치를 담당하는 것에 맞지 않고 학문하는 것을 자신에게 부여된 소명이라 생각하였다. 당시 자신의 심경에 대해 <도산잡영기>에서 이렇게 썼다.

    나는 시골 사람이므로 들은 것은 없어도 산림을 돌아다니는 데에 즐거움이 있다는 것을 일찍 알았다. 나이 들어 망령되게도 세상일에 나아가 바람과 티끌이 뒤덮인 곳에서 나그네 생활을 하였다. 스스로 돌아오지 못하고 거의 죽을 뻔하였다. 나이가 더욱 들어 병이 깊어져 세상은 나를 버리지 않았지만 부득이 나는 세상을 버려야만 하였다.

    비로소 짐승 우리와 새 장 같은 곳에서 벗어나 농촌에 돌아오니 산림의 즐거움이 다시 살아났다. 내가 묵은 병을 고치고 깊은 시름을 풀면서 궁색한 노년 생활을 편히 보낼 곳은 여기 말고 또 어디에 있겠는가.

    자신의 일생을 간략히 회고했다. 중앙 정계는 짐승 우리, 새 장이라고 했다. 거기에서 거의 죽을 뻔했다고 하면서 고향으로 돌아오니 새로운 기쁨을 얻게 되었다고 했다. 은퇴를 한 이황은 여생을 오로지 학문 공부에만 매진하였다.

    의양(依樣)에 의한 학문

    말세에도 하늘의 뜻은 바뀌지 않으니,
    우리나라는 성인들이 살고자 했던 곳이다.
    노나라의 풍습은 오히려 변할 수 있지만,
    기자의 가르침은 허망되게 없어지지 않는다.
    앞 시대의 사람들은 문장이 화려하고 뛰어났는데,
    오늘의 사람들은 잡스런 재주만 부리는구나.
    어느 누가 있어 스스로 분발하여,
    도(道)를 실행하고 경서(經書)로 향할 것인가.

    이황은 자신이 이루고자 했던 학문의 꿈을 이렇게 썼다. 그는 자신의 시대가 말세라고 했다. 말세인 이유는 두 가지 측면에서 얘기할 수 있다. 하나는 정치적 상황이다. 즉 사림파들이 대거 숙청당하는 사태를 두고 하는 말이다. 또 다른 하나는 학문적인 상황이다. 조선이 성리학을 이념으로 건국하였지만, 성리학 자체가 정체되어 있었다.

    학문적 측면에서 말하면 중국 역시 마찬가지였다. 중국에서도 성리학의 권위가 땅에 떨어져 있었다. 이황은 성리학을 조선에서 다시 새롭게 일으킬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일을 누가 감당하겠는가. 그래서 그 자신이 경서로 향한다고 했다. 즉 그 일을 감당하겠다고 했다.

    이황은 평생을 두고 조선에 성리학의 기풍을 새롭게 세우고자 하였다. 그 작업은 스스로 밝히고 있듯이 경서를 향하는 것에서 시작하였다. 이이는 <답성호원>에서 "서경덕은 자득(自得)에 의한 학문을 했고, 이황은 의양(依樣)에 의한 학문을 했다"고 썼다. 서경덕이 스스로 연구하고 깨우쳐 자신의 철학을 세웠던데 반해 이황은 옛 성현들의 책을 연구하여 자신의 철학을 세웠다는 얘기이다.

    이황은 고전 연구를 열심히 하였고, 고전에서 세워 놓은 전례를 따르고자 하였다. 그는 주자가 집대성한 이기론(理氣論) 철학을 깊이 이해하고자 하였다. 그는 주자를 존경하여 "천하고금에서 가장 으뜸으로 삼는 분"이라고 말하기도 하였다. 그렇다고 하여 그는 고전에 대한 주석 달기만 한 사람이 결코 아니었다.

    이황은 주자의 철학을 이해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그것의 부족한 점을 보완하고자 하였다. 그것은 주로 ‘인간’에 대한 문제였다. 성리학에서는 이 문제를 ‘심성론(心性論)’, 즉 인간 마음의 본질에 관한 학문이라고 한다. 그는 이 분야에서 독자적인 업적을 이룩하였다. 오늘날 이황이 조선 시대의 대표적인 유학자로 꼽히는 이유도 바로 이 분야에서의 업적 때문이다.

    기일원론 비판

    이황은 앞선 시대의 학자들을 평가하였다. 정몽주, 권근, 조광조, 서경덕 등이 그들이다. 정몽주에 대해서는 충절을 지켰으나 저술을 남기지는 않았다고 말한다. 권근에 대해서는 천인합일(天人合一)의 원리, 즉 하늘과 인간은 하나라는 원리를 밝혔으나, 논리가 무리하게 전개되었다고 말한다. 조광조에 대해서는 뜻을 제대로 펼치지 못하고 희생된 데 대해 안타까움을 나타냈다.

    정몽주, 권근, 조광조 등은 조선 유교 역사의 주류 계보의 인물들이었다. 이황의 그들에 대한 평가 역시 부족한 점에 대한 지적이거나 안타까움의 표시였다. 그러나 서경덕에 대해서는 달랐다. 이황은 서경덕에 대해 비판의 칼날을 들이댄다. 그는 "서경덕이 사물의 원리를 꿰뚫어보는 데까지 이르렀지만, 성현의 생각과 다른 방향으로 나아갔다"고 비판하였다. 이황이 말하는 성현은 주자를 말한다. 즉 이황은 서경덕이 주자의 입장에서 벗어났다고 비판한 것이다.

    서경덕은 만물의 근원은 기(氣)이고, 기가 스스로 운동하여 천지만물이 생겨났다고 말했다. 이황은 <비리기위일물변증>에서 서경덕의 철학을 비판한다. 기 이전에 이(理)가 존재한다고 말하며, 이는 귀한 것이고 기는 천박한 것이라고 하였다. 또한 기가 세상의 온갖 갈등과 대립을 일으키는 것인 반면에 이는 이런 갈등과 대립을 넘어설 수 있게 하는 것이라고도 하였다.

    서경덕에 대한 이황의 비판은 국제적인 이론적 정세와 관련된다. 중국에서는 명나라에 와서 주자 철학은 제대로 이어지지 않고, 새로운 학파들이 생겨났다. 왕수인은 ‘마음 속에 이치가 있다’는 주장을 내세워 ‘사물 속에 들어있는 이치를 탐구하라’는 주자의 주장을 비판하였다. 이것은 주자 철학이 가진 지나친 이론주의에 대한 비판이었다.

    나흠순은 성리학의 입장에서 왕수인을 비판한다고 하였으나 결국 주자의 철학과 멀어졌다. 그는 이(理)는 기(氣)를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다며 이가 기보다 앞서 존재한다는 주자의 주장을 벗어나 버렸다.

    이황은 왕수인의 양명학뿐만 아니라 나흠순의 철학이 조선에 들어오는 것을 극히 경계하였다. 서경덕의 철학에 대한 비판의 밑바탕에는 이러한 이론적 정세가 놓여 있었다. 그는 비록 서경덕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았지만, 왕수인과 나흠순의 철학에 대해서는 ‘이단’이라 규정하였다. 이러한 이단 규정은 조선 후기까지 계속 이어졌다. 따라서 조선의 기 일원론자들은 자신들의 언행에 극히 신중해질 수밖에 없었다.

    도덕의 철학

    기일원론을 이단이라 규정한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었다. 세상 만물은 기에 의해 생겨나고 운동한다는 것에 대해 주자 역시 인정을 한다. 그 운동의 원리가 이라는 게 주자의 주장이다. 주자에게 있어 이는 만고불변의 진리이다. 그리고 이황은 이가 모든 갈등과 대립을 넘어서게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모순이 발생한다. 이를 원리로 해서 생겨난 천지 만물 세상이 어찌 이리 혼탁하고 갈등과 대립 상황에 있게 된 것인가? 이것은 이황에게 크나큰 고민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찾아낸 해법은 세상을 둘로 나누는 것이었다. 이가 만들어낸 세상과 기가 만들어낸 세상.

    이황은 이런 생각을 자신의 관심 분야인 ‘인간의 문제’에서 풀어냈다. 그는 사단(四端)과 칠정(七情)을 끄집어낸다. 사단은 인간의 도덕적 심성으로 인의예지(仁義禮智)를 말한다. 칠정은 인간의 자연스런 감정으로 희노애구애오욕(喜怒哀懼愛惡欲), 즉 기쁘고 슬프고 사랑하고 증오하는 하는 마음을 말한다.

    사단과 칠정은 오래 전부터 유학자들 사이에 사용되어 온 개념이지만, 이황에 이르러 비로소 이 두 개념의 관계가 정리되기에 이른다. 이황은, 사단은 이가 발동한 것이고 칠정은 기가 발동한 것이라고 정의한다. 그래서 이는 귀한 것이고 기는 천한 것이라는 얘기이다.

    인간은 두 가지 마음을 가지고 있다. 하나는 이가 발동한 도덕심, 그리고 다른 하나는 기가 발동한 감정이다. 물론 앞의 것이 인간의 본성이다. 그러므로 귀중한 도덕심을 잘 보전하고 천박한 온갖 감정을 잘 다스려야 한다. 이것이 진정한 인간의 길이다. 이황이 말하고자 한 것이 이것이다.

    따라서 이황의 철학은 철저한 도덕의 철학이다. 그는 도덕심인 이를 중심에 둠으로써 자신의 철학적 체계를 세웠다. 그는 공정하고 바른 마음을 도심(道心)이라 하고 사사로움에서 비롯된 마음을 인심(人心)이라고 하여, 이 둘을 철저히 분리한다. 도심은 이가 발동한 것이고, 인심은 기가 발동한 것이다. 그는 항시 마음을 바르게 닦아서 인심을 다스리고 도심을 회복할 것을 주장한다.

       
      ▲ 정계를 떠난 이황이 공부한 안동의 도산서당(도산서원). 후에 영남 유학의 본거지가 되었고, 그 영향이 일본에까지 이르렀다.

    이황은 <언행록>에서 함부로 관직에 나아가려는 자들을 경계한다. 그는 그것에 대해 "마음에서 스스로 얻어 실행하는 것이 없으면서 세상 사람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말을 꾸며 대기나 하고, 바깥에 기준에 따라서 이름이나 얻고 칭찬을 받고자 하는 헛된 짓"이라고 비판한다.

    마음을 닦고 행실을 바르게 하는 게 먼저라는 얘기이다. 그래서 학문의 목적을 마음을 닦는 것에 두어야 한다고 하였다. 이러한 주장은 이황이 자신의 시대에 대한 인식 속에서 나름대로 해법을 찾아 나온 것이었다. 그는 자신이 살던 시대를 말세라 규정했고, 도덕철학으로 그것을 극복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그가 기일원론을 비판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것은 비천한 것을 중시하여 인간의 도덕심을 흩으러 놓는 주장으로, 세상을 더욱 더 혼란으로 이끌 것이라 보았기 때문이다. 그는 이 중심의 철학을 굳건하게 세우고자 하였다. 그가 지은 <반타석>이란 시를 보자.

    누렇고 탁한 물이 도도히 흘러오면 문득 모습을 감추고,
    물이 고요히 흘러 잔잔해지면 비로소 분명해진다.
    대견하구나, 이렇게 거센 물결 속에서도
    천고의 반타석은 굴러 기울어지지 않는구나.

    이황은 자신이 살던 동네의 개울에 있던 바위를 ‘반타석’이라 이름 짓고 이렇게 노래했다. 반타석이란 바위를 이에, 냇물을 기에 비유하여 기가 이를 가릴 수는 있어도 넘어뜨릴 수는 없음을 말했다. 냇물은 흘러가도 바위는 그 자리에 의연하게 서 있는 것이다.

    이분법적 세계관

    이황의 철학은 당장 반박에 부딪혔다. 당대 후배 학자인 기대승이 문제를 제기하고 나섰다. 그 핵심은 이황이 이와 기를 분리한 게 아니냐는 것이었다. 주자 철학에 의하면, 이가 기보다 우월하지만 이와 기는 떨어질 수 없는 관계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도 발동하고 기도 발동한다면 이와 기가 떨어질 수도 있음을 말한다. 기대승은 이것을 문제 제기하였다.

    이에 대해 이황은 <답기명언 논사단칠정 제2서>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가 발동하고 기가 따른다는 얘기는 이를 중심에 두고서 하는 말이지 이가 기 밖에 있다는 뜻이 아니다. 사단이 이런 경우이다. 기가 발동하고 이가 그것에 올라탄다는 얘기는 기를 중심으로 말하는 것이지, 기가 이 밖에 있다는 뜻이 아니다. 칠정이 그런 경우이다.

    이가 발동하고 기가 따른다, 기가 발동하고 이가 올라탄다는 식으로 이와 기가 분리되지 않음을 말하고자 했다. 그러나 논리적으로 보면 기대승의 문제 제기에 대한 답변으로는 불충분하다.

    이도 발동하고 기도 발동한다면 이와 기가 분리될 수밖에 없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이가 발동을 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성리학에서 이는 움직임이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이는 단 하나이기 때문이다. 움직이는 건 기이다. 기는 음기와 양기로 나누어지므로 그것들이 서로 대립적 운동을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부분에 대한 비판은 한 세대를 지나 이이에 의해 이루어진다.

    이황은 성리학에서 제대로 다루지 못했던 인간의 문제를 연구하였다. 그는 성리학의 이기론(理氣論)을 심성론에 적용하여 인간의 본성을 밝혀내려 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이 중심의 철학을 세우고 이가 발동한 사단, 즉 도덕심이 인간의 본성임을 밝혔다.

    그러나 그의 철학은 이의 발동과 기의 발동을 동시에 인정하는 이분법적 세계관이 될 수밖에 없었다. 또한 이를 귀한 것, 기를 천한 것이라 하였다. 이를 귀한 것이라 하여 개인의 수양을 통한 도덕성의 회복을 우선시 하였다. 반면 기를 천한 것이라 하여 현실 참여나 현실 개혁에 대해 외면하게 하였다. 그의 제자들이 선조 대에 이르러서야 중앙 정계에 본격적으로 진출하기 시작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말세의 극복은 도덕철학만으로는 이루기 어려운 일이다. 그것은 현실의 개혁을 요구한다. 이것을 위해서는 천한 것으로 여겼던 기의 역할을 다시 새롭게 인식할 수밖에 없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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