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의 공포, 그러나 아름다운 영화 <작은 연못>
    2010년 04월 12일 10:22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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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 잡지책 <고래가 그랬어>에서 시사회에 초대해 주었다. 노근리 양민학살을 영화로 만들었다는 얘기를 듣고 그리 기대하진 않았다. 이제껏 경험했던 바, 진보적 성향을 가진 영화들은 미적 감각에서 나와 좀 맞지 않았던 것. 투박하고 세련되지 못한 미감. 혹은 감동을 주어야 한다는 강박이 일구는 신파적 표현 따위들.

결론부터 잘라 말하자면, 이 영화는 감각적으로 잘 만든 영화다. 나의 예상을 완전히 뒤엎은 것. 초반부 농민의 일상을 담아낼 때엔 매우 단순한 카메라 워킹과 자칫하면 매우 지겹게 느껴질 수도 있는 컷의 길이를 선택했다.

폭격신에서는 핸드헬드 기법과 숏테이크를 적절히 사용했고, 살아남은 주민들이 마을에 돌아와 다시 일상을 이루는, 하지만 떠난 이들이 남긴 휑한 빈자리에 아련함이 밀려오는 부분에서는 자연을 더욱 아름답게 채색하여 그 아련함을 극도로 끌어 올린다.

‘진보’답지 않게 잘 만든 영화

영화는 정의를 부각시키기 위해 사악한 인물을 설정하는 그런 흔한 방식을 채택하지 않는다. 무고한 시민들에게 총알을 퍼붓는 미군들도 양심을 가진 인격체임을, 자연 속에 몸을 던질 여유가 있을 때엔 동심이 살아나는 사람일 뿐이란 묘사를 놓치지 않고, 또한 살육의 피해자인 주민들이라 해서 마냥 선하고 예쁘게만 꾸미지 않는다.

정확히 얘기해서 이 영화는 반미정서를 담지 않고 ‘노근리 사건’을 객관적으로 재현하려 노력했다. 상부의 명령에 의해 움직여야만 하는 군인들, 전쟁의 참혹한 피해자인 아이들, 여인들, 노인들, 사람들, 또 사람들.

시작에서부터 빛의 사용이 눈에 띈다. 방안에 앉아 따듯한 실내등에 몸을 맡긴 여인과 밖에서 푸른 달빛에 노출된 남성. 그들이 처한 상황을 빛의 효과로 연출하는 감각. 폭격에서 벗어나 살아 돌아온 이들을 담아낼 때 선택한 햇살, 그 포근함. 미술을 전공했거나 색에 민감한 사람이라면 영화가 담아낸 색감, 특히 자연의 색이 눈에 들어올 거다. 그리고 그러한 조명과 색의 향연이 가슴에 못질을 해댄다.

무엇보다 이 영화는 전쟁의 참혹함을, 죽음의 공포에 떠는 것이 무엇인지 전달해 준다. 관객은 그 앞에서 치를 떨고 눈물을 떨군다. 그리고 그것은 우선적으로 연기자의 연기력에서부터 시작된다. 관객의 가슴에 고통과 상흔을 전달해주는 연기. 선악의 드라마가 지어내는 감동이 부재하는 곳, 관객은 연기자를 통해 두려움에 떨고 그들의 절규와 오열 앞에서 안절부절 못한다.

그리고 감독은 감동 대신 공포영화에서 흔히 사용되는 충격 요법을 선택한다. 인간이 자행하는 짓들 중 전쟁만큼 충격적인 게 또 있을까, 소스라지는 충격에 관객들이 비명을 지르고 마음을 추스르려 할 때 쯤, 아름다운 풍광을 늘어놓는다. 이 얼마나 잔혹한가.

전쟁의 공포, 그리고 아름다운 풍광

노근리 사건을 다룬 영화라는 얘기를 들었을 때, 나는 진부한 반미정서의 영화일거라 예상했다. 하지만 나의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미군에 의한 양민학살이라는 사건의 진실을 인정하는 이들이라면, 그들이 정치적 성향이 어떻건, 심지어 미국인이건 상관없다. 영화는 보는 이들에게 ‘전쟁은 정의가 부재한 끔찍한 살육의 광란’일 뿐이라 말한다. 어느 보수주의자였던가, 어쩌다 ‘반전 평화’가 좌파의 구호가 돼버렸냐며 한탄했던.

음악의 사용도 인상적이었다. 드라마를 일궈내기 위한 장엄한 배경음악 따위는 없다. 아주 담백하게, 하지만 꼭 필요한 만큼만 삽입한 음악. 불안을 고조시키다 평온함으로 돌아서는 피아노 건반, 두 손을 꼭 쥐고 듣다 박수 몇 번 치곤 눈물 훔치게 만드는 아이들의 노래.

영화는 전체적으로 그런 방식으로 제작되었다. 헐리웃 식 작법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하지만 꼭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간파한 재능이 돋보이는. 이상우 감독의 경력을 보니 이 영화가 첫 감독이라는데, 믿기지가 않는다.

덧] 영화가 전쟁의 상흔을 가슴에 남겨줬다면, 감동은 영화 제작과정에 있다. 잘 알려진 연기자들의 자발적 참여, 뿐만 아니라 CG팀들도 무보수로 참여했다 한다. 감동을 원하는 분들은 영화정보를 검색하여 제작노트를 읽어보시길. 시사회 끝나고 나오는 길, 영화 배급을 위한 필름 값 십시일반 모금함에 만 원을 넣고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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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디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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