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 면목동 양아친데, 같이 좀 놉시다"
        2010년 04월 12일 12:56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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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서울의 변두리 면목동에서 자랐다. 엄마들은 보통 봉제공장에서 미싱을 한다. 아빠들은 젊을 때는 ‘완력’을 쓰는 일을 하다가 나중에 나이 들면 ‘경비’나 공공근로를 한다. 벌이야 뭐 더 물을 것도 없다. 다들 그럭저럭 밥만 먹고 살았다.

    중학교 때 골목길을 지나가면서 옆을 돌아볼 수가 없었다. 어스름한 시간부터 거기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는 건 보통 ‘양아치’들이었기 때문이다. 삥 뜯기기 싫어서 도망치곤 했다. 놀이터 근처도 피해야 했다. 고등학생들이 모여서 술을 마셨기 때문이다.

    면목동’들’의 풍경

    뉴스에 내가 다닌 고등학교 이야기가 나온 적이 있었다. 웬일인가 해서 봤더니 학력평가 시험이 있었는데 강남구의 X고와 중랑구의 M고의 점수 격차가 무려 100점이 났다는 이야기였다. 쉽게 이야기하자면 중랑구의 M고는 서울에서 꼴찌를 한 것이었다.

    고등학교에 진학해서 삥 뜯길 염려는 없어졌지만 여전히 긴장하면서 동네를 걸어 다녔다. 어디서 “야리냐? 이 씨XX아?”라는 말을 듣고 시비가 붙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범생이’들에게 내가 사는 면목동은 우호적인 지역이 아니었다.

       
      ▲임순례 감독의 영화 <세친구> 스틸사진. 

    기본적으로 ‘실업계’를 다니는 학생의 비중이 다른 동네에 비해 월등히 많았고, M고도 여러 가지 면에서 ‘피곤한’ 학교였기 때문이었다.

    상당히 많은 아이들은 학원에 다니다 지쳐 학교에서 잠을 청하는 게 아니라, 전날 밤에 놀다가 지쳐 수업시간에 잠을 자곤 했다.

    오전에 도시락을 까먹고 점심시간에 만만한 ‘범생’들의 밥과 반찬을 뺏어먹고, 쉬는 시간 짬짬이 담배 피우러 가는 녀석들이 많았다.

    어쨌거나 그렇게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 서울 인근의 4년제 대학을 다니게 된 아이들은 별로 없었다. 한 반에서 5~10명을 제외하곤 모두 서울 바깥으로 가거나 전문대에 진학했다. 재수를 선택하는 경우는 좀 다른 경로를 밟았겠지만. 그나마도 전문대까지도 가지 못해 그냥 일을 하기 시작한 아이들이 더 많았다.

    게다가 아까 말했듯이 일반계가 아닌 실업계로 진학했던 아이들은 IMF 사태 이후 만성화된 ‘고용 불안’으로 마땅한 직장을 찾지도 못했고, 찾아봤자 ‘비정규직’이었다. 진짜 ‘88만원’짜리 인생을 사는 애들이 더 많았다.

    우리 동네 지식인

    운 좋게 ‘서울에 있는 4년제 대학’에 갔던 나는 대학에서 ‘문화적 충격’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대학가’의 문화라는 것들과 동네 ‘양아치’들의 문화와는 맞닿을 수가 없었다. 대학에서 늘 삐딱하고 ‘발칙’했던 ‘운동권 언저리의’ 나는 동네 친구들의 공동체에 도달하면 늘 ‘지식인’의 역할을 맡아야 했다.

    가장 ‘가방끈’이 긴데다가 사회과학을 공부하니 별스런 질문들에 ‘엄정한 대답’을 해야 하는 역할마저도 해야 하기도 했다. 친구들의 부모들은 ‘똑똑한’ 내가 심지어 ‘큰 인물’이 될 것이라는 평가를 해주기도 했다. 어이가 없었다.

    많은 20대들은 신촌, 홍대, 신사, 대학로, 건대 등지나 대학교 근처에 있는 술집에서 술을 먹곤 한다. 아니 정확하게는 ‘많은 20대’는 꼭 아닌 것 같다. 그건 ‘서울 인근 대학’에 진을 치고 있는 ‘대학생’ 이야기다. 나머지 20대들은, 특히 내가 사는 면목동 근처의 20대들 같은 경우 동네에서 술을 주로 먹는다.

    자기들의 아빠 엄마가, 삼촌과 이모가, 형과 누나(언니와 오빠)가 술을 마시던 근처에서 술을 마신다. 영국에서 동네마다 있는 ‘펍’ 같은 곳에 동네 ‘진상들’이 다 모여서 놀 듯, 우리 동네의 ‘양아치들’은 동네에 있는 술집들에서 술을 마신다.

    우리 동네에 있는 ‘양아치들’은 지금 내 나이인 29살이 되도록 동네를 잘 빠져나가지 못한다. 일단 고용이 불완전하기 때문에 ‘독립자금’이 멀어 보인다. 그리고 나가서 술 먹기에는 ‘택시비’가 ‘후달린다’. 게다가 10대에 봤던 애들도 다 있다. 그러니 동네에서 술을 마시는 게 너무 당연하다. 이게 우리 동네의 일이기만 할까?

    진보정당 가식에 짜증난다

    ‘진보정당’의 문화를 겪고 있는 나는 도대체 매번 입이 닳도록 외치는 ‘서민’ 그리고 ‘노동자’, ‘민중’이라는 말의 가식이 짜증난다. ‘88만원 세대’라는 말이 사회에 많이 퍼져있다고 생각하는가? 아니 20대들이 모두 공유한다고 생각하는가? 서울 변두리에 있는 술집에서 떠돌고 있는 20대들과 한 번 술을 마셔 보시라. 그들은 ‘88만원 세대’라는 말을 써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다.

    ‘신자유주의?’ 이쯤 되면 완전 ‘범생이질’의 절정에 오른 것이다. 하지만 늘 지역에 붙어있는 당의 플래카드에는 ‘신자유주의’라든가 하는 아직 삶터의 말에 붙어있지도 않은 말들을 맥락 없이 너무나 쉽게 붙어있다. 그 ‘민중’들의 언어와 진보정당이 그들과 ‘함께 하기’ 위한 언어는 너무나 여전히 멀리 떨어져 있다.

    대학에 다니는 동안 운동권들에게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듣는 이야기가 “학우 대중에게 다가가야 한다”라는 정언명제였다. 대학을 졸업하고 기웃거린 ‘진보적 인간들’, ‘좌파들’의 이야기 역시 마찬가지였다. “대중을 잘 이해해야 한다.”

    하지만 여전히 ‘좌파’들은, ‘진보주의자’들은 별로 그럴 계획이 없는 것 같다. 대학생이 주축이 된 진보정당의 20대/학생 당원 모임에 비정규직의 ‘88만원 세대’ 20대 노동자는 가서 할 이야기도 별로 없을 것 같고, 설령 왔다가도 ‘어느 학교 몇 학번’을 물어보는 통에 그 다음에는 못 갈 것 같다.

    더 결정적인 것은 그러한 모임들이, 진보정당의 문화들이 여전히 ‘중앙’에 꽂혀있다는 것이다. 내가 보기에 전국 단위의 어떤 사업에 ‘올인’하는 것보다 훨씬 더 효과 있는 당원들을 유치하는 방법은 ‘술집들’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굳이 ‘술집들’이 아니어도 와서 지껄이고 ‘쌔끈한’ 노래도 좀 듣고, 노래도 좀 부를 수 있으면서도 구태여 ‘먹물질’ 안 해도 될 것 같은 공간들. 물론 그런 공간들이 있다. 근데 그런 공간들은 모조리 홍대와 신촌, 그리고 대학로에 밖에 없는 것 같다.

    "진보정당, 니들끼리만 놀지말고 같이 놀자"

    알바 뛰고 삐끼일 하고, 웨이터일 하고, 핸드폰 팔고 온 진짜 ‘88만원 세대’는 프랜차이즈 술집이나 곱창집에 모여 ‘새로운 감성’ 따위와는 상관없이, 그들의 윗세대들이 했던 똑같은 패턴의 술자리를 갖고 있다. 술자리에서 ‘양아치들’의 그 ‘빌어먹을’ 인생에 대해 함께 술을 마시며 듣기만 해도 뭔가 달라질 거다.

    일본의 마쓰모토 하지메가 처음 ‘뭔가’를 맘먹고 시작한 재활용 센터(사실은 다목적 공간) <아마추어들의 반란>이 떠오른다. 센터의 위치는 ‘양아치’들이 모여 있는 동네였다. 이 ‘양아치들’, ‘찌질이들’, ‘진상들’을 버리고 진보정당이 될 것 같아?

    말로만 ‘민중’, ‘88만원 세대’하지 말고, 꼭 뭔가 ‘아방가르드’한 공간 ‘찾기’에 올인 하지 말고 동네에 좀 만들지? 그게 더 싸게 먹히지 않을까. 그리고 ‘민중들’의 언어도 좀 배울 필요가 있겠다. ‘정치적으로 올바른’ 표현 한 마디를 건지려고 ‘정치적으로 취약한’ 다수를 버리는 이 습관들. 온실에 제 발로 들어가는 거 아닐까. 그런 얌전한 민중은 없거든? 진보정당아, 이제 좀 니들끼리 놀지 말고 동네에 ‘놀 데’를 만들어줘! 같이 좀 놀자구!

                                                      * * *

    *이 글의 필자는 80년대 어느 날 안암동에서 태어나 계속 면목동 같은 서울 ‘변두리’에서 살았다. 고등학교 때 진중권과 홍세화, 그리고 김규항을 읽는 바람에 ‘좌파’로 찍히고 보충수업과 야자를 빠지려고 무진 애를 썼다. 대학에서 운동권 주위를 기타만 들고 다니다가 졸업을 했다.

    그 후 군 복무 중에 맑스와 우석훈을 읽으면서 돌이킬 수 없다고 생각했다. 대학원에서 ‘문화’를 배우는데, 역시 ‘문화’는 현장에서 느껴야 한다고 생각 중이다. 꿈은 사가정역에 ‘아지트’ 만들기. http://flyinghendrix.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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