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 눈 앞의 혁명과 노동자정당
        2010년 04월 11일 12:58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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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내에서는 별 관심이 없었던 것 같지만, 지난 주 중앙아시아에서 한 가지 역사적인 사건이 터졌습니다. 키르기스스탄이라는 작고 가난한 나라에서 계속 권위화돼온 바키예브 정권이 일종의 민중반란에 의해서 유혈적으로 타도되고 사민당 등 야권 세력이 그 여세를 몰아 ‘과도기적 내각’을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가난한 주변부의 급진적 변혁

    2005년의 또 하나의 민중 반란의 과정에서 집권한 바키예브 문중이 거의 전형적인 ‘도둑 정치'(cleptocracy) 모양으로, 해당 국가의 거의 모든 가용 자원들을 사유화하여 일종의 가산적인 ‘일가 집권하의 국가’를 만드는 과정에서 자원 나누어먹기에 소외를 당한 북부지역의 관벌과 기업인, 유력한 범죄조직 보스 등이 야권으로 합류했으며, 야권과 바키예브 독재의 대립은 결국 민중반란을 통해 해결되고 말았습니다.

    정권에 의해 사병화된 경찰들이 민중들에게 조준사격을 가했던 관계로 사망자들이 65명에 이르렀답니다. (http://www.vz.ru/politics/2010/4/8/390961.html) 그런데 "못살겠다, 갈아보자"는 일념에 불타는 민중들이 죽을 각오로 대통령궁을 포위, 공격해 결국 값비싼 승리를 얻은 셈입니다.

    어떻게 보면, 가난하고 차별받는 주변부에서 가장 급진적인 변혁이 일어나는 법이죠. 30년 전의 ‘광주’도 잘 나가는 신흥공업국 대한민국의 가장 살기 어렵고, 가장 소외를 많이 당해온 동네에서 일어났지만, 지금 유럽에서 저항의 선두를 달리는 희랍도 사실 포르투갈과 함께 유럽연합의 가장 주변적 지대에 속합니다.

       
      ▲박노자 교수.(사진=레디앙) 

    유럽이라고 하지만, 구매력기준(PPP)로 본 1인당 국민소득은 약 2만9천 달러, 즉 정확하게 대한민국의 수준입니다. 키르기스스탄도 그렇죠. 타지키스탄과 함께 중앙아시아의 최빈국에 속하며, 1인당 국민소득은 인접국 카자흐스탄의 5분의 1 정도밖에 안됩니다.(구매력 기준, 액면대로라면 9배 정도 차이)

    키르기스스탄의 국제적 위치를 정확하게 규정하자면 자원수출도 상품수출도 여의치 않은 상황에서 주로 ‘사람 수출’, 즉 이주 노동자 수출을 한다는 것이죠. 세계체제 안에서는 사람 수출을 전문으로 하는 주변부 국가들은 키르기스스탄 이외에도 필리핀, 몰도바 등 몇 군데 있습니다.

    혁명은 사상이 아니라 절망을 이뤄진다

    키르기스스탄의 경우에는 그 5백만 명의 총인구 중에서는 약 10% 정도는 이주노동자가 되어 러시아나 카자흐스탄에서 상상 이상의 착취를 당하는 것입니다. 목구멍이 포도청인지라 아예 목숨을 걸고 미 제국 점령 하의 아프간에까지 가서 미 기지에서라도 일하는 지경이지요.(http://www.centrasia.ru/newsA.php?st=1199526420).

    그런데 굳이 아프간까지 안 가도 가족을 먹여살리느라 자기 목숨을 버릴 확률은 높지요. 러시아에서만 해도 범죄조직들에 의해서 인신매매 대상이 돼 명실상부한 노예가 되는 키르기스스탄 출신은 1년에 약 1천 명 정도이지요. 노예로 잡히기도 하지만, 스킨헤드로부터 단순 살인부터 생화장까지 당한 사람들도 많게는 수백명이 되고요.(http://www.ferghana.ru/article.php?id=4047)

    이러한 지옥을 타파하려고 민중들이 경찰의 조준사격을 무시하고 대통령궁을 향해 달려갔던 건 십분 이해되죠. 역시 혁명이란 사상으로 한다기보다는 절망으로 되어지는 것입니다. 잃을 게 없는 사람들이 궁지에 몰려 하는 게 혁명이죠.

    사실, 이와 같은 차원에서는 우리 운동권은 자본주의 세계체제에서 그래도 나름의 ‘중간적 착취자’가 이미 된 대한민국보다 차라리 키르기스스탄과 같은 모양으로 동북아의 최빈국이 된 북한을 주목할 필요가 좀 있어요.

    북한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장기적으로는 그 쪽에서의 부정부패의 만연과 ‘밑으로부터의’ 시장화는 언젠가 어떤 우발적인 민중 폭동을 충분히 촉발시킬 수 있을 것 같기도 하죠. 단, 합법적 야권이 있을 수 없는 체제 특성상 이 폭동이 체제의 전면적 파멸로 이어지지 않는 한 결국 국지화돼 진압될 수밖에 없을 겁니다.

    의미있는 부분은, 중국과 러시아 등지로 수십만 명의 이산인구가 합법, 비합법적으로 보내진 북한도 이제 키르기스스탄을 닮아가면서 ‘사람 수출’을 전문으로 하는 또 하나의 주변부 국가로서의 면모를 점차 띠는 것 같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북한 체제 붕괴’ 등등의 이야기를 믿으려 하지 않지만, "못살겠다"는 함성이 터져나오고 백성들이 몽둥이를 들고 죽기 살기로 권력에 덤벼드는 나라들은 대체로 오늘날의 북한과 유형적으로 흡사한 모습들이죠. 단, 북한에서는 대미, 대남 대립이 훨씬 더 강한 대민 규율화를 가능하게끔 만드는 것으로 봐야 합니다.

    그런데, 역사에서 – 러시아 10월 혁명 등의 소수 예외를 제하면 – 늘 그렇듯이 조준사격을 무시하고 몸으로 때웠던 사람들은 권력을 잡지 못하죠. 지금 과도기적 내각의 수반 오툰바예바 여사 같으면 주미 대사를 역임하는 등 경력이 화려한 관벌 출신이고, 나머지 각료들도 거의 다 기득권층의 소수파 정도밖에 안돼요.

    민중은 몸을 버리면서 공의와 최소한의 항산을 구하려 하지만, 권력 게임은 정당의 명망가 등이 하는 것이죠. 민중 정당이 없는 이상 그렇다는 것이죠. 물론 민중/노동자 정당이 있다 하더라도 1917년 이후의 러시아처럼 결국 독점적으로 집권하여 신흥 지배계급의 요람이 될 수 있지만, 그래도 그 과정에서 근대화가 도약적으로 촉진되고 노동계급의 위치가 비교적으로 승격되는 등 긍정적 효과들도 발생되긴 하죠.

    민중 정당이 준비해야 하는 것들

    그러나 노동자들을 위주로 건설된 당이 없다면, 내포적인 근대화라든가 노동계급의 보다 안정적 위치 획득, 복지 증강 등을 꿈꿀 것도 없어요. 결국 이 상태에서 대퉁령궁을 백번 공격하든, 수백수천 명의 희생자를 내든, 다음날 아침부터 ‘사람 수출’을 위주로 하는 현실이 이어질 뿐입니다. ‘탈출구’는 없을 거에요.

    제가 – 정치 자체를 개인적으로 꽤나 혐오하면서 – 진보신당의 당세 확장과 민노당 등 노동계급 본위의 제세력과의 전략적 연합을 간절히 바라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어요. 머지 않아 대한민국에서도 부동산 거품이 빠지는 등 꽤나 심각한 ‘동요’들이 예상되는데, 민중 정당이 이미 준비된 채 사태를 주도하지 않(못)으면 결국 영남지벌과 호남지벌 교체 이상의 효과는 없을 걸요. ‘쿨’하게 들리지 않는 단어지만, ‘노동자 정당’은 여전히 필요하단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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