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경덕, 은둔의 철학자
        2010년 04월 08일 11:11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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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도삼절

    조선 후기 실학자인 이긍익이 쓴 <연려실기술>에 이런 일화가 실려 있다.

    황진이는 개성에 살던 여자 소경의 딸이다. 성격이 쾌활하였고 거문고를 잘 탔으며 노래를 잘 불렀다. 산과 물을 찾아 놀기를 좋아하여 풍악산, 태백산, 지리산을 두루 다니다 금성(지금의 나주)에 이르렀다.

    마침 고을의 원님이 잔치를 베풀어 감사를 대접하고 있었다. 기생들이 가득히 앉아 있었는데, 황진이는 헤어진 옷을 입고 세수도 제대로 안한 채 윗자리에 앉아 태연히 이를 잡으며 거문고를 타고 노래를 불렀다.

    황진이는 평소 화담 서경덕을 사모하여 거문고와 술을 들고 화담의 집을 찾아가 놀곤 하였다. 황진이는 말하기를 “지족선사는 30년간 벽을 보고 수도를 하였다 하지만 나에게 무너졌다. 그런데 화담 선생은 여러 해 동안 친하게 지냈지만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다. 이 분은 진실로 성인이시다.”

    일찍이 황진이가 화담에게 "송도에 삼절이 있습니다." 하고 말했다. 화담이 "삼절은 무엇이냐?" 하고 물으니, 황진이가 "박연폭포와 선생님과 저입니다." 하고 답했다. 이에 화담이 크게 웃었다.

       
      ▲ 소리극 <황진이>에서의 서경덕과 황진이 (사진=국립국악원)

    송도삼절(松都三絶). 송도(지금의 개성)의 빼어난 것 세 가지라는 말이다. 박연폭포와 서경덕 그리고 황진이를 그렇게 부른다. <연려실기술>에 실린 이 일화는 서경덕의 인품을 잘 보여준다.

    서경덕(1489년~1546년)는 조선 11대 임금 중종 때 사람이다. 이 시기는 정치적 격변이 일어났던 시기이다. TV 드라마의 소재로도 자주 등장했던 시대이다. 중종의 부인인 문정왕후, 문정왕후의 동생인 윤원형의 첩 정난정 등이 드라마 소재로 자주 등장하였다.

    중종은 사림파인 조광조를 등용하여 정치 개혁을 추진하였다. 조광조는 덕치를 근간으로 하는 왕도 정치의 실현을 주장하여 왕에 대한 교육을 중시하였다. 또한 당시의 집권 세력인 훈구파의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개혁정책을 내놓았다. 현량과를 실시하여 사림파를 대거 합격시켰고, 훈구파의 공훈을 삭제하는 조치를 취하였다.

    그러나 중종은 자신을 계속 교육시키려는 조광조에 대해 염증을 냈다. 훈구파들은 자신들의 공훈이 삭제된 것에 불만을 품고 계략을 꾸몄다. 결국 1519년 기묘사화가 일어나 조광조는 제거되었다. 중종은 훈구파에 대한 견제를 위해 사림파가 필요했고, 그 수장인 조광조를 등용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조광조가 그 이상의 것을 시도하려 하자 제거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서경덕은 일체의 벼슬을 하지 않았다. 조광조가 거듭 요청했음에도 그는 거절하고 은둔생활을 하였다. 또한 그의 은둔생활은 자신의 철학과 연관된 것이었다.

    격물을 통해 이치를 깨닫다

    서경덕은 농사를 지으며 가난하게 살았다. 그는 후일 "나는 스승을 얻지 못하여 학문을 익히고 깨닫는데 힘이 들었다."고 말했다. 독학을 통해 자신의 학문을 이룩한 것이다. 그래서 그의 학문을 ‘자득지학(自得之學)’, 즉 스스로 터득한 학문이라 부른다.

    그가 독학을 한 데에는 집안이 가난하여 스승을 구하지 못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14세 때에 선생을 정하고 공부를 하였는데, 선생이 <상서>의 기삼백(朞三百) 대목을 설명하지 못하였다. 이때부터 그는 선생을 두지 않고 홀로 독학을 하였다고 한다. 18세 때 <대학>을 읽다가 ‘격물치지(格物致知)’에 이르러 학문의 방법을 깨달았다고 한다.

    이때의 감격을 그는 "우리가 학문을 하는 데 있어 먼저 격물을 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고 말했다. ‘격물치지’. 알기 위해서는 사물을 연구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만약 이백이나 두보의 시에서 시구를 찾는 버릇이 여전히 있다면, 소씨(昭氏)의 거문고와 같지 않겠는가. 시가 마음을 즐겁게 하면서 그 뜻을 잃지 않는다면 올바른 태도가 아니겠는가. – 서경덕, <송심교수서>

    소씨의 거문고는 <장자>에 나오는 얘기이다. 소씨가 거문고를 타니 제대로 나오지 않는 소리가 있고, 거문고를 타지 않으니 소리가 제대로 나온다는 말이다. 스스로 연구하여 시를 짓지 않고, 이백이나 두보의 시구를 모방하는 자세에 대한 비판이다.

    격물, 즉 사물에 대한 연구. 이것이 서경덕의 학문하는 방법이었다. 그는 자신의 방에 천지만물의 이름을 써 붙여 놓고, 그것을 하나하나 연구하였다. 그리하여 3년을 연구한 끝에 그는 "나는 20세가 되어서야 한 번 저지른 실수를 두 번 다시 저지르지 않게 되었다"고 자부심을 가지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

    그의 연구는 주로 주변 자연 환경에 집중되었다. 종달새는 왜 나는 걸까, 바람은 왜 부는 걸까. 이러한 것들이 그의 주된 연구 주제였다. 그는 연구를 통한 발견에 기쁨과 자부심을 느꼈다. 자신이 도달한 경지에 대해 이렇게 시로 썼다.

    눈에는 발을 드리우고 귀에는 문을 닫았지만,
    솔바람 시내 소리는 더욱 뚜렷하기만 하구나.
    나를 잊고 물(物)을 물대로 보게 되니,
    마음이 어디에 있든 절로 맑고 따뜻하구나.
    – 서경덕, <무제>

    나를 잊고 물을 물대로 본다는 것은 물아일체(物我一體)의 경지를 말한다. 이런 경지에 다다르니 눈귀를 가려도 바람 소리, 시내 소리를 뚜렷하게 들을 수 있다는 얘기이다. 서경덕은 자연에 대한 탐구를 통해 물아일체에 이르렀음을 말하고자 한 것이다.

    우주만물의 근원은 기(氣)

    서경덕은 오랜 연구를 통해 무엇을 알아냈을까. 다음의 시를 보자.

    바람이 지나간 뒤 달은 밝게 떠오르고,
    비온 뒤 풀 냄새 향기롭다.
    하나가 둘을 타고 있는 것을 보니,
    물(物)과 물이 서로 의지해 있구나.
    오묘한 낌새를 꿰뚫어 얻어,
    방을 비우고 앉으니 빛이 생겨난다.
    – 서경덕, <천기>

    바람이 불고 난 뒤에 달이 밝고 비가 온 뒤 풀 냄새가 향기롭다는 것은 서경덕이 자연을 관찰한 결과이다. 그것은 물과 물이 서로 의지해 있음을 말한다. 하나가 둘을 타고 있다는 것에 대해 서경덕은 <원리기>에서 "하나의 기(氣)가 음양의 두 기를 가지고 있어서 음양의 두 기가 하나의 기에서 나타나는 원리"라고 말한다. 이런 오묘한 이치를 알게 되니, 방을 비워도 즉 마음을 비워도 진리를 얻게 된다는 얘기이다.

    서경덕이 얻은 이치는 기에서 물이 생겨났고, 물과 물은 서로 의존해 있다는 사실이다. 그는 자신이 밝혀낸 진리에 대해 <태허설>에서 재차 설명을 한다.

    태허는 비어 있으나 비어 있지 않다. 태허는 곧 기이다. 태허는 끝이 없고 기 또한 끝이 없다. – 서경덕, <태허설>

    태허와 기는 만물의 근원이다. 시작도 없고 끝도 없다. 태허와 기는 같은 것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태허인 기는 만물을 만들어낸다. 그러면 어떻게 만들어내는가.

    기이하고 기이하다. 묘하고 묘하다. 갑자기 튀어 나오고 홀연히 열린다. 누가 그렇게 하였는가. 스스로 그렇게 한 것이다. – 서경덕, <태허설>

    기의 운동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기는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스스로 운동한다는 얘기이다. 기는 만물의 근원 즉 만물의 재료이자 만물의 창조자 즉 운동의 주체이다. 기의 역할과 작용에는 인간의 정신도 포함된다. 이 점에서 기는 유물론에서 말하는 물질과 다르다.

    사람과 자연이 모두 기로 이루어져 있으므로, 서경덕은 자연의 연구를 통해 물아일체의 경지에 다다를 수 있었다. 물아일체를 주장하는 철학에 도교가 있다. 서경덕은 도교로부터 몇 가지 아이디어를 차용하였다. 예를 들어 태허는 장자가 사용한 개념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철학과 도교 철학의 차이를 분명하게 밝혀놓았다.

    노자는 유에서 무가 생겨난다고 말하는데, 이는 태허가 곧 기라는 것을 모르고 한 말이다. 태허에서 기가 생겨난다면 기가 생겨나기 전에는 기가 없는 것이니, 태허는 죽은 것이다. 태허에서 기가 생겨난다면 기는 시작과 끝이 있는 한정적인 것이 된다. – 서경덕, <태허설>

    태허와 기를 분리하는 도교 철학에 대한 비판이다. 이 둘을 구분하면 만물의 근원과 운동에 대해 제대로 설명할 수 없게 된다. 태허는 만물의 근원이고 기는 운동인데, 기 이전에 또 다른 운동이 있어야 한다는 것으로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기의 무한성은 부정되고, 기인 태허 역시 부정되어 버린다는 얘기이다.

    생성과 극복의 통일

    서경덕의 철학은 김시습의 제기한 기일원론을 체계화한 것이었다. 김시습은 만물의 시작과 끝이 음과 양이 모이고 흩어짐에 따라 생긴다는 주장에 머물렀다. 서경덕은 이를 체계화하여 만물의 구성과 생성 원리를 밝혀놓았다. 다음의 설명을 보자.

    태허가 움직여 양을 낳고 조용히 하여 음을 낳는다. 기가 모여 두텁게 쌓인 것이 하늘과 땅과 사람이다. 모여 있던 사람의 기가 흩어지는 것은 몸과 영혼이 흩어지는 것이다. – 서경덕, <태허설>

    하늘과 땅 그리고 인간이 어떻게 생겨나고 어떻게 소멸하는지를 밝혔다. 사람이 태어나고 죽는 것은 기가 모이고 흩어지는 것에 불과하다. 서경덕은 기의 운동 법칙 또한 밝힌다.

    태허는 하나이지만 그 속에 둘을 포함하고 있다. 이미 둘이기에 그것은 열리고 닫히고 움직이고 멈추고 생성하고 극복한다. – 서경덕, <이기설>

    또한 그는 생성과 극복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하나는 둘을 생성하지 않을 수 없고 둘은 능히 스스로 극복한다. 생성이 극복이고 극복이 생성이다. 기가 미세하게 움직이든 크게 움직이든 생성과 극복이 있다. – 서경덕, <이기설>

    만물이 생겨나고 발전하는 데 외부의 힘은 필요하지 않다. 내부에서 스스로 생성과 극복의 운동을 한다. 생성과 극복. 요샛말로 바꾸어 놓으면 조화와 투쟁이다. 이런 두 가지 운동과 그것의 통일을 통해 만물이 생성, 유지, 발전을 하여간다고 서경덕은 말한다. 조화만을 강조하는 입장도 투쟁만을 강조하는 입장도 반대한다. 원효의 화쟁사상과 상통하는 얘기이다.

    서경덕의 철학은 정통 성리학과 대치된다. 성리학은 이(理)와 기(氣)를 가지고 세계와 자연과 인간을 설명하는 철학이다. 이 둘 중에서 성리학은 이치를 말하는 이를 더 중시한다. 이는 귀한 것이고 기는 천한 것이다. 서경덕은 이런 구분을 부정한다.

    이는 기를 주재한다. 주재한다는 말은 바깥에서 주재한다는 말이 아니다. 이는 기보다 선행할 수 없다. 만약 선행한다면 기를 유한한 것으로 보는 것이다. – 서경덕, <이기설>

    이는 기에 포함된 것에 불과하다. 이를 앞세우게 되면 태허와 기를 분리하는 도교와 마찬가지로 만물의 생성과 운동을 설명할 수 없게 된다는 얘기이다. 서경덕은 이를 폐기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의 독자성은 인정하지 않는다. 다만 그것은 기 속에 포함되어 있는 것에 불과하다. 어디까지나 기가 중심인 것이다.

    은둔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

    서경덕은 자신이 발견한 원리로 자연 현상을 설명하였다. 종달새는 왜 나는가. 떨어지려는 음기와 솟아오르려는 양기가 상호작용함으로써 종달새는 날아간다고 하였다. 부채를 부치면 왜 바람이 부는가. 부채가 공간 가득히 차 있는 기를 밀어내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서경덕은 여기에서 멈추어 선다. 그는 <송심교수서>에서 "군자가 학문을 소중히 여기는 까닭은 학문으로써 그치는 것을 아는 데 있다"고 말한다. 학문으로서 그친다는 말은 사회 현실에 개입하지 않는다는 얘기이다. 실제로 그는 일체의 벼슬을 하지 않았다.

    또한 그는 자신의 철학으로 인간과 사회에 대해 설명하는 데로 나아가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철학이 당대에 미칠 파장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사회 현실에 대해 입을 닫고 철저히 은둔자 생활을 하였다.

    그는 제자들에게 이런 유언을 남겼다. "학문의 대부분은 성현들이 밝혀놓았기에 나는 그 분들이 미처 밝히지 못한 부분을 밝혀내려 했다"고. 이것은 자신의 철학이 미칠 폭발력을 알고 있었기에 그것을 최소화해 보려는 의도된 발언이라 할 수밖에 없다.

    그가 자신이 철학에 대해 얼마나 조심스러웠는지는 그의 주요 철학 저작인 <원리기>, <이기설>, <태허설>, <귀신생사론> 등을 죽음에 임박하여 썼던 것에서도 알 수 있다. 그는 성현들이 밝히지 못한 부분을 밝힌 것뿐이라고 말했지만, 실제로는 자신의 철학이 정통 성리학을 완전히 뒤집어놓는 것임을 잘 알았다.

    서경덕은 성현의 글을 따르지 않고 스스로 사물을 연구하여 자신의 철학을 세웠다. 그는 스스로 우주의 비밀을 풀었다고 자부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자신의 철학을 세상에 내놓는 데는 소극적이고 신중하였다. 그가 살았던 시대가 아직 그의 철학을 받아들일 준비가 안 되어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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