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명박 정부에 이 영화를 권한다
    60년전 노근리와 천안함 닮은 꼴
    By mywank
        2010년 04월 06일 01:03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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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화 <작은 연못> 포스터

    고즈넉한 산골 마을은 일찍 저문다. 어둠이 내려앉은 산길에 눈이 익은 마을 사람이 한 무리의 경찰을 이끌고 앞장서서 채근한다. 어서 가서 사람 잡으라고. 그들이 찾아갈 집에서는 갓난아이를 품에 안은 젊은 아낙이 남편에게 아무래도 불안하니 도망가라고 한다.

    남편이 태연하려 애쓰며 대답한다. 시키는 대로 연맹에도 가입했는데 뭐 별일 있겠느냐고. 그러나 막상 우르르 몰려오는 발자국 소리가 가까워올수록 눈빛이 흔들리고, 마침내 급하게 담을 넘어 산속으로 달아난다.

    이웃 사람이 마치 저녁 마실이라도 온 양 집에 있느냐고 부를 때, 남편이 집에 없다는 것을 알아채고는 뒤에 숨 죽이고 서있던 경찰들이 우격다짐으로 집 안팎을 뒤질 때, 나라가 시키는 대로 보도연맹에도 가입하고 앞으로 가족이 함께 안전하게 살 수 있으리라던 기대는 무너진다. 이 깊은 산골 마을은 충청북도 영동군 황간면 노근리, <작은 연못>은 여기서 이렇게 시작한다.

    스크린에 옮겨진 ‘노근리 양민학살 사건’

    어느 한 가족이 밤사이 생이별을 하고, 멀리서는 전쟁이 터졌다지만 첩첩산중에 들어앉은 마을 사람들에게는 별 소식이 없다. 휴교령이 내려졌으니 아이들과 선생님은 여전히 학교에 모여 수업 대신 서울에서 열리게 될 동요 경연대회에 나갈 연습을 하고, 마을 어귀 평상에서는 어르신들이 바둑을 두며 오가는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고, 산비탈 밭에서는 한참 바쁜 농사철이라 땡볕 아래 땀흘려 일하고 있다. 그러다 읍내 나들이 다녀오는 사람에게 전쟁 소식을 물어보면, 대통령이 말씀하시길 국군이랑 미국이 잘하고 있으니 걱정말라고 했다지만 자꾸 피난민도 늘고 슬슬 걱정스럽다.

    그러다가 느닷없이 미군 지프가 돌아다니며 확성기에 대고 일본말로 요란하게 떠들어댄다. 마을이 작전지역이 되었으니 모두 떠나라고 몰아친다. 어디로? 무조건 다른 곳으로. 알고 보니 안심하라던 대통령과 정부 각료들은 벌써 한강다리 끊어놓고 부산으로 피난 가버린 뒤다. 국군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고, 말도 통하지 않는 미군들만 나타나 일제 때 순사질했을 군속을 앞세워 자꾸만 피난길을 재촉한다.

       
      ▲ 영화의 한 장면

    이렇게 피난가던 노근리 인근 마을 주민 수백 명이 미군의 무차별 총격과 폭격으로 죽어간 사건이 <작은 연못>의 배경이 되는 노근리 양민학살 사건이다. 6·25전쟁 발발 직후인 1950년 7월, 충청북도 영동군 황간면 노근리 철길과 철길 아래 쌍굴에서 정부와 미군의 채근을 받아 피난가던 인근 마을 주민 수백 명이 미군의 무차별 총격과 폭격으로 죽어갔다.

    미군이 빨갱이로부터 자신들을 안전하게 보호해주리라 믿었던 피난민들은 불현듯 퍼붓는 미군의 폭격에 쫓겨 철길 아래 쌍굴다리 안쪽으로 몸을 피하지만, 그 쌍굴 터널 안에 갇힌 채 삼일 낮 삼일 밤 동안 무려 12만 개라는 어마어마한 총탄 세례를 받아야했다. 자식을 품에 안은 엄마도, 아직 젖을 떼지도 못한 어린아이도, 기력이 쇠한 백발노인도 상관없이. 5백여 명의 민간인 가운데 겨우 살아남은 이가 겨우 스물다섯 남짓. 그 무참한 총격은 전선이 밀려 미군이 퇴각하고서야 멈추었다.

    Kill them all

    피난민 사이에 민간인으로 위장한 적군이 있다는 미확인 정보가 원인이었다. 미군에게 내려진 명령은 “Kill them all”, 전원 사살 명령. 이 사건이 세상에 처음 알려지게 된 것은 1960년 민주당 정권 당시 유족들이 미군 소청심사위원회에 소청을 제기하면서였다. 당시 미군측은 소청을 기각해버렸고, 이 사건은 그대로 묻혀졌다가 1994년, ‘노근리양민학살대책위원회’ 위원장 정은용이 이 비극적인 사건을 담은 《그대 우리의 아픔을 아는가》라는 실록 소설을 출간하면서 다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 영화의 한 장면

    그 후, 한겨레 신문과 월간지 말, MBC 시사 프로그램 등이 사건에 대해 다루었지만 자세한 진상이 밝혀지게 된 것은 이 나라 정부가 관심을 가졌기 때문이 아니라 일이 벌어진 지 50 년이 지나고서야 미국이 기밀해제 시한을 넘긴 문건을 공개하면서였다.

    1999년 AP 통신이 기밀해제된 당시 군 작전명령 중에서 ‘피난민들을 적군으로 대하라’라는 미군 제1기갑사단과 미군 육군 25사단 사령부의 명령서 등 미군의 공식문건과 참전미군 병사들의 증언 등을 바탕으로 보도한 기사가 그해 퓰리처상을 받으면서 비로소 미육군성은 이 사건에 대한 조사를 시작했고, 한국 정부는 2004년에야 겨우 ‘노근리사건 희생자 심사 및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을 제정했지만 아직도 보상과 위로는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송강호, 문소리 등 전원 노개런티 출연

    이런 비극적 역사를 기억해 잘못을 되새기고, 유가족과 피해자를 위로하려는 영화에 대해 사회의 관심도, 국가의 지원도 없었다. 그래서 송강호나 문소리같은 당대의 스타급 배우를 비롯해 영화에 참여한 142 명의 연기자들이 전원 노개런티로 출연하고, CG나 특수효과를 맡은 업체들과 229 명의 스탭들도 모두 현물투자라는 방식으로 제작에 참여했다.

    이렇게 어렵사리 만든 이상우 감독의 <작은 연못>이 개봉을 앞두고 영화 프린트를 관객들이 직접 구매해 배급에 동참하는 자발적인 필름 구매 캠페인을 위한 시사회를 열고 있다. 이 캠페인에 힘을 보탠 관객이 3,000 명을 넘어섰다.

    <작은 연못>은 무능하고 정직하지 못한 정부에 대한 믿음이 어떤 참극을 불러 오는지 보여준다. 역사를 거울삼아 반성하고 잘못을 바로잡으려는 세상이 아니기에 <작은 연못>은 제작에서 배급까지 너무 오랜 세월이 걸렸고, 상영 프린트 한 벌을 만들 비용조차 마련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 영화의 한 장면

    대부분의 상업영화들이 스타들을 연예오락 프로그램에 내보내고, 협찬사와 홍보마케팅을 벌이느라 시사회를 여는 것과 달리, <작은 연못>의 시사회는 이 영화를 다른 많은 사람들과 함께 볼 수 있는 프린트 필름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열리고 있다.

    고 박광정이 자신의 연기가 스크린에서 펼쳐지는 것을 보지 못하고 세상 떠난 지 일주기가 되도록 <작은 연못>은 상영관을 찾지 못해 창고에서 묵혀져야 했다. 노근리 피해자와 유가족은 이렇게 영화 제작과 개봉이 늦춰지는 동안 또 얼마나 가슴앓이를 했을 것인가? 영화 <작은 연못>은 가르쳐준다. 이 사건을, 이 영화를 밀쳐내려던 현실이 바로 천안함을 둘러싼 진실도 묻어버리려는 현실이라고.

    의미는 있지만 재미없는 영화?

    대통령은 자기 말을 믿으라고 하고, 군은 안전을 책임지겠노라고 한다. 그래서 대통령과 군의 명령에 따라 길을 나섰다가 수많은 생목숨이 영문도 모르는 채 죽어갔다. 어쩌다 그런 기막힌 일이 벌어졌는지를 밝히고자 해도 정부와 군대는 사실을 덮어버리려 하고, 원통하고 절통한 피해자와 유가족의 목소리를 틀어막으려 한다. 얼마전 갑자기 침몰된 천안함과 그 천안함을 찾으러 나섰던 금양호의 잇단 침몰이 그렇다. 정부와 군대가 사건 경위에 대해 발표를 할수록 의혹은 점점 불어나고, 불신과 분노가 커져간다.

    이상우 감독이 연출한 <작은 연못> 언론배급 시사회장에서 영화 상영이 끝나고 기자 간담회가 시작되자 첫 번째로 질문한 기자는 이렇게 말했다. “의미는 있지만 재미는 없는 영화인 것 같습니다. 굳이 이런 영화를 만드신 이유는?” 영화를 보고서도 그 이유를 모르겠다면, 영화를 보는 것이 오로지 재미 때문이라고 생각한다면 그대는 이 영화를 보지 않는 게 좋다.

    그러나 나는 믿는다. <아바타>의 아찔한 시각적 쾌감 못지않게 <작은 연못>의 예쁜 붕어 두 마리가 커다란 고래가 되어 하늘을 헤엄치는 모습을 보는 것도 중요하다고. 어떻게 아이들이 그 노래를 마치지 못했는지를 기억하고, 다시는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영화를 빌어 힘을 보탤 수 있다고.

       
      ▲ 영화의 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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