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베네수엘라 혁명은 새 유토피아의 제시
        2010년 04월 05일 10:13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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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네수엘라의 혁명이 시작된 지 꽤 세월이 흘렀다. 그리고 현재 국면에서 베네수엘라는 어려움이 많다. 콜롬비아에 세워질 미군기지 때문에 안보의 두려움을 가지고 있고 최근의 가뭄에 의한 수력발전량의 부족으로 제한 송전까지 하고 차베스 진영 안에서는 일부 내부 이탈까지 일어나고 있다.

    미국과 대립각을 세우고 있는 베네수엘라 혁명정부가 석유에 의존하는 경제구조에서 벗어나 21세기에 걸맞는 비 석유의 생태적 에너지 구조 전환에 대한 비전이 없다면 결국 석유사회주의의 한계로 인해 혁명의 미래 선도적 의미가 실패할 것이라는 이정필의 해석은 어떻게 보면 베네수엘라 정부의 아킬레스 건을 건드린다는 점에서 날카롭다.

    이에 대해 정면의 반론을 제시하는 대신 다른 각도에서 필자의 주장을 전개하고 싶다. 다만 베네수엘라 정부가 농업 및 국내적 자원과 과학기술 테크놀로지를 활용한 내수기업 발전이 중요시되는 ‘내발적 발전 전략’을 통해 비 석유 산업부문의 발전과 특히 농업의 소농, 생태적 유기농업의 발전을 중요한 정책 수단으로 삼고 있다는 점만을 밝히겠다. 그러나 그런 전략은 매우 장기적인 과제가 될 것이다.

    [2007~2013 국가경제, 사회발전 계획]에 의하면, 점진적으로 ‘생산수단의 사회적 소유제’에 중점을 두어 이를 발전시키고 석유 수출의 재정수입을 이용한 국내시장의 확장과 강화, 특히 ‘농업혁명’을 적극 추진하는 것으로 되어있다. 농업혁명은 생태적 에너지 전환의 비전이 아닌가?

    베네수엘라에게 지구 에너지전환전략 내라는 것은 이상주의

    우선 석유사회주의라고 호명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현 단계에서 그렇게 부를 수 도 있는 맥락을 충분히 이해하지만 자칫하면 라틴 아메리카 좌파들의 상징처럼 되어있는 베네수엘라 체제를 지나치게 현상의 표면에 집착하여 평가하는 것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거대한 지구의 생태문제 해결의 비젼을 역사적으로 사회 경제적 구조의 기본 축으로 석유에만 의존해온 하나의 나라에게 당장 구체적인 체제 전환의 대안적 에너지 전략을 내놓으라는 것은 너무 진보를 추상적으로 총체화 일반화시키는 이상주의적 태도이지 않을까?

    미 소 냉전시기에도 소련은 미국과 대립적 공존구도를 가졌다. 20세기 현실 사회주의의 실험은 지나친 관료주의, 억압적인 국가중심 성장주의와 비민주성 때문에 실패하였다. 지금의 자본주의 체제는 신자유주의 체제이다. 좌파정부라면 바로 그 신자유주의체제를 반대하고 그것을 극복하려는 꿈, 유토피아, 비전을 걸고 거대담론을 제시하고 구체적인 전략을 실천할 것이다.

    바로 그 선두 주자가 베네수엘라이다. 그러므로 미국과 대립각을 세우는 것은 당연하다. 무엇보다 현재의 베네수엘라 정부는 라틴아메리카의 역사적, 사회적 구조를 변혁시키려는 흐름의 선두에서 노력하고 있다.

    우리 사회의 글발있는 좌파 이론가들도 신자유주의 체제를 통렬히 비판하면서도 시원한 대안은 못 내놓고 있다. 개중에는 개인들의 내면에 있는 ‘이명박’을 깨닫고 스스로 영성적으로 성찰하자고 한다. 그러나 현재까지의 사회과학 담론에 의하면 개인들의 이성적 인식을 통해 사회가 변혁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가?

    깨달음과 영성으로 헤쳐나갈 수 있나?

    부르디외는 역사적, 사회적 조건이 어떤 계급 집단에 속한 개인들의 육체 속에까지 무의식적으로 각인되어 들어온다고 하였다. 그것이 아비투스 개념이다. 우리 시대의 역사적, 사회적 조건은 신자유주의 체제이다. 이 체제는 단지 FTA체체로만 상징되지 않는다. 무엇보다, 언론과 지식을 통한 대중에의 설득과 동의를 구하며 대중으로 하여금 다른 대안이 없다는 것을 공포심에 절어 인정하게 만든다.

    그것을 부르디외는 상징적 폭력이라고 하였다. 바로 우리사회의 지나친 경쟁과 불안 그로 인한 광적인 교육열이 그 결과이다. 우리는 모두 공포와 불안의 아비투스에 무의식적으로 젖어있다. 그러므로 체제의 변혁가능성은 개인의 의식이 아니라 사회적 구조 조건 자체의 변혁이다.

       
      ▲ 대중 앞에 선 차베스

    그것이 베네수엘라의 경우 바로 1989년의 카라카스 대중 소요를 시발로 차베스와 그 추종세력이 집권하게 된 맥락이다. 에콰도르의 경우는 1990년에 그 당시 신자유주의 정부의 한가운데에서 그 사회의 가장 아래에 있는 원주민들이 대규모 사회운동을 통해 사회적 조건을 변혁하는 움직임이 시작되었고, 2007년에 베네수엘라 정부와 비슷한 성향을 가진 꼬레아 정부가 집권한다.

    볼리비아의 경우도 그 수순은 마찬가지다. 이들 정부들은 신자유주의 반대를 외치는 ‘대중의 요구’에 응답한 것뿐이다. 그러므로 에르네스토 라클라우가 지적하듯이 포퓰리즘 정부이면서 동시에 민주주의 정부이다.

    아르헨티나도 2001년 12월의 극한적 경제위기속에서 실직한 노동자들과 중간계급의 ‘대중의 요구’에 페론당의 좌파인 키치너 정부가 응답한 것이다. 아르헨티나의 경우도 사회운동에 의해 사회의 구조적 변혁이 일어나고 있다.

    비록 그 속도는 위의 나라들보다 느리지만 아르헨티나에서는 오랫동안 페론당이 정치적 헤게모니를 쥐어왔고 그에 대항하는 라디칼당이 양립되어 있었다. 그런데 라디칼당은 거의 궤멸되다시피 약화되었고 페론당은 서너 개의 분파로 분열되어 있고 최근 제 3의 중도좌파 정당이 부상하고 있는 등 정치사회의 변혁이 서서히 이루어지고 있다.

    브라질의 룰라정부도 마찬가지다. 대중의 기본적 생존권을 지키기 위해 여당인 PT에서 ‘기본소득제’를 통과시키지 않았는가? 기본소득제는 아르헨티나의 학자들도 주장하고 있다.

    21세기 사회주의와 볼리바리안 혁명

    21세기 사회주의라는 호칭은 바로 20세기 현실사회주의의 비민주성을 비판, 거부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주민평의회’를 중심으로 하는 ‘주민이 주인공이 되어 참여하는’(una democracia participativa y protagonista) 급진적 민주주의의 실험이 진행 중이다.

    그러면 볼리바리안 혁명이란 무슨 의미일까? 두 가지 중요한 볼리바르의 사상이 있다. 하나는 가장 가난한 사람들도 포용하려는 사회적 연대의 사상이고 다른 하나는 라틴 아메리카가 미국을 배제하고 통합하려는 것이다.

    시몬 볼리바르가 단순한 반미주의자라서? 아니다. 그의 개인적 꿈속에는 몇 백년간의 라틴아메리카 대중들의 꿈이 녹아있다. 바로 공동체가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다. 라틴아메리카의 원주민 문화가 그 원형인데 박제된 것이 아니라 현재도 생생하게 살아있다. 그 핵심은 강한 사회적 연대를 가지는 구어문화이다.

    또한 라틴 아메리카에서 사회주의 실험이 20세기에 두 차례 있었다. 하나는 성공했고 하나는 실패했다 그 방식도 달랐다. 하나는 폭력적 방식이었고 다른 하나는 합법적, 대의 민주주의적이었다. 전자는 쿠바였고 후자는 칠레였다.

    21세기 사회주의라는 의미는 쿠바식을 배제하는 것이다. 물론 베네수엘라가 쿠바와 강하게 연대하고 있지만 혁명방식은 다르다는 점이다. 후자인 칠레의 경우, 실패의 원인분석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가장 큰 실패원인 중의 하나는 라틴 아메리카의 연대와 통합의 부족에 있었다. 21세기 사회주의 혁명은 바로 그 점을 겨냥하여 ALBA(미주 볼리바리안 대안협정-편집자 주)와 UNASUR(남아메리카국가연합-편집자 주)를 태동시킨 것이고 그 주역이 베네수엘라이다.

    그런데 여기서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이 같은 연대와 통합 움직임이 단지 라틴아메리카의 차원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상식적으로 18세기부터 시작된 근대성, 19세기부터 극성을 부린 식민주의의 거부는 물론이고 산업혁명 이후를 자본주의 체제의 시작으로 보는 관점을 거부하고, 이와는 전혀 다른 인식론적 관점에서 새로운 유토피아를 세우고 있다는 점이다.

    간단히 이야기해서 칼 폴라니의 『거대한 전환』의 비젼보다, 신자유주의 체제 극복을 위한 장치들이 더 정교하고 대담하게 장착된 비전이다. 근대성/식민성/자본주의는 모두 라틴 아메리카 정복이 시작된 16세기 초부터라고 비판한다.

    위의 삶의 방식을 이탈하기 위한 전략 포인트가 지식의 유럽 중심성으로부터의 탈피이다. 여기서 식민성은 위계 서열적, 권위적, 차별적 억압성을 말하고 하드웨어적인 식민주의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위에서 언급한 부르디외의 아비투스와 같이 우리의 내면에 무의식적으로 내장된 삶의 가치관, 태도를 말한다.

    근대성/식민성/자본주의에 대한 라틴아메리카의 개안

    바로 우리 사회의 핵심적 문제가 바로 이 식민성에 있다. 그 뚜렷한 징후가 지나친 유럽 아니 미국 중심적 선망의 태도이다. 이 식민성 때문에 비정규직 문제도 우리사회에서 유난히 심각하고 4대강 문제도 발원되는 것이다.

    이를 차베스 개인이 연구하여 담론을 제시하였다는 것이 아니라 1990년대 초부터 페루의 사회학자 아니발 끼하노를 필두로 일군의 라틴 아메리카 안디노 국가들의 인문, 사회과학 학자들이 새로운 비판이론을 제기한 것이다. 그런데 이 비젼이 차베스 정부의 정책의 장기적 방향과 서로 상응한다는 점이다.

    유럽의 경우의 프랑크푸르트 학파에 비견하는 새로운 거대, 비판 이론을 세우고 있는데 그 중의 뛰어난 학자는 안드레스 에스꼬바르와 보아벤투라 데 소사 산토스이다. 이들에 대한 소개는 글이 길어져서 다음으로 미루겠다.

       
      ▲ 지젝

    다만 생태적으로 새로운 삶의 방식의 전환을 주장한다는 점만 밝히겠다. 그리고 이 그룹은 아니지만 베네수엘라 혁명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는 학자가 슬라보에 지젝과 안토니오 네그리이다. 지젝은 이렇게 이야기한다.

    좌, 우, 자본주의, 사회주의 이데올로기의 오랜 딜렘마를 버리도록 만드는 제2의 근대성에 대해 무슨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하더라도, 중요한 결론은 공공의 정치적 통제를 받지 않는 사기업들이 우리의 모든 것, 우리의 생존까지도 위협할 수 있는 결정을 내리고 있는 현재의 세계화된 상황에서 유일한 대안은 일종의 생산과정의 직접적 사회화에 있다 – Zizek 2001, 『 고통스런 주체 』, 373 강조는 필자

    여기에서 언급하는 생산과정의 직접적 사회화를 추진하는 것이 베네수엘라의 조합운동과 노동자 공동경영 기업의 사례이다. 이 글의 제목에서 베네수엘라 혁명은 거대한 유토피아의 실천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길고 긴 꿈이라, 현재 차베스 정부의 구체적인 실험들이 중도에 실패할 수도 있고 중심세력의 배신도 얼마든지 현실적으로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그 실패의 평가는 유토피아 자체에 대한 해석과는 별도이다.

    그리고 네그리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사회운동과 정부는 지속적으로 상호인정과 단절의 과정으로 인식되고 있다. 이 과정은 끝나지 않는 과정이고 핵심 엔진은 제헌적 권력이다. 사회운동의 표현능력을 사회적 거버넌스의 형식으로 변혁시켜감을 의미한다. 이리하여 장기적으로 부르주아 자본주의 국가의 정부를 헤게모니적으로 해체하려는 것이다.

    민주주의를 건설하는 것은 이를 심화시키는 것이다. … 코뮌주의의 제안이다. … 결국 밑에서부터 지속적인 실험을 통해 일반론적이고 비효율적인 틀에 빠지지 않고 … 공동체적 가치( 교통, 생태, 교육, 안전, 도시문제 등)를 둘러싸고 다양한 힘들의 동시 출현이 효율적이고 다중에 의한 집단적 거버넌스의 새로운 형태를 실험한다. – Negri, 2006 『글로발』, 242~243)

    유럽과는 다른 ‘권리’

    이 형태가 베네수엘라의 주민평의회와 조합운동의 실험이다. 이어서 네그리가 인식하는 중요한 점은 라틴아메리카에서는 우리가 존중하는 유럽적 인권의 시각을 혁파하고 있다는 것이다.

    유럽의 경우는 인권에 대한 시각에 개인의 권리를 천부인권으로 생각한다면 라틴 아메리카 도시노동자의 상당수를 차지하는 세금도 안내는 가난한 비공식 노동자들(예: 무질서한 노점상)을 ‘공동체적 권리’로 인정하고 조합결성 등을 정부가 지원하고 있다.

    브라질에서 실시되는 기본소득제도 개인의 권리를 인권개념의 바탕으로 생각하는 유럽적 인식과 충돌한다. 즉, 공공과 사익의 구분이 무의미하다고 네그리는 언급하고 있다.

    개인적으로 베네수엘라 혁명에 대해 환호와 우려를 할 수 있지만 베네수엘라 혁명의 밑에 깔린 맥락에는 거대한 꿈과 유토피아가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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