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시습, 기일원론의 개척
    2010년 04월 01일 11:06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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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신 이야기가 중요한 이유

우리나라 최초의 소설은 무엇인가? 이 퀴즈에 대한 답은 어렵지 않다. 교과서에도 나오고, 시험 공부하느라 달달 외웠을 터, 김시습의 <금오신화>가 그 답이다. 그런데 <금오신화>를 읽어 본 사람, 손들어 보세요? 이 질문에 손을 드는 사람은 많지 않은 거 같다. 이게 우리의 교육 현실이지 않겠는가.

   
  ▲ 김시습

<금오신화>는 귀신 이야기이다. 이 소설을 쓴 김시습은 누구인가. 조선의 대학자 율곡 이이가 쓴 <김시습전>에 김시습의 어린 시절이 기록되어 있다. 그는 태어난 지 8개월 만에 글을 알았다고 한다.

당시의 글이란 한문을 말한다. 아직 말도 못 배운 나이에 한문을 깨쳤다는 얘기다. 이이는 이름이 시습이 된 유래도 밝혀놓았다. 『논어』의 첫머리는 ‘학이시습지’, 즉 배우고 또 수시로 익힌다는 말로 시작된다. 최치운이란 사람이 아이의 천재성을 생각하여 『논어』첫머리의 ‘시습’을 따서 이름 지어 주었다고 한다.

또 세 살 때 시를 지었고, 다섯 살 때 『대학』과『중용』을 다 읽었다고 한다. 세종이 이 소문을 듣고 시를 짓게 하였더니 금세 시를 지어 올렸다고 한다. 한 마디로 김시습은 장래가 촉망되는 신동이었다.

이런 신동이 귀신 이야기를 썼다는 게 예사롭지 않다. 조선 전기, 귀신 문제는 학자들 사이에 해명해야 할 문제 중 하나였다. 귀신 신앙이 민간에 뿌리 깊게 박혀 있었다. 이로 인해 수많은 폐단이 생겨났다. 귀신을 이용한 혹세무민으로 민심이 흉흉해지기도 하였다. 따라서 귀신은 처단되어야 할 대상이었다.

그런데 조선의 건국이념인 유교는 조상에 대한 제사를 매우 중시한다. 조상귀신을 소중히 모시라는 것이다. 여기에 이율배반이 생겨난다. 왜 어떤 귀신은 처단되어야 하고, 어떤 귀신은 소중히 모셔야 하는가.

김시습(1435년~1493년)은 <귀신>, <신귀론>, <금오신화> 등에서 자신의 귀신론을 펼친다. 이 중에서 <금오신화>에 수록된 <남염부주지>를 중심으로 김시습의 귀신론을 비롯한 다양한 귀신 이야기를 살펴보자.

박생이 묻는다.
"귀신이란 무엇입니까?"
염왕이 답한다.
"귀신의 귀는 가장 신령스러운 음기를 말하고, 신은 가장 신령스러운 양기를 말합니다. 두 기운이 조화를 이루어 만물을 만듭니다. 그래서 살아 있으면 사람이다 사물이다 말하고, 죽고 나면 귀신이라 합니다. 이치로 따지면 두 가지가 다르지 않습니다.

<남염부주지>에 나오는 귀신에 대한 정의이다.

귀신을 몰아내자

<남염부주지>의 주인공 박생은 경주 지방의 선비로 열심히 과거 공부를 하였지만 낙방하여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평소 한 가지 의문을 가지고 있었는데, 불교나 무당이 말하는 귀신 이야기였다. 당시 유교를 공부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진 의문이었다.

무당이 말하는 귀신론이란 사람은 죽어 귀신이 되고, 그 귀신은 산 사람에게 화와 복을 내리니 잘 모시라는 얘기이다. 사람뿐만 아니라 호랑이, 나무, 돌 등 모든 사물에도 귀신이 있으니 그 역시 잘 모시라는 주장이다.

먼 옛날부터 민간에는 이런 귀신 신앙이 있어서 돌을 보고도 치성 드리고 나무에도 제사지내고, 집안에 안 좋은 일이 생기면 굿을 하고 심지어 병이 나도 치료한다고 굿을 하는 풍습이 있었다. 불교는 이런 민간신앙을 흡수하였다.

문제는 민간의 귀신 신앙이 아름다운 풍속에 그치지 않고, 무당 등이 그것을 이용하여 치부하고 백성을 호도한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오래 전부터 그것을 퇴치하기 위한 노력이 있었으나, 성과는 크지 않았다.

<고려사>에 나오는 함유일이란 사람의 일화를 보자. 함유일은 묘청의 난이 일어났을 때 공을 세워 여러 가지 벼슬을 한 사람인데, 관직에 있을 때 귀신을 섬기는 신앙을 몰아내려고 노력하였다. 귀신을 모신 사당을 불사르고, 귀신이 나타난다는 연못을 메워버리는 등 여러 가지 일을 하였다. 그런데 귀신들이 임금의 꿈에 나타나 살려 달라 애원하니, 임금이 명령을 내려 사당을 다시 짓고 메우어진 연못을 복원하게 하였다.

이런 일도 있었다. 등주(登州, 오늘날의 함경남도 안변군)의 성황신이 무당에게 내려와 국가의 앞날을 잘 맞힌다는 소문이 돌았다. 이에 함유일을 보내 제사를 지내게 했는데, 탐탁지 않게 여긴 함유일은 제사는 지내되 절은 하지 않았다. 이 일로 인해 그는 파직 당했다. 귀신을 몰아내려다 오히려 자신이 쫓겨났다.

이 일화는 고려 시대 사회의 한 단면을 그대로 보여준다. 고려는 겉으로는 불교와 유교를 내세우는 나라였다. 그러나 민간에는 귀신을 섬기는 신앙이 널리 퍼져 있었고, 그 영향력 역시 만만치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조선은 이런 귀신 신앙에 대해 단호하게 대처하고자 하였다. 정도전은 <조선경국전>에서 귀신 신앙에 대해 "아첨이고 예가 아니며, 음란하기만 하고 복될 바 없으므로 금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무당은 아예 도성 안에 거주할 수도 없게 했고, 도성 안에서 굿을 하다 걸린 자에게는 곤장 1백 대의 형벌이 가해지기도 하였다.

우리의 주인공 박생은 유교를 공부한 사람답게 자신의 의문에 대해 스스로 답을 내린다.

천하의 이치는 한 가지뿐이다. 이치란 무엇인가? 본성이다. 본성이란 무엇인가? 하늘에서 타고난 것이다. 하늘은 음양과 수 ․ 화 ․ 금 ․ 목 ․ 토 5행으로 모든 사물을 만든다. 거기에 기를 불어넣어 형태를 만들고 이치를 부여해 준다. 이치란 부모 자식 사이에는 친하고, 임금과 신하 사이에는 의리가 있고, 부부나 어른과 아이 사이에도 지켜야 할 도리가 있음을 말한다. 이것이 우리가 말하는 도이다.

이치는 마음 속에서 실현된다. 이치를 따르면 어디에 가든 마음이 안정된다. 이치에 어긋나면 본성을 어기게 되고 마음이 황폐해진다. 이치를 따져 본성을 살펴 연구하고, 사물에 부딪쳐 지식을 얻고 이것을 이용한다. 인간의 삶 속에 이런 마음이 있어 본성이 실현된다.

모든 사물에 이런 이치가 있다. 욕심을 없애고 정성스런 마음으로 본성에 따르면 이치에 맞게 된다. 어떤 사물의 근원을 따져가다 보면 마침내 천하의 이치가 드러난다. 이치의 핵심은 마음 속에 있으니 이것으로 유추하면 천하와 국가에 대해서 알게 된다.

천하의 모든 사물과 비교해 보아도, 고금의 역사에 비교해 보아도 틀림이 없다. 어찌 귀신에 물어보아 현혹될 것인가. 선비가 해야 할 일이 이러한데 어찌 두 개의 이치가 있겠는가? 저들이 말하는 설명은 이단일 뿐이다.

요지는 간단하다. 자신의 마음이나 주변의 사물을 잘 살펴 연구하면 천하 만물의 이치를 알 수 있는데, 왜 귀신 이야기에 귀기울이냐 하는 말이다. 당대의 유교인 성리학의 인식론을 잘 보여준다.

조상귀신은 어찌해야 하는가

그러나 귀신 문제가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조상에 드리는 제사 문제가 남았다. 제사란 조상귀신을 모시는 행위이다. 이것에 대한 설명을 두고 입장이 나뉜다.

먼저, 당시 집권파의 입장을 대리하여 성현의 주장을 들어보자. 당시 집권파는 조선 건국, 이방원의 쿠데타, 수양대군의 쿠데타에 공을 세워 권력을 잡고 있던 세력으로 ‘훈구파’라 불린다.

성현(1439년~1504년)은 <부휴자담론>에서 귀신 문제를 다룬다. 그는 귀신이 있느냐는 질문에 귀신은 있다 하고 답한다. 귀신에 제사지내면 이로움이 있느냐는 질문에는 이로움이 있다 하고 답한다. 단 귀신의 종류가 많으니 제사지내야 할 귀신을 가려내야 한다고 덧붙인다. 제사지내지 않아야 할 귀신을 나열하는데, 주로 무당과 불교에서 섬기는 귀신들이다.

그러면 귀신이 사람에게 화와 복을 내릴 수 있는가. 성현은 그럴 수 없다고 답한다. 화와 복은 하늘이 내리고 귀신은 그 일을 도울 뿐이라고 말한다.

성현의 주장에 따르면, 귀신은 존재한다. 그러나 제사를 지내야 할 귀신을 가려야 하고, 귀신이 화와 복을 내릴 수 있다는 주장은 잘못된 것이다. 이러한 그의 주장은 불교와 무당의 귀신은 제사에서 제외하고, 귀신이 화와 복을 내린다는 민간신앙을 배척한 점에서는 정통 성리학의 입장과 맥을 같이한다. 그러나 다양한 귀신의 존재를 인정했다는 점에서는 성리학보다는 민간의 귀신 신앙에 가깝다.

이러한 모순은 집권파들의 철학이 조선 건국의 이념으로부터 변질되었음을 보여준다. 그들은 통치와 권력 유지를 위해 자신들의 정치 강령의 관철이 아니라 타협 정책을 추구하였던 것이다. 성현의 귀신론에는 민간의 귀신 신앙과 자신들의 정책을 조화시키려는 의도가 담겨 있다고 보아야 한다. 즉 그의 귀신론은 철학의 영역에서 정치의 영역으로 가 버렸다.

다음으로 야당의 입장을 보자. 당시 야당은 지방의 중소 지주 집안 출신으로 집권파인 훈구파에 눌려 있다 조선 중기 이후 집권세력으로 발돋움하는 집단이다. 이들을 ‘사림파’라 부른다. 사림파 인사들 중에 귀신론을 소상히 다룬 사람은 남효온이고, 이후 이이가 이것을 보충하였다.

남효온(1454년~1492년)은 생육신의 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는데 <귀신론>을 길게 썼다. 그는 사람이 이(理)와 기(氣)로 이루어져 있다고 한다. ‘이’는 이치를 말한다. ‘기’는 사물을 구성하는 재료와 그 재료들이 모이고 흩어지는 운동을 말한다. 그러면 사람이 죽으면 어찌될까? 그는 이와 기가 분리되고 마음도 육체도 모든 형체가 없어진다고 말한다.

그렇다고 하여 남효온이 귀신의 존재를 부정한 건 아니다. 본시 성리학은 귀신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는다. 유교의 4대 경전 중 하나인 『중용』에 한 개의 장을 할애하여 귀신 문제를 다루고 있음을 보아서도 알 수 있다. 공자는 "귀신의 덕은 크다"고 말했다. 다만, 귀신이 신통력을 발휘한다는 민간의 귀신관을 부정하고자 한 것이다.

남효온은 사람이 죽으면 이와 기가 분리된다고 했다. 덧붙여 기는 공중에서 흩어져 버리고 귀신은 이만으로 남는다고 말한다. 이제부터 어려움이 발생한다. 이는 사물의 이치로 아무런 형체도 없고 능동적인 작용도 하지 않는다. 형체를 만들려면 기가 작용해야 한다. 그런데 기는 공중에 흩어져 버려 모이지 않는다.
그러니 제사를 지낼 때 조상귀신은 나타날 수 없다. 오지도 않는 귀신에 제사를 드려야 할 판이 되었다. 이렇게 되면 조상귀신과 후손은 교감할 수 없고, 제사를 지내는 의미를 찾기 어렵게 된다.

남효온은 이런 난점을 해소하기 위해 조상과 후손은 서로 잘 통하는 관계라고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후손이 정성껏 제사를 지내면 그 순간 이만 있던 조상귀신에 기가 다시 모인다고 말한다. 이런 주장은 조상 제사를 소중히 해야 한다는 윤리 도덕적 호소는 될지언정, 논리적으로는 비약이다. 여기에서 남효온의 귀신론은 철학의 문제가 아니라 신앙의 문제로 가 버린다.

한 세기가 흘러, 율곡 이이가 <사생귀신책>에서 이 난점을 해결하기 위해 나섰다. 그는 한 순간 이만 있던 조상귀신에 기가 모인다는 남효온의 주장을 버리고, 이만으로도 충분히 조상과 후손이 교감할 수 있다고 말한다. 남효온이 범했던 논리적 비약, 그의 귀신론의 약점은 해소되었다.

그러나 난점의 완전 해소는 아니다. 이는 능동적인 작용을 하지 않는다. 이가 어떻게 후손과 교감 같은 작용을 할 수 있는가. 이이는 이것에 대해 설명하지 않는다. 그는 자손의 정신이 조상의 정신이므로 자손이 정성을 다하면 당연히 조상이 응답한다 하며 끝을 맺어 버린다. 남효온과 마찬가지로 이이 또한 조상귀신 문제는 신앙의 영역으로 넘어가 버렸다.

기일원론을 열다

다시 김시습의 <남염부주지>로 돌아와 보자.

박생이 물었다.
"제사를 받는 귀신과 조화를 이루는 귀신은 다릅니까?"
염왕이 답한다.
"다르지 않습니다. 귀신은 소리도 없고 형체도 없습니다. 만물의 시작과 끝이 음과 양이 합치고 흩어짐에 따라 생기므로, 하늘과 땅에 대한 제사는 음과 양의 조화를 이루어준 데 대한 공경입니다. 산과 하천에 대한 제사는 기질을 내려준 데 대한 보답입니다. 조상에 대한 제사는 자신의 근본에 대한 감사입니다. … 제사는 존경심을 갖는 데 그쳐야 합니다. 귀신은 형체가 없어서 인간에게 화와 복을 주지 않습니다."

귀신은 소리도 형체도 없다! 이것이 김시습이 말하는 귀신론의 핵심이다. 그는 귀신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다. 그는 염왕의 입을 빌어 거듭 강조한다. "죽으면 정기가 흩어지고 혼과 육신은 본래 왔던 곳으로 되돌아갑니다."

그러면 조상 제사는 왜 지내는가. 김시습은 감사의 마음, 존경심의 표시라고 말한다. 그는 성현, 남효온과는 전혀 다른 철학적 지반 위에 서 있다. 그는 ‘만물의 시작과 끝은 음과 양이 합치고 흩어짐에 따라 생긴다’고 말한다. 음과 양은 기이다. 흔히 음기, 양기라 하지 않는가. 만물의 시작과 끝, 그리고 그 사이의 변화를 기로만 설명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을 ‘기일원론(氣一元論)’이라고 한다.

김시습이 모든 귀신을 부정한 건 아니다. 억울하게 죽은 원귀는 인정하였다. 그래서 <금오신화>에 원귀들의 이야기를 썼다. <만포사저기>에는 고려 말 왜구에 희생된 여자 귀신을, <이생규장전>에는 고려 말 홍건적난 때 희생된 여자 귀신을, <취유부벽정기>에는 옛날 평양에 있었던 기자 조선의 기자의 딸 귀신을 등장시킨다.

한 세대가 지나 화담 서경덕은 <귀신생사론>에서 이것조차 없애 버렸다. 그는 삶과 죽음, 사람과 귀신은 기가 모이고 흩어지는 데 지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런 전제에서 사람이 죽으면 신체도 혼도 흩어져 버려 귀신은 없다고 하였다. 제사에 대해선 아예 일언반구의 말도 없다. 귀신을 철저히 부정해버렸다.

김시습은 방외인의 삶을 살았다. 방외인이란 체제 바깥에 있는 사람을 말한다. 수양대군이 단종을 몰아냈다는 소식을 듣고 공부하던 책을 모두 불태워 버렸다. 중이 되어 전국을 떠돌아 다녔다. 늦은 나이에 환속하여 결혼하였으나 부인이 곧 죽자 다시 방랑 생활을 하였다.

김시습은 생육신의 한 사람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러나 그는 단종에 대한 충절만을 지킨 사람이 아니다. 한양에 자주 들러 양녕대군 등과 어울리며 왕실의 일을 돕기도 하였다. 그는 복잡한 삶을 살다 갔다.

그는 유교뿐만 아니라 불교, 도교까지 두루 공부하였다. 그런 공부의 결과가 기일원론 철학이다. 기일원론이란 인간과 자연을 포함한 우주만물이 기로 이루어져 있다는 철학이다. 기일원론에 따르면, 사물의 이치는 물(物)에 대한 치열한 탐구 속에서 밝혀질 수 있는 것이다. 이규보, 정도전으로 이어지는 ‘물의 철학’의 계승이자 발전이었다.

그러나 김시습은 기일원론을 체계화하지는 못했다. 그것은 뒤이어 등장하는 철학자들의 몫이었다. 그럼에도 그가 기일원론을 제기하였다는 철학사적 의의는 충분히 평가할 만하다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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