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동성’은 철학인가, 수식어인가?
        2010년 03월 29일 04:08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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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복지국가 소사이어티가 지방선거를 앞두고 ‘역동적 복지국가의 논리와 전략’이라는 책을 펴내고 이를 선거의 중심적 쟁점으로 제기하였다. 언론을 통해서 볼 때 그들의 의도가 상당부분 성공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나는 몇 가지 점에서 복지국가 소사이어티의 시도와 성과에 대해 찬사를 보낸다.

    먼저 복지국가소사이어티의 시도는 거칠게 보자면 DJ의 ‘생산적 복지’, ‘시장경제와 민주주의의 병행발전’, ‘남북간 공존과 평화적 통일’ 이후로(조금 더 너그럽게 인정한다면 노무현의 민주주의의 진전으로서의 ‘참여의 확대’를 포함시킬 수도 있겠다) 아마도 진보개혁세력이 이 사회에 제기한 주장으로는 역사적이며 사회과학적 가치를 가진 최초의 주장이라고 생각한다.

    정치공학 중심에서 벗어난 복지국가소사이어티의 시도

       
      

    반성적으로 평가해 보건데 진보개혁세력은 노무현의 당선을 즈음한 지난 10년간 ‘국민경선제’, ‘기간당원제’, ‘민주대연합’, ‘대통합’ 등의 정치공학적 주장을 중심으로 정치를 해 왔다고 할 수 있다. 그 대표적 예로서 지난 시기 우리 정치의 중심적 화두였던(찬성과 반대를 떠나서) ‘열린 우리당’의 당명을 들 수 있다.

    열린 우리당은 두 개의 단어 ‘열렸다’와 ‘우리’의 결합인데 여기서 그나마 시대적 함의를 가진 단어는 ‘열린’이다. 이는 당시 노무현의 ‘참여’의 확대와 잇닿아 있다는 점에서 일정한 가치를 가진 용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 ‘열렸다’는 가치는 명확한 시대성, 역사성을 가진 단어라고 볼 수는 없다. 이 단어를 포퍼의 ‘열린 사회와 그 적들’에서의 ‘열린’이라는 단어와 비교해 보면 그 한계가 명확해 진다. 포퍼는 ‘열린’이라는 단어를 명확히 ‘닫힌’이라는 개념과의 대비를 통해 쓴 것이며 이는 또한 이념적, 종교적 전체주의라는 구체적 대상의 분석과 잇닿아 있다.

    그러나 열린 우리당의 ‘열린’이라는 개념은 명확한 함의가 없다. 부분적으로 당시의 한나라당에 비해 당원의 참여의 폭을 열어 놓았다는 의미 정도가 있을 텐데 그 이후의 과정을 살펴보면 명확한 차별성, 차별성을 유지할 수 있는 철학적 기반과 제도적 장치가 전제되지 아니한 정치적 구호에 불과했음을 알 수 있다.

    지난 시기에 대한 이런 반성적 입장에서 보자면 ‘역동적 복지국가’론은 우리 진보개혁세력에게 가치의 중요성을 바로 세우게 해 줄 수 있을 것이며 정치의 존재 이유가 정치하는 자들의 권리와 의무(기간당원제와 그 후속 버전인 당원의 자격과 권리에 대한 국민참여당식의 강조)를 밝혀내는 것이 아니라 국민들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철학과 방법임을 일깨워 줄 수 있을 것이다.

    다음으로는 복지국가 소사이어티의 노력이 소위 그 많은 진보개혁 정치인 및 세력의 일회성, 당일치기성 가치/비전론과는 다르게 상당한 시간을 거쳐서, 그리고 보다 중요하게는 그 과정에서 학자들, 정치인들, 현장의 활동가들, 연구자들, 지난 10년 정부시기의 정책집행자들의 공동 참여를 통해서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는 점이다.

    이 점은 보기보다는 매우 중요한 요소인데 지난 대선시기의 소위 진보개혁세력의 대선후보들이 공약을 만드는 과정과 비교해 본다면 그 차이를 매우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학자, 정치인, 활동가들의 공동 연구물

    대중들이야 어쩌면 정동영의 ‘가족행복시대’, 유시민의 ‘국가개조론’이나 심상정․이범의 ‘핀란드식 교육제도’에 환호하거나 선수와 심판을 언제나 아무런 경계 없이 넘나드는 김호기의 올마이티파워식 논평에 감동할 수 있을 것이지만 진정으로 우리 진보개혁세력에게 결핍되었던 것은 이런 뛰어난 개인들의 창의적인 해결책이나 발 빠른 벤치마킹이 아니라 그것을 현장에서 적용해본 경험, 경험의 반추, 그리고 다소 부족하더라도 그 해결책을 현장에서 실현하고/지지하고/버티는 구체적 힘이다.

    복지국가 소사이어티의 가치와 주장들은 아마도 그냥 한번 해본 말이거나, 선거에 때맞추어 성가시고 효과도 없지만 후보들이 차고 나오는 악세서리의 수준을 넘어서, 비교적 정교해지고 현실 적합성도 충분히 고려할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 주장을 뒷받침할 수 있는 정치적/시민적 실체를 가진 가치로 발전해 나갈 것이다.

    (지난 몇 년간의 정치에서 여기서 주목하는 ‘가치’의 중요성을 어쩌면 가장 멀리서 지켜보며 ‘실용’을 외쳐왔던 정동영의원이 이번 복지국가 소사이어티의 주장에 적극적으로 동조하고 있는 것은 참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지만 그러나 그 누구도 생각이 바뀔 수 있으므로 앞으로 그의 정치에서 역사적, 사회적 가치의 중요성이 명확해 지기를 기대해 본다.)

    그래서 어쩌면 김대중 노무현 이후의 진보개혁세력의 정치가 ‘역동적 복지국가’ 이전과 이후로 구분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이 기대에는 ‘역동적 복지국가’에 대한 더 많은 비판과 토론들을 통해 진보개혁세력의 가치와 비전이 풍부해지고 구체화되고 무엇보다 실체를 가진 주장으로 진화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겨 있다.

    2.

    ‘역동적 복지국가론’이 정치적/역사적 의미를 갖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일 것이다. 하나는 보편적 복지가 우리 시대에 진보세력이 제시할 수 있고 사실은 국민들이 원하는 (스웨덴보다는 한참 늦었고 또 불완전하더라도) 가치라는 선언일 것이며 다른 하나는 한국적 현실로 인해 거기에 ‘역동적’이라는 수식이 필요하다는 인식일 것이다. (‘역동적 복지국가의 논리와 전략’에서는 스웨덴식 보편복지국가에 대한 일반적 주장과 함께 부분부분 한국적 현실의 수용에 대한 이해가 혼재되어 있다)

    물론 ‘역동성’을 한국적 변용의 표현이 아니라 보편적 복지를 통한 사회활력제고라는 식의 적극적 의미로 해석하거나 주장할 수도 있겠으나 이는 보편적 복지국가론 자체가 그러한 포괄적 주장에 근거한 것이므로 굳이 그 앞에 ‘역동적’이라는 말을 붙이는 것이 동어반복에 불과하다는 점에서 적절한 해석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지식의 부족과 과문의 탓으로 나는 복지국가 소사이어티의 ‘역동적’이라는 수식이 그들의 작업에서 일관된 것이었는지 아니면 이번 ‘역동적 복지국가의 논리와 전략’이라는 책에서 보다 구체화 되었는지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어쨌건 ‘역동적’이라는 수식을 통해 그들이 한국적 현실의 일단을 포섭하려고 했다는 점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고 본다.

    ‘역동’, 한국적 현실에의 적응?

    그렇다면 이 책에서 주장하는 ‘역동성’의 함의가 무엇인가가 중요하다. 나는 이 책의 여러 부분에서 ‘역동성’의 구체적 증거라고 생각할 만한 주장들을 찾을 수 있었다. 이상구 등은 제 4장 ‘교육정책의 현황과 과제’에서

    “예를 들어, ‘취업 후 학자금 상환제도’나 등록금후불제 등으로 국가가 교육부분의 재원조달 기전에 관여하면서, 대학에 대한 질 관리와 평가인증을 요구할 수 있다. <중략> 실험시설 및 교수의 수준과 숫자 등에서 적정기준을 제시하고, 이를 충족시키지 못하는 학교에 대해서는 등록금후불제 대상에서 제외하는 방법으로 개입할 수 있는 것이다.<171쪽>”라고 주장하였다. 더하여 현재의 83% 수준의 대학진학률을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대략 50% 수준으로 하향하여야 한다는 목표치를 제시하였다.

    이는 일반적으로 보편적 복지론에서 말하는 대학교육까지의 무상화, 등록금의 반값화, 무차별적 등록금 지원제도들과는 다른 것이다. 한국사회에서 앞서 말한 주장들은 서민들을 위한 정책으로 포장되지만 국가의 공적 재정으로 불필요한 대학 진학을 지원함으로써 사실은 일부 사학재단의 탐욕과, 이상구 등은 언급하지 않았으나 이들 사학재단에서 일하는 교수, 직원들의 노동권을 보장하는 수단에 불과하다.

    이상이는 제 11장 복지국가를 위한 사회서비스 확충 전략에서 우리나라에서 영국이나 스웨덴처럼 공공병원(소유권을 중심으로)의 비중을 압도적으로 높이는 것이 합리적이고 타당한가에 대한 의문을 제시하고 의료재정체계(보험을 중심으로 하는)의 공공성이 확고하다면 굳이 의료제공체계까지 완전하게 공공으로 유지할 필요는 없다는 주장을 소개하고 있다<432쪽>.

    또 1990년대 유럽 복지국가의 개혁 과정에서 이들 국영의료체계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공공병원들간의 경쟁을 활성화하는 다양한 제도적 노력이 이루어졌다는 사실도 소개하고 있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현재 10% 미만 수준의 공공병원(소유권을 중심으로)을 30%까지는 높일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물론 우리의 의료체계가 소유권을 중심으로 볼 때 겨우 7% 수준의 공공병원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현 체계를 절대적으로 고수해야 할 가치가 있다고 주장하는 근거인 한국적 의료체계의 공공성이 만들어진 이유가 무엇인지? 또 그 이유가 전일적 강제 국가의료보험의 힘이라면 왜 30%까지의 공공병원의 확대가 필요한지? 확대가 필요하다면 왜 30%정도가 적당한지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없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공공병원만이 의료의 공공성을 보장한다는 전통적인 주장과는 명확히 다르다.

    전통적인 복지 담론과는 다른 주장들

    또한 그는 같은 글에서 “이상에서 언급한 사회서비스 분야의 공공성을 높이고, 이를 통해 보편주의 복지국가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먼저, 사회서비스 분야에서 공공 재정의 비중을 지속적/획기적으로 확충해 나가야 하며, 다음으로 사회서비스의 제공에서는 스웨덴에서 보는 바와 같이 직접 서비스 제공자로서 국가가 일정한 역할을 수행해야 하며, 그 외 비영리민간 제공자, 사회적 기업 등의 발굴과 육성에도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이를 통해 공공의 직접 서비스 제공과 일정하게 경쟁하는 방식으로 비영리 중심의 민간이 복지공급의 혼합체계를 달성함으로써 좋은 시너지를 만들도록 해야 한다.<442쪽>.”고 말한다.

    그의 이러한 주장은 한국장애인인권포럼이 주최한 ‘사회서비스시장 어떻게 볼 것인가’라는 세미나에서 박지영 민주노총 공공노조 정책부장이 노동권 침해 등의 예를 들어 제시한 ‘공공행정서비스와 연계하여 공적으로 사회서비스를 공급하는 체계를 구축하여 영유아, 노인, 장애인, 환자의 최소한의 권리를 보장하고, 특별한 욕구에 대해서는 민간영역에서 제공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임,<사회서비스시장 어떻게 볼 것인가. 자료집 82쪽>’이라는 논리와는 상당한 거리가 있는 주장이다.

    물론 나의 짐작이지만 ‘역동적’이라는 수식의 의미라고 해석한 요소들이 이 책의 기조로서 명확하게 이해 된 것은 아니다. ‘노동시장과 고용정책의 현황과 과제’라는 은수미의 글, ‘국민건강보장과 의료정책의 현황과 과제’라는 박형근의 글에서는 이런 요소를 거의 찾아보기 어려웠다.

    특별히 은수미의 글은 3비층, 비경제활동인구와 비임금근로자(자영업 및 가족노동 등)와 비정규직의 문제를 노동문제의 핵심으로 제기하고 있으면서도 비경제활동인구와 비임금근로자의 문제에 대해서는 별다른 대안이 제시되지 않고 비정규직의 문제에 집중하는 전통적 해결방식에서 한 발짝도 나아가고 있지 않기도 했다.

    ‘국민연금과 노후소득보장의 현황과 과제’라는 이태수의 글에서 나는 복지국가 소사이어티의 진정성을 절실히 느낄 수 있었다. 특별히 참여정부 유시민 보건복지부 장관 시기의 국민연금개정을 포함하여 여러 차례에 걸친 국민연금제도의 개정이 ‘재정건전성’이라는 잘못된 의제의 설정으로 인해 사실상 국민연금 체계에서 소외된 광범위한 저소득층의 존재와, 40년 가입이라는 한국의 직업근속현실과 전혀 부합하지 않은 기간 설정으로 인한 노후보장책으로서의 불안정성 및 이에 따른 연금제도에 대한 신뢰의 위기라는 본질적이고 정치적인 의미를 놓치고 말았다는 그의 주장은 참여정부에 대한 안타까운 애정을 가진 사람들에게도 가슴 아픈 지적이 될 것이었다.

    ‘역동성’의 내용 채워져야

    그러나 복지국가 소사이어티의 진정성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역동적 복지국가론’이 하나의 완성되고 또 시대적 의미가 분명한 가치가 되려고 한다면 나는 필연코 ‘역동성’에 대한 철학적이며 시대적인 논거가 분명해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역동성’은 경쟁과는 어떤 관계에 있는가? ‘역동성’은 세계화와는 어떤 관계에 있는가?

    ‘역동성’은 노동권과 소비자의 선택권과는 어떤 관계에 있는가? ‘역동적 복지국가론’은 ‘보편적 복지국가론’과 어떤 관계에 있는가를 조금 더 일관되게 설명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역동적 복지국가론’은 사실 ‘보편적 복지국가론’의 정치적 수사에 불과하게 될 것이고 이는 새로울 것도 없는 것을 포장하는 것에 불과할 수도 있다.

    더 나아가 ‘역동성’에 대한 진실한 대면을 통해서 어쩌면 그들이 얘기하는 진보파를 위한 승부수에 진정으로 필요한 자기반성과 혁신을 위한 단초가 명확해질 수도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3.

    이상이는 제 11장 복지국가를 위한 사회서비스 확충 전략에서 사회서비스의 확대를 복지의 확대와 일자리의 창출이라는 양면에서 강조하면서 사회서비스 재정의 확충과 전달체계의 국가역할 확대를 동시에 주장하였다. 특별히 그는 사회서비스의 전달체계를 시장화하는데 대하여 우려를 표명하면서 지방자치단체의 전달체계로서의 역할을 제안하였다.

    나는 그가 지적하고 있는 시장화의 부작용에 대해 적극적으로 인정한다. 그러나 그의 대안이 효과적일 것인가에 대해서는 의문을 갖는다. 그도 잘 알다시피 의도가 선하다고 꼭 결과가 좋은 것은 아니다.

    우리 사회에서는 아직 사회서비스 수혜의 경험이 부족하여 국민들이 그 중요성을 체감하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노인요양서비스, 중증장애인활동보조서비스, 가사간병서비스 등이 시작되고 있고 아동보육/교육 분야, 의료 및 건강관리 분야, 행정서비스의 일정 분야 등에서 확대될 가능성이 많다.

    통계에 따르면 OECD국가의 평균 사회서비스 취업비중(‘03)이 21.7%이나, 우리나라는 13.8%(’07)로 현저히 낮은 수준이며 특히 보건 및 사회복지는 전체 취업자에서 차지하는 고용비중이 3.6%(OECD 평균 9.4%)에 불과하여 추가적인 고용여력이 많다고 할 수 있다.

    OECD 수준의 사회서비스 취업인구를 가진다면 대략 200만 정도의 고용을 창출할 수 있을 것이므로 한국사회의 비경제활동인구와 비임금근로자(자영업) 하층의 상당 부분을 흡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양적으로는 우리 사회의 일자리 해결의 절대적 부분을 차지할 사회서비스 분야는 어떻게 구조화 되어야 할 것인가?

    2007년 보건복지부는 장애인복지법의 개정에 따라 ‘중증장애인활동보조서비스’제도를 시행하였다. 이 제도는 최중증장애인에게 활동보조서비스를 제공함으로써 최소한의 인간적 생존을 보장하려는 취지에서 시도되었다.

    그런데 한국사회에서 이 제도는 보편적 복지의 확장이라는 논리에서 출발한 것은 아니다. 이 제도는 중중장애인들 스스로가 자신들의 생존적 권리를 확보하고자하는 노력으로부터 출발하였다. 그들은 자립생활과 활동보조서비스의 내용을 담은 장애인복지법개정안을 만들어 공청회를 열고 적극적인 입법 활동을 전개했다.

    뿐만 아니라 기획예산처를 압박하고 2006년 전국에서 모인 중증장애인들이 정부종합청사 앞에서 그리고 여의도에서 기나긴 천막투쟁을 전개한 끝에 자립생활이념과 활동보조서비스의 근거를 담은 장애인복지법을 전면 개정하고 국회에서 예산을 마련하는 노력을 경주한 끝에 드디어 2007년 활동보조서비스는 전국사업으로 시행하게 되었다. 미국과 일본 등 활동보조서비스가 제도화 된 대부분의 나라에서도 이 제도는 복지의 확장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고 장애인의 인권 투쟁에서 출발한 것이다.

    현실 제도는 ‘보편적 복지’ 논리가 아니라 당사자 인권 투쟁에서 출발

    내가 이 점을 언급하는 것은 중증장애인활동보조서비스가 단지 사회서비스의 한 종류로 인식되고 그 제도화와 구조화에 사회서비스의 일반원리를 적용하는 것이 꼭 타당한 것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이상이는 앞의 글에서 사회서비스공급체계의 시장화에 따른 핵심적 문제를 ‘서비스의 질과 종사자의 고용의 질의 현저한 저하’라고 규정하였다. 따라서 그는 서비스 질과 고용의 질을 안정적으로 보장하기 위해 국가, 특히 지방정부가 공급의 주체로 나서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중증장애인활동보조서비스를 하나의 추상화된 사회서비스라는 관점에서 볼 때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러나 장애인들이 만든 이 제도에서 장애인들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서비스의 질과 고용의 질이 아니다. 장애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서비스의 통제권이다.

    중증장애인활동보조서비스는 장애인복지의 패러다임 변화와 관련되어 있다. 장애인복지의 패러다임은 현재 의료 또는 재활모델에서 자립생활 모델로 변화하는 과정에 있으며 활동보조서비스는 이 패러다임 변화의 상징이다.

    재활모델은 장애인을 일정한 수준 이상의 치료, 교육, 훈련, 보호를 받으면서 살아가야 하는 존재로 인식한다. 장애인의 기능적, 직업적 재활을 위한 훈련을 강조하고, 이에 중점을 두는 서비스들이 집중적으로 개발되었다. 이 모델에서 장애인복지 서비스들은 서비스 전달기관이 감독하는 서비스 제공자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해당 기관이나 전문가가 모든 서비스의 직무내용, 서비스의 실시여부, 서비스 실행계획, 운영, 종결, 평가까지 전체적으로 개입 및 감독한다. 그러기에 서비스 이용 장애인은 수동적 서비스 수혜자일 뿐이다.

    자립생활 모델에서는 장애인의 기능회복과 교육훈련의 성과는 일정한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으며, 이러한 한계의 근본적인 원인은 사회적인 장애요소에 기인하기 때문에 사회에 내재해 있는 물리적, 심리적 장애요소들을 제거하여야 하며, 동시에 지역사회에서 독립적으로 생존할 수 있도록 하는 재정적, 전문적 서비스들이 강조된다.

    또한, 서비스 제공에서도 기관이나 전문가 중심의 접근방법보다는 서비스 이용자인 장애인 중심의 접근방법에 초점을 둔다. 이는 장애인 자신이 자신에게 어떠한 서비스가 필요한지 잘 알고 있으며, 필요한 서비스를 선택하고 통제할 수 있는 능력과 자질을 갖추었다는 전제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즉, 모든 서비스의 계획, 실행, 평가에 서비스 이용 장애인 자신이 참여하고, 이를 당연한 권리로 인정하는 것이다.

    때문에 중증장애인활동보조서비스라는 사회서비스의 제도화를 이끌어 온 장애인들은 이 서비스의 제공자들을 ‘도우미’라고 부르는 것을 거부하였으며 활동보조인의 제도화, 자격증화에도 반대하고 있다. 이는 공급하는 자의 고용의 질과 자격이 공급받는 자의 선택권․결정권과 아주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양자의 권리 가운데 어떤 균형점이 옳다고 말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이상이의 글에서 사회서비스의 제도화와 관련하여 중증장애인활동보조서비스에서 제기되는 소비자의 선택권의 문제가 전혀 언급되지 않는 것은 그가 적어도 이 제도에 대한 어떤 구체적인 이해도 갖고 있지 않음을 나타낼 뿐이다.

    노동 중심 정치전략과 복지 소비자의 문제

    또한 그는 역동적 복지국가를 위한 정치전략이라는 관점에서 사회서비스의 보편화를 주장함으로써 다수의 수혜 대상자들을 끌어들이고 동시에 질 좋은 ‘공공 고용’을 통해 사회서비스노동자들을 포섭하는 일거양득의 효과를 노리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의 주장이 장애인 관련 사회서비스에 종사하는 노동자의 수보다도 더 많은 다수의 장애인 소비자들을 배제할 수 있음을 전혀 이해하고 있지 못하다.

    2009년 현재 중증장애인활동보조서비스는 수치상으로 대략 1700억 정도의 예산으로 3만 1천명의 장애인에게 1만 8천명 정도의 활동보조인을 제공하고 있다. 이 제도가 장애인의 이용시간을 월 최소 40시간에서 최장 180시간까지로 구별하고 활동보조인의 경우 개인당 활동보조시간의 균질성이 떨어짐으로 해서 정확한 추산이 불가능하지만 현장의 경험에 의하면 중증장애인들은 대략 한달에 100시간(하루 3-4시간) 정도의 활동보조서비스를 받는 사람이 1만 5천명 정도에 이를 것으로 추산되고 활동보조인들은 월 평균 100시간 노동에 60만원 정도의 수익을 얻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또한 이를 중개하는 중개기관의 경우 중개수수료로 연간 300억 정도를 수수하고 이 가운데 절반 정도는 중개 관련 비용으로 지출하고 나머지는 코디네이터 등으로 대략 500-700명 수준의 관련 종사자를 고용하는 것으로 추산된다. 결론적으로 정부와 지방자치단체의 1700억 정도의 예산은 3만의 중증 장애인에게 새로운 삶의 기회를 주고 2만에 가까운 낮은 수준의 고용을 창출하였다.

    물론 그 이면에는 열악한 고용현실이 있고 장애인의 입장에서는 충분하지 않는 시간의 아쉬움이 있고 장애인 소비자와 활동보조인 사이에 정립되지 않은 관계와 갈등이 있다. 역동적 복지국가론의 정치전략이라는 면에서 볼 때 우리는 중증장애인 활동보조서비스와 관련한 5만명의 이해당사자들 사이의 균형 있는 관계를 통해 어느 한편을 배제하지 않는 전략의 구사가 절실함을 이해해야 한다.

    특히나 이 숫자가 중증장애인활동보조서비스라는 단일한 제도를 넘어서고 또 앞으로 확대될 여지를 고려한다고 할 때 우리 사회의 사회서비스의 소비자(다른 사회서비스의 경우 관련 일자리 대비 수혜자의 비율이 월등 높다)와 노동자의 총수는 최대 수백만에 이를 수 있다. 때문에 보편적 사회서비스국가의 정치전략에서 노동 중심주의는 소수화의 가능성을 피하기 어렵고 이는 교육서비스와 관련하여 전교조의 역사가 어느 만큼 증명하고 있다.

    우리가 현재의 중증장애인활동보조서비스를 지방정부의 공급체계로 변화한다고 가정할 경우 활동보조인과 이를 관리하는 비용의 상승을 피할 수 없으며 현재의 예산 수준에서 볼 때 장애인의 활봉보조서비스 시간의 축소가 불가피할 것이며 또한 활동보조를 받는 장애인들의 선택권은 상당히 제약될 수밖에 없다.

    물론 우리는 현재의 활동보조인들의 고용의 질을 외면할 수는 없다. 특히 고용에 따른 4대보험의 문제, 주당 40시간 정도를 근로하는 활동보조인들에 대한 최소한의 적절한 급여 수준의 문제, 장애인 소비자의 선택권과 결정권을 존중하면서도 활동보조인과 평등한 관계를 만드는 문제와 관련한 소비자 교육과 모니터링 문제 등을 외면할 수는 없다.

    지자체 효율성과 사회단체 거버넌스

    마지막으로 이상이는 위의 글에서 지방정부의 공급자 역할을 매우 강조하고 있다. 내가 보기에 이러한 주장은 현실성을 검토하지 않은 매우 관성적인 것으로 보인다. 중앙정부도 그런 의심을 받고 있지만 특히 지방정부 관료체계의 비효율성에 대해서는 아주 많은 연구와 경험적 진술들이 있다. 때문에 지방정부의 효율성과 관련한 대안이 없는 상태에서 사회서비스의 공급주체로 지방정부의 역할을 강조하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물론 그도 지방정부와 함께 사회서비스 공급주체로서 사회적 경제, 사회적 기업을 제안하고는 있다. 주로 그는 관료적 공급의 효율성을 견제하는 장치로서 비영리적 민간기관들의 역할을 말하고 있는 듯하다. 그의 이러한 제안이 틀렸다고는 말하지 못하더라도 충분히 옳은 것은 아니다.

    전문성을 갖고 있지는 않으나 현대의 민주주의에 대한 논의에서 거버넌스의 문제, 공공부분과 민간부분의 관계, 특히 그 중에서도 대의적 민주제의 한계를 넘어서려는 시도들, 즉 행정 자체의 민간위탁, 민간위임 등은 매우 중요한 가치로 여겨지고 있다. 즉 공공부문과 민간부문의 거버넌스는 그 자체로 매우 진보적 가치이며 정치전략의 면에서도 매우 중요한 기제이다. 때문에 그가 사회서비스의 시장화에 대한 대안으로, 또 사회서비스의 공공성 담보의 중요한 기제로 곧바로 지방정부의 역할을 강조하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중증장애인활동보조서비스의 경우 전달체계가 다행히도 시장에 완전히 개방된 것은 아니다. 노인요양서비스와 다르게 중증장애인활동보조서비스의 경우 중개 기관을 복지관, 자활후견기관, 장애인 자립생활센터 등의 비영리 민간기관으로 한정하고 있고 대략 전국적으로 450개가 있다. 그런데 중증장애인활동보조서비스의 공급체계가 그가 그렇게 반대하는 완전한 시장적 방식을 피할 수 있었던 힘은 사회서비스의 보편화 전략 때문이 아니라 장애인들의 인권적 투쟁 때문이었다.

    중증장애인활동보조서비스의 중개기관별 점유율을 보면 복지관이 다수를 차지하고 장애인자립생활센터가 대략 15% 정도를 차지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리하여 장애인자립생활센터들은 중개수수료로 60-70억 정도를 확보하고 있으며 대략 60여개 정도의 장애인자립생활센터가 중개기관으로 활동하고 있는 점을 고려하면 한 개의 장애인자립생활센터가 년간 1억원 정도의 수입을 확보한 셈이다.

    이는 장애인자립생활센터의 유지와 독립에 결정적인 힘이 되었으며 그로 인해 미국의 경우 장애인자립생활센터가 대략 40년이 넘는 역사 속에서 500개 정도 만들어져 활동하고 있는데 비하여 한국의 장애인자립생활센터는 10년이 못되는 역사에 거의 150개가 만들어지는 성과를 낳고 있다.

    제3섹터 전략을 적극적으로 구사해야

    더 나아가 장애와 관련한 시민사회에서 볼 때 장애인자립생활센터는 복지관이나 기타 사회복지공공부문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왕성한 활동력을 보여주고 있으며 진보개혁세력의 정치전략과 관련하여서도 훨씬 가깝고 그 규모가 크며 가능성 높은 연대의 대상이라고 생각한다.

    때문에 사회복지서비스의 보편화와 관련하여서 우리는 사회복지서비스 전달체계의 공공화라는 관성적 주장이 아니라 시민사회의 적극적 참여를 전제로 하는 새로운 유형의 제 3 섹터형 공급체계를 구상하여야 하고 그 속에서 사회복지서비스의 수혜자들과 공급자들 모두를 보편적 사회복지서비스의 정치적 동력으로 전환하는 담대한 정치전략을 구사하여야 한다.

    나는 이번 복지국가 소사이어티의 ‘역동적 복지국가론’이 전통적 보편복지국가론의 어떤 요소들을 수정하는 역동성을 가진 것이기 위해서, 특별히 정치전략적 영역에서 우리 모두가 간절히 원하는 진보개혁세력의 재구성이라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자본과 노동, 또는 시장과 국가라는 분단선과 함께 시민적 덕성이 작동하는 제3섹터로서의 사회적 경제와 시민사회의 적극적 역할이 옹호되어야 하며 특히 이원재의 논의에서 강조되는 ‘보호된 시장’의 필요성, 그리고 노동자와 소비자의 공존에 대한 탐구가 더 보편화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다면 ‘역동적 복지국가론’의 역동성이라는 단어가 불행하게도 정치적 수사일 뿐이라는 혐의를 벗기 어려울 것이다.

    * 이 글은 사회디자인연구소가 운영하는 ‘좋은 정치포럼’ http://www.goodpol.net/에 실린 것입니다. 사회디자인연구소의 허락을 받아 게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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