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도전, 혁명과 조선의 설계자
        2010년 03월 25일 05:00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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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로운 국가의 탄생

    1392년, 조선이 건국되었다. 918년, 왕건이 궁예를 몰아내고 왕위에 추대되어 세워진 고려는 475년 간 존속하다 멸망하기에 이르렀다. 고려의 신하였던 길재는 후일 다음과 같은 시조로 고려를 추모하였다.

    오백년 도읍지를 필마로 돌아드니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 데 없네
    어즈버 태평연월이 꿈이런가 하노라

    그러나 실상은 다르다. 조선이 세워지는 과정에서 정몽주 등 일부의 저항은 있었지만, 고려를 위해 투쟁하는 세력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시조를 지은 길재 자신도 조선 건국 후 벼슬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지, 조선에 저항한 인사는 아니었다.

    사정이 이렇게 된 이유는 고려의 지배세력들이 무능력한데다, 백성에 대한 극심한 수탈로 백성들의 생활이 극도로 피폐해졌기 때문이다. 고려 후기는 식민지적인 지배와 혼란의 시기였다. 고려는 근 100년 가까이 원나라를 세운 몽고족의 지배를 받았다. 몽고족의 지배가 풀리자마자 북쪽에서는 홍건적, 남쪽에서는 왜구의 침략을 받아 전 국토가 전쟁에 휩쓸려 들어갔다.

    이런 시기에 고려의 지배층인 권문세가는 사병까지 두고 호화 사치 생활을 하면서 자신들의 토지를 확대하는 데 열을 올렸다. 여기에 정신적 지주를 자임하고 있던 불교계까지 합세하여 토지 확대 경쟁을 하였다. 경제의 토대인 토지가 권문세가와 사원으로 집중되면서 국가 재정은 고갈되었다. 그것을 벌충하고자 고려 정부는 백성들에게 더 많은 세금을 갈취해갔다. 권문세가와 사원에서는 자신들의 토지에서 엄청난 소작료를 훑어갔다.

    전쟁과 이중 삼중의 수탈. 길재에게는 그것이 ‘태평연월’일지 모르나 백성들에게는 ‘지옥과 같은 나날’이었다. 고려의 멸망은 시간 문제일 뿐이었다.

       
      ▲ 정도전

    조선은 고려와 무엇이 다른가 하는 의문은 당연한 것이다. 왕의 성씨가 왕 가에서 이 가로 바뀌었다는 데에서 역사적 의의를 찾을 수는 없다. 두 가지 측면에서 그 차이점을 찾아볼 수 있다. 하나는 지배적인 이념이 불교에서 유교로 바뀌었다는 점이다.

    또 하나는 당시 세계적으로도 유례를 찾기 어려운 부분인데, 조선은 설계도를 가지고 건국되었다는 점이다. 즉, 정치 강령을 가지고 시작했다는 얘기이다. 이 두 가지 일을 해낸 사람이 정도전(?~1398년)이었다.

    혁명가의 길

    몽고족의 지배와 전쟁, 백성들의 피폐한 생활은 지식인들의 비판의식을 고양시켰다. 그들은 주로 지방 관리 집안 출신들인데, 과거 시험을 보아 중앙 정계에 진출하였다. 그들을 가리켜 신흥사대부라고 한다. 그들은 청운의 꿈을 안고 중앙 정계에 나아갔지만 모든 권력을 장악하고 있는 권문세가들 앞에 좌절할 수밖에 없었다.

    신흥사대부는 비판적 의식을 가지고 개혁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다. 안축이란 사람이 쓴 <염호>라는 시를 보자.

    늙은이가 아들, 손자 거느리고 / 잠시도 쉬지 못하는구나
    아주 추운 날에도 바닷물 긷는데 / 짐이 무거워 어깨와 등이 벌겋게 되었구나
    매서운 열기, 타는 매연과 그을음에 / 지지고 삶느라 얼굴이 검어졌다
    문 앞에 열 수레 섶나무가 / 하루 저녁 견디지 못하네
    매일 백 섬 바닷물을 끓여도 / 소금 한 섬 채우지 못하는데
    기한에 맞춰 바치지 못하면 / 악독한 아전이 화내며 꾸짖어 댄다

    소금 만드는 사람의 처지를 얘기했다. 이렇게 현실비판은 하였지만 그것을 개혁할 방책은 없었다. 그래서 어떤 이는 낙향하여 농사를 지으며 살았고, 어떤 이는 적당히 타협하여 일신의 안위를 꾀하였다. 그 중에는 권문세가에 대항하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그들은 멀리 귀향가거나 죽음을 당하였다.

    정도전은 이런 상황에서 태어나 과거를 보고 중앙 정계에 진출하였다. 그의 출생 연도에 대해 1337년 설과 1342년 설이 있다. 1362년에 처음 관료로 임명되었지만 그의 관료생활은 평탄치 않았다.

    정도전은 좌절하여 낙향하는 사람도, 적당히 타협하는 사람도 아니었다. 그는 중국에서는 물론 우리나라에서도 오랫동안 칭송받아온 도연명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남북이 분열하여 전쟁이 계속 일어나 백성이 편한 날이 없고, 장차 내란이 일어나 왕실이 기울어 뜻있는 사람이 필요한 때, 도연명은 시골 전원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가 지은 시라는 것도 밥 빌어먹는 가난한 선비가 원망하는 마음에 술을 마신다는 둥 심심해서 술 마시며 세월을 보낸다는 것뿐이다. – 정도전, <독동정도시후서>

    도연명의 현실 도피에 대한 비판이다. 또한 정도전은 선비인 척하는 자들에 대해서도 분노를 터뜨렸다.

    저 선비인 척하는 자들은 헌 갓과 낡은 옷을 입고 벌벌 떨며 관망만 하며 자기의 보신만을 생각한다. 말단 자리에 앉게 되어도 능력 발휘를 못하는데, 눈을 부릅뜨고 당당하게 조정에 서서 도리를 따지는 일을 할 수 있겠는가. 부끄러움도 모르는 자는 말만 꾸며 하찮은 재주를 부리고, 요행을 바라며 바삐 움직이다가 이권이나 챙기려 든다. 벼슬자리가 없을 때는 고담준론이나 한답시고 하다가 일을 맡기면 당황하여 어찌할 줄을 모르는 자들이다. – 정도전, <송조생박거서>

    지식인이란 자들의 기회주의적 행태에 대한 비판이다. 정도전의 생각과 기질이 잘 드러난다. 이런 생각과 기질로 인해 그의 관료생활은 순탄할 수 없었다. 무려 9년이란 세월을 귀양살이를 해야 했다.

    귀양살이는 그에게 소중한 학습의 시간이었다. 시골 농부들과 많은 얘기를 나누고, 사회 문제에 대해 탐구를 하면서 자신이 나아갈 길을 찾았다. 이 때 지은 <감흥>이란 시를 보자.

    봉황은 어찌 그리 높이도 날아서 / 높은 데 올라도 바라볼 수 없구나
    배고프면 푸른 낭간을 먹고 / 목마르면 천지의 물을 마신다
    굽어보니 티끌과 같은 세상 좁기만 하여 / 닭과 오리가 꽥꽥대는 마당에 불과하구나
    그래서 오랫동안 내려오지 않고 / 천 길 멧부리에서 돌고만 있는가

    예나 지금이나 봉황은 최고의 자리를 의미한다. 그 봉황을 자신의 모습으로 비유했다. 자신이 가고자 하는 길을 이렇게 노래했다.

    정도전은 혁명가의 길로 들어섰다. 혁명은 혼자만의 힘으로 이룰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스승인 이색도 동문수학한 정몽주도 이에 반대하였다. 결국 정도전은 이성계를 추대하고 거사를 일으켜 고려를 멸망시키고 조선을 건국하였다.

    물(物)의 철학

    정도전은 당대 최고의 철학자였다. 그는 이색에게서 배웠다. 이색은 성리학을 그냥 받아들이기만 한 사람이 아니고 스스로 탐구하는 데 힘쓴 사람이다. 그는 물(物)의 이치를 밝히고, 그것을 인간과 연관 짓는 연구를 하였다. 그렇게 하여 밝힌 원리를 "사람에게도 성(性)이 있고, 물에도 성이 있다."고 정리하였다. 사람과 물에 같은 성이 있으니 다르지 않다는 말이다. 이규보가 개척한 ‘물의 철학’의 계승이다.

    정도전은 이것을 이어받아 더욱 철저화하였다. 이색은 도(道)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도는 천지 사이에 있어서 어둡고 밝은 데를 관통하고 크고 작은 것을 포함한다. 그래서 물에는 도가 없는 곳이 없다. 도의 실체와 작용은 찬란하지만 사람이 그것을 실행할 때에는 알려진 것도 있고, 알려지지 않는 것도 있다. – 이색, <송절박상인서>

    도는 천지만물에 있지만 사람이 도를 실행하고자 할 때는 알려지지 않는 것도 있다는 얘기이다. 그만큼 도의 발견과 실현이 어렵다고 본 것이다. 이색의 철학이 가진 불철저한 면이다. 이색과 그의 철학을 충실히 계승한 정몽주는 ‘혁명’, 즉 고려를 뒤집어엎는 일에 반대하였다. 도의 실행이 불확실하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그러나 정도전의 생각은 달랐다.

    도는 헤아릴 수 없이 깊은 것은 아니지만 그 미묘한 것을 쉽게 알아내기는 어렵다. 비록 도가 일상적인 주변에 있지만 그 원대한 것을 쉽게 얻을 수도 없다. 오로지 탁월한 사람이 깊이 파고들어 연구한 후에야 도달하게 된다. – 정도전, <이목은송자허시서권후제>

    도가 일상의 주변에 있다고 말한다. 비록 도를 찾는 일이 쉽지는 않지만, 깊이 파고들어 연구하면 알아낼 수 있다고 말한다. 이색은 알려지지 않는 것도 있다 했지만, 정도전은 일상 주변에 대한 끈질긴 연구 속에서 찾아낼 수 있다고 한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그는 주자가 써놓은 글을 해석하는 게 철학이 아니고 현실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철학이라 생각했다.

    정도전은 도를 찾아내고 실현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보았다. 그것은 투철한 현실 연구가 바탕이 되었기에 가능한 생각이었다. 그만큼 고려는 혁명이 아니고는 고쳐질 수 없는 중병을 앓고 있었던 것이다. 정도전의 철학은 혁명가의 것이었다.

    조선 건국의 설계도

    정도전은 조선 건국의 밑그림을 그렸다. 그것은 크게 보아 불교에 대한 비판과 이상국가의 실현으로 요약할 수 있다. 불교 비판은 지배 이념의 새로운 정립이란 측면에서 매우 중요한 과제였다. 이색과 정몽주 등은 불교에 대해 타협적인 자세를 취하였지만, 정도전은 매우 철저하게 비판을 하였다.

    정도전은 불교가 허황한 데 근거하고 있음을 먼저 비판한다. 그는 불교에서 말하는 윤회설 등이 허황하다고 보았다. 불교는 사람이 죽더라도 정신은 없어지지 않아 끝없이 윤회한다고 주장한다. 이에 대해 정도전은 <불씨윤회지변>에서 사람이 죽으면 정신도 흩어져 없어진다며 비판을 가한다.

    정도전의 불교 비판의 핵심적인 부분은 현실세계에 대한 인식이다. 불교는 현실세계를 인연에 의해 생겨난 가상의 세계라고 주장한다. 그래서 현세에 대한 일체의 집착을 버리라고 말한다. 그래야 고통에서 벗어나 해탈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정도전의 비판은 매우 단호하다. 그는 먼저 승려들의 이중성을 지적한다.

    승려들은 걸식을 표방하면서도 호화로운 생활을 한다. 그들은 의리를 저버리고 인륜의 해충이 되었다. 온갖 것들을 함부로 낭비하니 천지의 큰 좀벌레이다. – 정도전, <불씨걸식지변>

    고려 말 승려들이 보여준 행태에 대한 비판이다. 말로는 현세를 떠나라 하면서도 실제로는 자신들부터 현세를 못 떠나고, 오히려 현세에서 부귀영화를 누리고 있다는 얘기이다. 그러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람은 천지 사이에 있으면서 하루라도 물과 떨어져 살아 갈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처사접물(處事接物)하여 그 도를 다하고 어그러지거나 잘못된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 정도전, <불씨매어도기지변>

    처사접물. 일을 할 때 항상 물을 연구하라는 말이다. 불교의 현실세계에 대한 인식을 비판한 것이다. 현실은 가상이 아니라 실재하는 세계이고, 인간은 이곳을 벗어나서 살 수 없다는 얘기이다.

    이와 같은 현실세계관에 입각하여 정도전은 이상국가의 실현을 주장한다. 인간이 살아가는 세계를 이상적으로 바꾸어야 한다는 것은 혁명가에게는 당연한 생각이다. 또한 그것은 이전 시기 나라를 다스리는 원리라 했던 유교 사상에 대한 철저한 자기 혁신의 주장이었다.

    그는 "도덕을 심신에 쌓은 자를 선비라 하고 정사에서 교화를 베푸는 자를 관리라 한다"고 전제한다. 그리고 도덕은 교화의 근본이 되는 것이고, 교화는 도덕의 실천이므로 도덕과 교화는 한 가지 이치이고, 따라서 선비와 관리는 둘이 아니고 하나라고 말한다. 그런데 선비라는 자들은 도덕은 쌓지 않고 음풍농월이나 하고, 관리들은 교화 대신에 형벌로써만 다스리려 한다고 말한다. 이전 시기 유교를 공부하였던 자들이 보여준 모습에 대한 비판이다.

    정도전은 도덕과 교화를 통일시키는 덕치의 실현을 이상국가로 제시한다. 덕치는 백성을 근본으로 하는 민본의 정치이다. 백성들이 편안하게 생업에 종사할 수 있는 정치를 지향한다. 이것은 고려 말 피폐해진 백성의 삶을 극복하고자 하는 시도였다. 그가 토지개혁을 핵심정책으로 제시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러한 그의 정치사상은 분명 이상국가에 대한 강한 열망을 반영한 것이었다.

    정도전은 자신의 ‘물의 철학’에 입각하여 조선 건국의 설계도를 그렸다. 그것은 물에 대한 탐구, 현실에 대한 연구의 결과물이었다.

    무너져 내린 이상

    조선 건국 초기는 정도전의 시대였다. 그의 주장대로 이념 정책에서 숭유억불 정책이 채택되었다. 조선이란 국가의 기본 골격인 <조선경국전>의 편찬에서부터 왕궁인 경복궁에 대한 설계에 이르기까지 그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곳은 없었다.

    그러나 이방원의 쿠데타에 의해 정도전의 꿈과 야망은 무너졌다. 이방원을 중심으로 한 왕실 세력들에게 정도전의 철저한 민본 정치사상은 부담스런 것이었다. 정도전이 제거되자 급격한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정도전 지우기 작업이 진행되었다. 갑자기 길재가 충절의 대명사로 받들어지기 시작한다. 길재는 조선이 건국하자 낙향한 인사였다. 그는 고려를 위해 몸 바쳐 충성한 것도, 조선에 저항한 것도 아니었다.

    이런 인사가 충신으로 찬양된 이유는 두 가지였다. 첫째, 정도전을 고려를 배신한 자로 부각시키고자 하는 의도였다. 둘째, 왕에 대한 충성 이데올로기를 고양시켜야 했기 때문이다.

    정도전은 지워지기 시작하였다. 철학적 측면에서 볼 때, 정도전의 ‘물의 철학’이 이른바 심성론으로 대체되었다. 심성론이란 사람의 마음[심(心)]을 철학적으로 연구하는 것을 말한다. 심성론으로 전환은 곧 ‘심의 철학’으로 되돌아감을 의미한다. 이는 철학이 현실에 대한 치열한 연구에서 떠나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한국 철학의 계보에서도 정도전은 없어지고 길재가 주요한 인물로 기록되었다. 그리하여 정도전은 최후의 고려인으로, 길재는 최초의 조선인처럼 되어버리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되어버렸다.

    정도전의 민본 덕치라는 정치사상은 조선에서 형식적으로는 유지되었다. 그러나 그 기초가 되었던 ‘물의 철학’이 ‘심의 철학’으로 대체되면서 활력을 상실하게 된다. 선비라는 자들은 현실의 연구에서 떠나버렸다. 그리하여 조선은 건국 후 한 세기도 지나기 전에 침체, 쇠퇴기를 맞이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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