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람' 이 '사람'을 죽이는 계급 전쟁
    By 나난
        2010년 03월 24일 10:12 오전

    Print Friendly

    유난히 눈이 많이 내렸던 작년 겨울. 충청도 어느 곳에서 함박눈을 보니 문득 평택 칠괴동이 생각나 쌍용자동차 한 해고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평택에도 눈이 많이 오나요?’하고 물으니 하늘만 쨍쨍 하단다. 그래서 서로는 ‘작년 여름에 물마저 끊긴 공장에서도 비가 오지 않더니 평야지대 평택엔 눈조차 구경하기 힘들구나’하고 멋쩍게 웃으며 전화를 끊었다.

    어느덧 쌍용차 노동자들의 77일 점거파업이 사계절을 지나고 있다. 올 여름이 되면 다시 평택에 비가 많이 내렸는지 안 내렸지 궁금해 할 것 같다. 1년 전을 회상하며 ‘그때 비가 왔더라면 파업 참가자들은 신나게 벌거벗고 나가 머리 감고, 속옷을 빨았을 텐데. 물을 받아 맘 편히 마시며 공장에서 더 버틸지도 모를 텐데’하며 우스갯소리를 할지도 모르겠다.

    더불어 희멀건 한 주먹밥 얘기도 하겠지. 쌍용차 해고자들이 11월 노동자대회에서 주먹밥을 만들어 연대온 노동자들에게 나눠주었을 때 ‘아! 이게 그 주먹밥이로군요’하며 파업의 경험과 감동을 나누고자 집어삼켰던 것처럼.

    그러나 분명한 건 파업의 기억은 그리 감상적이지도 희미하지도 않다는 것이다. 지난 여름 평택공장 안팎에서 벌어진 일은 SF영화를 방불케 하는 ‘계급간의 전쟁’이었기 때문이다. 그곳은 ‘인권’이란 말이 무색하게 인간이 없었던 곳이었다.

    사람이 살지 않는 곳

    사람이 살고 있는 곳인데 사람이 없었다니. 이처럼 간담이 서늘해지는 말이 또 있을까. 도장공장을 부여잡고 사형선고인 해고를 하지 말라는 파업 참가자들의 목소리는 사측에게 짐승만도 못한 것들의 울부짖음이었다. 코뚜레까지 해가며 산골짜기 논밭을 갈기 위해 주인에게 길들여진 일소조차 밥도 먹고 물도 마신다.

       
      

    그래서 사측은 물, 음식, 가스, 의료진을 모두 차단할 수 있었다. 사측은 지켜야 할 사유재산이 많아진 사회에서 이름만 세련되게 바꾼, 돈을 쥘 수 있다면 도덕적 기준은 몽둥이 하나로 날려버릴 수 있는 용역업체를 불렀다. 그리고 법원은 시설을 보호하고, 임직원들의 안전을 보장해야 한다며 수천만 원에 달하는 용역비를 허락하고 그 여파에 대해서는 침묵했다.

    하늘에서 홍보물을 내리 뿌렸던 헬기를 띄우는 비용, 노동자들의 임금은 체불해도 법정관리인의 임금은 꼬박 꼬박 허락했다. 검찰 역시 노동자들의 파업이 끝나자 상하이자동차가 기술유출을 했다는 의미 없는 결과를 발표했다. 사법부가 한 행동이 어디 이 뿐이랴.

    언제부터인가 비해고자들은 동료가 해고되어야 내가 그 사형선고에서 제외될 수 있다는 것을 직감한 듯 죽기 살기로 용역들과 매서운 눈빛으로 덤벼들었다. 그래서 6월은 남북이산 가족 못지않은 비극으로 가득한 달이었다.

    기계만 잡았던 노동자들의 손에는 어설프게 쇠파이프가 들렸고, 공장으로 진입하는 동료를 막기 위해 쇠파이프를 휘둘러야 하는지, 몇 십 년같이 일한 동료가 살아보겠다고 공장을 점거했는데 그를 밀쳐내야 하는지.

    순간순간 흔들리는 눈빛과 헛발질은 카메라 렌즈에 너무나 선명하게 잡혔다. 금속노조 간부들 역시 이 같은 상황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간부들은 헬기에서 내리는 경찰 고위 간부에게 다가가 대화로 해결해보려고 했지만 번번이 무시당했다.

    그러나 한 번 잡은 쇠파이프를 내려놓기엔 때는 늦어 보였다. 사측은 희망퇴직자와 그렇지 않은 사람을 나눴고, 정리해고자와 비해고자를 나누더니 파업참가자와 비참가자로 나눴다.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농성 중에 이탈자한 사람과 이탈하지 않고 마지막까지 남은 사람으로 나뉘었고, 파산 이데올로기가 기승을 부릴 때는 원청직원과 협력업체 직원으로 나뉘었다.

    죽으라는 거구나

    노무현 대통령이 사망해 시청광장에 노란물이 들었을 때 노동자, 가족들이 내쉰 안도의 한숨은 아직도 기억에 선명하다. 언제나 노동자 편이 아니었던 이명박 정부가 굵직한 정치적 사안들을 처리하는 동안 파업 참가자들은 시간을 벌 수 있다고 생각했다.

    정부는 바빴다. 촛불정국 이후 미디어법, 비정규직법안 처리…. 그리고 문득 안도의 한숨 이면에는 대통령의 죽음이 쌍용차 노동자들에게는 마냥 애도할 만한 일이 아니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노동자들은 상하이자동차의 먹튀 행각을 예견하고 매각 반대 투쟁을 했지만 노무현 정부는 자본에 손을 들어줬으므로.

    이명박 정부가 한 일은 파업 참가자들은 사람이 아니라고 쐐기를 박는 것이었다. 용산참사의 후폭풍, 사측과 용역의 공장 탈환 행동의 사회적 여파, 그리고 예상하지 못했던 노동자들의 목숨을 건 저항에 고사작전을 선택했다. 시시각각 조여드는 경찰병력의 포위망, 언제 공격해 들어올지 모를 진압에 평택공장은 항상 위태로운 공기가 감돌았다.

    상추를 씻으러 간 노동자를 잡아가고, 병원에 가야 할 아픈 노동자는 경찰서로 데려갔고, 가족들이 보낸 음식물, 각종 물품은 가방을 열어 일일이 확인했다. 취재진 역시 차단했는데, 일부 취재진들은 파업 내내 자주 구타당했고, 경찰의 보호는 못 미더웠다.

    가대위 소속 한 회원이 ‘실망스럽다 못해 비참할 정도로 시시했다’는 금속노조의 하루 총파업이 이루어지지 않고, 금속노조, 민주노총의 ‘공권력 투입시 총파업’이 ‘도장공장 투입시 총파업’으로 바뀔 그 무렵, 7월 20일 정부는 본격적으로 진압에 나섰다.

    불붙은 폐타이어의 검은 연기와 헬기에서 노란 최루가루와 최루봉지가 뿌려질 때 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줄 알았다. 영화보다 더 극적인 상황에 나의 머릿속은 현실과 꿈을 넘나들었다. 그렇게 상황은 극단을 향해 달려갔고, ‘함께 살자’던 노동자들은 ‘차라리 죽여라’며 외줄에 매달린 채 도장공장에 요구를 적어나갔다.

    파업 기간 동안 6명의 노동자, 가족이 죽었지만 7마리 괴수가 산다는 칠괴동 평택공장에서 7명이 죽어야 사태가 해결될 거라는 흉흉한 소문이 돌았다. 그러나 경찰병력은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볼트는 다리 사이를 살짝 살짝 비켜갔고 혹시 맞으면 손가락과 어깨뼈가 부러졌다.

    어릴 적 시골에서 몸보신을 위해 어른들이 몽둥이로 개를 흠씬 두들겨 팼던 것처럼, 경찰병력의 곤봉과 방패는 사정없이 노동자를 내리쳤다. 그리고 여섯 명의 철거민이 사망한 용산참사의 컨테이너 박스가 오르는 순간 머리카락이 주뼛주뼛 섰다. 죽으라는 거구나….

    그러나 정부가 보기에 사람답게 살 자격조차 없는 쌍용차 파업참가자들은 마지막 순간까지 포기하지 않고 싸웠다. 퍼붓는 최루액을 두 팔 벌려 온 몸으로 맞으며 저항했고, 밤낮으로 미친 듯이 울려 퍼지는 선무방송과 헬기 소리에 정신줄을 놓지 않으려고 자신을 채찍질했다.

       
      ▲ 사진=노동과세계

    사람이 없는 공장에서 77일 동안 취재하면서, 나 역시도 사람이 아니었다. 노동자의 목소리를 싣는 언론은 사측에게 무시하거나 없애버려야 할 대상인 것 같았다. 주류 언론의 한 기자는 비해고자들이 그에게 새총을 쏘자 사측 관리자에게 전화해 항의하기도 했다. 그런 행동이 오히려 이상해 보였다.

    여기는 전쟁터다. 나는 점거파업 취재가 끝나고 경찰서 유치장에 갇혀서야 안전함을 느꼈고, 잠을 잤고, 김치에 밥을 먹었고, 점거파업기간 동안 한 번도 하지 않았던 생리를 했다.

    연대, 그리고 계급

    노동자, 가족들은 파업 내내 연대를 호소했다. 금속노조 조합원들에게 총파업을 하자는 호소문을 전했고, 매일 저녁 열렸던 촛불문화제에서 파업 참가자들은 그동안 연대하지 못했던 모습을 반성하며, 작은 것에 눈시울을 붉혔다.

    가대위는 천막농성, 삼보일배, 60여 명에 이르는 국회의원 서명, 청와대 방문시도, 종교계에 호소, 국회의원․평택시장경기도지사인권위 면담, 단식투쟁, 한나라당 항의방문, 의료진물 반입 시도, 각종 집회 참가 등 안 해본 게 없을 정도로 발에 불이 나도록 돌아다녀도 부와 권력을 가진 자들의 문은 강고했다.

    미디어충청뿐만 아니라 일부 언론들 역시 사회의 진실을 알린다는 사명감뿐만 아니라 노동자들의 연대의 호소로 취재할 수 있었다. 인화물질로 가득한 위험천만한 곳 도장공장으로 몰리기 전부터 노동자들은 공장 안에서 취재하고 있던 기자에게 말했다. “나갈 거야? 우리 도장공장 들어가면 같이 취재하러 갈 거지? 밖에는 기자들 많은데 안에서 우리 취재해줄 사람은 없잖아.”

    그러나 연대는 가진 자들의 호화로운 주택의 담벼락 높이만큼이나 넘나들기 쉽지 않아 보였다. 파업참가자들은 공장 밖에서 연대 온 사람들의 집회가 있는 날이면 가족들 얼굴을 찾는 만큼이나 어느 곳에서 주최하는지, 몇 명이 모였는지 궁금해 했다.

    금속노조 간부들이 공장 안에 들어오는 날이면 무슨 이야기를 전하고 갔는지, 중재단의 입장은 무엇인지 궁금해 했다. 쌍용차 노동자들만의 투쟁으로는 이 투쟁이 승리할 수 없음을, 경제위기 하에 제조업 노동자들의 생존권을 위한 투쟁의 핵심에 쌍용차 파업이 있음을, 자본과 정부의 탄탄한 연대는 뼛속부터 정치적임을, 물리력은 물리력으로 맞서야 이길 수 있다는 것을 노동자들은 파업을 경험하며 직감적으로 알아갔다.

    처음엔 정리해고 대상자에 내가 들어가 있지 않기를 바랐던 노동자들이 한 명을 해고해도 그 가족에겐 사형선고와 마찬가지인데 생산직 노동자 두 명당 한 명이 잘려나가는 2,646명의 해고가 벌어지자 노동자들에게 ‘생존권’이라는 원초적인 계급의식을 불러냈다. 그 변화는 시간이 지날수록 찰나마다 보였다.

    하지만 총파업을 호소하던 목소리는 어느덧 정문 밖에서 물․음식물 반입, 의료진 출입 보장 등 인권을 지키기 위한 투쟁, 민주노동당의 천막농성, 사회주의를 주장하는 세력의 여름휴가 반납 투쟁에 안도해가는 모습으로 바뀌었다.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었던 파업참가자들은 이 투쟁마저 없다면 공장 밖 전선은 무너질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기억상실에 걸리지 않기 위해

    이제 점거파업이 끝나고 투쟁을 둘러싼 다양한 시선들과 마주하고 있다. 한 기자는 진정한 패배자는 소비자의 신뢰를 깬 쌍용자동차라고 했고, 77일 동안이나 투쟁했음에도 막판 교섭에서 정리해고를 막지 못했으니 쌍용차 노조의 패배라고 하는 이도 있다.

    쌍용차 노동자들은 ‘영웅’적으로 투쟁했지만 금속노조, 민주노총을 비판하며 민주노조 운동의 패배라고 평가하기도 하고, 민중운동 진영의 연대의 패배라 보는 시각도 있다. 또한 노동자가 전부인줄 알고 살았지만 파업을 통해 시민권을 얻었다는 이도 있다. 무엇을 남겼고, 무엇을 패배했을까.

    돌아보면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은 있는 힘껏 참 잘 싸웠다. 생존권을 포기 하지 않고, 양 갈래의 ‘승리의 광장’이었지만 이길 수 있다는 가능성과 분노의 끈을 놓지 않았기 때문에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일을 해냈다. 투쟁하지 않았다면 2,646명 모두가 손쉽게 정리해고 되었겠지만 단 한 명도 정리해고 될 수 없다는 생각을 행동으로 보여줬다.

    그러나 자본과 정부는 더 강해 보였다. 계급의식으로 완벽하게 무장한 이들은 시기마다 눈치를 보기도 했고, 십분 만족할만한 성과를 가져가지 못했지만 쌍용차 구조조정이 이루어져야만 자본과 정부의 부와 권력이 앞으로도 유지될 수 있기에, 악랄하게 행동했다. 그리고 점거파업이 끝난 뒤에 누구나 알다시피 차근차근 행동하고 있다.

    2009년 쌍용자동차 파업의 기억이 희미해 질래야 희미해질 수 없는 이유는 이 투쟁이 계급 대 계급의 전쟁이었기 때문이지 않을까. 사람이 없었던 공장에 ‘인권’이 없었던 것처럼 보였던 현상의 본질은 이 투쟁이 계급투쟁이었기 때문이며, 노동자가 조금 양보해도 통하지 않았던 것 역시 이 투쟁이 계급투쟁이었기 때문인 것 같다.

    그래서 어쩌면 쌍용차 노동자에게나 민주노조운동에 요구되는 것은, 누군가가 말하는 ‘민주노조 운동의 연대의 강화’의 출발점은 더 무장된 계급의식일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사회는 더 이상 산뜻한 주제가 아닐지라도, 내가 서 있는 계급이 어디인지조차 확신할 수 없는 사회에서 ‘계급’의 문제를 말하기 시작하는 것에서 쌍용차 파업의 기억을 되살려야 할 것 같다. 이 투쟁이 끝나지 않았다면 말이다.

    필자소개

    페이스북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