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국-예수 장사'가 잘 안되는 이유
        2010년 03월 21일 11:48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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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즘 제가 가르치고 있는 ‘한국 종교와 철학’이라는 과목을 듣는 몇 명의 학생들이 기말 레포트로 ‘한국 반기독교 감정의 연구’를 내보겠다고 해서, 저도 이 주제에 대해 여러 가지로 고민하고 있는 중입니다.(http://www.uio.no/studier/emner/hf/ikos/KOR1502/index.xml)

    개신교 교세 확장, 왜 안 되나

       
      ▲필자

    사회 상부구조의 모든 현상들이 다 그렇듯이, 이 ‘반기독교'(주로 반개신교) 감정도 수많은 요인이 작용된 만큼은 분명합니다.

    예컨대 교인들이 다수를 이루는 학교 내지 직장, 동네 등에서 비신자들이 느끼는 소외감, 또는 비신자들이 당하는 피해 등이 있다는 것이 하나의 현실적 이유일 수도 있다는 것이지요.

    신자가 얻는 ‘보너스’가 큰 만큼, 한 사회의 울타리 내에서 벌어지는 제로섬 게임에서 비신자가 안아야 할 손해가 있단 말이죠.

    뭐, 동네 편의점에서 교회에 다니는 주인 아저씨가 아르바이트생에게 "너, 교회 왜 안다녀?"라고 당연하다 싶은 표정으로 반헌법적 종교 강요를 하는 차원부터 소망교회에 다니는 사람이 대한민국 관리자들의 사회에서 받는 ‘플러스 알파’들까지 이야기할 수 있으니 이 일의 이치가 꽤나 분명합니다.

    교회의 교세가 그래도 계속 확장되어가는 만큼 비신자들이 좀 위축돼 있었던 1980년대 말까진 그랬지만, 요즘 개신교의 교세가 더 이상의 확장을 못하게 된데다 민주주의까지 어느 정도 착근돼 다들 자기 소회를 솔직히 밝히는 일에 익숙해졌으니 다소 패권적 개신교 세력들의 각종 피해자들의 ‘반격’이 시작된 셈입니다.

    더군다나 개신교 세력 중의 상당수를 이루는 보수, 수구파의 단순 무식과 광신("해일 피해자들이 하나님을 믿지 않아서 벌을 받았다"는 류의, 참 예수님이 좋아하실 것 같지 않은 망언들), 거의 ‘유일사상’ 정도의 맹목적 친미반북 등이 다원화된 후기 자본주의의 복합사회에서 개신교의 권위를 상당히 실추시키지 않을 수 없었어요.

    쉽게 이야기해서는, 이렇게 막 나가면 특히 젊은 사람 사이에서는 더이상 예수를 팔아 장사 못한다는 거죠. 재미있는 비교를 하자면, ‘민족해방’ 담론이 잘 팔렸던 1980년대 말에 비해 이제 와서 ‘주사파’가 운동 사회에서 그 영향력을 더 이상 확장시키지 못하는 이유와 상당히 유사하기도 해요.

    개신교와 주사파의 유사성

    복합화된, 그리고 외국의 지식시장과 이제 거의 실시간으로 거래가 가능해진 정보화된 사회에서는, "무조건 믿고 따르라"는 식의 단선적 이야기에 대한 사회적 수요가 작아질 수밖에 없다는 점을 직시하시기 바랍니다.

    물론 강경 개신교도, 주사파도 그 다양해진 사회 속에서도 자기들만의 이야기만이 통하는 하나의 배타적 권역을 만들어 오랫동안 지속시킬 수 있기도 하죠. 일본, 그리고 요즘의 대한민국에서까지도 창가학회 류의 섹트들이 교세 유지를 잘 하는 걸 보면, 그 사회적 심리를 쉽게 이해하실 것입니다.

    물론 유통돼 있는 돈과 재물, 담론 자체의 사회적 수용성과 패권 획득의 가능성 등이 완전히 다르기에 강경 개신교와 주사파 사이의 단순 비교는 무리긴 하지만, 어떤 ‘유형적’ 차원에서의 비교 고찰이 가능하리라 믿습니다.

    그런데 최근의 개신교의 종교 상품 판매의 저조, 그리고 그 상품에 대한 소비자들의 여론 악화 등은, 장기적인 사학적 시각으로 볼 때에는 또 다른 차원도 분명히 있습니다.

    옛날 소련 시인 예브투센코가 그랬지요: "러시아에서는 시인이란 시인 이상의 역할을 맡는다"(Поэт в России больше, чем поэт). 그 말을 한국적 조건에 맞추어서 바꾸자면 국내에서는 종교란 종교 이상의 역할을 맡게 된다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근대’ 그 자체를 대변했다

    기독교(개신교)는 근대 초기 한국인에게 단순히 ‘종교’뿐만이었나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길선주 식의 신비주의자, 구령 운동자라 하더라도, 국산 장려부터 금주운동까지 모든 근대주의 지향의 운동들을 다 조금씩 해본 데에서 알 수 있듯이, 기독교는 ‘근대’ 그 자체를 대변했어요.

    개인 영혼이 구함을 받는 동시에 나라도 새로운 이스라엘이 되어서 하나님과 미국의 구제로 독립, 건국되고, 미국 신사들처럼 근검절약으로 단련된 신도들에 의해 구미처럼 부유해지고, 깨끗해지고, 구미인에 의해 ‘인정’을 받고 결국 하나의 기독교 열강이 되는 것…

    여러 사람 사이의 차이가 있지만(한경직 류의 사상에서는 가장 전형적으로 나타나긴 합니다), 대체로 이 정도면 근대 개신교의 거시적 비전이었어요. 여기에서 경제주의적 부분("부라는 게 하나님의 축복" … 아이고, 예수님이 보셨으면 채찍을 들고 성전에서 쫓아내셨을 터인데 말이에요…)도 재미있지만, 특히 ‘미국’이 모든 선한 것의 기준이 된다는 것은 아주 괄목할 만합니다.

    아주 쉽게 이야기하자면 근대 기독교의 프로젝트는 "우리도 한 번 – 미국처럼 – 잘 살아보세" 기조 위에 세워진 것입니다. 물론 기독교 지도자들의 조찬기도들을 한 몸에 받아왔던 다카키 마사오 소위가 ‘귀축’으로 기억됐던 미국보다는 차라리 기시 센빠이 류의 인간들이 잘 이끌었던 일본을 모델로 생각했지만 그 당시 일본도 미국의 군사적 보호령이자 피후견국 위치에 있었기에 이 대목에서는 기독교 근대지상주의와 그렇게 심한 충돌이 되지도 않았어요.

    그런데 이 세상에서는 영원한 ‘매력적 모델’이란 없지요. 지금 오늘날 대한민국의 젊은이에게 미국이란 무엇인가요? 일면으로는 대한민국 내부 시장에서(아직도!) 고가로 거래되는 ‘영어’를 돈내서 습득할 수 있는 ‘본고장’이자 노동력을 비교적으로 비싸게 팔 수 있는 곳이긴 하지만, 동시에 기존 사회인프라나 교통시설, 제조업의 수준이 한국이나 일본에 훨씬 못미치는 ‘빛바랜 옛날 선진국’이기도 합니다.

    반기독교 감정과 미국에 대한 감정

    인천국제공항을 떠나 케네디 국제공항에 도착할 때에 이 두 공항을 비교해서 느끼는 소회를 한 번 생각해보시기를. 거기까지야 후발국의 장점이라 치더라도 (무차별적이고 무의미한) 전쟁, 종교적 광신, 미래가 없는 투기적 ‘금융자본주의’, 그리고 산업화된 세상에 보기 드문 빈부격차와 상당수의 빈곤…

    사실 ‘친미’로 알려진 이명박 류의 정객이라 해도, 아무리 ‘글로벌 스탠다드’를 들먹이더라도 기본적으로 중상주의적, 자국 산업 육성주의적 기조로 일관하지 제조업 공동화를 부르는 레이건식 정책을 전혀 펴지 않는 것입니다.

    노동자들에게 공황의 대가를 전가시키는 악덕 자본가긴 하지만, 정치적 자살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미국’을 더이상 기독교라는 종교 상품 판매의 이미지적 기초로 활용할 수 있습니까? 불문가지의 일입니다. 반기독교 감정을 이제 이야기할 수 있는 이유 중의 하나는, 바로 이와 같은 미국의 ‘이름 값’의 하락에 있기도 하지요.

    ‘미국 장사’와 ‘예수 장사’를 겸업해오신 분들의 매상고 저조는, 우리 국내의 사회주의자, 사회민주주의자들에게 하나의 ‘기회’일 수도 있습니다. 거시적인 시각으로 볼 때말이죠. 미국이 더이상 우리가 ‘따라잡아야 할’ 이상이 아니라면 새로운 이상(들)을 사회적으로 제시할 ‘틈새’가 벌어지기 때문입니다.

    특정 국가를 이상화시키자는 이야기는 아니고, 투쟁해서 쟁취할 수 있는 미래의 이상을 이야기하는 것이죠. 하여간, 제가 요즘 그리스의 근로대중들의 활약상을 보느라고 희망이 조금씩 생깁니다. 그래도 ‘미래’를 다르게 만들어보자고 ‘광장’에 나설 사람들은 유럽(특히 그 반주변부적 지역)에서 가면 갈수록 많아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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