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블러드벅스' 마시며 출근하는 뱀파이어
    By mywank
        2010년 03월 20일 05:30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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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화 포스터

    뱀파이어는 놀라운 존재다. 가망 없이 퍼진 암에서도 벗어나고, 젊음이 사위어 늙어가는 고통도 피하고, 심지어 인간이라면 당연히 맞이해야할 죽음으로부터도 자유롭다. 눈부신 햇빛 아래 나서지만 않는다면 영원히 살아있을 수 있다. 조건은 딱 하나, 살아있는 남의 피를 계속해서 빨아 마실 수만 있다면.

    제발 내 피를 빨아줘

    그래서 뱀파이어에 대한 하이틴 로맨스 판 <트와일라잇> 시리즈의 벨라(크리스틴 스튜어트)는 영혼을 잃게 되는 것 따위 전혀 아쉽지 않다며 영원히 젊음을 유지하며 살아갈 수 있는 뱀파이어가 되기를 갈망한다.

    오히려 뱀파이어가 되었기 때문에 남들보다 잘 생기고, 강하고, 부자로 살아가고 있는 에드워드(로버트 패티슨)는 자기도 뱀파이어로 만들어달라는 철딱서니없는 연인 벨라를 말리느라고 멀리 떠나기도 하고, 다른 뱀파이어들과 맞서 싸우기도 하느라 하루도 편할 날이 없다. 그런데도 영화 속의 벨라도, <트와일라잇> 시리즈에 열광하는 독자와 관객들도 뱀파이어에 대한 동경으로 에드워드한테 자꾸만 들이댄다. ‘제발 내 피를 빨아줘.’라며.

    스피어그 형제가 감독한 <데이 브레이커스>는 이런 뱀파이어에 대한 동경이 실현된다면 어떤 세상이 될 지를 그려낸다. 전 세계의 95%가 뱀파이어, 나머지 5%만이 ‘진짜’ 인간인 세상이다. 커피에 피를 타서 파는 테이크아웃 커피숍은 <블러드벅스>, 인간을 사육해 뽑아낸 피를 시장에 공급하는 회사는 <블러드뱅크>다.

    회사 출근하는 뱀파이어

    뱀파이어가 되었다고 일상에서 벗어나는 건 아니다. 회사도 다니고, 군대도 가고, 정치도 하고, 이혼도 한다. 그러니까 생로병사라는 자연적 순환으로부터 벗어난 것 뿐이다. 뱀파이어 세계에도 빈부가 있고, 엘리트 집단이 있고, 계급이 있다.

    그런데 진짜 인간이 멸종 위기에 처하면, 이어서 멸망할 것은 뱀파이어 세계다. 그래서 뱀파이어 세계의 최대 기업은 대체 혈액을 개발하느라 혈안이 되어있다. 그 연구의 책임자 에드워드(에단 호크)는 <트와일라잇> 시리즈의 에드워드와 이름 뿐 아니라 고민도 비슷한 존재다. 남의 피를 빨아 마시며 구차하게 생존을 이어가는 것은 영혼을 잃은 삶이라며 괴로워한다. 그래서 생일이라고 동생이 특별히 구해온 순도 100%짜리 사람 피를 거부한다.

       
      ▲ 영화의 한 장면

    거지 뱀파이어는 ‘피 한 잔만 줍쇼.’라며 피를 구걸하다 경찰에게 처벌 받고, 커피에 들어간 피의 함량이 적다고 항의하던 구매자들은 폭동을 일으키고, 피를 마시지 못한 뱀파이어들은 변종 괴물이 되어 판단력을 잃고 같은 뱀파이어를 공격하거나 심지어는 자기 살까지 뜯어 먹는다.

    빨대 꽂힌 인간들의 최후의 선택

    얼마 남지 않은 진짜 인간들과 몇몇 뱀파이어들은 자본과 권력의 추적을 피해 뱀파이어를 다시 인간으로 되돌릴 수 있는 방법을 찾으려 애쓴다. 인간이 되어 이루고자 하는 것은 두 가지, 햇빛 아래 당당히 나서는 것과 남의 피를 탐하지 않고 살다가 자연스레 늙어 죽는 것이다. 그런데 뱀파이어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인간’이 되면 뱀파이어에게 빨대 꽂혀 마지막 피 한 방울까지 착취당하거나 세상을 뒤엎을 각오로 맞서 싸우는 방법밖에 없다.

    <데이 브레이커스>가 그리는 무한 이기주의 뱀파이어 세상은 기존 뱀파이어 장르에서 흡혈이라는 모티브를 빌어 왔으나, 그 충동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아슬아슬한 에로티시즘도 아니고 근엄한 사회의 이면에서 금기에 도전하려는 저항도 아니다.

    아비가 자식을, 동생이 형을 뱀파이어로 만드는 것은 세상이야 어찌 되든 우리끼리만은 잘 살아보자는 생각에서다. 오직 남을 착취하고 희생시켜서 자신의 목숨을 이어가려는 욕망, 그리고 가능하다면 그 과정에서 최대의 이윤을 뽑아내려는 탐욕이다. 그래서 <데이 브레이커스>의 뱀파이어는 위험한 매혹의 존재가 아니라 징글징글한 괴물이 된다.

       
      ▲ 영화의 한 장면

    영화는 두렵지만 외로운 타자를 그리는 뱀파이어 장르보다는 집단의 광기가 세상을 추악하게 덮치는 좀비 장르에 가깝다. 피를 내놓으라며 아비규환을 이루는 뱀파이어들의 모습이나, 자본과 공권력이 결합해 사회 전반에 착취 시스템을 유지하려 애쓰는 것은 모든 것을 경제 논리로 치환시키는 신자유주의 시대에 대한 캐리커처가 된다.

    스피어리그 형제는 뱀파이어 장르에서 신비감을 벗겨내고, B급 공포영화 장르의 유머를 더한다. 그 유머가 꽤나 현실비판적이면서도 뒷맛이 개운하지 않은 것은 자본의 착취 시스템에 대한 냉소나 영화 내내 낭자하게 흐르는 핏빛보다 진하게 영화 전체에 걸쳐있는 크라이슬러 자동차 PPL의 느끼함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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