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직선제 폐기하자”
        2010년 03월 16일 10:12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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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한국노동운동연구소가 펴낸 <노동의 지평> 최근호에 실린 것으로, 필자는 노동운동의 현재 상황이 과거와 달리 국면적 위기가 아니라 구조적 위기이며, 외생적 위기가 아니리 주체의 위기라고 강조한다. 필자는 이 같은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발본적’ 변화의 필요성을 이야기하고 있다.

    민주노총 위상의 재정립, 민주노조의 조직과 정치 노선 그리고 사회연대 노선에 대한 전면적 재검토와 재설계 그리고 정파 문제에 대한 비판적 검토 등 노동운동 전반에 대한 성찰과 대안적 의견을 제시하고 있다. <레디앙>은 저자의 동의를 얻어 전문을 몇 차례 나누어 싣는다. - 편집자 주

    2. 노동운동 조직노선의 검토

    1) 총연맹의 위상과 기능 문제

    총연맹으로서의 민주노총의 위상에 대해서 크게 두 가지 입장이 있다. 하나는 총연맹 중심의 민주노조 ‘총단결론’이라 할 수 있다. 다른 하나는 총연맹의 위상 ‘재조정론’이다.

    총단결론은 일견 매우 상식화되어 있는 입장이다. 노동운동에 대한 입장이나 정파를 불문하고 민주노총이 총자본에 맞서 투쟁하는 총노동의 구심체로서 강화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부정하지 않고 있다.

    노동운동 진영의 일각에는 민주노총이 그 자체 단일한 노조 조직으로 재편되어야 한다는 입장도 있고, 그 정도는 아니라 하더라도, 예컨대 민주노총 임원직선제에 대해서는 적어도 외형적으로는 정파를 넘어선 광범한 합의가 있다.

       
      ▲ 지난 1월 28일 실시된 민주노총 대의원들이 임원선거 투표를 하고 있다 (사진=노동과 세계 / 이명익 기자)

    현재의 노동정세가 국가권력과 재벌대자본을 중심으로 ‘민주노총 죽이기’라 할 정도의 강력한 탄압과 배제가 진행되고 있고, 비정규법과 복수노조, 전임자 임금문제 등 총노동 전선에서 해결해야 할 정치적 과제들도 산적해 있는 노동정세 역시 총단결론에 대한 당위적 동의의 근거이다.

    ‘재조정론’은 아직 어느 단위에서도 정식화되어 제출된 바가 없으나 노조간부와 활동가, 연구자들 사이에서 고민이 계속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우선은 전노협 이래의 역사적 뿌리를 지니고 있는 총단결론이 더 이상 현실적이지 않다는 점이 있다.

    현상적으로 민주노총의 지도력, 관장력이 현저히 저하된 상태에서 어떤 방법으로도 이를 회복하기 힘든 현실적 상황이 있다. 이론적, 논리적으로는 대중조직의 총연합단체가 단일노조와 같은 방침과 지침으로 대중적 동원투쟁의 주체가 될 수 있는 것인가의 문제도 제기된다. 산별노조 건설운동의 진전과 더불어 단일노조로서의 기능이 민주노총 산하 산별조직으로 이미 중심이 이전되고 있는 상황도 그 배경이다.

    총단결은 실현 불가능

    필자의 생각은 후자에 있다. 안타깝긴 하지만, 총단결론은 이제 실현 불가능한 상황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아마도 올해 상반기가 총단결론이 그나마 유효한 마지막 시기가 될 것이라 본다. 이번 선거에서도 보았듯이, 제정파와 의견그룹들이 모두 이런저런 내용의 총단결론, 총력투쟁론을 내세우고 있지만, 모두가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노동운동의 위기 극복을 위한 내부 혁신의 과제도 현장에서 지역, 산별, 총연맹에 이르기까지 산적해있다. 그러나 혁신의 최종 근거지는 역시 ‘현장’이고, 그 계기는 위에서부터 만들어져야 한다. 총연맹의 구조를 그대로 두고는 산하 조직의 혁신을 추동할 수 없다. 지금 총연맹의 존재는 조직 전체에 걸쳐 내부 혁신 기피의 알리바이, 심지어는 걸림돌이 되어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총연맹 중심의 총력투쟁론이 계속되는 한 계속 그럴 것이다. 아직 소진되지 않은 노동운동의 에너지가 위가 아니라 아래로, 즉 지역과 현장으로 집중될 수 있도록 해야 하고, 투쟁의 중심도 산별과 지역, 현장이 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민주노총 중심의 투쟁은 소모적인 일회적 집회투쟁 이상의 것이 될 수 없다.

    ‘재조정론’에 비중을 두고 있지만, 두 가지 문제가 걸린다. 첫째, 총자본과의 관계에서 요구되는 총노동의 투쟁 중심체로서의 총연맹의 역할을 당장 부정할 수 없다. 둘째, 그동안 이야기된 ‘재조정론’은 산별조직들의 역할 강화를 전제로 한 것이었다. 산별노조 조직화가 진척되고 그 연장선상에서 자연스럽게 재조정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 이 전제조건이 확보되지 못하고 있다.

    이런 딜레마를 안고 있지만, ‘재조정’을 위한 체계적인 준비작업을 서둘러야 한다는 생각이다. 필자가 생각하는 이 준비작업의 핵심은 민주노총의 정책생산 역량 강화에 있다. 좀 심하게 말하자면, 현재 한국의 노동운동에는 ‘두뇌’가 없다.

    한국노동운동에는 ‘두뇌’가 없다

    경제와 산업, 통상, 교통, 조세, 노동시장과 교육, 주거, 의료, 환경 등에 대한 거시적 노동정책의 부재 문제도 이미 심각하고, 무엇보다도 임금, 고용, 노동조건, 작업환경, 산업안전과 보건, 숙련향상 등 노동자들의 직접적인 당면의 이해관계와 관련해서도 한국노동운동의 정책과 집합적 목표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구체적인 전략과 전술도 턱없이 부족한 상태이다.

    상황과 시기에 따라, 어떤 성향의 지도부가 들어섰는지에 따라 민주노총이 ‘지그재그’를 반복해왔다는 비판도 여기에서 기인한다. 총연맹의 정책 기능이 취약한 상황이고, 따라서 산하 조직에 대한 정책서비스 능력도 취약하다. 이 때문에 일부 산별조직들이 독자적으로 정책 생산을 위한 연구소(원)를 설립하고 있지만, 재정과 인력의 제약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런 상황 때문에 총연맹이 해야 할 일과 산별조직, 지역, 단위사업장 조직이 해야 할 일의 계통화가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 당면한 현안 과제들에 대한 지침과 방침에만 의거한 사업계획, 이행이 뒤따르지 않는 결의가 반복되는 중요한 원인이기도 하다.

    투쟁의 중심으로서의 총연맹에 대한 과잉된 역할 부여를 줄이고, 총연맹 기능의 핵심을 정책 생산, 그리고 이완 결합된 교육 서비스에 집중시킬 필요가 있다. 총연맹의 투쟁은 총자본에 대한, 그리고 다양한 사회연대 단위들을 대상으로 한 ‘공중전’이 중심이 되어야 하고, 그 능력이 배가될 때 비로소 산하 조직들의 ‘지상전’ 능력도 배가될 수 있을 것이다.

    예컨대 다음과 같은 조치들이 필요할 것이다. 현실적으로 가능하지도, 바람직하지도 않고 이론적, 논리적으로도 맞지 않는 ‘직선제’는 폐기할 것, 위원장을 제외한 선출직 임원(부위원장)은 선출이 아니라 부문별, 직능별로 지도부가 위촉할 것, 지역본부의 위상도 재조정하여 마찬가지로 ‘직선제’는 폐지하고 산별 지역조직들간의 협의체로 재구성할 것, 중앙 상근인력의 절대 다수를 정책과 교육 중심의 전문 인력으로 재편하고 합리적인 인사관리 및 직능개발 훈련 시스템을 도입할 것 등등이 그것이다.

    산하 조직에 대한 총연맹의 지도력 혹은 관장력은 최종적으로는 정치적인 것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현재의 조직상황을 볼 때, 정책적 지도력, 관장력의 제고가 무엇보다도 절실하다, 그 기초 위에서 비로소 정치적 지도력도 다시 구축될 수 있을 것이다.

    2) 산별노조 건설 문제와 관련하여

    산별노조 건설운동 역시 심각한 위기에 있다. 현재 민주노총 산하 산별조직들의 상태나 특징들을 감안할 때, 산별노조 건설의 과제는 여전히 금속과 공공 양대 조직에 압도적인 비중으로 주어져 있다.

    금속은 일단 형식을 갖추었고, 내용을 채워 나가야 할 단계에서 심각한 조직위기의 상황에 처해 있다. 공공의 경우 대산별 건설의 가능성은 거의 사라지고 있는 듯하다. 금속은 산별노조로서의 조직정비, 즉 지역지부 체제로의 전환 여부가 금년 내에 사실상 결정될 것이다. 공공의 경우 연맹으로의 회귀(기업별노조 체제로의 후퇴) 가능성이 매우 크고, 공공서비스노조의 존속 가능성도 문제시될 것으로 보인다.

    그럴 경우, 민주노총은 독자적 산별노조로서의 조직 전망을 확보하기 힘든 몇 개의 소규모 산별노조(업종 및 지역), 전교조나 공무원노조와 같은 전국적 단일노조들, 그리고 이런 저런 연맹 산하 기업별노조들이 금속노조와 공존하는 모습이 될 것이다.

    전임자 임금 문제가 어떻게 정돈되느냐에 따라 산별전환이 불가능하거나 산별에서 기업별로 후퇴하는 노조들이 늘어날 가능성도 크다. 멀리가 아니라 바로 올해, 길어야 내년 정도면 이런 상황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기업별노조들의 조직전환을 통해 대규모 통합산별노조를 구성하고 조직 내부적으로는 기업지부를 지역지부로 전환시켜 산별조직 전환을 완성시킨다고 하는 것이 산별노조 건설운동의 큰 기조였다. 현재 이 운동은 첫 단계에서부터 장애에 처해 있거나, 두 번째 단계에서 난항을 겪고 있다. 그 이유와 원인이 어디에 있든, 이제 이 기조를 재검토해야 할 상황이 되고 있다는 느낌이다.

    여러 유형의 노조 조직 병존의 상황을 승인하고, 산별노조 조직화의 경로를 재설계할 필요가 있다. 지금까지의 추진 방식과는 달리, 하향식이 아니라 상향식의 산별 조직화 경로를 추가로 모색하자는 것이다. 시간이 더 걸릴 것이고, 상당한 혼란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기왕의 조직노동자들을 산별의 틀로 묶는 것이 산별노조 건설의 최종 목적이 아니었음을 상기한다면, 그리고 기업별노조의 조직전환을 통한 산별건설 경로가 현실적 조건을 감안한 차선의 선택이었음을 상기한다면, 이 운동이 성과와 더불어 한계를 노정하고 있다면, 그간의 실천의 성과와 한계를 어느 단계에선가 정확히 평가/정돈하고 그동안 유보되었거나 잊고 있었던 새로운 실천의 경로를 함께 모색하자는 제안에 동의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산별화의 경로 재설계해야

    이 제안은 무엇인가를 완전히 청산하고 새로운 작업에 나서자는 뜻이 아니다. 지난 10여 년 동안 지역일반노조 운동, 여성노조 운동, 비정규직 조직화와 투쟁의 다양한 경험들, 정규직/비정규직의 단일 조직으로의 규합을 위한 노력, 단일 기업단위 조직의 지역노조로의 전환을 통한 비정규직 및 지역 미조직 노동자 조직화를 위한 노력, 업종과 직종의 경계를 넘어서는 지역지부 건설 방침, 청년유니온 등 이미 새로운 방식의 다양한 사업들이 진행되고 있었다.

    이러한 노력과 경험들을 산별노조 건설운동의 큰 틀 속으로 적극 수렴하여, 정당하게 의미부여를 하고 위상을 정립하고, 이후의 최적의 진로에 대한 합의를 이루고, 노동운동의 자원을 여기에 투입할 수 있도록 하자는 뜻이다.

    노동운동의 자원이라 하였지만, 그 의미를 넓게 해석하여야 한다. 조직화된 노동부문의 자원도 물론이지만, 이 운동의 의의를 사회적으로 널리 공유하도록 하는 노력을 통해서 다양한 자원들을 동원할 수 있어야 할 일이다.

    노동운동 활동가들과 그 조직들 및 단체들, 일반 노동자, 여성/인권/이주민 등 사회운동의 자원들, 진보 지식인 운동, 청년학생, 정당, 지역사회조직들, 여러 전문가 집단들 등을 참여시킬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지금까지와 같이 이들이 단순한 도덕적 지지, 지원이 아니라 이 운동의 의미를 공유하고 직접 주체로 참여하는 사회운동의 방식을 개발하여야 한다.

    말하자면 개방적 멤버십(이중 멤버십을 포함)의 사회노조(social union), 사회연대노조, 혹은 본원적 의미에서의 일반노조(general union)를 지향하는 폭넓은 사회운동으로 전개할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이를 서구의 경우와는 좀 다른, 한국적 형태의 사회운동노조주의(social movement unionism), 혹은 사회적 노조주의(social unionism)를 뜻하는 것으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이런 제안의 핵심은 산별노조 건설운동과 미조직/비정규직 조직화 사업을 정합적으로 결합시키자는 데에 있다. 필자 자신이 그동안 이 문제에 대해서는 이론적으로나 실천적으로 단계론적인 사고를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음이 사실이다.

    조직부문의 자원을 미조직/비정규직 부문으로 체계적, 조직적으로 투입하기 위해서 조직부문의 산별노조 전환과 산별 조직체계의 정비를 서둘러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이 작업이 지지부진하면서 너무 오랜 시간을 끌었고, 그 결과도 아직 신통하지 않고 전망도 낙관적이지 못하다.

    이 과정에서 산별전환을 앞서 추동해온 여러 조직들이 그간의 성과를 이후의 본격적인 산별운동의 출발점으로 인식하기보다는, 그에 안주하여 자족적/자기완결적 조직관에 머물거나 산별노조 건설운동에 대한 경제주의적/도구주의적 평가에 기초하여 기업별노조주의로 퇴행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그 사이에 비정규직 문제는 이미 전사회적 의제로 부상하였고, 조직부문 중심의 노동운동은 대중적 신뢰, 사회적 영향력을 잃고 고립화되어 갔다.

    따라서 이런 문제의식을 공유하는 현장 간부, 활동가, 지도부들이 중심이 되어 조직부문 노동운동이 이 운동에 주체적으로 참여하도록 하는 일은 전체 노동운동의 차원에서 매우 중요한 일이 될 것이다. 지금까지의 산별운동의 과정에서 형성된 관행이나 관성, 특히 영역별 조직계선을 고수하려 하기보다는, 그것을 넘어서는 운동적 결합이 촉진될 필요가 있다.

    그럴 경우, 상식화된 기존의 조직 구획 경계가 흐려질 수도 있고 조직간의 경쟁이 커질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기존 조직의 한정된 자원을 둘러싼 내부 경쟁과는 성격이 다른 것이며, 그보다는 노동운동의 조직 자원을 더 크게 확보해 나가기 위한 경쟁이 될 것이다. 이를 차단하거나 통제하려 하기보다는 오히려 촉진해야 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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